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92
201
36. 북부전선
산 너머로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맑고 청명한 하늘이었다. 평소였다면 들판은 잘 익어 가는 곡식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집집마다 저녁 빵을 굽는 연기가 올라왔을 것이다. 일을 끝낸 부모들은 거리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데려와 손과 발을 씻기고, 집 안에서는 맛있는 냄새에 허기진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먹을 것을 졸랐을 그런 평온한 오후였을 것인데.
“이곳도 처참하군.”
하운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보석술사 한 명이 결국 참지 못하고 구토를 시작했다. 그나마 함께 온 기사들은 참고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 역시 좋지는 못했다.
하운은 몸을 숙여 바닥에 있는 사체의 일부분을 보았다. 기껏해야 열 살 정도였을 아이의 왼쪽 손이 나뒹굴고 있었다. 절단면은 크고 날카로운 것에 깔끔하게 잘려 나가 있었다. 하운이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드래곤의 이빨이다.
그는 일어선 다음 이 몸의 주인이 어디에 있을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성한 곳이 없는 시체의 산 앞에서 그는 찾을 생각을 접어야 했다. 그러다 그의 눈에 모여 있는 시체 조각이 보였다.
“심심했나 보군.”
“네?”
하운이 내뱉은 말에 옆에 서 있던 기사가 무슨 뜻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네이판타가 이곳을 제 놀이터로 잠시 삼았던 모양이다. 사람들을 갖고 놀았어.”
“갖고 놀았다니….”
“저길 봐.”
기사들은 하운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결국 구역질을 참지 못한 기사 하나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멀리서 많은 사람들이 토악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는 토막 난 시체들이 예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머리에 여자의 몸, 아이의 팔에 인간의 것이 아닌 다리가 붙어 있었다.
마치 마음에 드는 것들만 오려다 붙인 것도 모자라 시체의 머리는 일부러 입을 찢어 웃는 것처럼 만들어 두었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기괴함에 사람들은 끝없는 공포를 느꼈다.
“보석술사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대기하고, 기사들과 생존자들은… 마을에 진입해 사망자들을 수습한다. 아이들과 노약자는 절대 접근시키지 말도록. 시작해!”
“네!”
하운은 사람들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제 손에 가득 들려 있던 문스톤들을 하늘로 던졌다. 전장에서 사용하도록 완벽하게 세팅된 보석들은 허공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더니 마을 위에 옅은 빛을 뿌리며 천천히 돌았다.
전쟁 중에 안전지대의 표시나 다름없는 문스톤들의 모습에 멀리 뒤에 서 있던 생존자들이 마을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들은 처참한 모습을 보더니 울부짖으며 자신들의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여기저기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운이 북부 전선으로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왕실과 원탁회의에 등록된 보석술사들 중, 전투에 투입이 가능한 보석술사의 절반 이상이 그와 함께 북부로 왔다. 그들이 오자마자 본 것은 불타고 있는 북부였다.
하운은 오기 전 힘을 완전하게 회복시킨 폭우의 하우윈을 꺼냈다. 며칠간 불타오르던 들판에 폭포와도 같은 비가 쏟아지자 불길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그와 함께 온 왕실의 관계자는 절망적인 얼굴을 한 채 왕실로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올해는 북부 지역이 풍년이라 왕실이 여름에 식량 비축분을 많이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은 것이 없으면…. 수도의 비축분을 다 끌어와도 모자랄 것 같군요. 서부도 셀비아스의 소멸 때 입은 타격이 큰데….”
그의 말에 하운은 짐작할 수 있었다. 올해 겨울. 이곳에서는 아사자가 나올 것이다. 가장 풍요로운 국가의 가장 풍요로운 땅에서 굶어 죽는 이들이라니. 다가올 처참함에 하운은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는 절망을 느꼈건만 사람들은 하운의 이름에 희망을 가졌다.
네이판타가 부활한 이후로 북부는 매일 매일이 새로운 지옥이었다. 배치된 보석술사들이 전투가 아닌 방어를 전문으로 했고, 그나마도 복구 작업을 위해 건축이나 기타 생활에 필요한 힘을 가진 자들이었기에 네이판타의 브레스를 막아 내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네이판타가 우려했던 것보다 활동 범위를 넓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 부활한 이후 무시무시한 기세로 마을들을 박살 내었건만 며칠이 지나자 네이판타는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 나타나지 않았다.
학자들은 그런 네이판타의 행동에서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어야 할 것이 극단적으로 압축된 것 같음을 알아차렸다. 다른 드래곤들이 수십 년에서 수백 년에 걸쳐 진행할 활동을 네이판타는 일주일 만에 반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빨리 힘을 회복한다는 소리였으니까.
보석술사들이 막아 내면 되지 않겠냐 할 수도 있지만 보석술사들이 사용하는 보석은 한계가 있다. 그들 역시 힘을 쓰면 수면기에 들어간다. 네이판타와의 전쟁이 길어지면 보석술사들이 먼저 한계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확실했다.
상황을 파악한 하운은 왕실에 보고했다. 최대한 빨리 모든 힘을 총동원해서 네이판타를 잡지 않으면 이것은 카르디아의 재앙이 아닌 인류의 재앙이 될 것이라고. 그러니 다른 국가의 보석술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고.
부탁은 왕실에게만 전해진 것이 아니다. 하운은 원탁회의의 루시안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루시안은 하운의 편지를 받고 각 나라에 있는 원탁회의에 모두 연락했다. 일주일 후,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부터 카르디아 북부 전선으로 갈 테니 입국 허가 좀 빠르게 부탁드립니다.
네이판타가 모두의 재앙임에 공감한 보석술사들이 참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카르디아는 그들 모두에게 긴급 입국을 허용했고 각 나라의 내로라하는 보석술사들이 카르디아 북부 전선으로 향했다.
덕분에 지금 북부 전선의 최전방에는 대륙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보석술사들이 모이게 되었다.
네이판타의 지배하에 있던 마을 하나를 탈환한 뒤, 하운과 보석술사들은 그곳을 최전방의 기지로 삼았다. 그 마을의 하늘에는 언제나 수백 개의 문스톤들이 천천히 회전하며 언제 올지 모르는 네이판타의 공격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 냈다.
하운은 북부로 온 다음, 먼저 도착한 보석술사들 중 강한 파괴력이 있는 보석술사들과 의논한 뒤 일주일 후 네이판타를 공격했다.
이틀 내내 최전방에는 밤이 찾아오지 못했다. 한밤중이 되어도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하늘에 번쩍거렸다. 북부의 큰 도시들은 그 빛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잠을 방해하는 것은 빛 사이에 길게 이어지는 네이판타의 비명 소리였다. 하늘과 땅이 동시에 떨리며 울리는 기괴한 울음소리는 사람들의 꿈에서까지 그들을 괴롭혔다.
다행히 선제공격은 네이판타에게 타격을 주었다. 한쪽 날개가 너덜거릴 정도로 타격을 입은 네이판타는 재빨리 지하에 있는 플레노트의 레어로 숨어들었다. 따라 들어가 마저 숨통을 끊어 버리고 싶었지만 인간들의 피해도 컸다.
먼 곳에서 찾아온 나이 든 보석술사 한 명이 네이판타의 브레스에 몸 절반이 녹아내렸다. 또 다른 한 명은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고.
원래의 힘뿐만이 아니라 잡아먹은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드래곤의 힘까지 사용하는 모습에 보석술사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명예롭게 전사한 동료의 장례를 치렀다.
그사이 절망만이 가득했던 북부의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하운 대공님께서 네이판타를 막아 내셨대!”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한다는군. 그렇잖아도 위험한 도시들이 많았는데 다행이야.”
“크게 상처를 입고 땅 속으로 숨었다지. 이제 더 많은 보석술사들이 모여 상대하면 물리칠 수 있을 거야.”
계속되는 패배 속에 처음으로 거둔 승리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미친 듯이 도망가기에 바빴던 도시들은 숨을 고를 시간을 얻었고 사람들은 이제 맞설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하운을 바라보았다. 그가 있으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그라면 네이판타를 막아 낼 수 있겠지.
“후우….”
자신에게 배정된 집으로 들어온 하운은 문을 닫자마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종일 자신에게 쏟아진 환호와 애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아직 네이판타의 지배하에 있는 마을을 되찾아 달라 애원하는 남자가 있었다.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이 그곳에 있다고. 일을 하러 다른 마을에 왔던 사이에 습격을 당했다고.
“제 가족은 살아 있을 겁니다! 제가 언제나 무슨 일이 있으면 지하에 잘 숨어 있으라고 했거든요! 그러니 제발 제 가족을 살려 주십시오!”
다들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당신이 살았던 마을은 네이판타가 일으킨 산사태에 휩쓸려 완전히 묻혀 버렸다는 사실을.
하운은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몸을 씻었다. 하루 종일 뒤집어쓴 먼지와 피가 물에 씻겨 내려갔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그에게 일상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피곤함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왜 이렇게 모든 일들이 힘겨운지.
씻고 나온 그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자 선명한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맑은 하늘, 아름다운 정원, 들려오는 웃음소리 그리고 그를 부르는 목소리.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파르멜 저택은 마치 그의 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얼마 전까지의 평온함은 지금 그가 버틸 힘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를 가장 힘겹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했다.
그의 의식이 여전히 멀리 떨어진 곳을 그리워하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하운은 튕기듯이 벌떡 일어나 빠르게 현관의 문을 열었다.
“하운 대공님, 수도에서의 편지입니다.”
“고맙네.”
연락을 담당하고 있는 보석술사가 그에게 몇 통의 편지를 건네주고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하운은 문을 닫은 다음 소파에 앉아 재빨리 편지를 넘겼다.
왕실, 원탁회의, 드래곤을 연구하는 학자들…….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하운의 손은 재빨리 그것들을 뒤로 넘겼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기다리는 편지가 나타났다.
리엘라 테니어.
보는 것만으로도 눈매가 사르르 풀어지는 이름이었다. 하루 종일 굳어 있던 그의 입매가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하운은 허겁지겁 봉투의 봉인을 뜯었다. 그러자 안에서 장미향을 입힌 종이가 나왔다. 꺼내어 보니 동글동글한 리엘라의 글씨가 보였다.
“…….”
그 편지에 하운은 오래전의 일이 생각났다. 호슨 공작이 살아 있었을 때 어느 날부터인가 다른 글씨체로 오기 시작했던 편지. 꼭 전할 내용만 짤막하게 적던 호슨 공작의 편지와는 다르게 몇 장에 걸쳐 소소한 하루의 이야기를 가득 적었던 편지.
처음에는 왜 이런 걸 보내나 했었지만 어느새부터인가 그는 그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편지를 읽다 보면 언제나 제가 마음 한구석에 몰래 품고 있던 평화로운 일상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운은 편지의 첫 문장을 읽었다.
보고 싶어요.
굳어 버린 듯 그 문장을 보고 있던 하운은 한참 후,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도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