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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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는 주먹을 쥐었다. 제 피에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던 꽃이 생각났다. 그녀는 급히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있다.”
왕궁에서 일을 해 봤기에 리엘라는 정원사들이 본궁에 자주 꽃을 보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머물기 위한 방. 머무는 사람의 편안함을 다른 방보다 조금 더 신경 써야 하기도 했다.
리엘라는 장식장 위에 있는 꽃병을 들고 왔다. 그녀의 뒤에 둥둥 떠 있는 목걸이가 뭘 하는지 궁금하다는 듯 리엘라의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리엘라는 조심스럽게 꽃병 안에 있는 꽃들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곧 병에는 작은 이파리들이 동동 떠 있는 물만 남았다.
리엘라는 꽃병을 놔두고 칼 같은 게 없는지 둘러보았다. 하지만 마땅한 것을 찾지 못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종이 한 장을 집었다. 양옆이 깔끔하게 잘린 종이를 세워 든 리엘라는 그것을 제 손가락에 대고 슬쩍 그었다.
“읏.”
따끔거리는 통증과 함께 흰 손가락의 끝에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우웅. 뒤에 떠 있던 목걸이가 리엘라의 행동에 당황한 듯 짧게 울리는 소리를 내었다. 리엘라는 종이를 내려놓은 다음, 피가 나는 손가락을 위에서부터 강하게 쥐었다. 그러자 작은 상처에 금방 핏방울이 맺혔다.
퐁!
급히 손을 꽃병의 위로 옮기자 핏방울이 병에 담겨 있던 물 위로 떨어졌고, 아지랑이처럼 퍼져나갔다. 리엘라는 잡은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좀 더 벌어진 상처에서 핏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이내 꽃병 안의 물은 탁한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제야 리엘라는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눌렀다. 생각보다 종이에 깊게 베인 것인지 피는 많이 흐르진 않았어도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한참 후, 겨우 피가 멈추고 리엘라는 다른 손으로 테이블 위에 놓았던 꽃 한 송이를 병에 꽂았다.
꽂아 둔 후로 시간이 조금 흘렀는지 살짝 시들했던 꽃이었다. 그것은 꽃병에 들어가자마자 마치 시간을 거꾸로 빠르게 돌린 듯 생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밝은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우우웅!
그것을 알아챈 에르첼라의 보석들이 미친 듯이 리엘라의 주변을 맴돌았다. 목소리는 없어도 그 꽃을 자신에게 달라는 애원임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리엘라는 제 옆을 돌아다니는 에르첼라 컬렉션이 총 몇 개인지를 세었다. 전부 합쳐 일곱. 아직 보석의 방 안에 있는 것들도 있다지만 그것들까지 챙길 수는 없었다.
리엘라는 테이블 위에 놔둔 꽃들 중, 제일 싱싱한 것 여섯 송이를 더 골라내어 꽃병에 꽂았다. 그것들 역시 하나둘씩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리엘라의 눈에는 이 꽃들이 보석으로 만들어진 램프보다 훨씬 더 환한 빛을 내뿜는 듯했다. 그녀가 애정으로 키워 냈던 빛나는 꽃에 버금갈 정도로 아주 강한 빛이 꽃잎을 휘감고 있었다.
병 속의 탁했던 붉은 물이 처음처럼 맑아지고 있었다. 꽃들이 그녀의 피를 전부 머금어 빛으로 바꾼 것이다. 물이 완전히 맑아진 것을 본 리엘라는 꽃들을 다시 병에서 꺼내어 시끄러울 정도로 미친 듯이 주변을 날아다니는 에르첼라 컬렉션을 향해 말했다.
“이걸 너희들에게 줄게.”
그 순간 보석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더니 리엘라의 앞에 몰려들었다. 마치 과자를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보석들은 서로를 밀어내며 조금이라도 더 먼저 리엘라에게 꽃을 받고 싶다는 듯 굴었다.
“어차피 말할 수도 없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아서는 안 돼. 무슨 뜻인지 알지?”
우우웅!
보석들의 대답을 들은 리엘라는 보석들에게 차례대로 꽃을 주었다. 한 송이씩 꽃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일곱 개의 보석. 일곱 송이의 꽃. 그것이 리엘라가 있는 방 가운데 떠오르더니 강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발하듯 빛이 터졌다. 강한 빛에 리엘라는 팔로 눈을 가렸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고 고개를 들었을 때 꽃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위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영롱함을 품은 에르첼라의 보석들이 빛나고 있었다.
***
“응?”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있던 레이안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대신들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저 빛은 뭐지?”
창가로 다가간 레이안이 놀란 얼굴로 말하자 대신들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네? 무슨 빛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기 빛! 저렇게 환한데, 안 보여?”
“무슨 빛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대신들은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잖아도 요즘 격무에 시달리던 왕이다. 아무리 왕비가 그의 손과 발이 되어 함께 움직이고 있다고 하나 그녀는 어디까지나 레이안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정보를 모아 오는 것일 뿐, 결국 최종적으로 고민을 하고 선택을 하는 것은 레이안의 몫이었다. 그것이 그의 의무였으니까.
덕분에 전쟁이 시작된 지금 레이안의 업무는 살인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잠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아무래도 레이안에게 헛것을 보게 만든 것일까. 순식간에 대신들은 심각해졌다.
“그러니까 자네들은 저게 안 보인다고? 저렇게 빛나는데?”
“밖에 누구 있나! 의사를 불러와라!”
“안 아파! 안 미쳤다고!”
의사를 부른다는 말에 레이안은 한숨을 푹푹 쉬며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게 안 보인다고?’
멀리 떨어져 있는 그의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빛이다. 하지만 대신들에겐 정말로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도 창 너머를 바라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다른 이들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레이안은 여전히 의사를 찾는 대신들에게 입 좀 다물고 있으라 소리친 다음 빛이 나는 곳을 또다시 바라보았다.
‘저긴….’
레이안이 잘 아는 곳이었다. 궁에 머무는 자들을 위한 숙소. 하운이 돌아올 때마다 머무는 곳. 그래서 일부러 하운이 창가에 서 있으면 램프로 암호를 보내며 장난을 친 적도 있었다. 그러다 레티시아에게 걸려 도대체 몇 살이냐고 구박을 들었지만.
레이안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강한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레이안은 지금 저곳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리엘라 테니어.”
도대체 그녀는 뭐지?
“전하!”
“시끄러워! 좀 조용히 있어 보게! 아니, 나 잠깐 나갔다 올 테니 자네들은 회의하고 있어!”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는 대신들에게 소리를 빽 지른 레이안은 급히 회의실을 나갔다. 그는 복도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마침 회의실로 돌아오고 있던 레티시아를 마주쳤다.
“레티시아!”
“누가 호위도 없이 혼자 다니래요!”
레티시아는 저를 향해 반갑게 달려오는 레이안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레이안은 혼난 강아지처럼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 모습에 레티시아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런 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니까.’
무척이나 헐렁해 보이는 이 국왕의 속에는 능구렁이가 백 마리 정도 들어 있다는 것을 과연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제 동생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으니 눈치챈 사람은 그녀를 제외하면 거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선왕 부부 정도나 알고 있으려나.
‘아마 나도 속이고 있겠지.’
비밀이 많은 사람이다. 아마 아내인 그녀에게도 많은 걸 숨기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그 사실이 섭섭하지 않았다.
어릴 적 그녀가 이 두 형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수려하고 재능이 넘치는 하운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하운의 뒤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못하는 척하고 있는 레이안이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타고난 성정이 곧았다. 만약 레이안이 동생인 하운에게 악심을 품고 있었다면 더 가까이 가지는 않았으리라. 어쩌면 하운이 레이안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비밀을 갖고 있는지는 몰라도 레이안이 하운을 챙기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결혼까지 하고 왕비도 해 주고 있는 것 아니겠어.’
애초에 왕비 자리 같은 건 한 번도 원해 본 적이 없거늘. 울먹이며 도와 달라 매달리던 레이안의 손을 잡은 날, 그에게 꿀꺽 먹히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것 아니던가.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날은 레티시아가 성인이 된지 며칠 후 였다. 분명 그때까지 기다렸다 홀랑 덮친 것이리라.
레티시아는 갑자기 그때가 생각나 어쩐지 울컥하는 마음에 레이안의 양 뺨을 잡아당겼다.
“아야! 갑자기 왜 이래!”
“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혼자 놀러 다니는 국왕의 모습을 보니 속이 터져서 그래요. 호위는 왜 안 데리고 왔어요?”
“그거야….”
레이안이 제 뺨을 잡은 레티시아의 손을 감싸 쥐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에게 몰래 부탁할 게 있어서지.”
“뭔데요?”
“리엘라 테니어에게 사람을 붙여 줘.”
“그녀라면 이미 공작저에 보석술사들을 보냈잖아요?”
“그걸로는 안 돼. 공작저의 드래고니안도 눈치를 못 챌 정도의 사람으로 붙여 줘.”
“무슨 일 있어요?”
레이안이 부탁하는 내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레티시아가 굳은 얼굴이 되자 레이안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목에 입술을 지분거리면서 대답했다.
“있을 것 같아.”
“…안 좋은 쪽으로?”
“그걸 모르겠어. 그래서 알아보려고.”
레이안은 이제는 빛이 완전히 사라진 리엘라의 방을 노려보았다.
***
퍽!
바닥을 굴러다니던 몬스터의 시체가 하운의 발길질에 사정없이 나동그라졌다. 꽤나 거칠게 굴고 있음에도 답답한 속은 전혀 시원해지지 않았다.
“젠장!”
놀란 얼굴의 리엘라가 자꾸만 생각났다. 그녀가 왕궁에 와 있을 거라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적어도 이런 꼴은 보이지 않았을 텐데. 편지는 리엘라만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하운 역시 틈틈이 시간을 내어 답장을 썼다. 편지의 내용은 언제나 같았다.
괜찮다고. 별일 없다고.
안심시키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 편지에는 어느 정도 그의 허세가 담겨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네이판타 정도는 쓰러트릴 수 있다고, 곧 돌아가겠다고 적었는데….
“하….”
하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들을 기리며 떠난 자리를 다시 메꾸기에도 바쁜데 제 부끄러운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해 이런 추태를 부리는 꼴이라니.
철이 들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해 왔던 일들이 왜 지금은 이렇게나 힘든 것인지. 그가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을 때 보석술사 하나가 그를 찾았다.
“대공님.”
“무슨 일인가?”
“치유의 힘을 가진 보석들이 전부 힘을 다했습니다.”
보석술사는 빛을 잃은 푸른색 보석 하나를 하운에게 건넸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많은 자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던 보석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 힘을 다하고 만 것이다. 이제 이 보석은 언제 깨어날지 기약할 수 없는 긴 잠에 빠질 것이다.
“저기… 새로운 보석이 필요한데… 아직 지원이 도착하지 않아서….”
“알겠다. 이걸 가져가.”
하운은 제가 갖고 있던 치유의 보석을 건네주었다. 보석술사는 기쁜 얼굴로 그것을 받고 돌아갔다. 하운은 차마 그 보석이 남아 있는 치유의 보석 중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다시 혼자 남은 하운은 제 손에 들린 보석을 보았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그는 그것을 들고 제 처소로 돌아갔다. 박살 난 곳들이 많았지만, 다행히 그가 머무는 곳은 창문이 몇 개 깨진 것 말고는 무사했다. 안으로 들어간 하운은 혹 누군가가 숨어 들진 않았는지 살피며 지하실로 가 문을 닫았다. 빛이 새어 나갈 곳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품 안에 있던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그것을 열자 반짝이는 빛을 품은 꽃잎이 나왔다. 그가 파르멜 저택을 떠나기 전에 리엘라가 주었던 엘피안 꽃의 꽃잎이었다.
하운은 그것을 들고 잠시 고민하다 보석의 위에 올렸다. 환한 빛이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잠시 후 그의 손에는 언제 잠들었냐는 듯 빛을 되찾은 보석이 있었다.
하운은 보석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역시 너무나 위험하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리엘라는 더욱 위험해질 것이다. 그녀는 물론, 그녀의 존재 자체도. 하운은 힘을 되찾은 보석을 주머니에 넣은 다음 위로 올라갔다. 이 모든 것을 끝낼 방법은 하나뿐이다.
‘서둘러야 해.’
오늘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네이판타의 날개 하나를 잘라 내는 데 성공했다. 땅속으로 돌아가던 네이판타가 쏟아 내던 저주의 말이 세상을 흔들었다.
‘서둘러서 그것을 없애야 해.’
호슨 공작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하운은 그 저주스러운 것을 완벽하게 소멸시킬 것을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