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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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손끝에 느껴지는 시린 한기에 리엘라는 놀라 뒤로 물러났다. 뾰족한 돌을 짚었는지 손바닥에 통증이 느껴졌으나 그것을 신경 쓸 정신조차 없었다. 기어 도망간 리엘라의 몸 아래에서 돌이 부딪히는 소리와 진흙이 철퍽대는 소리가 들렸다.
“흐, 으….”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리엘라의 입에서는 짐승의 울음 같은 신음 소리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몇 걸음도 채 기어가지 못했는데 딱딱한 벽이 닿았다. 리엘라는 더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몸을 웅크렸다. 눈을 감지 않았건만 감은 것과 다름없는 어둠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리엘라는 어둠이 주는 본능적인 공포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한참이나 숨을 죽이고 있는 사이 조금씩 이성이 돌아왔고, 리엘라는 조금 전 제가 만졌던 것의 감촉을 떠올렸다. 서늘했지만 동시에 매끄러운 것을 만진 것 같은 촉감이 있었다. 그러자 곧바로 생각난 것은 정신을 잃기 전 보았던 네아의 검은 손이었다.
“…….”
만약 네아라면.
리엘라는 아주 조심스럽게 팔을 앞으로 내밀어 몸을 움직였다. 워낙에 정신없이 굴렀기에 지금 제가 가는 방향이 조금 전 자신이 있었던 쪽인지도 알 수 없었다. 덕분에 리엘라는 한참이나 주변을 느릿하게 더듬으며 기었다.
‘조금이라도 빛이 있었으면….’
그러면 여기가 어디인지,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리엘라는 빛과 함께하는 자들이 누군지 떠올렸다. 보석술사들. 하지만 자신은 빛나는 힘을 가진 보석도 없으며, 보석술사도 아니었다.
갑자기 창세 신화가 떠올랐다. 세상에 빛이 떨어져 퍼지기 전 모든 생명은 이렇게 어둠 속을 기었을까. 이런 암흑 속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제 모습조차도 볼 수 없는 이 어둠 속에서.
그 순간, 작은 소리가 들렸다.
“읏….”
“……!”
리엘라가 기어가려고 한 곳에서 들린 소리였다. 짧은 신음 소리였음에도 리엘라는 그것이 네아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네아!”
제가 아는 것이 있다는 마음에 리엘라는 빠르게 기어가 소리가 난 곳을 더듬었다. 턱! 리엘라의 손이 조금 전에 만졌던 차가운 것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을 떼지 않았다. 리엘라는 천천히 제가 잡은 것을 더듬었다. 아주 날카롭고 뾰족했다. 분명 정신을 잃기 전 그녀의 허리를 감았던 긴 손톱일 것이다. 리엘라의 손이 천천히 네아의 손을 더듬어 올라갔다. 손톱 아래 울퉁불퉁한, 촘촘히 비늘이 박힌 손이 만져졌다.
하지만 리엘라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팔을 타고 올라간 손이 네아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리고 얼음같이 차가운 몸임에도 네아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안 순간 안도했다.
“살아 있어….”
네아의 몸을 더듬던 리엘라의 손이 잘린 어깨에 닿았다. 거짓말처럼 싹둑 베여 나간 자리에는 끈적끈적한 것이 만져졌다. 아마도 검은 피일 것이었다.
“네아.”
리엘라는 조심스레 네아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몇 번 더 네아를 불러 보던 리엘라는 남아 있는 네아의 팔을 끌어안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네아의 손을 잡았을 때 언제나 서늘함을 느꼈다. 그때는 그저 원래 손이 좀 차가운가 보다, 생각했었는데….
리엘라는 붙잡은 네아의 팔에 제 손을 문질렀다. 그러면 네아가 조금이라도 따뜻해지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여기가 어딜까.’
리엘라는 조금씩 남아 있는 기억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앞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은 채, 네아는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낙하감에 눈을 떴을 때는 거대한 검은 구멍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땅속은 분명한데….’
그때 리엘라가 붙잡고 있던 팔이 떨렸다.
“네아?”
리엘라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순간 어둠 속의 어둠이 눈을 떴다. 리엘라는 어둠에도 빛과 색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칠흑 같은 공간에서 짐승의 눈동자가 깜빡였다. 네이판타의 시선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리엘라가 팔을 놓으려는 순간 네아의 손톱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콱!
손톱은 리엘라의 어깨 쪽 옷을 뚫고 벽에 박혔다. 아슬아슬하게 어깨가 다치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벽으로 밀린 탓에 온몸에 다시 통증이 느껴졌다. 리엘라는 고개를 들어 네이판타를 마주 보았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최대한의 반항은 이것뿐이었다.
심연을 담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다시 몸이 굳어 왔다. 그래도 리엘라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네이판타만큼은 아니더라도 리엘라 역시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 리엘라를 살피듯 네이판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네가 재미있는 힘을 가진 것을 알고 있다. 빛나는 꽃을 피워 내더구나.]“……!”
그 말에 리엘라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모르는 척 해야 했다.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오면 머뭇거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답하겠다며 혼자 연습도 했었다. 하지만 정작 상황이 닥쳐오니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저 굳은 채 숨을 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무슨… 소리를….”
리엘라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형편없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정한들 그 누구도 믿어 주지 않을 목소리였다.
네이판타는 놀란 리엘라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박았던 손톱을 빼내어 리엘라의 뺨을 쓸어 만졌다.
[너를 위한 장소를 만들어 주마. 네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장소를. 너는 이곳에서 내 보석들을 위한 꽃을 길러 내야 해.]네이판타의 말에 리엘라는 소름이 돋았다. 언제나 두려워하던 상황이 닥쳐오고 만 것이다. 그것도 최악의 상대로.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에게는 이것이 있으니.]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깜빡였다. 그 행동에 리엘라는 네이판타가 말하는 ‘이것’이 네아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너를 공들여 기를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나에게 기쁨을 다오.]네이판타의 목소리에 리엘라는 직감했다. 이제 자신은 이곳에서 네이판타에게 사육당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
쾅! 콰광!
격렬한 폭음이 북부 전선 위의 하늘에 울렸다. 이미 모든 짐승들이 다 도망간 지 오래기에 그 소리에 놀라 날아가는 새들조차 없었다. 보석술사들은 굳은 얼굴로 깊은 구덩이 속에 서 있는 하운을 바라보았다.
그가 수도에서 돌아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천에 둘둘 감긴 무언가를 들고 돌아온 그는 가져온 것을 자신의 처소에 놓은 후 곧바로 네이판타가 기어 들어간 땅 위에 섰다.
그 후로 보석술사들이 본 것은 눈이 머는 듯한 빛의 난무였다. 하운이 사용하는 보석 중, 가장 위력이 강하다는 징벌의 오닉스의 힘이 그대로 땅을 후려쳤다. 땅이 파이며 흙과 바위가 하늘을 날았다. 주변에 있던 보석술사들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몬스터들을 막는 데 썼던 보석을 하운이 만들어 낸 흙더미를 막아 내는 데 사용해야 했다.
“호슨 공작님도 이런 짓은 하지 않으셨거늘.”
구덩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크기에 일람 라브카는 혀를 찼다.
수도 전체가 들어가도 남을 구덩이는 하늘에서 보아도 거대했다. 창세 신화의 빛이 떨어진 흔적이라던 중앙 협곡만큼이나 깊고 넓은 구덩이. 이것을 오직 징벌의 오닉스 하나로 파헤쳐 놓다니.
‘사실 저쪽이 드래곤인 건 아니겠지.’
일람은 자신이 오래전 호슨 공작을 보며 떠올렸던 것과 똑같은 생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하운이 어린 시절 호슨 공작에게 뒷덜미를 붙잡혀 끌려다니는 것을 본 사람이었다. 사실 그때부터 하운의 성격을 눈치채고 있었다. 조용하고 이성적이며 냉철한 것 같으나 사실은 불과 같기가 호슨 공작 이상인 왕자라는 것을. 그래도 계속 최전선에서 조용히 살기에 성격이 변했나 싶었는데 지금 이 모습을 보니 그냥 그동안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멀쩡할 수 있을 리가.”
제 연인이 납치당했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으면 그것은 그것대로 무섭다. 물론 하운이 이렇게까지 돌아 버릴 줄은 몰랐지만.
일람은 몸을 앞으로 내밀어 거대한 구덩이 안을 보았다. 계속해서 파고 들어가 기어이 네이판타를 끌어낼 것 같았던 하운은 벽을 마주해야 했다. 그의 발아래의 땅은 마치 겨울철 얼어붙은 호수처럼 투명한 벽이 생겨 있었다. 그것은 하운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일람은 오래전 이것을 본 적이 있었다. 호슨 공작이 네이판타를 상대할 때, 네이판타는 제가 갖고 있는 보석들의 힘을 조합해 강한 방어막을 만들어 냈었다. 분명 그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문제는… 저걸 어떻게 푸냐는 건데….”
그 당시 호슨 공작은 제 심복인 레이디 이블린의 도움을 받아 저 보석의 힘을 해체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이블린이 자신의 모든 기록을 남기지 않기를 원했기에 호슨 공작은 방어막을 푸는 방법을 그 어디에도 남겨 두지 않았다.
“크리스털에 기록된 것들도 전부 지워 버렸고….”
그 당시 호슨 공작과 이블린이 저것을 해체하는데 걸린 시간은 1년에 가깝다. 그러니 저것을 해체하기 위해 다시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문제는 그 시간을 하운도, 이 아래에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리엘라도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지만.
“복원하면 되잖아요.”
그때 누군가 일람의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
하운은 제 발아래에 있는 투명한 벽을 바라보았다. 불길한 빛이 너울거렸다. 이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는 보석의 힘이었다.
‘어쩐지 필사적으로 땅으로 기어 들어가더라니.’
땅속에 이런 것을 만들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징벌의 오닉스가 빛을 잃을 때까지 두들겼건만 이 투명한 벽은 금 하나 가지 않았다.
하운은 필사적으로 이 힘을 구성하는 데 들어갔을 보석의 힘들을 짐작해 보았다. 셀비아스를 죽이고, 플레노트를 죽인 다음 얻은 보석들이 이것을 만들어 내는 데 들어갔겠지. 그러니 그 드래곤들이 갖고 있던 보석의 목록을 만들고 비교하면서 이것을 해체해야….
“…늦어.”
하운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명 이 아래에 리엘라가 있다. 이것을 해체하고 네이판타를 끌어낼 때까지 그녀가 무사할까? 그때까지 리엘라가 버틸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빨리 이것을 해체해야 하는데….
순간 하운의 몸이 휘청거렸다. 일주일 내내 자지도, 먹지도 않은 채 미친 듯이 힘을 쓴 그의 몸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숨을 쉬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것을 해체할 수 있을까. 작은 실마리라도 좋으니 도움이 될 기록이라도 볼 수 있다면. 하지만 그것들은 지워지지 않았던가.
하운은 점점 절망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그때 하운의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하운 대공님.”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어렴풋이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기에 하운은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기사 두 명과 함께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대는….”
여자는 하운을 한 번 보고 바닥을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왕실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구금의 해제와 함께 지금 이 시각부터 하운 대공님의 휘하에서 모든 기록의 복원에 협조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또한 왕실에서 과거 네이판타와 관련된 기록이 있는 크리스털을 전부 가져왔습니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여자의 손에는 탁하게 빛을 잃은 크리스털들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제 아래의 단단한 벽을 보더니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매달 저에게 많은 꽃과 어머니의 기록을 보내 준 레이디 리엘라 테니어를 도울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다하겠습니다.”
오래전, 보석의 방을 열었던 카밀라 레드버리는 크리스털을 움켜쥔 채 바닥을 노려보았다.
217յη
똑. 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리엘라는 몸을 웅크렸다. 으슬으슬한 한기가 몸을 휘감았다. 얇은 것이라도 좋으니 덮을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손에 잡히는 것은 축축한 흙과 돌멩이뿐이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리엘라는 덜덜 떨리는 몸을 더욱 작게 웅크렸다.
여전히 빛 한 점 없는 곳이기에 여기가 어디인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피로를 버티지 못한 지친 몸은 어느 순간 고꾸라졌고, 그때마다 쓰러지듯 잠들었다. 이미 시간의 개념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춥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어둠 속에서 제 목소리마저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어 리엘라는 힘겹게 작은 소리를 내었다. 추워 곱아드는 손가락에 입김을 불어 보았지만 따뜻함은 순간이고, 숨결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는 더한 한기가 자리 잡았다.
몇 번 손을 호호 불던 리엘라는 다시 포기한 채 눈을 감았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똑같았으나 무엇인가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눈을 감고 있는 편이 나았다.
추위와 허기에 시달리다 보니 떠오르는 것은 따뜻하고 맛있는 것들뿐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있는 광경도.
파르멜 저택의 수리가 끝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은 정말로 완벽한 날이었다. 늦게 저무는 늦여름의 해가 하늘에 주황색과 보라색의 멋진 어울림을 만들어 냈었다. 친한 이들, 심지어는 멜라니아 로헴까지 참석하지 않았던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리엘라는 웃으면서 몇 번이고 술잔을 들어 올렸고,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옆에서 자꾸만 새로운 메뉴이니 먹어 보라고 닦달하던 리나의 목소리와 멜다 부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배고파….”
꼬르륵 소리와 함께 위장이 쥐어짜이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리엘라는 더욱 몸을 웅크리며 주린 배를 움켜쥐었다.
“돌아가면… 많이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왜 그것밖에 안 먹냐고, 이번 것은 맛이 없냐고 근심하던 멜다 부인과 리나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때 하나만 더 집어먹을걸. 두 사람이 만든 레몬 타르트 정말 맛있었는데. 갑자기 아래턱이 뻐근해지며 침이 고였다. 제 몸의 반응에 리엘라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상황에서 먹는 생각이라니.
혼자 웃던 리엘라는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묻었다.
네이판타가 저를 사육할 줄 알았는데 방치할 생각이었나 보다.
‘굶겨 죽일 거면 왜 데려왔어….’
네이판타를 원망하며 리엘라는 옆을 더듬었다. 이내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가 만져졌다. 이 물이라도 먹어야 할까 고민하며 리엘라가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저벅저벅.
떨어진 곳에서 걸음 소리가 들렸다. 리엘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아?”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그러더니 갑자기 강한 빛이 생겨났다.
“읏!”
리엘라는 놀라 눈을 감았다. 너무도 오랜만에 본 빛은 눈을 태우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했다. 그토록 원하던 빛이었음에도 리엘라는 손으로 눈을 가리며 피해야 했다. 어둠 속에 얼마나 있었다고 이렇게 빛을 피하게 된 건지.
그사이 걸음 소리는 더 가까이 다가왔고, 갑자기 리엘라의 몸이 붕 들어 올려졌다.
“네아?”
“…….”
여전히 대답은 없었지만 리엘라는 손을 더듬어 자신을 들어 올린 존재를 만졌다. 잘린 팔 부분이 손에 닿았고, 그 덕분에 리엘라는 안심할 수 있었다.
“네아다….”
네이판타가 어둠 속에서 말을 건 다음 네아는 어디론가 사라졌었다. 이제 네아의 몸은 완벽하게 네이판타가 통제하는 것 같았다. 네아는 아무 말 없이 리엘라를 안아 들더니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 리엘라는 조금씩 빛에 익숙해졌다.
한참을 걷자 공기의 냄새가 바뀌었다. 퀴퀴하고 습한 공기가 조금씩 사라지더니 네아가 발걸음을 멈췄을 때는 마른 흙의 냄새가 나는 공간에 도착해 있었다. 네아가 리엘라를 내려놓았다. 계속 웅크리고 있었기에 리엘라는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하고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하지만 네아는 그런 리엘라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더듬거리면서 바닥을 짚은 리엘라는 제가 마른 땅 위에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주변이 밝다는 사실도.
“으….”
리엘라는 힘겹게 눈을 떴다. 찌르는 듯한 통증과 눈부심이 느껴졌지만 이곳이 어디인가 하는 궁금함이 더욱 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둘러본 공간은 어설프게 꾸며진 방이었다.
“여긴….”
“여기서 회복이 될 때까지 지낼 것이다.”
리엘라의 질문에 네아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이판타는 네아에게 짧은 명령을 남겼다. 지하 레어에서 리엘라 테니어가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라는 명령을. 네아는 제 안의 지식들로 레어 안에 있는 물건들을 뒤졌다. 그러다 부족함을 느껴 네이판타에게 밖으로 나가 인간들의 마을에 다녀오겠다는 요청을 했다. 그 후의 기억은 네아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자신이 레어의 어느 한구석에 쑥대밭이 된 인간들의 마을에서 가져온 물건을 쌓고 있었다. 네이판타가 밖으로 향하는 길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손을 쓴 것이다.
네아는 그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네이판타는 자신의 어머니다. 어미의 믿음을 받지 못하는 자식이라니. 네아는 어렴풋이 누군가가 제 머리를 쓰다듬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것은 분명 네이판타의 손이었으리라. 그때 제가 받았던 신뢰와 사랑을 되돌려줄 수만 있다면.
네아는 공을 들여 공간을 꾸몄다
왜인지는 몰라도 자신에게는 인간들의 지식이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훌륭하진 않아도 인간 하나를 기르는 데 문제없을 공간이 꾸며졌다. 그리고 곧바로 데려온 것이 이 인간이다.
인간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바닥을 기었다. 어느 순간 네아는 자꾸만 자신이 이 인간에게 다가가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네아.”
네아는 자신을 부르는 인간의 목소리가 거슬렸다. 자신에게는 기억이 없거늘 저 인간은 자신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대했다. 그럴 리 없었다. 자신은 드래곤 네이판타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이며 태어나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아왔다.
인간들은 죽여야 할 존재이며, 그중에서도 보석술사들은 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제 앞에 있는 이 인간은….
네아는 자꾸만 작은 인간을 향해 뻗으려는 손을 거두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친 것일까. 그녀를 부르던 인간은 바닥을 더듬어 지푸라기가 쌓인 곳으로 가더니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일정해진 숨소리로 잠이 들었음을 안 네아는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침대로 갈 힘도 없었나.’
인간들은 네모나고 푹신한 곳에서 잠을 잘 터인데. 네아는 잠든 인간을 바라보다 그녀를 안아 들고는 침대라는 것 위에 올려 둔 다음, 자신이 가져온 것이 분명한 두꺼운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네이판타는 자신에게 이 인간이 회복될 때까지 돌볼 것을 명령했다. 그러니 이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네아는 잠든 인간의 주변을 한참이나 떠나지 못했다. 그러다 다시 몸을 일으키면서 네아는 생각했다. 이 인간을 위한 먹을 것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것은 아주 좋은 것이어야 한다고. 언제나 그랬듯이.
***
카밀라는 왕실의 허가를 받아 창고에 잠들어 있던 크리스털을 모조리 가져왔다. 이미 여러 번 돌려 본 탓에 기록된 기억이 희미해진 크리스털이었지만 카밀라는 그것들의 기억을 모조리 복원해 냈다.
덕분에 하운은 더욱 바빠졌다. 그는 카밀라가 복원해 낸 영상을 보며 네이판타의 특징과 함께 호슨 공작이 그것을 어떻게 상대했는지를 보았다. 그러다 드디어 카밀라가 과거 네이판타가 만들어 냈던 방어 결계에 관한 영상을 찾자 더욱 눈을 번뜩였다.
“좀 쉬시지요.”
그를 보좌하는 보석술사들이 하운에게 휴식을 권했지만 하운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들 그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잠을 자지 못한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뺨은 해쓱해져 있었다. 차림새가 흐트러진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간곡한 부탁에도 하운은 계속 눈앞의 영상에만 몰두했다. 이러다 쓰러지는 것이 아닐까, 모두가 걱정하고 있을 때 일람 리브카가 모두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하운의 뒤로 슬금슬금 접근했다.
그러다 하운이 그의 기척을 눈치챈 순간, 푸른 빛이 막사 안에 번쩍였다. 잠시 후 사람들은 책상 위에 쓰러져 있는 하운을 볼 수 있었다. 일람 리브카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운 대공을 쓰러트렸으니 오늘부터 내가 카르디아 제1의 보석술사로군.”
그 모습에 마침 크리스털의 기억을 복원해 가져온 카밀라가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다른 보석술사들 역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진심 같아요.”
사람들의 핀잔에 일람은 멋쩍게 뺨을 긁더니 밖에 서 있던 기사들을 불렀다.
“대공님께서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침대로 모시게.”
기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하운을 업었다. 워낙에 큰 덩치였기에 기사 두 명이 끙끙거리면서 그를 데리고 나갔다.
“이것 참, 40년 전에 했던 짓을 똑같이 할 줄이야.”
일람은 아주 오래전 자신이 지금과 똑같은 방법으로 호슨 공작을 잠재웠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도 지금처럼 네이판타와 맞서고 있을 때였다. 동료들을 네이판타의 손에 잃은 호슨 공작이 며칠간 잠도 자지 않고 제대로 먹지도 않으며 네이판타가 만든 방어막을 해체하는 데 매달리고 있었다.
“이거, 평소라면 걸리지도 않았을 힘인데….”
일람이 갖고 있는 보석은 수면의 어벤츄린이란 보석이었다. 그가 젊은 시절 짧은 시간이라도 푹 자기 위해 구입했던 이 보석은 정작 일람보다는 일에 매달려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않는 호슨 공작을 잠재우는 용도로 더 자주 쓰였었다. 그것을 이제는 그녀의 제자에게까지 쓰게 될 줄이야.
“그거야 평소의 하운 대공이었다면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니까 그런 것 아닌가요?”
카밀라의 말에 일람은 혀를 찼다.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늙은이 상처받네.”
“됐고, 깨어 있는 보석술사들이나 좀 불러 주시죠. 하운 대공께서 자는 사이에 우리가 좀 더 정리해 놔야 할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크리스털을 바라보는 카밀라의 얼굴은 어두웠다.
“문제라도 있는 건가? 못 찾았어?”
“찾긴 했는데… 문제가 있군요.”
카밀라는 제가 복원한 크리스털의 기억들을 허공에 띄웠다. 희미한 영상이었지만 알아보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카밀라가 복원한 영상을 보던 일람의 얼굴이 그리움에 젖어 갔다. 영상 속에서는 40년 전의 호슨 공작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이나 말없이 영상을 보던 일람은 찡해진 코끝을 누르며 다시 카밀라에게 질문했다.
“문제라니, 어떤 문제가 있기에?”
“40년 전이다 보니 보석의 소유자가 사망한 경우가 많고, 혹 갖고 있다 하더라도 힘이 다한 경우가 많겠지요. 어쨌든 확실한 건 저 보석들이 전부 흩어져 있다는 건데, 저것들을 언제, 누가 다 찾아올 수 있겠어요?”
카밀라가 한숨을 쉬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