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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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르. 천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리엘라는 고개를 들어 갈라진 틈을 보았다. 아슬아슬하게 사람 한 명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너비의 틈. 그곳에는 길게 그어진 손톱자국이 있었다. 조금 전 네아가 기어 올라간 자국이었다.
살려 달라는 말에 네아의 표정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자신이 한 말이 네아의 마음에 얼마나 큰 파문을 불러올지 리엘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은 네아의 죄책감을 아프게 찔렀을 것이다. 네아가 위험한 곳에 그녀를 홀로 놔두고 떠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올라간 것은 아니다. 벽에는 수없이 많은 손톱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이제 마지막이다 싶었을 때, 네아는 올라가는 것에 성공했다. 한쪽만 남은 팔로, 그것도 성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무척이나 아팠을 텐데 네아는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피를 흘리며 기어올랐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리엘라를 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외쳤다.
“살아 계셔야 해요. 꼭 하운 데려올 테니까…!”
그 말을 한 네아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음에도 네아의 모습이 사라진 순간 리엘라는 잠시 잊고 있었던 공포가 다시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또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 어두운 공간에 홀로 남았다.
무너지는 소리와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거대한 지하 공간에 울렸다.
“아….”
그러다 리엘라는 제 발과 손에서 참을 수 없는 따끔거림을 느꼈다.
“상처가….”
이곳까지 오는 길은 험난했다. 어둠 속에서 네아에게 설명을 하면서 차오르는 물을 헤치며 걸을 때 몇 번이나 돌에 걸려 넘어지고 다리를 찧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생긴 손과 발의 상처가 가득했다. 그리고 이제야 바닷물에 닿은 상처가 내지르는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피부를 칼로 저미는 것 같은 통증에 리엘라는 신음을 흘리며 조금이라도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네이판타가 만들어 낸 투명한 벽은 인간들의 공격으로부터 아래를 지키고 있음과 동시에 아르펠트해와 연결된 것이었다. 그것이 부서지기 시작했으니 분명 점점 더 빠르게 해수가 밀려올 것이고, 벽이 완전히 부서지면 이곳은 해수로 가득 찬 지하가 되겠지.
점점 출렁이며 올라오는 거친 물살에 리엘라는 좀 더 뒤로 물러났다. 발로 디딜 수 있는 공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뒤로 물러나다 벽에 닿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으면… 이 속에서 죽을 것이 분명하다. 혼자서. 외롭게.
잠시 이성이 흔들리며 조금 전의 선택이 후회가 되었다. 차라리 네아와 함께 있는 것이 나았을까. 그러면 이렇게 무섭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야….”
리엘라는 울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둘이 죽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살아야 했다. 적어도 네아는 살았다.
리엘라는 몰려오는 물을 피해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그때 리엘라의 손에 푹신한 것이 잡혔다.
“……!”
이 공간에 있을 리 없는 감촉에 놀라 아래를 바라본 리엘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손바닥에 잡힌 것은 언제 자라났는지 모를 이끼였다. 그 이끼에 손에 묻은 해수를 조금이라도 닦아 내려 하던 리엘라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손이 스쳐 지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끼가 빛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리엘라는 급히 고개를 숙여 이끼를 살폈다.
“꽃이….”
이끼의 위에 쌀알 같은 작은 흰 꽃이 피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피를 머금고 빛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리엘라는 황급히 제 아르펠트의 진주를 꽃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꽃에 머물렀던 빛이 진주로 옮겨 가며 진주가 조금씩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큰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리면서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떨어진 돌들이 이끼 위를 덮었다.
“안 돼!”
리엘라가 손을 뻗는 순간 그녀의 위로도 큰 바위가 떨어졌다. 하지만 바위가 닿기 직전, 아르펠트의 진주가 빛나더니 리엘라의 주변에 보호막을 만들어 내었고, 떨어진 바위는 빛에 닿는 순간 부서졌다.
그리고 진주는 다시 빛을 잃었다.
“…….”
사라지는 빛에 리엘라의 마음도 같이 어두워졌다.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지켜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네아는 미친 듯이 뛰었다. 땅으로 나온 순간부터 어디로 가야 할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저 멀리 네이판타가 있었고, 그와 대치하는 인간들의 힘이 느껴졌으니까. 수많은 보석들의 힘이 같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하운도 분명 저기에 있을 터였다.
하지만 네아가 달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네이판타는 인간들을 향해 브레스를 내뿜었다. 그 충격파가 네아가 있던 곳을 휩쓸었다. 거센 바람이 불면서 옆에 있던 나무들이 뿌리를 드러내며 나뒹굴었다. 네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콰직!
날아가던 몸이 단단한 것에 부딪히자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지간한 것으로는 부러지지 않는 몸이었지만 세게 날아가 추락하듯 부딪혔으니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동시에 강한 빛이 세상을 덮었다.
한참 후에 네아는 눈을 떴다. 잠시 기절했던 것 같았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움직여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하운에게 가서 리엘라를 구해 달라고 해야 했다. 하지만 아수라장이 된 숲을 지나 네아가 맞이한 것은 처참한 광경이었다. 쓰러진 인간들, 힘을 잃고 나뒹구는 보석. 하르메아인 것이 분명한 큰 드래곤 역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힘겹게 서서 네이판타를 보고 있는 하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의 보석술사들이 네이판타에게 진 것이다. 그때 네이판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너희들이 끝을 맞이하겠구나.”
네이판타의 몸의 절반이 넘는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 모습에 네아는 저도 모르게 제 입을 가렸다. 제 피를 이어받았으니 너로 실험해 보는 게 좋겠다며 저것과 같은 입을 제 몸에 만들어 두지 않았던가. 한 번도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으나 분명 지금의 네이판타만큼이나 끔찍한 몰골일 게 분명했다. 이런 모습인데도 리엘라는 제 손을 붙잡고 따라왔는데….
네아는 절망에 주저앉았다. 이제 모두 네이판타에게 먹히리라. 하운도, 자신도. 그리고 리엘라는 땅 아래에서….
제 몸보다 더 크게 벌린 징그러운 입이 인간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 순간.
쾅!
세상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네이판타의 몸이 날아갔다.
***
네이판타의 입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하운은 제 손에 들려 있던 에르첼라의 목걸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보석이 부서지고 난 장식판. 그곳에 살짝 파인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머리카락?”
분명 붉은색 머리카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색이 바래고 푸석해진 거친 머리카락이 그곳에 있었다. 도대체 누가 에르첼라 컬렉션 뒤에 이런 것을 넣어 놓는단 말인가. 다른 것이라면 모를까, 에르첼라의 목걸이는 잠시 왕궁에서 가출한 적은 있어도 그 형태가 훼손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마디로 에르첼라 시대에 만들어져서 한 번도 분해된 적이 없다는 소리였다.
문득 하운은 오래전에 호슨 공작에게 배웠던 것이 생각났다. 이것이 만들어졌을 당시에 사람들이 보석을 대하던 태도. 그리고 왕궁 여기저기에 걸려 있는 그 사람의 초상화까지도.
바로 앞까지 다가온 네이판타의 입이 보인 순간, 하운은 목걸이에 있던 머리카락을 제가 들고 있던 헤마타이트에게 먹였다. 제 생각이 맞다면 분명 이것은….
화아아악!
손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짐과 동시에 검은 기운이 하운이 들고 있던 머리카락을 삼켰다. 신체의 일부분을 먹고 그것을 완벽하게 구현해 내는 힘을 가진 보석. 헤마타이트는 제 능력을 충실하게 발휘했다.
하운은 순식간에 제 앞에 생겨난 존재를 바라보았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진흙 덩어리 같은 검은 기운이 꿀렁이며 뭉치더니 이내 사람의 형태로 바뀌었다. 그리고 끝에서부터 천천히 제가 복제한 존재의 색을 찾아갔다. 하운은 제 앞에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와 거의 비슷한 키에 단단한 몸, 그리고 단아하고 아름다운 얼굴,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
하운은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운뿐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루시안도, 샤를로테도 눈앞에 새로이 나타난 존재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보석술사라면, 카르디아의 국민이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 번은 보게 되는 초상화가 있다. 카르디아를 지금의 위치로 올려놓은 정복 왕이자 가장 위대한 보석술사.
에르첼라.
하운은 과거 보석의 방에 있던 호슨 공작의 복제를 떠올렸다. 이제 막 복제된 에르첼라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일단 자리를 피해야 했다. 하운이 에르첼라의 손목을 잡으려는 순간 에르첼라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가 손을 움직이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반지가 떠오르더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졌다. 그리고 에르첼라는….
쾅!
세상이 갈라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지척에 다가왔던 네이판타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갔다.
하운의 눈에는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 그 모습이 느릿하게 보였다. 반지에서 빛이 터짐과 동시에 에르첼라가 높이 뛰어올랐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니까 에르첼라가 네이판타를….
“…때렸어?”
하운이 본 게 착각이 아니었다는 듯 그의 뒤에 있던 루시안이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먹 한 번으로 네이판타가 날아가다니. 말도 안 된다. 에르첼라도 결국은 인간이었다. 보석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그저 조금 강한 인간일 뿐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 순간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머지 에르첼라 컬렉션들이 떠오르더니 빠르게 에르첼라를 향해 날아갔다. 제 몸에 과거 자신의 것이었던 것들을 걸친 에르첼라는 쉬지 않고 손과 발을 움직였다.
얼핏 보면 거대한 짐승에게 달라붙은 벌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에르첼라가 제 몸을 휘두를 때마다 네이판타는 공이라도 된 것처럼 굴렀다.
‘어떻게?’
힘을 잃었던 보석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힘을 쓸 수 있지? 게다가 어디까지 기억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이제 막 복제된 에르첼라가 무슨 수로 저토록 강할 수 있단 말인가?
제게 덤벼드는 에르첼라를 상대한 네이판타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에르첼라는 따라가지 않고 땅에 서서 높이 날아오른 네이판타를 경멸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못생긴 게.”
오래전, 벽 너머의 복제된 호슨 공작과 비슷한 고저 없는 목소리에 하운과 루시안은 알 수 있었다. 저 복제된 에르첼라가 정말로 본능에 따른 혐오감 하나만으로 저렇게 네이판타를 박살 내 놓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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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넋이 나갔던 루시안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에르첼라…? 되살아났다면… 헤마타이트?”
루시안의 중얼거림에 하운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루시안은 입을 떡 벌리며 눈을 크게 떴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그다음에는 돌아 버리겠다는 듯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인간이 가진 모든 감정을 얼굴로 표현해 내던 그는 잠시 후 복잡한 머릿속을 다 정리했는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쨌든 우리 쪽에 좋은 일인 것 같군요. 그거면 되었습니다.”
“자, 잠깐만! 에르첼라? 헤마타이트? 되살아나?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요!”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는 샤를로테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물어봤지만 하운도 루시안도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설명할 마음도 없었고.
“저거… 뭐야…?”
어느새 정신을 차린 하르메아는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꾸물꾸물 기어 와 하운의 뒤로 숨었다. 물론 그 덩치가 다 가려질 리가 없으니 그냥 하운이 드래곤 앞에 서 있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었지만.
정신을 차린 카르디아의 보석술사들 역시 말을 잃은 채 하운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에르첼라의 모습을 보았다. 보석술사들의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에르첼라의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보석술사가 아닌 격투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에르첼라는 멀리 날아오른 네이판타를 흘긋 보더니 하운에게 말했다.
“너, 내 후손이구나.”
“…….”
“어떻게 알았냐는 얼굴 하지 마.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그래도 내가 보석의 힘으로 되살아난 건 알겠네. 어디 보자….”
그때 에르첼라가 걸고 있던 장신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에르첼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하나씩 말해!”라고 소리쳤다.
그래도 보석들이 하나같이 제 할 말만 하자 결국 에르첼라는 제 귀를 막았다. 그 모습에 하운은 저 보석들이 원래부터 말은 듣지 않았던 것들임을 깨달았다. 잠시 후, 에르첼라는 긴 한숨을 쉬더니 짜증 난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좀 혼란스러웠는데 이제 대강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겠다.”
하운은 중얼거리는 에르첼라에게 질문했다.
“도대체 무슨 수로 이렇게 빨리 복제된 겁니까?”
과거 호슨 공작을 복제했던 헤마타이트는 이렇지 않았다. 며칠간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 같은 소리를 냈었고,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었다. 처음에는 분명 대화도 매끄럽지 않았다. 그런데 에르첼라는 나타나자마자 강한 힘을 쓰고, 진짜 과거의 에르첼라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운이 의심을 다 지우지 못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에르첼라는 이해된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 꽃 때문인 것 같은데. 네가 목걸이에 꽃을 먹였잖아. 얘가 그걸 못 버티고 깨져 버리긴 했는데, 그 힘이 내 머리카락에 온 것 같아. 그사이 헤마타이트가 나를 복제하면서 좀 증폭이 된 것 같고. 그래서 얘네들의 힘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완전히는 몰라. 그러니까 이건 그냥 내 가설.”
“…당신은 어디까지 인지하고 있는 겁니까.”
다시 이어지는 하운의 질문에 에르첼라가 미소 지었다. 그저 즐거운 것 같은 미소만은 아닌, 복잡한 감정이 서린 웃음이었다.
“나는 내가 가짜인 것을 알고 있단다. 진짜의 기억과 감정을 모두 갖고 말이야. 헤마타이트의 한계일까, 아니면 일종의 안전장치인 걸까. 이 사실이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슬퍼야 하는데 그런 건 별로 느껴지지 않는군. 아무래도 감정은 완벽하게 복제하지 않는 모양이야. 되살아난 순간 정신 붕괴를 우려해서 그런 것일까?”
자신의 일임에도 에르첼라는 태연하게 분석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원본’이 갖고 있던 감정과 의지가 그대로 복제되었지. 그래서 저 괴물을 두들겨 팬 거고. 네이판타 저거 천년 가까이 지나니 완전히 미쳤군? 인간에게 소멸당할 위기까지 갔으니 당연한 건가. 쟤는 나 살아 있을 때도 골치였어. 나와 드래곤 로드가 싸우는 사이에 비어 있는 대륙을 멋대로 약탈하고 다녔지.”
하늘에 떠 있는 공포 그 자체를 마치 동네 말썽꾸러기를 대하듯 그녀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런데 저게 이제는 셀비아스와 플레노트에 이어 드래곤 로드를 흡수해 괴물이 되어 버렸네.”
그때 갑자기 멀리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하운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에 저런 모습의 네이판타가 있는데 이제 와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를 것이 무엇이 더 있을까.
뒤쪽에 아직 힘이 남아 있는 보석과 보석술사들이 있었는지 작은 폭음과 함께 공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사이를 무엇인가가 빠르게 뛰어오고 있었다.
모두가 긴장을 하며 다가오는 생명체를 보았다. 그러다 언덕 위에 있다가 이쪽으로 내려온 기사들이 정체불명의 습격자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공격을 막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하운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그 움직임에 하운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비명 소리와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하십시오!”
어차피 피해 봤자 머리 위에 네이판타가 있는데 어디로 갈 수 있을까. 하운은 저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피투성이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공격을 했는지도.
피로 범벅이 되어 생김새를 제대로 알 수 없음에도 몸의 절반 가까이 될 것 같은 입과 그 안에 빼곡히 박혀 있는 날카로운 이빨은 누가 보아도 네이판타를 생각나게 했다. 어쩌면 네이판타의 새끼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슷하게 끔찍한 모습에 하운은 옆에 서 있던 기사의 검을 빼앗아 들었다.
하운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네이판타를 향했던 살의가 괴물에게 향했다. 하지만 하운이 미처 다가가기도 전에 괴물은 힘을 다했는지 다른 이들에게 공격을 당해 쓰러졌다.
“……?”
그러면서도 괴물은 똑바로 하운을 향해 기어 왔다. 자신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것일까 싶어 살펴보려는 순간 뒤에 있던 에르첼라가 말했다.
“드래곤인데 인간이랑 섞여 있네?”
“……!”
그 순간 하운은 더욱 강하게 검을 붙잡고 괴물에게 다가갔다. 하운이 아는 한, 그런 괴물은 오직 한 마리밖에 없다. 네아. 호슨 공작의 은혜를 잊고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후, 리엘라를 납치한 저주스러운 것. 저것이 네아라면 기필코 제 손으로 목을 벨 생각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모습은 피투성이의 고깃덩어리와 같은 모습이었다. 자신을 향한 공격을 막을 생각이 없었는지, 아니면 막을 힘이 없었는지 괴물은 사람들의 공격을 막지 않은 채 그대로 몸으로 받아 냈다. 그 결과는 겨우 숨만 붙어 있는 핏덩어리였다.
하운은 검을 들어 올렸다. 한 번에 죽이기가 싫었다. 가능하다면 이대로 살려 두고 최대한의 고통을 주고 싶었다. 마치 네이판타가 자신들에게 그러하였던 것처럼.
피에 완전히 절어 형태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하녀복이 보였다. 그 모습에 하운은 더욱 이가 갈렸다. 아직도 이것은 제가 공작저에 살았던 하녀인 것처럼 굴려고 하는 것인가. 너덜거려 곧 뜯겨 나갈 것 같은 다리를 향해 하운이 검을 내려치려는 순간이었다.
“하… 운….”
엉망으로 갈라졌으나 분명 네아의 목소리였다. 뒤따라온 루시안이 네아임을 알아차리고는 숨을 삼키며 물러섰다. 하운은 네아가 제게 뭐라 하고 싶은 말이 있음을 알고 입을 열었다.
“지껄여 봐.”
유언을 내뱉은 수만큼 네아의 몸을 조각내 버릴 생각이었다. 네이판타가 시킨 저주의 말을 내뱉을까. 아니면 저를 믿고 리엘라를 맡겼던 그의 어리석음을 조롱할까. 하지만 하운의 기대와 달리 네아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완전히 부러져 흔들리는 팔을 억지로 들어 올리려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지 다시 하운에게 기어 왔다. 그 모습에도 하운에게는 조금의 동정심도 들지 않았다. 하운의 앞까지 기어 온 네아가 상체를 일으키며 목을 내밀었다.
목을 졸라 죽여 달라는 것일까. 하운의 눈이 더욱 노기로 붉어진 순간 네아가 힘겹게 소리를 내었다.
“목… 수정….”
피거품이 섞여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 두 단어만큼은 확실히 들렸다. 하운은 곧바로 네아의 목을 살폈다.
“너….”
하운의 잇새로 이가 갈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아의 목에 걸려 있는 것은 분명 리엘라가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있던 수정의 절반이었다. 하운이 거칠게 그것을 잡아채자 네아의 몸이 풀썩 쓰러졌다. 마치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피에 젖어 있는 수정을 손으로 닦은 하운은 그 안에 기록이 들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도대체 이 안에 어떤 기억이 담겨 있을지 하운은 두려웠다. 보란 듯이 파르멜 저택의 사람들을 죽이고 시체를 트로피처럼 전시해 놨던 네아다. 이 안에 리엘라의 어떤 모습이 있을지….
그때 쓰러져 있던 네아가 중얼거렸다.
“어서… 빨리… 아가씨가….”
그 말에 하운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수정의 기억을 불러냈다. 만약 이 안에 리엘라의 마지막이 담겨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네이판타와 네아를 갈아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하면서.
수정을 잡은 하운의 손이 떨렸다. 수정의 기억을 불러내는 것은 초보 보석술사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다. 특히나 하운에게 이런 널리고 널린 하급 수정의 힘을 끌어내는 것은 숨쉬기보다도 쉬울 터였다. 하지만 하운은 몇 번이고 기억을 불러내는 데 실패했다. 보다 못한 루시안이 대신 하려고 수정을 가져가려 하자 하운은 거칠게 그의 손을 쳐 내고는 다시 떨리는 손으로 수정을 붙잡았다.
잠시 후, 어딘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새카만 광경만이 보여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물소리와 함께 갈라진 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보고 나서야 그곳이 지하 어딘가임을 알았다. 도대체 저곳이 어디인지 하운이 생각하는 순간 화면이 흔들리더니 그가 보고 싶었던 얼굴이 나타났다.
“리엘라….”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자들이 놀라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수정의 기억에 나타난 리엘라는 웃고 있었다. 핏물에 젖은 모습으로, 여기저기 상처를 잔뜩 달고서도. 마치 앞에 그가 있는 것처럼 환하게.
하운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기억 속의 리엘라에게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허상을 헤집을 뿐이었다. 툭. 하운의 얼굴을 따라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이 그를 향해 웃고 있음에도 하운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심장이 쥐어짜여 비틀어지는 것 같았다.
리엘라가 안전하길 바랐다. 이 위험한 것들로부터 멀리서 평안하게, 하루를 즐기며 살아갈 수 있기를. 그저 멀리 있으면 안전할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했던 결과가 이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려고 내가 당신을 떠나 온 게 아니었는데.
수도를 떠나기 전날 밤이 생각났다. 파르멜 저택의 침대에서 제 옷을 꼭 붙든 채 잠들었던 리엘라의 모습이.
그사이 기억 속의 광경이 흔들리며 바뀌기 시작했다. 네아의 목에 수정이 걸리더니 네아가 땅으로 기어 올라가기 위해 노력한 모습들이 보였다. 그리고 네아가 땅 위에 올라와 리엘라를 부르며 아래를 바라보았을 때, 어서 가라고 외치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리엘라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지막을 준비하는 체념의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