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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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는 네아가 잠시 달리는 듯 기억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었다. 하운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이 본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았다. 피와 땀과 먼지로 엉망이 된 하운의 얼굴에 길게 눈물 자국이 남았지만, 감히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바라보며 웃을 수 없었다.
하운은 수정을 움켜쥐고 네아가 달려온 방향을 보았다. 시간이 없다. 수정이 보여 준 지하의 공간에는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네아가 여기에 오기까지 시간이 걸렸을 터이니 그사이에 물은 더욱 차올랐을 것이다.
리엘라가 있던 공간은 뒤쪽의 조금 높은 흙무더기를 제외하면 천장까지는 높이가 있었다. 이대로 물이 차오르면 체력을 소진한 리엘라는….
조급해진 하운이 몸을 돌려 발을 떼는 것과 동시에 하늘에 떠 있던 네이판타가 사람들을 향해 다시 브레스를 내뿜었다.
콰과광!
다시 굉음, 충격 그리고 흙먼지가 세상을 뒤덮었다. 다행히 이번의 브레스는 에르첼라가 막았다. 그녀는 하운을 향해 말했다.
“지금 내 상태와 헤마타이트의 한계를 생각하면… 기껏해야 10분 정도 네이판타를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구나. 그 후에는 헤마타이트가 부서지면서 나도 사라질 거야.”
10분 후, 복제이긴 해도 제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에르첼라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그동안 너희들은 많은 일을 할 수 있겠지. 여기서 도망가는 것도, 네이판타와 싸우는 것도, 아니면 저기 남아 있는 통신석으로 수도와 연락을 해서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유언을 남길 수도 있을 테고.”
에르첼라는 하늘을 향해 손을 올렸다. 그녀가 끼고 있던 팔찌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더니 네이판타의 날개 하나를 감쌌다. 네이판타의 비명이 울리는 가운데 에르첼라는 여전히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하고 싶은 게 많긴 해. 그동안 수도가 어떻게 변했는지도 보고 싶고… 정원에 두었던 내 동상은 여전히 잘 있는지도 궁금한걸.”
부활하면서 보석들의 힘까지 함께 되찾은 에르첼라였다. 어차피 끝을 알고 있다면 지금 당장 그녀가 보석의 힘을 이용해 수도로 떠나 버린다고 해도 그녀에게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10분이라는 시간도 그녀가 네이판타를 상대할 경우 버틸 수 있는 시간이지 그녀가 네이판타를 무시하고 다른 일을 한다면, 어쩌면 무한대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과거 호슨 공작을 흉내 내던 헤마타이트가 아무것도 없는 벽 너머에서 몇 개월을 버텼듯이.
“도대체 왜 도와주려 하시는 겁니까.”
물론 인간이었던 그녀가 적이었던 드래곤을 상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본질은 보석인 헤마타이트이지 않은가. 굳이 인간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아도 될 텐데.
“그게… 어차피 다 죽었잖니.”
에르첼라는 한숨을 푹 쉬었다.
자신이 복제된 거짓 존재임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인간으로서의 욕망은 생생했다. 비록 엉망이 되었지만 바람의 냄새와 숲의 냄새가 가득한 땅, 밝은 햇살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 또한 제 앞에서 날개를 퍼덕이는 드래곤에 대한 적의 또한 그대로였다. 그래도 그녀에게 남은 감정 중 가장 강한 것은 그리움이었다.
드래곤 로드와 싸우면서 큰 상처를 입었다. 그때 이미 의식은 혼미해졌었다. 죽는 순간에 에르첼라는 억울함을 느꼈다. 이러려고 열심히 살아온 게 아니었다. 자신은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보석술사라고 해도 결국은 인간, 에르첼라는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모든 감각이 희미해졌을 때 마지막까지 알 수 있었던 것은 울면서 자신을 부르던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되살아났음을 깨닫는 순간 에르첼라는 그 목소리들이 그리웠다. 그리고 제가 부활한 이 시대를 좀 더 인지한 순간에 깨달았다.
이미 세상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제가 단단하게 입지를 다져 놓은 나라는 대륙의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어 있었고, 이렇게 잘생기고 강한 후손도 있다. 그런데….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은 없어.”
에르첼라는 그녀가 살아 있던 시절을 회상했다. 국왕의 위엄이 땅에 떨어졌다고 감히 저를 구박하던 자신의 딸과 그녀가 싸우러 나갈 때마다 우는소리를 하며 따라오던 보석술사들. 그리고 그녀가 사랑했던 남편들.
그들 속에서 살아왔기에 매일이 즐겁고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죽기 전 왜 더 살고 싶어 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드래곤 좀 적당히 잡을 것을.”
드래곤 로드까지 완전히 몰아내고 나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편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그 일만 하다 세상을 떠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니 내 시간을 너에게 주마, 기왕 줄 것이라면 후손을 위해 주는 게 좋지 않겠니.”
에르첼라는 네아가 왔던 방향을 가리켰다.
“가라, 너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
에르첼라는 멀어지는 하운을 보았다. 그사이 네이판타는 그녀가 만들어 냈던 불기둥을 소멸시켰다. 완전히 타서 녹아내린 탓에 뼈가 훤히 드러나는 날개를 퍼덕이자 참기 힘든 악취가 풍겼다. 에르첼라는 이런 냄새마저 생생히 느낄 필요는 없지 않냐며 짜증이 난 눈으로 네이판타를 바라보았다.
“웃긴 일이야. 드래곤이 만들어 낸 보석으로 드래곤의 가장 큰 적이 되살아나다니. 이게 인생이지. 언제 어디서 무슨 웃긴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
에르첼라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녀가 걸치고 있던 에르첼라 컬렉션들이 조심하라고 말하는 듯 웅웅거렸다. 그 순간 에르첼라는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러고 보니, 너희들! 내가 분명 나하고 같이 묻어 달라고 했는데!”
……!
에르첼라의 외침에 그녀의 장신구들이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들켰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 내 딸이 평소에도 욕심을 냈던 것들이었으니… 같이 안 묻을 줄 알고 있었어. 어쩌겠어….”
에르첼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언제나 제가 입버릇처럼 남겼던 말을 중얼거렸다.
“보석술사의 미덕은 탐욕인걸.”
강할수록 탐욕스럽다. 그래서 에르첼라는 많은 것을 욕망했었다. 강한 나라, 아름다운 궁, 안정된 땅,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화원. 그 가운데 서 있는 자신과 사람들.
한번 손에 넣어서 끝나는 것이 아닌 평생을 노력해야 하는 것들을.
아무 일도 없는 평화로운 하루는 그 모든 것을 손에 넣어야만 누릴 수 있는 것이었기에 에르첼라에게는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했다.
“나는 누리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이라도 누리면 좋지. 그것도 내 욕심인걸.”
에르첼라는 제 보석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너희들하고 함께 가고 싶은데, 어때?”
지이이잉!
모든 장신구들이 강하게 몸을 떨었다. 에르첼라가 만들어 내어 언제나 품고 다니던 것들이었다. 그리움의 감정이 인간과는 조금 다를지언정 에르첼라 컬렉션에게 있어서 에르첼라는 그들의 부모였다.
“앞으로 10분.”
에르첼라는 웃으면서 네이판타를 바라보았다.
“놀아 보자.”
***
도대체 위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리엘라는 턱까지 차오른 물의 차가움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큰 소리와 함께 진동이 느껴졌다. 그러자 수면이 출렁이며 작은 파도를 만들어 냈고, 리엘라의 몸이 그 흔들림에 휩쓸려 휘청거렸다.
물은 계속해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헤엄쳐 물 위에 떠올라 볼까 했지만 몇 번의 시도 후에 체력만 더 빨리 닳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포기했다.
“읏.”
다시 물이 출렁이자 바닥을 딛고 있던 발이 떠올랐다. 이제 더 이상 땅을 딛고 있기도 힘들어졌다. 몸이 떠오르자 한쪽만 남아 있던 신발이 벗겨져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방이 어두운 데다가 피에 물든 아르펠트해의 바닷물은 불투명했기에 신발을 다시 찾는 것은 무리였다. 리엘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금 상황에서 신발이 뭐가 중요하다고.’
어릴 적, 언니들과 함께 산과 들에서 뛰어놀다 강가에서 신발을 잃어버렸던 일이 생각났다. 아일리가 엉엉 우는 리엘라를 달래지는 못할망정 “신발을 잃어버리면 영영 집에 못 돌아간대.”라며 놀리다 첫째인 레베카에게 아주 세게 등짝을 맞았다. 왜 하필 지금 그때의 일이 생각나는 걸까.
“언니 다시 만나면 가만 안 둘 거야….”
재수 없게 왜 그런 소리를 했냐고 화를 내야지. 다시 만나면 화를 내야….
눈물이 아래로 떨어졌다.
‘울면서 죽고 싶진 않았는데.’
그 순간 땅이 크게 흔들리며 다시 위쪽이 무너져 내렸다. 갑자기 쏟아진 흙더미에 물의 높이가 순식간에 리엘라의 머리를 넘어섰다.
“컥! 쿨럭!”
갑자기 입 안으로 밀려온 흙탕물을 뱉어 내는 사이 리엘라의 몸이 떠올랐다가 다시 아래로 쑥 내려갔다.
“악!”
그 순간 발아래에서 살이 찢기는 통증이 느껴졌다. 바닥에 구르고 있는 자갈들에 발이 찢긴 것이 분명했다. 필사적으로 벽에 붙어 조금이라도 뭔가를 딛고 서 보려고 하던 리엘라는 벽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다. 아르펠트의 진주에게 힘을 돌려주었던 이끼의 꽃이 그곳에도 피어 있었던 것이다. 리엘라는 허겁지겁 손목을 이끼에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아르펠트의 진주는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진주가….”
드래곤 로드의 피가 만들어 낸 보석. 그래서 빛에서 태어난 보석들과 다르게 수명이 있다고 했었다. 그리고 조금의 색도 남아 있지 않고 회색이 된 채 금이 가 있는 진주를 본 리엘라는 아르펠트 진주의 수명이 다했음을 알았다. 공작저에서 죽었던 진주들 색 또한 이러했기에.
진주에 대한 미련을 접은 채 리엘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 피가 물에 퍼진 덕분일까. 벽을 타고 피어 있는 이끼의 꽃들이 순식간에 피어오르며 작은 꽃마다 빛을 머금었다. 그때 다시금 위에서 네이판타의 울음소리와 폭음이 들려왔다. 위에서 사람들이 네이판타와 싸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꽃을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제 제 능력을 숨길 때가 아니었다. 네이판타를 막지 못하면 모두가 죽을 것이다. 그러니 들키든지 말든지 제 피로 다른 꽃들까지 피워 낼 수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리엘라는 잠시 숨을 멈추고 몸에 힘을 주어 발로 바닥을 더듬었다. 몇 번을 디디자 조금 전 그녀의 발에 상처를 낸 것 같은 자갈이 밟혔다. 리엘라는 그 위치를 기억하고는 눈을 감고 물속으로 잠수했다.
잠시 후, 물 위로 올라온 리엘라의 손에는 단면이 날카로운 돌이 들려 있었다. 이것을 잡는 사이에 그새 베인 손가락에서도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점점 몸에서 힘이 빠졌다. 더 이상 발이 땅에 닿지 않아 허우적거려야 했다. 그러니 실행을 하려면 조금이라도 빨리해야만 한다.
‘물은 이곳을 가득 채운 뒤, 땅 위로 넘쳐흐를 거야.’
그때 이 물에 제 피가 섞여 있다면. 그렇다면 겨울이긴 해도 남아 있는 땅 위의 꽃들이 피어나지 않을까. 사람들이 그것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쩌억!
그때 금이 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리엘라는 그것이 동굴 속 방에서 보았던 네이판타가 만들어 낸 결계가 갈라지는 소리임을 기억했다. 그것이 깨지면 아르펠트해의 바닷물이 더욱 거세게 이곳으로 밀어닥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물이 밀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리엘라는 이를 악물고 날카로운 자갈을 든 채 제 다른 손의 손목을 내려찍었다.
“악!”
한 번 찍었을 뿐인데 손목에 깊게 생긴 상처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생각보다 통증은 덜했다. 오히려 점점 무뎌지는 것 같았다. 리엘라는 더 이상 몸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손에 들려 있던 돌멩이가 물속으로 떨어지고, 힘이 빠진 몸이 물 위에 떠올랐다.
리엘라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위쪽을 바라보았다. 갈라진 틈이 이제야 가까워졌는데 그곳을 향해 헤엄칠 힘도 없었다.
서서히 시야가 흐려졌다.
‘보고 싶다.’
이제는 아픔도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리엘라는 편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모두가 보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보고 싶어.’
하운이 보고 싶었다.
리엘라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환상일까. 리엘라는 세상이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나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