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37
39
09. 쉴 수 있는 곳
“안녕히 가세요!”
“정말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리엘라는 손을 흔든 후 몸을 돌려 말을 몰았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말들도 좋은 여물과 물을 마시며 잘 쉰 탓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가족들 옆에서 개는 아쉽다는 듯 축 내린 꼬리를 흔들면서 끼잉끼잉 울었다. 그러다 하운과 눈이 마주치면 재빨리 후다닥 주인 뒤로 숨어 꼬리를 내렸다.
농부의 집을 벗어나 한참을 달려 개울가의 다리를 건널 때 리엘라가 물었다.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무엇을?”
“자신이 그 대공이라는 사실 말이에요. 무척 반가워했을 텐데.”
“쓸데없는 부담감만 줄 뿐이다. 그리고….”
하운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저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지 않나.”
“그 말씀은….”
“그대를 노리는 자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음… 변호사님들 말로는 귀찮은 사람들이 많을 뿐, 제가 그렇게 위험한 입장은 아니라고 하던데요. 오히려 저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더욱 이득을 보기 힘들게 공작님께서 유언장을 작성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세상에는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않는 무모한 자들도 있는 법이야. 또한 이득을 바라는 마음이 아닌 원망으로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고.”
그의 말에 리엘라는 그가 그런 사람들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왕의 동생이고 이 나라 최강의 보석술사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물론 나라 안에서도 경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리엘라는 초대한다고 덥석 농부를 따라간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었고 반가이 맞이해 주는 가족들 때문에 위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였다면 쉽사리 따라가지는 않았으리라. 분명 정중하게 거절했겠지. 그런데 오늘 농부의 초대를 받아들였던 건….
‘대공님이 있어서였지.’
그러다 리엘라는 제 생각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운 대공이 있어서 안심을 했다고? 자신이? 리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하운의 옆에서 약간 멀어졌다. 하운이 그런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리엘라는 급히 말을 돌렸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조심하지 않고 따라가 버렸네요.”
“오늘은 괜찮아.”
오늘이라면 괜찮다니? 그럼 어제나 내일이었다면 위험하고?
“이미 그 집에 들어서기 전에 날붙이가 있는지, 혹시 음식에 독이 있는지 이미 확인을 끝냈으니까.”
“아, 저번에 식당에서 사용하셨던 그 보석…!”
“그래.”
하운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굵은 반지가 보였다. 밝은 햇살 아래 깊고 줄무늬가 있는 갈색 보석이 반지에 박혀 있었다.
“정찰의 재스퍼라는 이름이 있어. 가장 유용하게 쓰는 보석 중 하나지.”
이름만 들어도 언제 어떻게 사용했을지 알 것 같은 보석이었다. 그래서 리엘라는 설명을 부탁하는 대신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 거의 묘기에 가깝게 고삐를 잡은 채 몸을 일으키자 하운이 재빨리 다시 장갑을 끼어 버렸다. 그 탓에 리엘라는 아쉬움을 삼키며 다시 말 위에 바르게 앉는 수밖에 없었다.
리엘라는 마침 말이 나온 김에 예전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 보석은 어떻게 얻으신 건가요?”
“이건….”
하운이 머뭇거리면서 쉽게 말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장갑 위, 반지가 있는 곳을 계속 매만졌다. 하운이 이렇게까지 망설이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리엘라는 제가 무척 실례되는 질문을 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때 하운이 대답했다.
“…형님께서 주신 것이야. 다른 자들에게는 말하지 말도록.”
신문에서는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말했다. 국왕이 하운을 경계해 그가 어린 나이에 계승권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하운은 그런 형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서 전쟁터로 갔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나오곤 했다.
‘다 헛소문이네.’
사이가 정말로 나쁘다면 저런 보석을 줄 리가 없다.
“이건 원래 서류상으로 전하께서 갖고 계셔야 하는 보석이야. 나에게 있다는 게 알려지면 시끄러워져.”
“왜 저에게는 말해 주시는 건데요?”
리엘라의 질문에 하운은 생각에 잠기더니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나도 그대 비밀을 하나 알고 있으니 그대도 하나 알아야 공평하지 않겠나.”
“그런가요…?”
하운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엘라를 보다가 다시 제 손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말대로 원래 이것은 레이안의 손에 끼워져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레이안 역시 보석술사였다. 하운에 비하면 한참이나 재능이 부족했지만.
그는 하운이 계승권을 버리고 처음 전쟁터로 떠나기 전날 밤 몰래 찾아와 이것을 건네주었다.
“형님. 이건….”
“갖고 가. 널 살려 줄 거니까.”
“안 됩니다. 이건 국왕에게만 허락된 보석입니다.”
“안 가져간다면 난 네 출정 명령서를 태워 버릴 거야. 그리고 호화스러운 왕궁 감옥에 처박아 넣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가둬 둘 거야. 그렇게 살고 싶다면 받지 말든가.”
“…….”
“네가 왜 전쟁터로 가는지 알아. 미안하다.”
레이안은 그렇게 말하고 한참이나 하운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다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의 말대로 이것은 몇 번이나 하운의 목숨을 살렸다. 자신의 존재가 형에게 위협이 될 것을 알기에 스스로 떠나 버린 동생의 목숨을.
“대공님?”
리엘라가 부르는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린 하운은 길옆을 보았다. 풍성하게 밀이 자라고 있는 들판 옆에 잡초가 가득한 땅이 있었다. 마치 여기서부터 전혀 다른 땅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큰 저택이 보였다. 그곳을 바라본 하운이 잠시 말을 멈춰 세웠다.
“여긴….”
가까워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벌써 근처에 왔었던 건가.
“아마도 여기서부터는 다른 사람의 영지인가 봐요.”
리엘라의 말에 하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리엘라는 그의 시선을 따라 저택을 바라보았다.
언덕 위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좀 더 가까이서 보니 입구부터 풀이 무성했다. 게다가 모든 창에 나무판이 덧대어진 것을 보니 사람이 살지 않는 저택 같았다. 방치된 저택에서 시선을 돌린 리엘라는 다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조금 전에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에서 폭우도 보석의 힘을 쓴 거라고 했잖아요. 그건 어떤 보석인가요? 혹시 지금도 갖고 계세요?”
리엘라의 말에 하운은 제 품 안으로 손을 넣어 보석이 담긴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는 그중에서 아주 작은 푸른색 보석을 남기고 나머지를 다시 품 안으로 넣었다.
“폭우의 하우윈이라고 불리는 보석이야. 레드 드래곤 플레노트를 상대하며 자주 썼던 보석이지요.”
“하우윈?”
어쩐지 하운의 이름과 비슷한 보석이었다.
“일부러 부모님께서 내 이름을 이 보석과 비슷하게 지으셨어. 내가 태어나기 직전에 힘을 회복했거든. 뭔가 운명이라 생각하셨던 것 같더군.”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리엘라는 그의 손에 있는 아주 작은 보석을 보았다. 지금까지 보았던 보석들 중에 가장 그 크기가 작은 보석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본 보석들과 비교해 다른 점이 있었다.
“이 보석은 색이 왜 이런가요?”
폭우의 하우윈은 리엘라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어두운 색이었다. 단지 색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빛을 잃어버린, 마치 죽은 것 같은 느낌의 보석.
“힘이 다해서 잠들어 있기 때문이야. 조금씩 회복하고는 있지만 완전히 깨어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이고.”
하운은 폭우의 하우윈을 조심스럽게 리엘라의 손 위에 올려 주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리엘라는 오늘 아침의 일이 생각났다.
혹시나 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공작에게 선물했던 빛나는 꽃을 제 방으로 옮겨 두었다. 출발하기 전 그 꽃을 살피다가 꽃잎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원래대로라면 그것을 책이나 신문지에 넣어 말렸을 건데 시간이 없어 아깝다 생각하면서 그대로 주머니에 집어넣었었다.
혹시나 싶어 주머니를 뒤져 보았더니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막 떨어진 듯 싱싱한 꽃잎이 나왔다. 물론 여전히 반짝거리는 상태였다.
“저기… 혹시 꽃잎 하나지만 이것도 보석에게 효과가 있을까요?”
꽃잎과 함께 보석을 돌려주자 하운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이걸 나에게 주겠다고?”
“어차피 떨어진 꽃잎 하나인걸요. 게다가 그렇게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 보석이라니 되도록 빨리 회복을 할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닐까요?”
리엘라는 그 꽃잎을 조심스레 하운의 손 위에 올렸다. 하운은 제 손에 올려진 꽃잎과 하우윈을 번갈아 보다 나직이 보석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꽃잎도 보석도 천천히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서로에게서 뿜어져 나온 빛이 보석과 꽃잎을 감쌌다. 빛은 색으로 변했고 색은 다시 여러 가지 색으로 변했다. 그러더니.
파앗!
뭔가 솟아오르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색이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그것을 본 순간 리엘라는 창세 신화가 생각났다.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꽃과 보석이 되었다는 신화가. 빛과 색이 사라진 하운의 손에는 이제 빛을 잃어버린 꽃잎과 달리 영롱한 푸른빛을 되찾은 하우윈이 있었다.
“맙소사. 잎 하나로 이 만큼이나 회복이 되다니….”
하운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리엘라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아주 열심히 길렀던 꽃이었으니까요. 잘됐네요. 이제 다시 이 보석을 쓰실 수 있는 건가요?”
“가능할 것 같군.”
“그럼, 한 번만 보여 주실 수 있으세요?”
리엘라는 기대가 가득한 반짝거리는 눈으로 하운을 보았다. 호슨 공작에게 빛나는 꽃의 힘에 대해서 설명은 많이 들었지만 그걸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었기에 궁금하던 차였다.
“그러도록 하지.”
리엘라의 부탁에 하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오랜만에 빛을 찾은 하우윈이 반가웠다. 그래서 그것을 손에 올려 두고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꾸물꾸물 생겨나기 시작했다.
콰쾅!
하늘이 번쩍이더니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따라왔다. 소리가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투두둑, 하고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
하운은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비는 거세져 1분도 되지 않아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이 비인지 폭포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에 말들이 놀라서 울었다. 하운은 당황하며 손에 올려진 하우윈을 보았다. 하우윈은 저와 인연이 있긴 했지만 말을 잘 듣지 않는 보석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제멋대로 군 적은 없었다.
“대, 대공님?”
리엘라의 목소리에 하운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이 보면 물에 넣어다 빼내었냐고 물어볼 정도로 쫄딱 젖은 리엘라가 놀란 얼굴로 그와 보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운은 황급히 하우윈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쏴아아아아!
그러나 하우윈은 오랜만에 깨어난 것이 신났는지 더더욱 비를 뿌렸다. 어찌나 거센 비인지 비에 맞은 뺨이 아파 올 정도였다.
“이런….”
하운은 빠르게 체온이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리엘라 역시 어느새 입술이 파랗게 변했다. 하운은 급히 하우윈을 품에 넣었다. 신나 날뛰는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쉽게 진정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디에선가 이 비가 멈출 때까지 몸을 피해야 했다.
하운은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그들이 지나왔던 풀밭 너머에 있는 방치된 저택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