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74
78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취미 같은 건 없다. 리엘라는 벌떡 일어나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신문을 정리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 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건가. 왜 갑자기 샤를로테 공주와 자신을 비교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마지막 신문을 접을 때 ‘사실이면, 왜?’라고 묻던 하운의 모습이 떠올랐다. 리엘라는 다시 저도 모르게 입술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서로 이야기도 많이 하고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말해 줄 수도 있지 않았나 싶어 서운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누군가와 사귀는 일을 쉽게 말하고 다니는 것도 별로지 않나 싶었다.
말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하는 마음과 그래도 개인 간의 관계를 남들에게 마구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싫다는 두 가지 마음이 리엘라의 안에서 서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럴 때가 아니지.”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리엘라는 제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꽃 축제가 한 달 정도 남았다. 지금쯤이면 제 안에서 어떤 작품을 만들 것인지 이미 결정을 내리고 스케치도 끝나 있어야 하는데 스케치는커녕 여전히 무엇을 할지, 주제조차 결정하지 못했다.
‘떠오르는 게 없는 건 아닌데….’
오히려 반대였다. 그사이에 왕궁을 드나들며 모리스 경과 클로에 베넷의 작품들을 봤더니 머릿속에 영감이 샘물처럼 퐁퐁 솟아나고 있었다. 좋은 일이긴 한데 너무 솟아나다 보니 그중에 무엇을 할지 오히려 결정하기 힘들어져 버린 것이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전부 다 예쁜데!
리엘라는 제가 그려뒀던 수십 장의 스케치를 가져왔다. 도대체 이 많은 것 중에 뭘 하면 좋을까. 무엇을 만들어 전시해야 사람들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며 다들 좋아해 줄까. 그녀가 다시 스케치를 테이블 위에 펼쳐 두고 고민에 잠겨 있을 때 네아가 들어왔다.
“아가씨, 리나 양께서 오셨어요.”
리엘라는 놀라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어요?”
얼마 전, 리나에게 편지가 왔다. 가게를 잠시 수리하게 되어서 놀 수 있게 되었는데 공작저에 놀러 가도 되겠냐는 내용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당연히 어서 놀러 오라 답장을 보냈었는데 그날이 오늘이었다.
리엘라는 급히 1층으로 뛰어갔다. 현관 앞에 서 있는 리나의 모습이 보였다.
“리나!”
“리엘라!”
두 번째 방 때문에 브릭스 거리에 가지 못한 지 오래다. 그 탓에 매일 만나던 리나와 만나는 것도 무척이나 오랜만이었기에 두 사람은 얼싸안고 서로를 반가워했다.
“잘 지냈어? 가게는 어때?”
“얼굴 보면 모르겠냐. 여전히 잘 지내지. 가게도 공사 잘 끝날 것 같고 이게 다 너랑 대공님 덕분이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리나는 리엘라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검은 고양이’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하운과 리엘라의 이름을 붙인 새로운 메뉴를 제공했다. 들어보니 이미 있는 메뉴에 재료 몇 개를 더 얹고 좀 더 먹음직스럽게 꾸민 다음에 가격은 두 배를 더 받았다나 뭐라나. 그런 게 팔리겠냐 했더니 리나는 없어서 못 판다며 이런 건 비쌀수록 잘 팔리는 법이라 말했다.
도대체 그 메뉴로 얼마나 판 건지 이제 더 이상 음식값은 안 줘도 된다고 말하더니 가져오는 식사의 양도 엄청나게 늘었다. 그러다 편지에 현재의 상황을 적었다. 여전히 찾아오는 손님들은 줄을 이루고 모두들 그 비싼 메뉴를 시킨 덕분에 돈을 좀 벌었다고.
“그 메뉴가 그렇게 많이 팔렸어?”
“당연하지. 하운 대공님 메뉴하고 네 메뉴가 있는데 팔리는 양으로 치면 네 메뉴가 더 팔려.”
“팬케이크에 딸기하고 생크림 좀 올리고 샐러드랑 같이 나가는 게 전부인 메뉴가?”
“어허,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올해 수확한 중앙 평야의 밀로 만든 1등급 밀가루와 데루섬의 최고급 사탕수수로 만든 흑설탕에 아침 갓 짜낸 우유를 넣어 반죽한 팬케이크. 곁들임으로는 수도 근처 농장에서 가져오는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듬뿍 넣은 건강한 샐러드.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러면 값을 다섯 배는 더 받을 수 있어.”
“…….”
손가락으로 돈을 세는 시늉을 하는 리나의 모습에 리엘라는 말을 잃었다. 내 친구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었어….
***
리엘라는 리나를 데리고 공작저 여기저기를 안내해 주었다. 대기실, 응접실, 후원, 온실 등등…. 혹시나 하는 마음에 꽃은 네아가 치워 둔 제 방까지. 다 돌아보고 난 다음에 리나는 중얼거렸다.
“진짜 끝내준다…. 여기 살면 매일매일이 재미있겠다. 놀러 안 가도 되겠어. 후원에 계곡까지 만들어져 있을 줄은 몰랐다고!”
“좀 더 더워지면 거기서 놀 건데 올래?”
“당연하지!”
신나게 대화를 나누며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더니 어느새 네아와 멜다 부인이 간식을 준비해 둔 상태였다. 리나는 재빨리 테이블로 다가가 다과를 보더니 눈을 빛냈다.
“냄새부터 장난 아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리나라고 해요. 멜다 부인 맞으시죠? 괜찮으시면 양파랑 치즈 스콘 레시피 좀… 아야야! 이거 놔!”
“넌 또 장사할 생각뿐이지?”
리엘라가 귀를 잡아당기자 리나는 엄살을 부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 모습에 멜다 부인은 웃으면서 가기 전에 알려 줄 테니 걱정 말라 말하고 방을 나갔다. 네아 역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달라 하고는 방을 나가자 리나는 재빨리 한 손에는 스콘, 다른 한 손에는 샌드위치를 붙잡고 한 입씩 먹더니 발을 동동 굴렀다.
“와, 진짜 맛있다. 저번에 네가 우리 집 스콘이 맛있긴 한데 멜다 부인 게 더 맛있다고 했을 때 좀 울컥했거든? 그런데 인정.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맛이야.”
그 후로도 리나는 한참이나 ‘이게 맛있다’, ‘이건 어떻게 만든 거지?’ 등등 무척이나 연구적인 자세로 먹었다.
“후아….”
“이제 다 먹었어?”
“응. 조금만 먹으려고 했는데 손이 안 멈추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을 과자에서 떼지 못하던 리나는 뒤쪽 큰 테이블 위에 쌓인 신문을 보더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맞다, 저 이야기도 하려고 했었는데. 하운 대공님 정말 결혼하신대?”
“글쎄….”
한다, 안 한다, 말없이 갔으니 리엘라도 알 수 없었다.
“나도 모르지. 대공님의 일인데.”
“그래도 뭐 들은 건 있을 거 아냐.”
“듣긴 뭘 들어. 우리도 아침 신문 보고 처음 알았는걸.”
“그래? 대공님 정말로 이런 일 입에 잘 안 올리는 타입이구나….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렇게 심각해?”
“내가?”
리나의 말에 리엘라는 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응. 대공님이 결혼 선물로 보석이라도 내놓으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하긴. 결혼한다고 하셔도 좋아서 하는 것도 아닌데 선물 받고 싶겠어?”
“그건 무슨 소리야?”
“생각해 봐. 신문에서는 연애라고는 하지만 사실 하운 대공님은 플레노트가 잠든 후에 수도로 돌아오시고는 거의 움직이지 않으셨잖아. 신문에서야 뜨겁게 연애하는 것처럼 적긴 했지만 과연 그럴까? 저 나이의 사랑이 폭발하는 청년이 편지로 마음을 달랜다? 그건 그거대로 좀 무섭다, 야.”
“아니 그러니까 좋아서 하는 결혼이 아니라는 건 무슨 말이냐고.”
“모르겠어? 정말 좋아했으면 이렇게 수도에서 보석의 방이나 열고 계시지 않았을 거라고. 없는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다시 북부 전선으로 가서 샤를로테 공주를 만났을 거란 말이야. 그런데 전혀 아니잖아.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듯이….”
리나는 리엘라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국왕 전하와 왕비 전하 사이에 아직 후계자가 없어서 하운 대공님을 경계하고 있다는 거 유명하잖아? 그래서 북부로 보냈다는 말도 많았었고.”
“…….”
리엘라는 그런 게 아니라고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국왕과는 사이가 좋은 사운이었지만 왕비하고도 좋은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돌아오시니 왕궁에서는 대공님을 견제하는 움직임이 강해졌다고 하더라. 당장 깨어날 드래곤도 없으니 대공님은 계속 수도에 계실 확률이 높고… 그래서 왕실에서는 좀 더 확실하게 대공님을 멀리 보낼 방법을 찾았는데 그게 이 결혼이었다는 소리도 있어. 왜, 우리가 자주 말하던 거 있잖아. 정략결혼.”
“…….”
자주 말하긴 했다. 친구들과 함께 돌려보는 소설에 자주 나오는 소재였으니까. 그때는 재미있다고 봤는데 정작 옆에서 그런 상황을 보게 되니 재미있기는커녕 착잡한 기분만 들었다.
리나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덕분에 리엘라는 샤를로테 공주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아름답고 심성이 고와 테티아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공주라고 했다. 특히나 현재 국왕인 그녀의 오빠가 그다지 평판이 좋지 못해서 더욱 사랑받는 것이라는 것도 알려 주었다. 그 외에 샤를로테 공주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어릴 적 있었던 일 등등….
한동안 신나게 말을 쏟아 내던 리나가 멜다 부인이 새로 만든 복숭아 타르트 레시피까지 알차게 챙겨 돌아간 건 꽤나 늦은 시각이었다. 걱정이 되어서 공작저의 마차를 내줬더니 시트를 팡팡 치면서 ‘이거 최고다! 엄청 폭신해!’라면서 신나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 리엘라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의 사이드 테이블 위에는 리나가 들고 온 책들이 있었다. 원래도 소설책을 사면 다 읽고 나서 친구들에게 빌려주며 소소하게 대여료를 챙기던 리나였다. 이번에는 특별히 그냥 빌려준다나 뭐라나. 얼핏 제목과 책 소개를 봤더니 죄다 정략결혼이 주제인 연애 소설들이었다. 얘는 식당이 아니라 서점을 했어도 잘 했을 거다 생각하며 리엘라는 씻고 돌아왔다.
평소라면 자기 전에 신나게 읽었을 책들이었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책을 넘기기 싫었다.
‘어차피 다 행복하게 될 거잖아.’
정략결혼으로 서로에게 아무런 호감도 없이 결혼하고 살았지만 무엇인가를 계기로 어느 날 상대가 좀 달라 보일 것이고 그러다 시선이 가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사랑하는 사이겠지, 뭐.
언제나 재미있게 보던 내용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책을 덮고 이리저리 뒤척이던 리엘라는 말이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대공님이다!’
오후에도 연락이 없어 오늘은 왕궁에서 자고 오는 것이 아닌가 했는데 돌아오려고 연락이 없었던 모양이다.
리엘라는 겉옷을 입은 다음 아래로 후다닥 내려갔다. 현관에 도착하자 마침 말에서 내려 들어오고 있는 하운이 보였다. 왕궁에서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일까. 아침에 나갔을 때보다 어두워진 얼굴빛이 눈에 들어왔다. 리엘라는 곧바로 다가가 하운을 붙잡았다. 소매를 붙잡으려 했던 것이 갑자기 다가온 그녀의 손에 놀라 움직인 탓에 리엘라는 결국 하운의 주먹을 붙잡는 꼴이 되었다.
뭘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하운에게 리엘라는 계속 생각했던 말을 했다.
“대공님, 결혼은 좋아하는 분이랑 하셔야 해요, 꼭.”
하운은 제 손을 붙잡고 그렇게 말하는 리엘라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 주제넘은 말을 한 걸까?’
연애결혼이든 정략결혼이든 이것은 하운의 일이다. 그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자신에게 있을까? 일단 말을 하기는 했는데 후회가 몰려왔다. 그냥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는 게 나았을지도.
민망함에 리엘라가 잡았던 손을 놓으려 한 순간 하운의 손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가 허리를 숙여 리엘라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그럴 거야.”
“네?”
“결혼은… 좋아하는 사람과 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