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79
83
하운은 자신에게 질문하는 리엘라를 바라보았다. 네아가 아침에 묶어 준 것일까.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의 양쪽을 푸른색의 리본으로 묶어 놓았다. 몸에 걸친 장신구라고는 천으로 만든 평범한 리본 하나가 전부일 뿐인데 왜 이렇게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것일까. 마치 어릴 때, 왕실 보석의 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처럼 말이다.
“대공님?”
하운이 멍하니 있던 탓에 리엘라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와 다시 물었다. 그제야 하운은 정신을 차렸다. 뭐라고 했지? 왜 왔냐고?
그 질문에 하운은 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왜 왔더라…? 기억나는 것은 오전에 샤를로테 공주를 만난 일이었다.
***
카르디아와 테티아 사이의 국경선에 대한 협의가 시작되었고, 오전 내내 회의실 안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양측 간의 대립으로 팽팽하게 긴장이 곤두섰다. 결국 잠시의 휴식 시간을 갖기로 하고 하운과 샤를로테는 자리를 옮겼다.
시종들이 두 사람을 위한 다과를 준비하는 사이 하운은 방 안에 장식되어 있는 꽃들을 바라보았다. 방 안 가득한 장식을 보자마자 생각난 것은 리엘라였다.
‘오늘은 뭘 하고 있으려나?’
예전에는 잘 참는 것 같더니 최근에는 꽤 심심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제가 가면 평소보다 더 반겨 주는 것이리라. 그때 샤를로테가 말을 꺼냈다.
“무슨 즐거운 생각이라도 하시는 건가요?”
하운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계속해서 말했다.
“하운 대공께서 웃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 같아 물어봤을 뿐입니다.”
그 말에 하운은 재빨리 제 표정을 갈무리했다. 실수였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풀어진 채로 있던 적이 없었다. 외국의 협상단, 그것도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샤를로테 앞에서 이렇게 있었다니.
‘이상해.’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무슨 실수인지. 조심해야겠다며 마음을 다잡은 순간 샤를로테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하운 대공께서는 호슨 공작의 상속인이라는 리엘라 테니어와 자주 만나신다면서요? 저도 한번 만나 볼 수 있을까요?”
샤를로테의 입에서 리엘라의 이름이 나온 순간 하운은 저도 모르게 거친 목소리를 내었다.
“무슨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말이 끝나는 순간 주먹이 날아올 것 같은 험악한 목소리에 샤를로테마저도 잠시 차를 마시던 손을 멈추고는 하운을 바라보았다.
평소 표정이랄 게 없는 하운이었다. 가끔 국경에서 마주쳤을 때도 서로를 도발하는 군인들과 달리 하운은 그저 한번 흘깃 바라볼 뿐 더 관심 둘 가치도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었다. 카르디아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리엘라 테니어에 대해서 물어본 순간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이야.
샤를로테는 찻잔을 내려 두고 질문했다.
“왜 그런 반응이신가요. 제가 리엘라 테니어를 만나는 데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요?”
“…….”
대답이 없다는 것은 긍정의 표현이다. 샤를로테는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번 만나 봐야겠다. 몰래 찾아가서라도.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운이 들어오라 말하자 왕궁의 시종이 들어와 왕실 보석술사들이 찾아왔다 말했다.
“대공님! 마저 정리했습니다! 가서 이 조건들을 한 번 더 시험해 보시고 결과를 알려 주신다면 곧 공작이 건 조건들을 좀 더 확실히 특정할 수 있을 듯합니다!”
며칠간 밤을 새운 것 같은 엉망인 꼴의 보석술사가 손에 종이를 가득 든 채 흔들며 하운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하운은 잠시 실례한다는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례는 무슨.’
샤를로테는 주머니에 넣어 둔 가넷을 꺼내 몰래 손에 쥐었다. 하운은 그사이 초췌한 몰골의 보석술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호슨 공작의 보석의 방을 열려고 노력하고 있다더니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은 모양이었다.
한참 후, 하운은 건네받은 문서를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문이 닫히고 조용해지자 하운은 샤를로테에게 잠시 이것들을 봐야겠다며 양해를 구하고 혼자 문서에 몰두했다. 기회는 지금이었다.
그녀의 손끝에 아주 약한 힘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몇 번째지?’
지금까지 대략 다섯 번쯤 하운에게 가넷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눠 쓰는 힘은 천천히 독에 중독되는 것처럼 그에게 영향을 미치리라. 가넷의 힘이 발동한 것을 안 샤를로테는 가만히 하운의 변화를 살폈다. 하지만 하운은 한참이나 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문서를 살필 뿐이었다.
그러던 그가 마지막 장을 읽고는 잠시 방 안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죄송합니다, 샤를로테 대공. 오후의 협의에는 불참하게 될 것 같군요. 하지만 저 말고도 다른 카르디아의 대신들이 진지하게 협의에 임할 것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나요?”
“공작저에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군요.”
하운은 그렇게 말하며 제 손에 들린 문서를 덮었다.
“호슨 공작의 보석의 방에 관련된 문제인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같은 보석술사로서 이해합니다. 저 역시 좀 더 많은 그녀의 보석을 보고 싶은 참이니 무사히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샤를로테는 다시 찻잔을 들어 올라가려는 입가를 가렸다. 가넷을 사용할 때마다 하운은 언제나 공작저로 향했다.
‘지금 그가 제일 원하는 건 보석 같은데.’
그 보석의 힘을 왕실을 향해 쓰려 하느냐 아니냐. 그것만 알면 가넷의 힘은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중요한 협의조차 뒤로한 채 하운은 곧바로 공작저를 향해 달렸다. 나오기 전, 방에서 꽃 장식을 본 순간 리엘라가 정원 관리부에 드나들면서 함께 오갔던 기억과 그 안에서 제가 그녀의 일을 도와주었던 기억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지금이다. 하운은 왜 왔냐는 리엘라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네가 생각나서 왔다는 대답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헛소리였다. 그리고 그걸 말할 수 있을 리도 없었고. 그래서 하운은 재빨리 다른 대답을 내뱉었다.
“왕실의 보석술사들이 두 번째 방의 조건에 대해서 또 다른 걸 찾아냈어. 그걸 확인하러 왔을 뿐이야. 다른 목적은 없다. 절대로.”
이상하리만큼 딱 잘라 말하는 하운의 태도에 리엘라는 슬그머니 한 걸음 물러선 다음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이 시간에 오신 적이 없어서 갑자기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걱정했어요. 그럼 잘 보고 가세요.”
“자, 잠깐!”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리엘라의 모습에 하운은 급하게 리엘라를 붙잡으려 했다.
퍽!
하지만 그 시도는 번개같이 나타나 그의 손을 후려친 네아 덕분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게 무슨 짓일까요, 하운 대공니임?”
이마에 핏줄이 솟은 채 파들파들 떠는 네아의 말은 하운의 귀에 ‘이게 미쳤나, 무슨 짓거리야?’라고 저절로 번역이 되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네아 덕분에 갑자기 그녀를 붙잡는 무례는 저지르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네아가 꽤나 힘을 주어 후려갈겼기에 얼얼한 손을 주무르며 하운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리엘라에게 말했다.
“문을 열기 위해 다시 몇 번 시험을 할 생각이야. 특별한 일이 없다면 보석의 방에 함께 가 줄 수 있나?”
“네.”
그게 뭐가 어렵겠냐는 듯 리엘라는 앞서서 보석의 방으로 걸었다. 가볍게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머리의 푸른 리본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하운은 나비가 팔랑거리며 내려앉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퍽!
그런 하운의 생각을 멈추게 한 것은 그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든 네아의 주먹이었다. 다행히 그의 머리에 닿기 직전 하운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몸을 뒤틀어 네아의 주먹을 받아쳤다. 리엘라가 사라진 복도에서 두 사람의 주먹이 여러 번 오간 다음 둘은 한 걸음씩 물러섰다. 누군가 이 장면을 봤다면 이곳이 공작저의 복도인지 기사들의 연무장인지 알 수 없었을 움직임들이었다.
매번 제 주먹이 막히는 것이 짜증 난 네아가 씩씩거리고 있을 때 하운이 입을 열었다.
“리엘라의 옷은 전부 네가 관리하고 있나? 찾고 있는 옷이 있는데….”
“…….”
하운의 질문에 네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세상에 둘도 없는 변태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가 진짜 오늘 너 죽이고 공작님에게 간다, 개새끼야.”
당장 잡아 죽여야 할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에 하운은 네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난 그냥 연회용 흰색 드레스가 있는지 물어보려는 것뿐이다.”
그 말에 네아는 하! 하며 큰소리로 코웃음을 친 다음 대답했다.
“그걸 말이라고! 마젠타 부인의 의상실에서만 주문한 게 다섯 벌에 ‘레이디 아일리아의 의상실’에서 준비한 게 셋! 블레넌 부인에게 따로 맡긴 흰색 드레스가 두 벌 더 있지! 이것 말고도 디자인별로 열 벌은 더 만들 거야!”
보통은 처음 참석할 때나 한 번 입는 흰색의 연회 드레스는 왜 저렇게 수십 벌 준비하고 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답을 알 것 같았다. 분명 리엘라가 뭘 입고 싶어 할지 모르니 종류별로 준비해 놨다고 하겠지.
“어쨌거나 다행이군. 준비해 둬.”
“뭐? 왜? 당분간 연회는 가지도 못하실 텐데.”
네아가 물어보았지만 하운은 대답하지 않고 보석의 방으로 걸어갔다. 따라가서 걷어찰까 고민하던 네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보아하니 리엘라를 어딘가의 연회에 참석시킬 모양인 것 같았다.
‘아가씨가 연회는 가고 싶어 하셨으니 참는다.’
왕궁의 연회에 데려갈 수 있는 것은 하운뿐이니 참을 수밖에.
“그런데 역시 싫어!”
이제는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네아는 혼자 분노했다. 준비해 놓으라고? 오냐, 준비해 놓으마. 나중에 네놈이 보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것들로 준비할 테니 빠진 턱이나 맞출 각오나 하라고!
***
이틀 후, 리엘라는 정원 관리부에 와 있었다.
샤를로테가 머무르는 동안은 왕궁에 들어가지 말라 하운이 말했었지만 계속 저택에 있는 게 심심했던 차에 클로에가 괜찮으면 놀러 오지 않겠냐는 편지를 보냈고, 리엘라는 조심스럽게 하운에게 정원 관리부만 잽싸게 다녀올 테니 보내 달라 말했다. 다행히 오늘은 샤를로테 공주가 왕궁이 아닌 밖에서 일정이 있는 날이었기에 리엘라는 왕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갔건만 정원 관리부는 침울한 분위기였다.
“무슨 일… 있어요?”
리엘라가 묻자 클로에가 꽃가위를 내려놓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있었죠.”
“무슨 일인데요?”
“샤를로테 공주가 장미 장식을 전부 돌려보내라 명령했어요.”
“네? 어째서요?”
“마음에 안 드신대요.”
그 대답에 리엘라는 당황스러웠다. 장미가 마음에 안 든다고? 모리스 경과 클로에가 길러 낸 장미가?
“그럼 이거 설마 내일 갈 장식들이 아니라….”
“그래요. 오늘 새벽에 보냈다가 돌아온 것들이에요. 전부 폐기 처분해야죠.”
그 말에 리엘라는 입술을 물었다. 세상에, 이렇게 멀쩡한데 다 폐기 처분이라고? 마음 같아서는 전부 마차에 싣고 공작저로 가져가 여기저기에 놓고 싶었다. 일부러 고르고 고른 품종들이라 화형(꽃의 형태)은 물론 향기까지도 진한 잘 핀 장미들이었는데 마음에 안 든다니?
“그래서 다시 만들어 보기로 했어요. 그런데 아무 생각이 나질 않네요…. 나름대로 열심히 만든 것들인데….”
클로에가 작업 테이블 위에 엎드리자 리엘라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잠깐만 쉬고 계세요. 창고에는 제가 갔다 올게요.”
정말 힘든 것인지 평소 같으면 같이 가겠다 할 클로에는 고맙다고 작게 대답할 뿐 여전히 엎드린 채였다.
낙담한 클로에를 놔두고 복도로 나가자 끝에 있는 모리스 경의 방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샤를로테 공주가 뭘 알아! 내 장미는 최고야!”
“진정하세요, 모리스 경!”
“모리스 경 붙잡아!”
아무래도 모리스 경 쪽도 난리인 모양이었다. 리엘라는 힘없이 터벅터벅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다들 열심히 준비했는데.’
하지만 샤를로테 공주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려가 힘겹게 창고의 문을 열자 시원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리엘라는 문을 고정시켜 두고, 안에 남아 있는 꽃들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손질된 장미가 꽤 여러 종류가 남아 있어 그녀는 그것들을 종류별로 몇 송이씩 통에서 빼냈다.
“아야!”
그러다 따끔한 통증이 느껴져 손을 보았더니 찔린 상처에서 피가 방울방울 배어 나오고 있었다. 잡으려던 장미에 아직 제거되지 않은 가시 하나가 보였다. 하마터면 위험한 걸 보낼 뻔했다 생각하며 리엘라는 제 손을 보았다. 그사이 흐른 피가 손등을 타고 흘렀다.
별것 아닌 상처인데 누가 보면 놀라겠다 싶어 창고 안을 둘러본 리엘라는 마침 시든 꽃 한 송이만 담겨 있는 물통을 보고는 재빨리 손을 씻었다. 다행히 피는 더 흐르지 않았기에 리엘라는 손가락으로 따끔거리는 부분을 누르며 꽃을 안고 창고의 문을 닫았다.
리엘라가 나가고 나서 한참 후, 통에 담겨 있던 한 송이 꽃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상처 입고 색이 바랬던 꽃잎이 막 피어났을 때처럼 깨끗해졌고, 시들었던 잎도 다시 싱싱함을 되찾았다. 그러면서 천천히 빛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모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정원 관리부의 직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작업에 쓸 꽃을 고르던 직원은 통에 한 송이만 남아 있는 꽃을 보았다.
“뭐야? 누가 이렇게 좋은 걸 남겨 뒀어?”
그는 웃으면서 꽃을 집었다.
“잘됐네. 샤를로테 공주님께 보낼 장식에 이것도 넣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