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8
8
오랜만에 하운은 수도로 돌아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플레노트가 수면기에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플레노트의 기척을 확인한 다음 하운은 제 휘하의 보석술사들과 병사들을 동원해 플레노트가 살고 있는 레어의 입구를 바위와 흙으로 틀어막았다. 단단히 막혔음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수도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 왕궁의 방에 앉은 하운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 도대체 몇 명이 자신에게 달라붙어 인사를 했는지 셀 수 없었다. 그들은 죄다 제 딸을 자랑하지 못해 죽은 귀신이 붙은 것처럼 제 옆에서 떠들어 댔다. 하운 대공님, 제 여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올해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공님, 제 딸은 노래를 부르기만 했다 하면 새들이 몰려와서…. 공작님, 제 딸은 그림을….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던 그들은 말없이 차가워지는 하운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슬슬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들이 내일 또다시 제게 다가올 것을 하운은 잘 알고 있었다.
‘욕심들도 많군.’
자신은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지 오래다. 그렇다고 해서 보석술사로서의 능력, 왕의 동생인 대공작의 지위와 그에 따른 많은 것들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면 제게 달라붙는 귀찮은 자들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안정적이라 생각하며 들러붙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왕위 계승권 포기하지 말 걸 그랬나….”
“뭐야? 반역할 생각이냐?”
그때 마침 집무실로 들어온 국왕 레이안이 물었다.
“들으셨습니까?”
“응. 왕위를 노리는 거면 그냥 갖고 싶다고 말해. 난 죽기 싫으니까.”
“줘도 안 가집니다.”
“누가 들으면 왕위가 코 푼 휴지인 줄 알겠군.”
레이안의 말에 하운은 그것이 자신에게 크게 다를 것도 없다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제 형이 ‘그럼 나는 코 푼 휴지 들고 있는 거냐고!’라며 짜증 낼 것이 뻔했으니까.
레이안은 하운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오랜만에 보는 동생을 살폈다.
형제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을 가진 형과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동생. 얼핏 보면 두 사람은 형제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분위기도 달랐다.
인상 좋은 옆집 청년이 생각나는 부드러운 느낌의 레이안과 말을 붙이는 것조차 머뭇거리게 되는 서늘한 느낌의 하운.
레이안은 저와 다른 동생을 안쓰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냐? 부르기 전에는 절대로 오지 않는 녀석이.”
“플레노트가 생각보다 빨리 잠들었습니다. 이제 60년 정도 북부 전선 일대는 안정을 되찾을 겁니다.”
“그건 다행이군. 다시 북부 개발 계획을 진행시킬 수 있을 테니. 아, 그리고 너 말이다….”
“말씀하십시오.”
레이안은 짧게 대답하는 하운을 보며 망설이다 조심스레 물었다.
“결혼할 생각 정말 없냐?”
하운은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필사적으로 삼키며 말했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제 결혼이 국가 최우선 과제로 선정되기라도 한 겁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왜 여기나 저기나 자신에게 결혼 소리를 해 댄단 말인가.
“그런 건 아니지만 누구나 신경 쓰는 문제이긴 하니까. 왕비도 오는 길에 궁금하다며 물어보라던데?”
“안 할 겁니다.”
단호한 하운의 대답에 레이안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단정 짓지 마. 그러다가 좋은 아가씨 만나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네 성격을 알아서 하는 말인데 너 그러다가 한 번 빠지면 일주일 만에 결혼식까지 끝낼 놈이야.”
레이안의 말에 하운이 쓰게 웃었다. 글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주변 사람들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것을 보아 왔다. 하운은 그게 다 한심한 일로 느껴졌다. 평소에 똑똑하던 사람들도 연애를 시작하면 어딘가 정신이 풀린 사람처럼 헤실거렸다. 가끔은 세상 무너지는 얼굴로 한숨을 쉬고 가끔은 울기도 했다.
한심한 모습 그만 보이라 했더니 대공님은 사랑을 몰라요! 라며 울면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연애해 보시면 제 마음 알 거라면서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미쳤나? 연애할 일도 없고 그런 꼴을 보일 리는 더더욱 없다.
하운은 레이안에게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절대로 그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03. 떠나는 자
리엘라는 끙끙거리며 가게 앞에 놓인 큰 석판을 들었다. 아직 해가 머리 위에 떠 있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장사를 접어야 했다. 무거운 석판을 치우려 하고 있을 때, 거리의 끝에서 마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소리였다.
호슨 공작의 문장을 단 마차가 미끄러지듯 달려와 리엘라의 꽃집 앞에 섰다. 곧 문을 열고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네아 씨?”
“모시러 왔습니다, 리엘라 아가씨.”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네아였다. 언제나처럼 단정하게 하녀복을 입은 네아가 리엘라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래도 역시 아직은 좀 무서워….’
네아가 인정사정없이 카밀라를 박살 냈던 모습을 떠오를 때마다 리엘라는 네아의 눈치를 슬슬 살폈다.
그날 돌아가는 길에 공작저의 하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었다. 카밀라라는 그 여자가 이 나라에서 나름대로 유명한 보석술사라는 것을. 그런데 네아는 그런 카밀라를 조금도 다치지 않고 가볍게 제압했다.
‘그렇다면 네아도 엄청나게 강한 보석술사가 분명한데.’
그런데 왜 하녀로 살아가는 걸까? 다른 보석술사들처럼 나라에 소속되거나 따로 의뢰를 받아 일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텐데.
리엘라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네아는 싱긋 웃었다.
“지금 정리하시나 봐요? 도와드릴게요.”
“조심해요. 이거 무거워요!”
제가 든 석판을 붙잡는 네아에게 리엘라가 놀라 말했다. 제일 큰 석판인 데다가 가게 앞에 두는 것이라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일부러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밑에 붙인 것이다. 그래서 들어서 옮기기보다는 끌어서 옮기는 것이었다.
“네? 이거요?”
분명 조금 전까지 자신이 온 힘을 다해서 끙끙거리며 옮기던 석판이었다. 그런데 네아는 그것을 손가락 두 개로 가볍게 들어 올렸다.
“어디에 둘까요?”
“…이쪽에 부탁드려요.”
콧노래까지 불러 가며 별것 아니라는 듯 옮기는 네아의 모습에 리엘라는 다시 한번 그녀가 보석술사임을 깨달았다.
“그건 무슨 보석의 힘이에요?”
“네? 아, 이거요? 이건 보석의 힘이 아니에요. 제가 원래 힘이 좀 세서요.”
“…….”
리엘라는 지난주에 공작의 후원에서 봤던 네아의 모습이 생각났다. 네아는 높은 나무 위로 한 번에 뛰어올랐다. 그때는 ‘제가 원래 높이 잘 뛰어요.’라고 했던가.
네아가 남은 무거운 것들을 옮기는 사이 리엘라는 남은 꽃들을 정리했다. 재빨리 정리를 마친 두 사람이 마차에 오르자 마차는 빠른 속도로 공작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리엘라가 공작저에 드나든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 짝이 없던 네아의 시중도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익숙해지고 있었다. 사실, 호슨 공작과의 인연은 그날의 티 파티가 끝일 거라 생각했다. 왜 자신의 꽃을 비싸게 샀는지 알려 주었고 자신을 어떻게 할 생각이 없다고 했으니 그걸로 공작이 자신에게 볼일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지.’
리엘라는 제가 처음 방문했던 날의 일을 떠올렸다. 그날 공작은 자신의 저택에 있는 정원과 온실을 보여 주었다.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그곳을 관리하는 정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공작과 함께 온 리엘라에게 새로 들어온 꽃들에 관심이 있냐며 온갖 희귀한 식물들을 보여 주었다.
정말로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았다. 꽃 도감에서나 보던 꽃들이 온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황송하다는 눈빛으로 꽃들을 보고 있을 때 온실의 담당자가 리엘라와 공작에게 말했다.
“저 멀리 북쪽에서 새로 들어온 꽃이 있는데 영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군요. 아무래도 이곳에 오는 사이에 많이 상한 모양입니다.”
“저런, 안타깝군.”
“아무래도 이 녀석은 꽃을 피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포기하고 새로 사 오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아쉽지만 포기하는 것이….”
“그럼 그 꽃 저 주세요!”
포기한다는 말에 리엘라는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온실의 담당자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카르디아에서는 귀한 꽃이었다. 왕실 식물원에서만 보았던 꽃. 그 그림을 보면서 언젠가 한번 직접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포기하다니? 조금 시들고 잎들이 떨어지긴 했지만 아직 포기하기에는 일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걷다가 다리가 아파 올 정도로 넓은 공작의 정원과 온실에는 미처 다 돌보지 못하는 꽃과 나무들이 많았다. 담당자는 시들한 꽃과 나무를 볼 때마다 ‘버릴까요?’라고 말했고, 공작은 ‘마음대로 하게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리엘라는 ‘저 주세요!’를 외쳤다.
온실을 다 돌았을 때, 리엘라가 가져가야 화분은 수십 개가 되었다. 당연히 들고 갈 수 없었고 가져간다 하더라도 놓을 자리가 없었다.
이야기는 어느새 리엘라가 그 꽃과 나무들을 매일 찾아와서 돌보는 걸로 끝났다. 호슨 공작에게 선물한 꽃이 계속 빛을 간직한 채 잘 자랄 수 있도록 보살필 사람도 필요했고. 제가 맡게 될 진기한 식물들에 감격한 탓에 리엘라는 자신의 뒤에서 온실의 담당자와 공작이 서로 눈을 찡긋거리는 것은 보지 못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택으로 돌아온 리엘라는 연신 호슨 공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꽃을 선물해 준 것도 고마운데 매일 와서 살펴 주기까지 하겠다니. 게다가 다른 식물들도 돌봐 주겠다는데 감사하다는 말은 내가 해야 할 것 같아.”
“아니에요. 저런 귀한 식물들을 돌볼 수 있는 데다가 오래 일하신 분들의 조언도 들을 수 있는 기회라니! 게다가 이렇게나 넓은 온실에서! 제가 돈을 드려야 마땅한 일이에요!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리엘라는 쉽사리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공작은 그런 리엘라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간단한 일 하나만 좀 도와주겠나?”
“네!”
리엘라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호슨 공작은 테이블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손가락에 힘도 없고 눈도 침침해서 편지를 쓰기가 영 힘이 드는군. 괜찮다면 편지 좀 대신 써 줄 수 있겠나?”
***
수도에서 다시 북부 전선으로 돌아온 지 이틀째, 하운은 호슨 공작의 편지를 받았다.
‘설마 또 이상한 편지를 보낸 건 아니겠지.’
저번에 보낸 편지가 신경 쓰여 공작저에 잠시 들러 호슨 공작을 만나고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왕궁에서의 일이 시간이 걸린 탓에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왜 그런 편지를 보냈는지 물어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하운은 저번 편지는 다른 자에게 갈 것이 잘못 왔던 것이리라 생각하며 편지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곧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응?”
크고 거침없던 호슨 공작의 필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곳에는 작고 동글동글한 글씨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