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82
86
“어….”
“아….”
지금 무슨 상황인지를 깨달은 두 사람은 얼빠진 소리를 내며 움직이지 못했다. 당혹스러움에 사고도, 행동도 정지된 것일까. 리엘라는 하운의 얼굴을 보다가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을 알았다. 얼굴을 보나 싶었는데 그의 시선이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갔다. 리엘라의 시선도 그를 따라 고개를 내렸다.
‘목…?’
목인가 싶었는데 그 아래에 윗부분이 훤히 드러난 제 가슴이 보였다.
당연히 모두 벗은 것은 아니다. 다행히 속옷 위에 얇은 슬립 하나는 입고 있었다. 그렇기에 맨몸을 보인 것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움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깨달은 순간 리엘라는 입을 벌렸다.
“으아…!”
이상한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하운이 방 안으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이젠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지금 리엘라가 인지할 수 있는 사실은 자신이 속옷만 입고 있다는 것과 같은 공간 안에 하운이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그것만으로도 이미 리엘라의 정신은 혼미해졌다.
왜 들어왔지? 하운은 왜 방으로 들어온 거야? 안으로 들어온 그를 따라 뒤로 돌아선 순간 펄럭,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
가볍고 부드러운 것이 리엘라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곧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침대 시트?’
어쨌거나 몸을 가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재빨리 제 위로 떨어진 시트를 움켜쥐고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시트 사이로 머리를 빼냈다. 흰색의 애벌레가 된 기분으로 고개를 내밀자 어느새 후다닥 뒷걸음질 쳐 벽에 붙어 있는 하운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돌린 채 더듬더듬 말했다.
“아니, 난! 보려고 본 게 아니라! 난 그냥 목걸이가! 아니, 그러니까….”
보석의 방에서 무한의 스피넬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에도 당황하기는커녕 무서울 정도로 침착하던 하운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목걸이요?”
그가 더듬거리던 말을 듣던 리엘라는 갑작스럽게 나온 단어를 되물었다. 목걸이라니? 갑자기 무슨 목걸이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제 목을 더듬거리던 리엘라는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옷 입어야 하는데!’
하필 옷장은 하운의 뒤쪽에 있었다. 정신없는 가운데 반대편 침대 위에 옷을 벗어 두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것이라도 입어야 한다는 생각에 몸을 돌려 걸으려고 한 순간 발이 시트의 끝자락을 밟았다.
“으악!”
시트에 돌돌 말린 꼴이었기에 허우적거리지도 못한 채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려고 하는 순간, 하운의 팔이 리엘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온몸을 감싸는 느낌에 리엘라는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처음 만났던 날, 그때도 하운은 네아를 죽이느니 마느니 하며 자신을 이렇게 끌어안았었다. 그때 어떻게 했더라? 분명 앞뒤 안 가리고 손에 들려있던 화분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냅다 그에게 집어 던졌다. 아마 그때 할 수 있다면 얼굴에 집어 던졌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
리엘라는 버둥거리지도 않은 채 하운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민망하고 부끄럽다. 하지만 싫은 것은 아니다.
리엘라를 갑자기 붙잡은 탓에 하운의 몸이 살짝 휘청였다. 그러다 그의 몸이 근처에 있던 서랍장에 부딪혔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리엘라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서랍장 위에 올려 둔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내 꽃들!”
리엘라의 외침에 하운 역시 고개를 돌렸다. 서랍장 위에는 두 개의 화분이 있었다. 그가 넣어두라고 했던 것들이었다. 빛나는 노란색 꽃을 보던 하운이 시선을 옆으로 돌린 순간 그가 놀라 리엘라에게 말했다.
“엘피안도 빛나게 된 건가? 언제부터?”
“…며칠 되었어요.”
“왜 말하지 않았어?”
“그게 아직 빛이 약해서….”
“그래도 이런 건 말을 해 줬어야지.”
탓하는 것 같은 하운의 말에 리엘라는 톡 쏘아붙이고 말았다.
“하지만 엘피안도 노란 꽃처럼 더 빛나게 되면 말씀드리고 싶었단 말이에요! 그래야 더 좋아하실 테니까요. 그렇게 만들어서 드리고 싶었고요!”
“왜?”
“왜긴요. 대공님 좋아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그렇죠!”
그 말을 들은 순간 하운은 제가 안고 있던 리엘라를 빙글 돌려 다시 안았다. 덕분에 그와 리엘라는 똑바로 마주 보게 되었다. 하운은 제 고개를 숙여 리엘라의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가져갔다.
“지금 뭐라고 했지? 다시 말해 줘.”
리엘라는 갑자기 다가온 하운의 얼굴에 숨을 삼켰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 짙은 푸른 눈동자가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수가 생각나는 고요한 눈동자다. 하지만 그 깊은 곳에 언젠가 보았던 거대한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은 느낌에 리엘라는 숨을 죽였다.
하운이 이상하다. 왜 갑자기 이렇게 가깝게 다가오는 걸까. 최근 며칠간은 유난스레 자주 찾아온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었는데 이제는 어느새 오늘 하운은 언제 올까 기다리는 자신이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리엘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시 리나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너 대공님 좋아해?”
리엘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떡하지? 그런가 봐.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하운 대공님! 어디 계십니까!”
하운을 찾는 목소리에 두 사람은 정신을 차렸다. 즉, 지금 어떤 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는 소리다. 리엘라는 으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꿈틀거리더니 하운의 품을 굴러 벗어났고 하운 역시 놀라 그런 리엘라를 놓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사이에도 여전히 밖에서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운은 고개를 돌리고 리엘라에게 말 했다.
“이, 일단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밖에서 급히 찾는 것 같으니!”
하운은 허둥지둥 리엘라의 방을 나왔다. 복도의 끝에서 그를 찾고 있던 자가 하운을 보더니 소리쳤다.
“보석의 방 두 번째 문이 열릴 것 같습니다!”
***
하운은 서둘러 달렸다. 실내에서 뛰면 안 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예의지만 지금 하운에게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모두가 들소처럼 복도를 미친 듯이 질주하는 하운의 모습에 급히 뒤로 물러섰다. 번개같이 지나가긴 했지만 붉게 물든 그의 얼굴은 누구나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의 뒤에서 소리치며 보석의 방을 향해 달려오는 보석술사들을 보고 저택의 하인들은 드디어 꽤 시간이 걸리고 있던 두 번째 문에 뭔가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렇게 하운이 흥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하지만 보석의 방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하운의 머릿속에는 온통 다른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선물했던 꽃. 보석술사들이 저택들을 드나들면서 혹시나 누가 볼지 몰라 위험하니 치워 두라고 했지만 내심 자신도 그 꽃을 볼 수 없어 섭섭했던 것은 사실이다. 호슨 공작에게 선물했던 화분만큼, 제가 선물한 것을 아껴 준다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느껴지는 만족감이 좋았다. 하지만 그러면서 아쉬움도 느꼈다.
호슨 공작에게 주었던 화분은 날이 갈수록 더 강하게 빛났는데 제가 선물한 화분은 그대로였으니까.
그런데 조금 전, 하운은 빛을 머금은 엘피안 꽃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선물 받았으니까 열심히 길렀다 말하는 리엘라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멋대로 해석하며 기대하지 말라고 스스로 되뇌고 있지만 하운은 제 뺨이 아플 정도로 욱신거리는 걸 느꼈다. 아무리 억누르려고 해도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가 보석의 방 앞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대공님이 왜 저런 표정이시지?’
그들은 평생 하운의 무뚝뚝한 표정만을 보아 왔던 사람들이었다. 그 외에 그들이 알고 있는 표정은 짜증을 낼 때나 화를 내는 것이 전부였기에 그들은 하운이 웃는다는 걸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두 번째 문이… 어떻게 되었다고?”
뺨이 씰룩거리며 입꼬리가 내려갔다 올라갔다를 반복한다. 얼마나 얼굴에 힘을 주고 있는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무서워!’
보석술사들과 저택의 하인들은 이젠 기괴해 보일 지경의 하운에게서 재빨리 멀어졌다.
“저렇게 좋으실까.”
뒤에 서 있던 보석술사들 중 한 명이 옆에 있는 동료에게 속삭였다. 며칠 전부터 왕실의 보석술사들이 노력한 끝에 문을 열기 위한 조건이 대부분 밝혀졌다. 그렇기에 오늘 다시 조건에 맞는 사람들을 모아 시도해 보았더니 문은 당장이라도 열릴 듯 흔들렸다. 그래서 하운에게 곧 열릴 것 같다고 전하라 했더니 그가 저런 표정으로 뛰어온 것이다.
‘나름 무던한 척하시더니….’
리엘라 테니어에게 호슨 공작의 보석을 빼앗기고 나서 생각했던 것만큼 큰일은 없기에 그가 나름 보석에 대한 미련을 버렸던 것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가져다주신 문서대로 조건을 맞춰 다시 실험해 봤습니다. 이제 거의 열렸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하운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마음 같아서는 두 번째 문이고 뭐고 다시 이대로 리엘라의 방으로 돌아가 조금 전에 했던 말 한 번만 다시 말해 주면 안 되냐 묻고 싶었다.
‘그러면 왜 안 되는 거지?’
문득 의문이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가 왜 하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원하는 대로 하고 싶다. 원하는 것을 갖고 싶고. 최근 들어서 더욱 제 안에서 그런 생각이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리엘라가 보고 싶으면 일정이 있어도 곧바로 공작저로 찾아오지 않았던가. 예전의 자신이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왜 지금껏 이렇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공님?”
그가 가만히 있자 보석술사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그들의 모습에 하운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겼다. 시트만 두른 채 저를 보던 리엘라의 모습이 생각났다. 지금 돌아가면 계속해서 그 모습이 생각날 것 같았다. 그러면 진심으로 제가 무슨 짓을 할 것 같기도 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리엘라에게 해를 끼치거나 그녀가 겁먹을 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하운은 그냥 보석의 방에 남아있는 쪽을 선택했다. 어차피 두 번째 문도 살펴보아야 했고.
보석의 방 안쪽으로 들어가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그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서 있었다.
언제나 하운 혼자만 있던 보석의 방에 사람이 이렇게 늘어난 지는 꽤 되었다.
‘고약한 노인네 같으니.’
두 번째 문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본 순간 하운은 다시 마음속으로 호슨 공작을 향해 험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와 왕실의 보석술사들이 달라붙어 두 번째 문에 걸려 있는 보석의 힘을 분석한 결과는 황당함 그 자체였다.
처음 알아낸 조건은 머리카락 색이었다. 검은색, 붉은색, 갈색 등등. 그렇기에 리엘라와 네아가 밀었을 때 문이 흔들린 것이다. 그 조건에 해당되는 사람들이었기에. 물론 자신은 제외였지만.
조건은 그것 하나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성별, 나이, 직업까지 온갖 조건이 겹쳐 걸려 있었다. 그 때문에 하운은 백발의 여자 보석술사와 붉은 머리카락의 여섯 살 소년과 검은 머리카락의 피아노를 치는 중년의 부인을 찾아다녀야 했다. 그 외에도 조건에 맞는 사람은 수십 명이 더 있었다.
조건만 안다면 그저 사람들을 데려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결국 하운은 인정해야만 했다. 그의 혼자 힘으로는 전혀 접점이 없는 사람들을 한날한시에 불러들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레이안이나 레티시아에게 도와 달라 할 수도 없었다.
전쟁터에서 나름대로 알고 지내던 자들은 이미 고향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이런 탓에 평소에 별다른 교류가 없었던 왕궁의 사람들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왕실의 보석술사들은 일부러 되도록 접점이 없게 만남을 피하던 하운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부탁하면 그들이 탐탁지 않아 할 것이 분명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하운은 몇 번이고 그들에게 말을 걸고 부탁하는 것을 망설였다.
지금까지처럼 혼자서도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뜻밖의 벽을 만나 막막했다. 좀처럼 마음을 먹지 못하던 하운은 결국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곳까지 미룬 뒤에야 왕실의 보석술사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하운의 부탁을 듣고서 그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역시나, 그동안 혼자 잘난 척한다 생각했던 것일까.
하운이 힘들면 괜찮으니 다른 이를 찾아보겠다 말하려 하는 순간 그들 중 가장 나이 지긋한 보석술사가 조금 감격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었다.
“대공께서 저희들에게 뭔가 도와 달라 하시는 것, 처음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