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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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공작저를 찾아온 루시안은 마중 나온 네아에게 당황스러운 얼굴로 물어보았다.
“왜요?”
“밖에서 보는데 여기만 먹구름이 끼었더라고 좀 더 있으면 비도 내릴 기세야. 게다가 들어왔더니 다들 축 늘어져서 반쯤 죽은 얼굴들이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
분명 그가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호슨 공작이 세상을 떠난 직후에야 검은 천을 내걸고 조용했던 공작저였지만 얼마 있지 않아 그 침울함에서 벗어났다. 당연히 그것은 리엘라 덕분이었다.
주방에서 만났던 멜다 부인은 멀리 온실로 뛰어가는 리엘라를 보며 아가씨가 없었다면 자신들은 주인이 없는 저택에서 조용하게만 살았을 거라 중얼거렸다. 공작저의 사람들은 세상의 예상과 달리 공작이 인정한 상속인인 리엘라를 공작의 딸처럼 아끼고 챙겼다. 그것은 그들에게 노동이 아닌 즐거움이었다.
그 모습에 루시안은 호슨 공작이 리엘라를 공작저에 있게 한 이유 중에 하나가 저택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것도 알았다.
어쨌든 리엘라가 있는 한, 공작저는 언제나 밝고 활기찼다. 그런 공작저가 이런 모습이라는 것은 리엘라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 질문을 바꿀게. 누가 저택에 왔었어?”
***
퍽. 퍽.
무언가를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온실 안에 울렸다. 그리고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도 함께였다. 과격한 소리들은 전부 리엘라의 손이 만들어 내고 있었다.
리엘라는 사다리를 타고 거대한 철골 조형물 옆에 서서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퍽퍽 때리는 소리는 촘촘하게 짠 철망 안에 뭉친 지푸라기를 넣은 다음 이끼를 집어넣으면서 생기는 소리였다. 손으로 꾹꾹 눌러 집어넣은 다음, 안쪽에서 다시 평평하게 퍼지기 위해 주먹으로 때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끼를 까는 작업이 끝난 다음에는 여기저기 꽃을 꽂아 넣는 일이었다. 평소보다 더욱 시원시원한 가위질이었고 리엘라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사다리의 아래에는 잎과 줄기들로 산이 만들어졌다. 리엘라가 열중하고 있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멜라니아 로헴의 제자가 되기로 결정이라도 한 건가요?”
“으앗!”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리엘라가 몸을 허우적거렸고 그 탓에 그녀가 올라가 있던 사다리도 흔들렸다. 루시안은 놀라 흔들리는 사다리를 붙잡았다. 다행히 재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리엘라는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미안해요, 많이 놀라게 했네요. 다치지는 않았죠?”
“괜찮아요.”
리엘라의 대답을 들은 루시안은 고개를 들어 리엘라가 작업하고 있던 것을 보았다. 철로 만들어진 뼈대는 보기만 해도 어떤 형태를 의도했는지 알 수 있었다.
“곰인가요?”
리엘라가 작업하고 있던 것은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곰 장식이었다. 사실 장식이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거대한 조형물에 가까웠다. 그 크기 때문에 보통 꽃 축제가 열릴 때를 제외하면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귀족가에서 큰 행사를 할 때 이따금 보이긴 했지만.
워낙에 큰 탓에 작업할 공간도 넓게 필요했으며 필요한 재료도 많았고 무엇보다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어서 작업비도 다른 의뢰에 비해 몇 배나 비쌌다.
‘그걸 혼자 하고 있다니.’
게다가 꽃은 아직 싱싱한 채였다. 상태를 보아 하니 작업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을 텐데 거대한 장식은 이미 절반 가까이 완성되었다. 리엘라 혼자 이것을 만들었다면 도대체 손이 얼마나 빠른 건지.
그 속도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그보다 루시안의 눈길을 끄는 것을 꽃을 장식한 방식이었다.
리엘라는 언제나 부드러운 느낌의 장식을 만들었다. 그렇기에 사용하는 꽃의 색도 아주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거대한 곰을 장식한 꽃의 색깔을 보면….
“사람 잡아먹은 곰입니까?”
“네?”
“…아닙니다. 평소와 다르게 과격한 색을 많이 쓴 것 같아서요. 그래서 멜리니아 로헴의 제자가 되기로 한 거냐고 물어본 겁니다.”
루시안의 말에 리엘라는 잠시 제가 만든 것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루시안의 말대로 평소에 잘 쓰지 않았던 짙은 원색의 꽃이 장식에 가득했다. 특히나 붉은색은 진한 핏빛의 장미를 사용했더니 잘못 보면 뭔가를 잡아먹고 즐거워하는 곰으로 보일 정도였다.
‘내가 이런 걸 만들었나?’라는 듯한 표정으로 리엘라가 멍하니 서 있자 루시안은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저번에 부탁했던 보석들의 배송은 완전히 끝냈습니다. 여기 서류 가져왔습니다.”
“네.”
“작은 문제가 몇 번 발생하긴 했지만 보석 자체에 문제는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보석의 방에 오래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신나서 조금 폭주한 것 같으니까요.”
“네.”
기계적인 대답에 루시안은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그 보석들 중에 몇 개는 내가 팔았어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답한 리엘라는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팔아? 뭘?
놀란 리엘라가 고개를 돌리자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루시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제대로 안 듣고 있었군요.”
“아… 죄송해요.”
리엘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실례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그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리엘라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샤를로테 때문이야.’
그녀가 돌아간 이후로 계속 그녀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돌았다. 뭐라고 했더라? 하운과 그녀가 곧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할 것이 있다고 했던가? 그러니 꼭 그 자리에 참석해 달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다시 가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리엘라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다시 잔뜩 골이 난 표정이 되자 루시안은 들고 왔던 서류를 다시 가방에 넣고 말했다.
“오늘 별일 없지요? 잘 됐네요. 저랑 같이 놀러 나갑시다.”
뜬금없는 루시안의 말에 리엘라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자, 어서 꽃가위 내려놓고 옷 갈아입고 와요.”
“아니, 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구요. 지금 보니 아무래도 기분 전환이 필요해 보여서 하는 소립니다. 네아! 네아, 거기 있지?”
루시안은 빼앗듯이 꽃가위를 리엘라의 손에서 빼앗고 소리쳤다. 당연히 온실에 둘만 놔둘 리가 없던 네아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재빨리 달려나왔다.
“르뷔티아 거리로 갈 거야. 잘 부탁해.”
르뷔티아 거리라는 말에 리엘라는 눈이 커졌고 네아는 즐거운 표정이 되었다. 그곳은 수도에서도 가장 비싸고 화려한 가게들이 가득 있는 거리였다.
그렇잖아도 샤를로테가 돌아간 다음에 우울해져 있는 리엘라였다. 리나를 불러올까 물어봐도 됐다고 하고 밖에 나가자고 해도 네아를 귀찮게 할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더니 어제부터는 갑자기 이런 곰 같은 거대 장식물을 만드는데 미친 듯이 몰두하고 있었고.
그런데 루시안이 강제로라도 데려간다 하니 네아는 말리기보다는 열심히 응원해 주고 싶었다.
‘게다가 그 동안 사 두었던 옷과 장신구들도 써 봐야 하거든!’
네아는 한껏 꾸미고 공작저에 왔던 샤를로테를 떠올렸다. 누가 공주 아니랄까봐 이것저것 예쁜 걸로 많이도 걸치고 왔다. 하필 그때 리엘라가 작업복을 입고 있던 것을 보고 가장 땅을 쳤던 사람이 네아였다. 우리 아가씨도 예쁜 옷 많아! 장신구도! 보석도 너보다 많다고!
“후후후, 이리 오세요. 아가씨.”
“네, 네아?”
“그날의 억울함 제가 오늘 풀고야 말겠어요. 어서 가죠!”
“자, 잠깐만! 꽃 정리해야 하는데!”
“그건 루시안 님이 알아서 하실 거예요. 그렇죠?”
“걱정 말고 어서 가 봐.”
“들으셨죠? 오늘 각오하세요.”
네아는 리엘라를 거의 안아 들다시피 하고는 저택으로 총총 사라졌다.
***
한 시간 후, 리엘라는 완벽하게 차려입은 채 마차에서 내려 르뷔티아 거리를 바라보았다.
수도에서도 가장 고급스러운 거리로 유명한 곳이었다. 예전에 리나와 함께 구경하러 돌아다녔을 때, 가진 돈으로는 쇼윈도에 있는 옷의 단추 한 개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풀죽었던 곳이기도 했다.
물건을 파는 가게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의 식당들은 물론 카페도 손이 덜덜 떨릴 정도의 가격이었다. 그래도 온 김에 먹고는 가 보자 해서 크게 마음먹고 들어갔는데 먹기는커녕 실내 구경도 하지 못하고 나왔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했으니까.
“네아가 그러는데 요 며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서요?”
그랬던가? 생각해 보니 멜다 부인이 놀라며 왜 이것밖에 먹지 못했냐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러니 일단 식사부터 하지요.”
루시안은 리엘라를 고급스러운 가게 안쪽으로 이끌었다. 손님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린 직원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예전에 리나와 왔을 때처럼 예약하지 않아서 곤란하다는 말을 들을 게 분명해 루시안의 옷을 잡았다.
“루시안 님. 이런 가게는 예약….”
“창가 자리로. 두 명 부탁해.”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루시안 님.”
리엘라의 걱정이 무색하게 직원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다음 두 사람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상하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리엘라가 루시안의 옷을 붙잡은 손이 머쓱해져서 슬그머니 내려놓자 루시안이 알겠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래봬도 원탁회의 의장입니다. 이런 가게들이 따로 빼 둔 자리를 바로 받기에는 무리 없는 위치지요.”
루시안은 그렇게 말하더니 눈을 살짝 찡긋거렸다.
“사실 이런 혜택을 받고 있어서 의장직을 그만 두기 싫다니까요.”
자칫하면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루시안은 언제나 적당히 장난기를 섞어 말을 했기에 그런 말들이 결코 불쾌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직원이 안내해 준 자리는 누가 보아도 식당에서 가장 좋은 자리였다. 빛이 너무 눈부시지 않을 정도로만 빛이 들어오면서 르뷔티아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다른 손님들도 멀찍이 떨어져 있었기에 사적인 대화도 편하게 나눌 수 있었다.
잠시 후, 직원이 음료수와 식사의 메뉴판을 들고 왔다. 식사는 그런대로 알 수 있었지만 음료수의 이름들은 하나같이 리엘라가 잘 모르는 것들뿐이었다.
‘타흐만 해변의 석양이라고만 적혀 있으면 무슨 맛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필사적으로 제가 아는 음료수가 없나 끙끙거리며 찾고 있자 루시안이 물었다.
“괜찮다면 제가 추천해도 될까요?”
“네, 부탁드릴게요.”
어차피 이거나 저거나 다 모르니 차라리 루시안이 추천해 주는 것을 마시는 것이 속 편할 것 같았다. 그가 처음 듣는 이름의 음료수를 주문하자 곧 분홍색과 주황색이 섞인 채 과일이 잔뜩 올라간 시원한 음료수가 나왔다.
“맛있어요!”
“그렇죠? 그런 과일이 들어간 것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시켰는데 정답이네요.”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같이 꽃 가게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인데. 당신이 뭘 좋아하는지 정도야 당연히 알고 있지요.”
“어… 그렇군요.”
루시안의 말에 리엘라는 어쩐지 목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언젠가 네아가 루시안은 사람들을 대하는데 능숙하다고 하더니 정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하고 상큼한 맛에 리엘라가 만족하며 마시는 것을 본 루시안이 웃으면서 턱을 괴었다.
“사실 오늘 이렇게 나온 건 당신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입니다.”
“제게요? 뭘요?”
“꽃 축제의 연회가 이틀 후인 건 알고 있나요?”
당연히 알고 있다. 샤를로테가 간 이후로 계속 신경을 쓰고 있으니까. 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시안이 자세를 바로하고 정중하게 물었다.
“그 날, 나와 함께 참석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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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지만 전 아직 연회에 참석할 수가… 대공님께서….”
당황한 리엘라가 더듬더듬 대답하자 루시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대공님께서 참석하지 말라 하셨던 거군요.”
“…….”
리엘라는 예전 하운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꽃 시장에 가고 가게에 나가는 것도 언제나 자신과 함께가 아닌 이상 안 된다고 말하던 하운이었다. 일반적인 외출도 언제나 네아와 함께 가라 했었고 다른 보석술사들을 만나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면서 그들이 참석할 확률이 높은 연회도 가지 말라고 했었다.
그 사실에 대해 딱히 불만은 없었다. 하운이 오히려 귀찮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자신을 호위해 주고 있는데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투정을 부릴 수는 없었으니까.
리엘라가 부정하지 못하자 그는 못마땅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무슨 이유로 하운 대공께서 공개적인 행사의 참석을 막은 겁니까?”
“아무래도 안전상 어쩔 수 없다고 하셔서….”
“그건 당신이 상속받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었지요.”
루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카르디아 안에서 당신을 위협할 사람들은 없습니다. 호슨 공작이 후원하고 있던 사업은 물론 영지민들의 생활도 공작의 생전과 다름없이 안정적이니까요. 게다가 보석들 또한 원래 대여해 주고 있던 사람들에게 대부분 돌아간 덕분에 평판도 문제없고.”
루시안은 처음 리엘라가 나타났을 때를 떠올려보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 역시 호슨 공작의 상속인으로 처음 보는 여자가 나타났을 때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하다못해 보석술사라면 자신들 몰래 후계자로 키운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라도 할 텐데 보석술사가 아닌 정말로 평범한 여자라니. 게다가 평범하게 수도에서 살 뿐, 호슨 공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리엘라에게 접근했다. 차라리 어느 귀족가의 영애라면 괜찮을 것을, 평범한 사람이 엄청난 것을 받았다. 아무리 호슨 공작이 미리 변호사들에게 많은 지시를 내려놓았다고 해도 결국 리엘라 테니어가 갑작스럽게 쥐게 된 부에 취해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었지.’
당장에 브릭스 거리를 떠나 모든 관계를 정리하고 공작저로 들어온 다음 평생을 호사스럽게 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엘라는 다시 브릭스 거리로 갔다.
일찍 일어나고 일을 하며 만나던 사람들을 만났다. 사는 곳과 먹고 입는 것이 바뀌었지만 리엘라는 여전히 자신의 삶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을 바꿀 수는 없다는 듯이.
어쨌거나 이제 리엘라가 외부 활동을 자제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부터는 더욱더 활발하게 하는 것이 그녀의 미래에 좋을 일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공작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어.’
루시안은 그런 하운의 태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전의 문제가 아니라면, 하운이 리엘라의 활동을 막아서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이유라고 추정되는 것들은 전부 하운의 개인적 이익을 위한 이유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점점 표정이 굳어가는 루시안을 보며 리엘라는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루시안 님이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분명 하운이 자신을 억압하며 다른 보석술사나 귀족들과의 교류를 막아 보석을 독점하려 한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진짜 이유를 말할 수도 없고.’
하지만 루시안이 오해를 하고 있다고 해서 빛나는 꽃에 대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루시안이 조금 전에 한 말이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꽃 축제 연회에 가고 싶지 않습니까?
가고 싶지 않을 리가 있나. 몇 번이나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연회에 나올 희귀한 꽃과 나무가 아니더라도 연회는 리엘라가 오래 전부터 동경하던 것이었으니까.
어릴 적에는 엄마의 옷장에 있는 긴 드레스를 몰래 꺼내다 입고 언니들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흉내를 내며 놀았다. 크고 나서는 리나를 만나고 그녀가 귀족들의 생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 주었기에 그 상상이 더욱 구체적이 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이었다. 언젠가는 꼭 한번 직접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경험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연회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은 단지 그것들 때문만이 아님을 스스로가 알고 있었다.
‘신경 쓰여.’
연회 날, 하운과의 일을 발표할 것이 있으니 꼭 참석해 달라는 샤를로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런 연락이 없는 하운도.
물론 근신중이라고 하니 그의 이름으로 어떤 연락도 보낼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섭섭한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동시에 자신 만만하게 말하던 샤를로테의 모습을 떠올렸다.
‘연회에서 뭔가 알려질 것이라고 했지.’
리엘라의 안에서 자신을 안고 눈을 마주치던 하운과 자신 만만하게 국혼이 있을 거라 돌려 말하던 샤를로테의 모습이 번갈아 떠올랐다.
‘기다리기 싫어.’
이번 연회에서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게 될 것이다. 리엘라는 공작저에 앉아서 가만히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보다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리엘라는 루시안에게 말 했다.
“저, 연회에 참석할게요.”
***
“정말로요? 정말가시는 거예요?”
공작저로 돌아온 다음에 리엘라는 곧바로 네아에게 루시안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네아는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곧 신난다는 듯 리엘라의 손을 꼭 잡고 눈을 빛냈다.
“잘 하셨어요! 정말로요! 그럼요! 얼마나 가고 싶어 하셨는데 가셔야지요!”
누가 보면 참석하는 사람이 리엘라가 아닌 네아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그녀는 제 일처럼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 역시… 하운 대공님 말을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샤를로테 공주도 별 일 없으셨잖아요. 어차피 빛나는 꽃이 바로 피는 것도 아닌데 연회 참석하는 정도로 뭐가 문제겠어요.”
네아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 역시 처음에는 하운과 마찬가지로, 아니 하운 이상으로 리엘라의 신변에 날을 세워 경계했다. 하지만 빛나는 꽃이 손만 댄다고 갑자기 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갑자기 찾아와 만나게 된 샤를로테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리엘라가 갖고 있는 힘이 모두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평생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귀족은 아니더라도 레이디의 칭호를 갖고 있으며 사람들과 교류를 해야 하는 리엘라였다. 이런 식으로 계속 사람들과 멀리 하다보면 언젠가는 분명 좋지 못한 소리가 나온다.
‘그렇다면.’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면 빨리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게다가 꽃 축제 연회는 1년에 한 번뿐이다.
네아는 리엘라의 방을 치우다가 그녀의 집에서 가져온 오래된 잡지가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었다. 여러 가지 삽화가 가득 있었고 그 삽화의 밑에는 올해 꽃 연회에 나왔다고 알려진 식물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네아는 리엘라가 연회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샤를로테가 분명 연회에서 무슨 짓을 하긴 할 것 같단 말이지.’
하운에 대해 한 말은 전부 거짓일거라 생각했지만 그 당당했던 태도가 거슬렸다. 게다가 돌아가고 나서 보란 듯이 다시 리엘라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마치 와서 확인하라는 듯이 말이다. 그걸 받자 리엘라는 가뭄 속의 풀처럼 시들시들해졌고 네아는 왕궁 쪽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하운 놈, 도대체 뭘 하고 있길래 아직까지 연락도 없고 샤를로테가 저렇게 날뛰게 놔 두는 거야?
속 터져 하던 네아는 결심했다.
‘굴러라, 새끼야.’
아마도 하운은 리엘라의 첫 연회 파트너가 될 생각이었으리라. 자신에게 연회용 옷을 준비해 두라고 말한 것을 보니 말이다. 혼자서 리엘라가 드레스 입은 모습을 상상하며 좋아했겠지. 하지만 그건 네놈을 위한 게 아니야! 샤를로테도 처리를 못하는 놈이 감히 우리 아가씨의 파트너가 될 생각을 해?
네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른 채, 리엘라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혹시 연회에 참석할 때 입을 만한 옷이 있을까요?”
리엘라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연회의 시작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이런 큰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꽤 오래 전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참석만 하지, 사람들 앞에 나갈 생각은 없어요. 그냥 안쪽에서 있다가 연회 시작하면 식물들만 보고 오겠다 루시안 님께도 말씀 드렸구요.”
그런 곳에 참석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고 너무 갑작스레 결정된 일이라 아직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식물들만 보고 조용히 돌아올 생각이다. 하지만 일단은 연회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기본적인 차림을 갖추긴 해야 한다.
“그러니까 적당히 입구만 문제 없이 통과 할 정도의 옷이면 될 것 같은데….”
덥석.
리엘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렇잖아도 언젠가 아가씨께서 연회에 참석하게 될 거라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었답니다.”
정말이었다. 공작저에는 리엘라를 위한 옷방만 해도 다섯 개다. 그 중에 정작 리엘라가 쓰는 것은 공작저에 들어올 때 가져온 옷들이 있는 옷방 한 개뿐이었지만 네아는 나머지 네 곳을 꽉꽉 채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네아는 신난 발걸음으로 리엘라의 손을 붙잡아 안으로 이끌었다.
네아가 리엘라를 끌고 도착한 곳은 리엘라가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다섯 번째 방이었다. 방의 문이 열리자 리엘라의 눈이 커졌다.
“이게 다 뭐예요?”
방 안에는 수십 벌이 넘는 흰색의 드레스가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전부 연회용 드레스였다.
“왜 흰 색의 드레스가 이렇게 많이 있는데요?”
흰 색의 드레스는 첫 연회에만 입는다. 그런데 왜 이게 수십 벌이나 있는데?
“그거야 어떤 게 아가씨 마음에 들지 모르니까 최대한 많이 다양하게 준비했지요.”
“낭비하는 거잖아요!”
“어머, 뭘 이 정도 갖고 그러세요. 공작님도 외출은 잘 하는 편이 아니셨지만 계절마다 수십 벌씩 새로운 외출복을 주문하셨어요. 르뷔티아 거리의 고급 의상실들이 공작님 덕분에 먹고 산다는 이야기가 그냥 나온 게 아니랍니다. 그리고 이건 낭비가 아니라 장인들을 후원하는 일이에요. 돈이 있다고 쌓아 두기만 하면 되나요, 이렇게 써야 돈이 돌고 경제가 살죠.”
술술 말하는 네아의 말을 들으며 리엘라는 고개를 끄덕일 뻔 했다. 그, 그런가? 하지만 그렇다고 한 번 밖에 안 입는 걸 이렇게나 많이 사야 한다고?
“그리고 아직 놀라기에는 멀었답니다. 여기도 봐 주세요!”
네아는 힘차게 방 안쪽에 있던 커튼을 젖혔다. 그러자 그 뒤로 신발, 가방, 숄 등등을 포함한 수백 가지의 장신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리엘라가 멍한 얼굴로 그것들을 바라보자 네아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준비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