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satile herald genius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학교 축제 (2)
“김준희. 너 청소 안 하고 뭐 하냐?”
창문을 닦다가 말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준희.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철환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멍 때리고 있지 말고. 한다고 했으면 열심히 해야지.”
“알았어. 하면 되잖아.”
준희는 다시 창문을 닦기 시작했다.
헝겊을 쥔 손에는 아까보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박박 닦지 않아도 되는데······.”
“······.”
민준과 예린이 나란히 걷고 있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김민준······.’
일러스트니 웹툰이니 하나에 집중 못 하고 이것저것 하는 걸 좋아하는 녀석인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연애에서도 그런 성향이 있을 줄은 몰랐다.
고유민 같이 예쁜 애랑 사귀면서 동시에 예린이까지?
‘그 자식 양다리 걸치고 있는 거지?’
준희는 아직도 민준이 문학반의 고유민과 사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옥상에서 둘이 나란히 앉아 커플 짓을 하는 것을 본 이후로.
“청소 다 했으면 슬슬 문 잠그고 갈까?”
깔끔해진 칠판과 교실 안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말하는 철환.
가방을 메고 나와서 교실 앞, 뒷문을 열쇠로 잠갔다.
녀석을 따라 교무실로 향하는 준희.
그녀의 머릿속에서 민준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궁금했다. 양다리를 걸치는 건지 아니면 유민에서 예린으로 환승이라도 하려는 건지.
‘철환이라면 알려나?’
준희는 요즘 들어 철환과 민준이 함께 식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떠올렸다.
얘라면 민준에 대해 무언가를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박철환, 너 요즘 김민준이랑 같이 밥 먹고 그러더라?”
“응. 그렇긴 한데······ 그게 왜?”
“아니. 그냥 걔랑은 뭔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나 궁금해서.“
“어······ 그냥 별거 아니야. 요즘 볼 만한 애······ 아니 영화 같은 거 얘기하고 그러지.”
“아. 그래? 딱히 다른 얘기는 안 해?”
“다른 얘기? 아니 딱히 안 하는데. 근데 네가 그런 건 왜 물어 보냐. 민준이한테 아직 관심 있냐? 요즘에는 거리 좀 두는 것 같더니만.”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극구 부정하는 준희.
하지만 철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건데?”
“아니. 그냥.”
교무실에 열쇠를 가져다 놓으니 오늘 당번 일은 이걸로 끝이었다.
준희는 철환과 헤어져 교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아. 자꾸 신경 쓰이네.’
딱히 민준을 좋아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이주노한테 품고 있는 연심과는 확실히 달랐다.
비록 부끄러워 아직 말도 제대로 걸어 본 적이 없었지만.
‘하아······ 짜증나네.’
한숨 쉬며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준희.
그녀는 담당 편집자인 임형택에게서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임형택: 어제 보내 준 다음 주 콘티 말인데 수정 사항 체크해서 메일로 보냈으니까 확인 부탁할게. 화이팅! (도라이몽 이모티콘)]준희는 매주 형택한테서 콘티 체크를 받고 있었다.
요즘 들어 전개나 개연성에 대한 댓글 지적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편집부와 상의한 끝에 매주 시행하고 있었다.
‘이번 콘티는 지적이 얼마나 있으려나.’
이번 콘티는 자신이 생각해도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기 때문에,
빨간 펜으로 적힌 지적 사항이 잔뜩 있을 것을 생각하니 다소 우울해졌다.
이번 주까지 수정해서 다시 보내 체크를 받아야 했다.
준희는 근처 카페에 가서 수정 작업을 하기로 했다.
집에서 하자니 자꾸 미루게 될 것 같았기 때문에.
마침 가연 예고 앞에는 적당한 카페가 있었기에 그곳으로 향했다.
“고디바 프라푸치노 그란데로 하나요.”
꿀꿀한 기분에는 달달한 것이 최고.
시원한 프라푸치노를 한 손에 든 채 2층 계단을 오르던 준희.
2층에 오르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두 사람을 보고 숨을 죽였다.
‘저거 김민준이랑 예린이 아냐?’
소파에 나란히 앉아 열심히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저 둘이 신경 쓰였는데 좋은 기회 아닌가.
준희는 조심스레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릴 만한 테이블에 앉고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 * *
나와 강예린은 2층 널찍한 원형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예린과 함께 하는 연극 스토리 창작.
시나리오 같은 걸 공동으로 짜는 것은 처음이라 재미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혼자 짜는 것보다는 낫겠지.
우리는 제일 먼저 브레인스토밍부터 하기 시작했다.
어떤 장르, 어떤 소재의 연극을 만들까 하는 것 말이다.
가장 기본이 되면서도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다.
여기서 내가 제일 염두에 둔 부분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고등학생 연극에 적합한가 하는 것이었다.
이번 연극은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는다고 생각해야 했다.
우리 반에는 연극부 출신이 아무도 없다.
거기다 학교 축제는 바로 다음 달이라서 소품 준비 시간도 연기를 연습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기존 작품을 각색한 연극을 생각하고 있는데.”
“기존 작품 각색이라면······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유명 고전을 각색하는 식을 말하는 거지?”
한 연극에 주어진 시간은 30-40분 정도다.
복잡한 플롯과 갈등 구조를 가진 오리지널 작품을 발표하기엔 주어진 시간이 적다.
이해하기 쉬운 동시에 빠른 전개까지 모두 챙기기 위해서는 그것이 낫다는 데 예린도 동의했다.
“그것도 그렇네. 기존 작품을 적절히 비트는 것이 이해도 쉽고 기억에 남을 테니까.
구체적으로는 어떤 기존 작품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걸 지금부터 같이 생각해 보게.”
나는 동화를 각색한 유쾌한 분위기의 작품을 생각하고 있었다.
애잔하거나 진중한 분위기 있는 작품은 피하는 것이 나은 것이, 예린 빼고는 연극을 해 본 경험이 모두 전무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어설픈 연기로 슬프거나 진중한 분위기를 살리려다 오히려 빈축을 살지도 모르니까.
다소 어설픈 연기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가볍고 유머 있는 작품이 낫다고 판단했다.
“일단 생각해 본 작품은 이건데······.”
나는 태블릿 위에 후보 작품을 써넣었다.
콩쥐팥쥐, 선녀와 나무꾼, 우렁 각시 같은 전래 동화에서부터,
미운 오리 새끼나 헨젤과 그레텔 같은 외국 동화까지.
“재미있을 것 같네. 현대적으로 적절히 각색도 해 주고 하면.”
“바로 그거지.”
내가 노린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클리셰를 비튼다면,
교훈적 메시지와 함께 오락적 재미도 줄 수 있다.
“그럼 여기 나온 동화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비틀지 생각하면 되는 건가?”
“그렇지.”
“그럼 일단 각자 아이디어를 적어 볼까? 여기 써놓은 동화를 어떻게 각색하면 재밌을지 말이야.
그 다음에 각자 생각을 공유하고 취합하는 식으로 진행하면 되겠지?”
역시 예린은 공부 잘하는 애라 그런 지 이해가 빨랐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뭘 해야 될지 순식간에 이해하고 제시해 주었다.
그녀가 제안한 대로 우리는 각자 스토리를 구상해 보기 시작했다.
그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에는 각자 짜낸 스토리를 공유했다.
예린은 드라마나 연극 같은 건 거의 본 적 없다고 했으면서도,
짧은 시간에 재미있는 스토리를 여러 개 짜서 공유해 주었다.
각자 공유한 내용을 가지고 토론하면서 취합하니 몇 개의 괜찮은 스토리가 나왔다.
2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이 정도까지 진행했으니 굉장히 빠른 편이었다.
팀플이라는 것은 팀원이 누구이냐에 따라서 천국일 수도 있고 지옥일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점에서 예린은 최고의 팀원이라 할 만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할까.”
“응. 그럼 나머지는 기승전결 좀 보강하고 등장인물 설정만 짜면 되겠네.”
“수고했어.”
“응, 민준이. 너도. 혼자 하려니 솔직히 막막했는데 덕분에 금방 끝낼 것 같아.”
예린에게 씨익 웃어 보인 후 나는 슬슬 집에 갈 준비를 해야 했다.
일러스트 외주 작업이 몇 가지 있었고 에밀리아에게 보낼 다음 작품도 구상해야 했으니까.
태블릿을 가방에 넣고 정리할 때 예린이 말을 건네 왔다.
“김민준, 너 요즘 표정이 좋아진 거 같다?”
“그런가?”
솔직히 요즘 삶이 만족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일러스트도 취미로 하는 스트리밍 활동도 별 탈 없이 잘나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통장에도 돈이 쌓여 가서 아파트 대출금도 다 갚을 정도는 모였다.
부모님한테 이제는 힘든 일 그만두시고 편히 쉬셔도 된다고 말할 정도가 되려면 아직 남았지만 말이다.
“너 혹시······ 여자 친구라도 생긴 거 아냐?”
“여자 친구? 그건 뭔 소리야.”
“너 고유민이랑 사귄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고유민이랑 내가?
문득 철환한테 고유민이랑 사귀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다른 애들한테까지 퍼지기 전에 미리 오해를 풀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고유민이랑 나 사귀는 거 아니야.”
“정말이야? 옥상 정원에서 너랑 둘이서 알콩달콩하고 있는 거 본 애가 있다고 하던데? 선물도 주고받고 그러면서.”
아하. 누군가 옥상에서 우리를 본 모양이다.
하필이면 고유민이 나한테 태블릿을 건네던 그 장면을 말이다.
“아. 그거? 일 도와주고 선물 받은 거 뿐인데.”
“일? 무슨 일 말하는 거야?”
나는 코코아 페이지 어플을 켜서 고유민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보여 주었다.
미친 황제의 후궁이 되었습니다라는 작품을 말이다.
예린은 표지 일러스트 담당으로 내 필명이 쓰여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 거였구나. 전혀 몰랐네. 난 또······.”
“응. 그래서 그것 때문에 옥상에서 회의하고 한 거야. 옥상이 조용해서 얘기하기 좋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얘기만 했을 뿐인데 이렇게 오해를 살지는 몰랐지만,
이제라도 잘 풀려서 다행이었다.
* * *
한편 준희는 한 시간 전부터 민준과 예린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테이블 건너로 들려오는 민준과 예린의 목소리.
아무래도 학교 축제 연극 스토리를 같이 짜고 있는 듯했다.
‘혹시 연극 스토리 과제 때문에 단 둘이 만난 것 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럼 여기 나온 동화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비틀지 생각하면 되는 건가?”
“그렇지.”
동화를 각색한 작품을 제출할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굳이 어떤 스토리를 짜나 염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단 둘이서 나란히 앉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신경이 쓰여서 엿듣고 있었으니까.
서로의 몸이 닿을 듯 가깝게 그리고······.
다정하게(준희의 눈에 비치기에는)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속이 답답했다.
“이 작품은 이렇게 각색하면 어떨까 싶은데.”
열심히 작품 얘기를 하고 있는 둘.
이제까지 얘기하는 걸 들어 보면 그렇게 농밀한 화젯거리 같은 건 없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과제 얘기가 끝난 후에 깨가 쏟아질지 누가 알 노릇인가.
‘그런데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몰래 숨어 둘을 엿듣고 있는 자신.
남들이 보면 스토커 같이 보일 것 같아 얼굴이 화끈해졌다.
‘이건 딱히 김민준 그 녀석이 신경 쓰여서가 아니라······.’
양다리라도 걸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곧바로 녀석에게 뺨따귀를 날리기 위해서다.
저런 음흉한 녀석 때문에 예린이가 속앓이하는 것을 볼 수 없으니까.
그렇게 자신을 변호하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 시간쯤이 지났을까.
얘기가 끝나고 자리를 옮기려는 듯했다.
민준의 입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눈이 번쩍 뜨였다.
“고유민이랑 나 사귀는 거 아니야.”
“정말이야? 옥상 정원에서 너랑 둘이서 알콩달콩하고 있는 거 본 애가 있다고 하던데? 선물도 주고받고 그러면서.”
이어지는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서 준희는 깨달았다.
민준은 딱히 고유민과 사귀는 것도 아니고 로판 표지 때문에 미팅을 했을 뿐이라는 것.
예린도 그저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야. 그런 거였어?’
카페 밖을 빠져 나가는 민준과 예린을 바라보는 준희.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린 듯 후련해짐을 느꼈다.
* * *
이튿날 다시 찾아온 홈룸 시간.
반 학생들이 짜온 각자의 스토리를 발표할 시간이었다.
나는 예린과 함께 작업한 스토리를 윤정 쌤에게 제출했다.
시놉시스 1장에 등장인물 설정 1장 즉 총 2장을 꽉꽉 채워서.
스토리 내용은 예린과 얘기했던 대로 전래 동화를 모티브로 한 것이었다.
둘이서 활발히 아이디어를 내고 스토리를 보강한 덕분에 괜찮은 작품이 나왔다.
물론 목표는 스토리 공모에서 우승해서 반 학생들과 함께 이걸 연극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제출한 원고가 교탁 위에 쌓였다.
학생들이 저마다 짜온 시놉시스를 윤정 쌤이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예술고 아니랄까 봐 별의별 시나리오가 많았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이 로맨스 소재의 시나리오가 많았지만 개중에는 독특한 것도 많았다.
소행성으로 인한 지구 멸망을 막기 위해 분투하는 과학자의 이야기,
학교 안의 귀신을 해치우기 위해 학생들이 퇴마 동아리를 결성해 싸우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30분짜리 연극으로 도저히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잘 썼는데 30분짜리 연극으로 만들기는 좀 애매할 것 같은데······? 괜찮은 거 뭐 없나?”
한숨을 쉬면서 다음 원고를 집어 드는 윤정 쌤.
그녀가 이번에 집어든 것은 나와 예린이 제출한 것이었다.
시놉시스를 진지한 표정으로 읽기 시작한 윤정 쌤을,
우리는 숨을 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