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satile herald genius RAW novel - Chapter 143
143화 연기 천재 (2)
* * *
오전 동안 1조의 오디션이 끝났다.
이어 오후에 있던 나머지 조의 면접도 모두 끝났다.
이제 최종 결과만이 남았다.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 주었던 오숙희,
그리고 이설희 씨는 채용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 외에 남자 성우도 2명 채용했다.
한 명은 대학로에서 현역 연극배우로 활동도 하신다는 박민이라는 분.
다른 한 명은 게임 쪽을 전문으로 활동하신다는 강하진이라는 성우 분이었다.
게임 초반 등장하는 캐릭터는 10명이 넘었지만 일단 이 정도면 충분했다.
베테랑들(오숙희, 강하진) 둘 다 각자 캐릭터 3~4명 씩 맡을 수 있는 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분 모두 목소리를 바꾸는 데 능숙해서 다른 캐릭터 여러 개를 맡아도 위화감은커녕 다른 지망생들보다 나았다.
이렇게 성우 4명이 정해진 시점에서 주인공 자리는 내가 맡게 되었다.
“정말 제가 맡아도 될까요?”
다른 멤버들은 모두 나를 적극 추천했다.
“누가 봐도 네가 제일 잘 하는 느낌이더라. 목소리도 설정 상 이미지랑 가장 가까운 느낌이었고.”
“맞아요. 10년차 베테랑 성우 분이 얘기할 정도니까.”
보이스 녹음이라…….
그렇게 엄청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고 해 보도록 할까.
솔직히 시나리오 작가 입장에서는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해 주는 게 최고다.
조이라보 멤버도 10년차 베테랑 성우 분도 가장 잘 맞는다고 추천해 주실 정도니.
그게 작품을 위해서 더 나은 일이겠지.
“네. 한번 해 봐야죠. 그럼.”
이렇게 5명의 출연진이 모두 정해졌다.
팀원들은 다음 날부터 스크립트를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즉 녹음할 내용을 미리 목록화해 놓는 작업이었다.
메인 스토리 속 대사뿐만이 아니라 전투 시 피격음이나, 스킬 사용 등 다양한 음성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스튜디오 대여비도 상당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녹음을 한 다음에 빠진 부분을 발견했다 하는 불상사가 없도록 전부 목록으로 만들어 놔야 했다.
이 작업은 조이라보의 5명이 달라붙어서 이틀에 걸쳐 완수해 냈다.
이제 본격적인 녹음 작업만이 남아 있었다.
* * *
보이스 녹음 당일 날.
남녀 각각 2명씩으로 구성된 성우진.
베테랑 남녀 둘과 신예 남녀 둘로 구성돼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인사성 밝게 한 명씩 악수를 건네는 남자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박민이라고 합니다.”
훤칠하게 생긴 20대 후반의 남자로 현재 대학로에서 연극배우를 하고 있었다.
성우는 취미 겸 일종의 용돈벌이라고는 얘기했지만, 발성과 연기력이 상당해서 전문 성우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주인공 역할은 결국 누가 하기로 했어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던지는 이가 있었다.
거의 10년차 베테랑인 숙희 누님이었다.
나를 주인공 역할로 추천했던 바로 그분이다.
“결국에는 제가 하기로 했습니다.”
“역시 그렇게 됐군요! 봐요. 제가 제일 낫다고 했죠?”
자기 일처럼 기뻐하셨다.
“어찌됐듯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작가님이면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다른 분들한테 민폐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네요. 올 사람 다 왔으니 이제 슬슬 들어갈까요?”
“그러죠.”
다른 성우들과 녹음실에 들어섰다.
각자 헤드폰을 쓴 채로 마이크가 놓여 있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솔직히 긴장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여기엔 나만 있는 게 아니라 실력 있는 분들 4명이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곧 시작하겠습니다.”
큐 사인이 나오고 헤드폰에서 웅장한 음악이 흘러 나왔다.
가장 초반 부분은 주인공이 왕위 경쟁에 패해 처형당하는 씬이었다.
전쟁광에다 무자비한 성격을 갖고 있었던 주인공 리처드.
결국에는 주변 동료들에게 하나둘 배신당해 처형장에 선다.
나는 이 순간 리처드가 되어 자신의 운명에 대한 회한 서린 독백을 시작했다.
로대주로부터 얻은 연기 재능 덕분일까.
눈시울이 붉어지고 마음이 아려오는 게 느껴지고 있다.
나는 배역에 금세 몰입하고 있었다.
“나는 결국 외로운 군주였을 뿐이구나. 아무도 나를 진심으로 따른 적이 없었던 것이야.”
슬픈 곡조의 배경 음악을 들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독백을 계속했다.
* * *
“그대…… 새로운 기회를 원하는가?”
인자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신 빅토리아의 목소리였다.
작중에서 주인공에게 두 번째 삶이라는 기회를 주고,
시간을 되돌리는 권능까지 부여해 주는 초월적 존재였다.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오숙희.
여신 빅토리아, 묘족 동료 카린, 마녀 키르케, 거기에 주점 여주인까지
오늘 1인 4역을 맡게 돼 있었다.
“예. 원합니다. 저를 배신한 이들에게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
민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과장되지 않고 담담한 어조이면서 동시에,
소름 끼칠 정도로 서늘한 분노를 담고 있는 목소리.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전율이 느껴졌다.
10년차 베테랑인 숙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껏 많은 베테랑 선배들과, 신인들을 봐 왔지만,
첫 녹음에 이만한 수준의 연기를 펼쳐 보인 것은 처음이었기에.
보통 연기력으로는 가능한 레벨이 아니었다.
캐릭터 설정에 대한 것은 어느 정도 숙지하고 왔다.
냉소적인 성격과 불타는 복수심을 가진 복잡한 인물.
그것을 그 누구보다 생생하게 표현해 내고 있었다.
‘이런 것이 진짜 재능이구나.’
아는 사람한테 얘기를 듣고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한 오디션.
시나리오와 대본이 요즘 게임답지 않게 수준이 높은 게 마음에 들어 참가했는데,
이만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보게 될 줄이야. 그것도 성우 지망생도 아닌 사람한테서 말이다.
재능 있는 사람과 함께 연기를 펼치는 것.
신인 때도 느꼈지만 언제나 가슴 떨리고 즐거운 일이었다.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숙희는 미소를 머금은 채 연기를 계속했다.
* * *
“목소리 연기 정말 대단했어요.”
“팔에 닭살이 돋을 정도던데요?”
“이 정도면 정말 성우 데뷔를 하셔도 충분하지 않나 싶네요.”
같이 녹음에 참여한 사람들한테서 극찬을 받았다.
분야에 상관없이 뭔가 잘한다고 인정받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늘 새롭고 짜릿한 일이었다.
보이스 수록이 무사히 끝이 나고 이제 음성을 갖고 게임에 집어넣는 작업과 싱크를 맞추는 작업에 들어갔다.
모든 작업이 끝난 후 멤버들은 모두 사무실 안에 있는 대형 모니터 앞에 모였다.
직원들이 머리를 식힐 때마다 대전 격투 게임을 하러 모이는 공간 말이다.
큰 화면을 통해 음성이 나오기 시작하자 다들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주인공 역할을 맡은 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다들 한층 더 집중하고 있었다.
“예. 원합니다. 저를 배신한 이들에게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
모니터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 내 목소리.
솔직히 내가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목소리 한번 잘 뽑았다.
리처드 목소리가 내 가슴에 울림을 주고 있었다.
이게 정말 내 목소리인가 싶은 수준이다.
“와. 이거는 전문 성우라고 해도 믿을 만한 수준인데!”
“아니. 웬만한 유명 성우보다도 나은 거 같아요.”
내 연기도 그렇지만 자기들이 열심히 만든 게임에,
성우 녹음이 들어간 것을 보고 멤버들은 모두 흥분해 있었다.
1년에 가까운 노력 끝에 하나의 보상을 얻는 순간.
하나의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유저들이 게임 개발자들의 노력을 곁에서 본다면,
어떤 게임이라고 해도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을 거다.
직접 만들어 보니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나의 게임이란 종합 예술 그 뒤에 숨은 이들의 노고를.
물론 오늘도 그 노력은 계속되고 있었다.
음성과 자막 속도가 잘 맞는지 싱크를 확인하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게임을 테스트해 보고 있는 네 명의 멤버들.
나도 그들과 함께 보고 있었지만 자꾸 눈이 감겨왔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선선한 가을바람을 느꼈다.
비몽사몽 와중에 현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맙다, 민준아.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내 가슴 위에 덮어지는 담요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나는 씨익 미소 지어 보이고는 달콤한 잠에 빠져 들었다.
* * *
클로즈 베타가 시작되고 고대하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오픈 베타를 위한 서버 확장 작업 및 UI 개선,
테스트에서 보고된 버그 수정 작업에 바쁜 매일을 보내고 있는 개발진.
반면에 나는 다음 업데이트 용 시나리오 초안과 캐릭터 디자인까지 모두 작성해 둔 상태라 거의 석 달 간은 할 일이 없었다.
웹툰이나 만화 쪽도 콘티를 그려 넘겨주면 나머지는 두 그림 작가 분들이 책임감을 갖고 완성해 주었다.
학교는 가끔 일 때문에 조퇴나 결석을 하는 것 외에는 별 탈 없이 흘러갔다.
교외 활동이 많은 것을 선생님들은 물론, 교감, 교장도 알고 있었기에,
일종의 연예인 학생 같은 취급으로 출석 부분은 눈감아 주고 있었다.
학교생활에 있어 방송 출연 이후 달라진 것이 있다면 교내에 팬이 늘었다는 것 정도일까.
빼빼로 데이 때 이주노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빼빼로 선물을 받은 것이다.
남학생들한테 받은 빼빼로 숫자가 더 많다는 게 좀 묘하기는 했지만 그거야 어쨌든.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묘한 게 있기는 했다.
최근 예린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혼자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을 보는 일이 잦았다.
“예린이, 너 무슨 근심이라도 있냐?”
“아니. 딱히 아무것도 없는데?”
예린은 거짓말이 무척 서툴다.
그녀의 근심의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본인한테 꼬치꼬치 캐묻기는 좀 그래서,
옆 자리 엘레나를 통해 물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예린이 언니가 한국에 왔다고 하더라고.”
엘레나의 한국어는 요즘 들어 부쩍 늘어 있었다.
한국 생활 시작한 지 1년이 된 것을 감안해도 말이다.
아마 그녀가 다니기 시작했다는 연극 극단의 영향이 크리라.
연극부의 유현화에게 소개 받은 극단 말이다.
‘그나저나 예린이 언니라면 그 사람이겠군.’
분명 이름이 강혜진이라는 이름이었다.
외국에서는 세레나 강이라는 이름으로 통하면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이 유력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었는데,
결국 올해 우승을 차지하는 것으로 그 재능을 과시했다.
미국의 유명 음대를 졸업하는 등 이룰 것은 다 이루고, 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모양이다.
‘예린이 마음이 뒤숭숭할 만도 하네.’
예린과는 어머니에게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 이후,
떨어져 지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두 자매에 있어서 다시 보는 것은 거의 6년 만이 되는 것이다.
근심이 아니라 기뻐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수업이 끝나고 예린을 포함 다른 학생들도 모두 가방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도 슬슬 집에 갈 준비를 했다.
게임 쪽 일도 정리됐겠다.
최근 6시간 이상 푹 잔 적이 드물기 때문에 수면을 좀 취하고 싶었다.
수업 시간에 몰래 조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좀 부족하다.
학교 계단을 홀로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음악실 쪽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기교로 유명한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곡이다.
이주노가 또 연습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안 본 사이에 얼마나 실력이 늘었나 오랜만에 들어볼 생각으로 다가갔다.
음악실 밖에는 예의 그 팬클럽 여학생 애들이 보였다.
의자 위에 올라서서는 헤벌레한 얼굴로 음악실 안을 구경하고 있었다.
‘얘네들도 징하네.’
주노에게 차갑게 무시당하면서도 팬을 계속하고 있다.
햇수로 따지면 2년째니까 졸업할 때까지는 계속 이러고 살겠지.
“저 언니도 엄청 잘 치는데? 누구지?”
“엄청 예쁜 것 같던데? 혹시…… 주노랑 사귀는 사람 아냐?”
“야!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마.”
아무래도 음악실 안에 있는 것은 주노뿐만이 아닌 듯했다.
주노 팬클럽 3인방에게 다가가 누구인지 물었다.
“우리도 몰라.”
“궁금하면 직접 보던가.”
주노 팬클럽 3인방은 나한테는 매번 까칠했다.
교내 경연 대회에서 녀석을 제치고 우승한 이후 줄곧 이랬다.
얘네들한테 미움 당하든 말든 뭐 눈꼽만큼도 신경은 안 쓰지만.
나는 녀석들이 올라서 있던 의자를 하나 빌려 그 위에 올라섰다.
창문 안쪽으로 한 쌍의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한 사람은 이주노고 다른 사람은 확실히 처음 보는 여자였다.
염색한 금발에 미려한 이목구비를 지닌 미인.
“주노, 너 피아노 꽤 늘었다?”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말하는 젊은 여성.
국제 쇼팽 콩쿠르 우승 뉴스 기사에서 봤던 바로 그 강혜진.
그렇다. 강예린의 친언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