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satile herald genius RAW novel - Chapter 16
16화 될성 부른 잎 (1)
* * *
음악 경연 대회까지는 아직 한 달이 남아 있었다.
악보를 보지 않고도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는 능력.
대단한 재능을 손에 넣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음악 경연 대회에 출전할 것이 확실시되는 이주노. 녀석은 불과 8살이라는 나이 때부터 피아노 영재라 불리우고 있는 녀석이었다.
경연 대회에 나가서 괜찮은 성적을 올리려면 연습을 좀 해둬야 하는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집에 연습용 피아노가 없다는 것.
그렇다고 중고 피아노를 사기에도 지금은 돈이 없다.
전에 빌렸던 이형민의 태블릿을 반납한 후, 새 태블릿과 컴퓨터를 장만하는 데 돈을 다 써 버린 상태였다.
그렇기에 연습용 피아노를 사기 전까지는 일러스트레이터 일에 매진할 생각이었다. 피아노에서 손을 좀 놓고 있다고 흡수한 재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사실 일러스트레이터의 일도 생각했던 이상으로 적성에 잘 맞았다.
상상한 것을 이미지로 구체화시킴으로써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일인 동시에, 게임이란 매체를 통해서 국내를 넘어 전 세계 수십,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내 그림을 보여 줄 수 있었다.
미술관이나 아트 갤러리에서 소수의 방문객이나 평론가들에게나 그림을 보여 주는. 소위 그들만의 리그라고 불리우는 현대 미술에는 별로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전자 쪽이 내가 꿈꿔왔던 그림쟁이의 이미지에 더 가까웠다.
게임 일러는 은근히 심오한 분야이기도 했다. 그림 실력만으로 다 되는 게 아니고 게임이나 트렌드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기도 했고.
요즘 먹히는 그림 스타일이나 유행이라는 게 확실히 존재했고, 상업적 예술이었던 까닭에 소비자의 니즈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어야 했다.
요즘 내가 공부하고 있는 건 다른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이었다. 공부라고 해서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고, 유명 작가의 작품을 인터넷에서 찾아 분석해 보고 직접 포토샵으로 재현해 보거나 하는 일이다.
아니면 직접 모바일 게임을 해보면서 일러가 실제 화면에서는 어떤 느낌인지 비교해 본다던지. 단말에 따른 화면 크기 등 여러 요소까지 고려하면서 최선의 일러스트 작법에 대해 생각해 보는 뭐 그런 공부였다.
오늘도 학생 식당에 앉아 다른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주변의 학생들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야. 주노 왔다.”
“와······ 언제 봐도 존잘이네.”
학생 식당 안 뭇 여학생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들어오는 한 남학생.
이주노, 저 녀석이 그 유명한 이주노였다.
180센티의 장신에 호리호리한 몸.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존잘 귀공자라 불리우며, 반대로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기생오라비 같다는 소리를 듣는.
인기가 많은 이유는 한 눈에 봐도 알 만 했다. 마스크가 웬만한 아이돌 배우 뺨치는 점도 그렇고, 어렸을 때 음악 신동으로 방송에 나온 적도 있어 대중적 인지도가 높았다.
녀석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면 꼭 한두 명씩 녀석 근처에 앉으려고 하는 여자애가 있었다.
“주노야, 혹시 여기 자리 비었으면 앉아도 돼?”
“맘대로 해.”
주노는 과묵한 편이다. 묵묵히 카레라이스를 입에 넣고 있다.
옆에 앉은 여자애는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나 우물쭈물 하고 있다.
그런 광경을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내 인생이 레전드였다.
“주노야, 이번 음악 경연 대회 너도 나가지?”
“응. 그런데?”
“오오. 그렇구나. 응원할게.”
“그러던가.”
녀석은 관심 없는 듯 단답을 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여학생들한테 철벽을 친다는 소문은 진짜인 듯했다.
그럼에도 눈앞의 여학생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말을 걸고 있었다.
“솔직히 경연 대회 우승은 주노 너라면 따놓은 당상 아냐?”
여학생은 주노에게 이런 저런 칭찬을 연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노는 표정은 반대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야.”
그의 차가운 시선에 아까부터 재잘대고 있는 여학생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네가 뭐라고 쉽다는 듯이 얘기하냐?”
“응?”
여학생은 단순히 호감을 사려고 했을 뿐이지만.
주노의 반응만 봐도 완벽하게 실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까부터 내 호감을 사고 싶어 하는 건 알겠는데. 짜증나게 쓸 데 없는 소리만 재잘대지 말고 빨리 꺼져라.”
“······미안해.”
여학생은 울상을 지으면서 자리를 떴다.
사라지는 그녀를 무관심한 눈으로 흘겨보는 이주노.
얘가 바로 다음 달 나와 함께 피아노 경연을 벌일 녀석이었다.
* * *
저번 그림이 호평을 받은 이후 일러스트 의뢰는 꾸준히 들어왔다.
이형민 대표는 나에게 일을 자꾸 소개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엔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이번에도 가이아 전기 캐릭터 일러스트를 너한테 부탁하려고 하는데.”
“어떤 그림인데요? 저번처럼 몬스터 일러스트인가요?”
“그것 말인데······ 이번에는 스토리 모드에 등장할 신 캐릭터 일러스트를 부탁한댄다!”
뭔가 갑자기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2성짜리 오크 전사 카드를 그리던 내가······ 스토리 모드 신캐를?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클라이언트 평가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사실 이건 자뻑은 아니지만······.
내가 봐도 저번 일러스트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실제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2성 초월급 일러 퀄리티라는 말이 나돌고 있었다.
“클라이언트랑 콘셉트는 간단히 얘기 나눴거든? 기획 팀장한테 받은 콘셉트 노트 보내줄 테니까. 대략적으로 구도랑 캐릭터 콘셉트만 스케치해서 보내 줄래?”
“네. 해 보겠습니다. 기한은 언제면 되죠?”
“목요일까지 가능할까?”
“네. 그때까지 보내 드릴게요.”
이제야 뭔가 프로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내 능력을 원하고 그것을 발휘해서 보수를 지급 받는다는 것.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임에도 나는 그것이 기뻤다. 진정 하고 싶었던 일로 돈을 번다는 것은 이런 기분인 걸까.
“어디 보자······ 남자 성기사의 일러스트라······.”
대충 연필로 끄적인 듯한 노트를 살펴봤다.
다급하게 그린 티가 확 나지만 그냥 콘셉트라서 뭐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까스로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남자 캐릭터 주위로 키워드가 쓰여 있었다.
한손검. 방패. 풀플레이트 아머.
성스러운 오러.
대충 캐릭터의 생김새를 보면 기획자가 아마 디아블X를 즐겨 했을 것 같은 느낌이 팍팍 풍겨 왔다. 솔직히 어느 게임에나 있을 법한 성기사 느낌.
그것을 특색 있고 인상 깊은 일러스트로 만드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나는 스케치북을 들고 침대 위에 엎드려 이런 저런 구상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십수 가지 아이디어 중 가장 나아 보이는 콘셉트 3가지를 골라서 보기 좋게 스케치한 후에 이형민에게 제출했다.
이형민 대표의 반응은 이번에도 상당히 괜찮았다.
“역시 민준이는 센스가 좋은 거 같아. 이거면 거진 오케이 받을 거 같은데? 이번 주 목요일에 미팅이 있거든. 거기서 컨펌을 받고 나면 다시 연락할게.”
“미팅이요?”
“그래. 클라이언트랑 만나서 협의하는 자리를 말하는 거야.”
아저씨. 미팅이 뭔지는 저도 아는데······.
그나저나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이라는 것에 상당한 흥미가 생겼다.
그냥 고객사도 아니고 그 유명 게임사인 넥스트와의 미팅이니 말이다.
넥스트의 직원과 안면을 익혀 두면 장차 좋은 인맥이 될 것 같았다.
사실 게임 일러스트레이터, 그것도 프리랜서로 활동하려면 의뢰주들과의 인맥이 몹시 중요하긴 했다. 그것도 직접 고객과 계약이 가능한 수준만큼 인정받았을 때의 일이지만 나야 그 부분은 문제가 없다.
나도 참여하고 싶다고 얘기해볼까? 안 될 건 없을 것 같은데.
“형.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응? 뭔데?”
“저도 그 미팅에 참가해도 될까요?”
내 제안을 듣고 형민도 다소 놀란 듯 했다. 하긴 실력이 있다고 해도 고등학생이 업체 미팅에 참가한다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닐 테니까.
“안 될 건 없긴 한데······ 너가 생각하는 거보다 좀 부담스러운 자리일 수도 있긴 한데······ 그래도 괜찮아?”
“물론이죠. 제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들어 보고도 싶고요. 솔직히 말해서 고객이 원하는 걸 알려면 고객을 직접 만나보는 것만큼 확실한 건 없잖아요?”
“이야. 너 되게 고등학생답지 않게 말한다?”
그야 내면은 고등학생이 아니니까.
“하긴······ 직접 만나보는 게 얘기하기 수월하겠지. 알았어. 미팅 시간도 마침 오후 5시라서 너 학교 끝나고 오면 충분할 거야. 그럼 넥스트 본사 앞에서 보는 걸로 하자.”
“네. 그럼 혹여나 늦을 일 없게 한 오후 4시 40분쯤에 집합하죠.”
“너 되게 꼼꼼한 구석이 있네. 알았다. 그 때 보자.”
“네. 그 때 봬요.”
미팅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혹시나 모르는 일이니까.
단순한 인맥 쌓기를 넘어 더 좋은 기회를 가져올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