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satile herald genius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만능의 천재 (1)
* * *
“공연을 하나 기획해 줬으면 좋겠어요.”
벽화나 포스터 디자인 같은 것을 예상했었다.
“그것도 처음엔 생각해 봤지만요. 역시 만능의 천재라는 명성을 지니신 분이잖아요. 그 명성이 진짜인지 당신의 다양한 재능을 보고 싶었거든요.”
공연 기획이라…….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인 만큼 흥미는 있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인 건 알고 있으니까요. 그에 합당한 보수를 제공하겠습니다.”
그레이스가 제시한 금액은 그야말로 억 소리가 나는 금액이었다.
나는 그녀로부터 묵직한 파일을 하나 건네받았다.
“여기에 이번 일에 필요한 정보는 다 들어 있어요. 이걸 참고로 기획안을 작성해서 보내 주세요. 당연한 얘기겠지만요. 보수는 기획이 통과됐을 때 지급된다는 건 이해하시겠죠?”
역시 이만한 보수를 그냥 지급할 리는 없었다.
부사장의 깐깐한 눈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소리였다.
“당연하죠. 충분한 성과도 못 내고서 보수를 받으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거든요.”
“그럼 부탁드리겠어요. 기한은 올해 말까지라면 상관없으니 완성되면 메일로 보내 주셨으면 좋겠어요.”
* * *
한편 영화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절반쯤 완성됐다고 할까.
미국 국내에서의 촬영은 모두 끝났고 해외에서의 촬영을 몇 번 남겨 두었을 뿐이었다.
그 다음 편집, 재촬영만 거치면 영화 촬영 자체는 끝이 난다. 내년 말 즈음에는 개봉될 예정이었다.
계약상 촬영장마다 반드시 동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번에 받은 의뢰에 대해 고민해 볼 시간은 확보된 상태였다.
새로운 공연이라…….
그레이스를 만나고 돌아온 이후 줄곧 고민을 했지만, 좀처럼 좋은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만든 공연이 전 세계의 수많은 데지니 팬 앞에서 공연될 것이라는 건 분명 가슴 뛰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미국 데지니 파크에는 아직 안 가 봤네.’
도쿄를 방문했을 때는 가 본 적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우선은 자택 근처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데지니 파크에 가보기로 했다.
로스엔젤레스 애너하임에 위치한 데지니 파크.
1955년 7월 18일에 개장한 세계 최초의 테마파크인 동시에 최초의 데지니 파크로서 역사가 깊은 곳이었다.
개장 이래 이제까지 무려 5억 명이 넘는 관광객이 방문했으며 연간 방문객의 숫자도 전 세계에 있는 모든 테마 파크 중 최다라고 한다.
데지니 영화를 볼 때마다 인트로에 나오는 신데렐라 성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저게 그 신데렐라 성 맞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사람이 적은 화요일 오전 시간.
나는 예린과 함께 데지니 파크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도 이곳 방문이 처음이었던 듯 꽤나 들떠 있었다.
첫 인상은 역시 테마파크로서의 매력을 잘 살렸다는 것이었다.
드넓은 전체 부지가 8개의 테마로 나뉘어 있어 지역이 바뀌면 어트랙션은 물론, 근처의 건물이나 파는 상품, 음식 등 전체적인 분위기가 바뀌게 돼있다.
수많은 히트 캐릭터를 보유한 데지니 답게 캐릭터를 이용한 부분도 눈에 띄었다. 미치 마이크 같은 인형 탈 쓴 마스코트 캐릭터들이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어 주기도 했다.
“미안. 민준아, 사진 좀 찍어 줄래?”
어느새 마스코트에 둘러 싸여 있는 예린.
물론 기념사진을 찍어 주는 것은 내 몫이었다.
그녀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니 같이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평일임에도 사람이 꽤나 있어 대기 시간마다 대화 상대도 돼 주었고 말이다.
“민준아, 공연 기획 맡았다고 하는 건 잘돼 가고 있어?”
“그러기엔 아직 뭐 한 게 없어서. 아직 구상 중이라서 말이지.”
“확실히 딱 듣기에도 쉽지 않을 것 같긴 해. 그래서 현장 답사도 하는 거니까 잘됐으면 좋겠어.”
예린은 옆에서 나를 응원해 주고 있었다. 몇 가지 아이디어를 내주기도 하면서. 비록 그중에 딱 이거다 싶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이날 어트랙션보다도 간간이 거리에서 펼쳐지는 퍼레이드나, 극장에서 정기적으로 선보이는 공연을 눈여겨보았다.
물론 기존 공연을 참고하면서 데지니에서 어떤 공연 기획을 원할 지 감을 잡기 위해서였다.
공연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위해 폐장 시간까지 데지니 파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 * *
자정에 가까운 시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기획안 작성에 돌입했다.
기획서 양식을 참고해 가면서 기획 의도와 테마, 스토리 라인 등을 빼곡히 정리해 나갔다.
이미 웹툰이나 만화 등 콘텐츠 기획에는 경험이 있었던 덕분일까, 수월하게 내용을 메워 나갔다.
이번에 내가 떠올린 콘셉트.
그것은 마술을 이용한 공연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쥐. 미치 마우스.
데지니의 팬들이라면 알겠지만 공식적으로 그의 특기는 마법이었다. 이는 1940년대에 방영한 환타지 랜드라는 애니메이션에 마법사의 제자 역할로 출연했던 것을 기원으로 지금까지 8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콘셉트였다.
그 콘셉트를 마술 공연으로 재현해 보고자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마술의 지식과 노하우라면 웬만한 베테랑 마술사에 뒤지지 않는다.
그렇게 콘셉트가 정해지니 공연의 스토리 라인도 술술 나왔다. 마법사로서 수행을 떠난 미치 마우스가 신데렐라, 백설공주, 곰돌이 부우 등 다양한 캐릭터들의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식의 스토리를 짜 냈다.
기획안을 모두 작성한 후 그레이스의 메일로 송부했다.
* * *
일주일 후 나는 그레이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내가 낸 기획에 대한 반응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잘 읽어 봤어요. 마술을 이용한 콘셉트가 마음에 들었네요. 하지만 그것보다도 인상 깊었던 건 말이죠. 기획서에 첨부해 주신 마술 트릭이나 무대 장치 활용법에 대한 것이었어요. 어떻게 이런 쪽으로도 잘 알고 계시는 거죠?”
직접 현장을 답사하면서 관찰한 내용, 그리고 최고의 마술사이자 무대 공연에도 잔뼈가 굵었던 헨리 와이즈맨의 지식 덕분이었다.
“마술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어서 말입니다.”
“마술을 이용한 일종의 매직쇼와 결합시킨 공연이라. 기존에 인기 있던 데지니 공연과 아주 동 떨어져 있지도 않고 뭣보다 기획서 내용이 세세한 부분까지 고려해서 쓰여 있어서 신뢰가 가는군요.”
일견 깐깐해 보이지만 칭찬할 부분은 확실히 칭찬해 주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왈도의 증손녀라는 것 때문에 부사장의 위치에 오른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쨌든 기획서 자체는 좋다고 생각해요. 담당자들도 대부분 좋은 반응을 보였구요. 얼마 안 있으면 본격적으로 공연 준비를 시작하게 되겠군요. 같은 배에 탄 이상 잘 부탁드릴게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기대하시는 만큼의 지원도 기대해도 괜찮겠죠?”
“물론이죠.”
모니터 속에서 그레이스는 여유 있게 미소 지어 보였다.
* * *
그레이스는 약속을 확실히 지켰다.
공연인 만큼 좋은 음악도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니 오케스트라 녹음도 지원해 줄 수 있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오케스트라라…….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하나의 곡을 만들어 낼 기회가 이런 식으로 올 줄은 몰랐다.
운이 좋군?
아니. 이건 운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낸 기회였다. 그레이스 데지니 같이 괜찮은 프로젝트엔 투자를 아끼지 않는 사람에게 내가 가진 모든 재능을 적극적으로 어필한 결과였다.
보름 후 그레이스가 약속했던 오케스트라와의 녹음을 준비하기 위해 나는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리사이틀 홀로 향했다.
할리우드는 미국 문화 산업의 중심지다. 문화 행사도 굉장히 많아서 세계에서 온 수많은 음악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은 물론, 리사이틀 홀이 로스엔젤레스 이곳저곳에 있었다.
그레이스는 그 중 하나를 대관해 주었다.
나는 리사이틀 홀 입구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레이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은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는 여사장 모드(?)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부사장이시면 다른 일도 바쁘실 텐데 직접 와 주셨군요.”
“부사장 주제에 은근 한가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죠. 이만큼 재미있어 보이는 일은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럼 들어갈까요?”
리사이틀 홀 안으로 들어가자 새하얀 조명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무대 위에,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하프 등 각종 클래식 악기를 손에 쥔 음악단원들이 앉아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레이스는 단원들에게 나에 대해 소개했다.
“소개하겠어요. 이쪽은 민준 킴. 세계적인 크리에이터로서 이름이 있으신 분이죠.”
단원들은 열띤 박수를 보내왔다.
미국에서도 이름이 점점 알려지고 있는 것이 실감이 나고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일러스트, 코믹스 쪽을 잘 아는 사람 아니면 아는 사람이 적었겠지만 말이다.
“이쯤에서 눈치 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전에 당신들에게 보내 준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 바로 이 민준 킴이에요.”
예상했던 대로 꽤나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아마 상당한 경력의 베테랑 작곡가가 작곡한 것으로 지레짐작했을 지도 모른다.
소개를 마친 후 맨 앞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는 그레이스.
“그럼 전 여기 앉아서 지켜보도록 하겠어요. 그럼 시작해 보시겠어요?”
부사장이 직접 보고 있으면 압박이 좀 있을 텐데 그런 것은 그레이스의 안중에 없는 모양이다. 다들 프로인 이상 영국 여왕이나 미합중국의 도라프 대통령이 직접 보고 있어도 완벽하게 연주해 내야 하는 게 숙명이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됐다.
1940년 왈도 데지니는 환타지 랜드라는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해, 막대한 돈을 들여 프로 음악가들을 고용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거의 80년이 지난 현재 그 증손녀가 음악가들을 모아 놓고 연주를 듣고 있었다.
내가 직접 작곡한 마법과 모험을 주제로 한 신비롭고도 경쾌한 곡조의 음악이 리사이틀 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야 물론 가벼운 마음으로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이곳에 온 건 일종의 음악 감독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구상한 곡의 이미지가 실제 오케스트라로 그대로 구현되고 있는 지를 귀를 쫑긋 세우고 체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대와는 다른 경우 내가 나서서 악보를 수정하거나 단원을 지도해야 했다.
곡의 템포를 좀 조절한다거나 악기 별로 세세하게 지적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바이올린 부분은 여기서 한 음 더 올리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요.”
이 작업에는 역시 절대 음감 능력이 도움이 되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음의 이탈이나 부조화를 인지하여 단원들이 고칠 점을 얘기해 주었다.
“말씀하신 대로 하니까 확실히 낫네요. 음감이 정말 저희도 놀랄 만큼 날카로우시군요.”
여러 번의 지적을 거쳐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내가 구상했던 그대로 곡을 구현해 내고 있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
역시 직접 눈앞에서 듣고 있으니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내가 작곡한 곡이다 보니 그 감동은 두 배…… 아니 세 배는 되었다.
녹음이 끝나고 이번 데지니 파크의 새 공연 준비도 본격적으로 시작이었다.
데지니 파크 소속의 공연 담당 안무가나 연극 단원들과 함께 동선이며 배우의 역할 등 여러 가지를 의논했다.
리허설 등 공연 관련 준비가 끝나니 어느새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어느새 한 달 앞으로 다가온 11월. 관객 앞에서 내가 기획한 새 공연이 공개되는 날이 찾아왔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예린과 함께 극장에 입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