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satile herald genius RAW novel - Chapter 22
22화 음악 경연 대회 (4)
* * *
나는 주노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주노 녀석의 키는 멀대 같이 커서 위압감이 있긴 했지만 주눅이 든다거나 기에 눌리진 않았다.
단지 나를 찾아온 이유가 궁금할 뿐.
“왜. 무슨 말을 하려고?”
“별다른 건 아니야. 서로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예선 때 네가 연주했던 라 캄파넬라만큼, 오늘도 훌륭한 연주를 보여 줄 거라 믿는다.”
잠깐······ 그 천하의 이주노가 나를 칭찬해 주고 있다.
이건 웃으면서 고맙다고 답해 줘야 되나?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녀석이 한마디 덧붙였다.
“근데 솔직히 내가 더 잘 친다고 생각한다.”
뭐냐, 이 자식. 갑자기 지 자랑이네?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지만, 아직 자신 있게 확신은 못 하는 상태지. 난 그 확신을 얻기 위해 오늘 연주에 임할 거다.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다야. 그럼 건투를 빈다.”
이주노는 거기까지 말을 마치고 대기실 안으로 사라졌다.
저 녀석······ 중2병인가?
뭐. 중2병이든 뭐든 상관없이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녀석은 이번 본선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예선에서 보여 준 터키 행진곡. 물론 뛰어난 연주이기는 했으나,
음악 신동이라는 이름값에는 미치지 않는 좀 아쉬운 곡 선정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예선이라서 쉬운 곡을 택했을 것이다.
녀석에게는 확실한 실력이 있었고 전국 중학교 콩쿨 우승이라는 확실한 실적도 있었다.
재능을 얻었다고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저 온 힘을 다해서.
* * *
피아노 경연이 시작되기에 앞서서 강당으로 학생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검은 색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물결이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 안에는 김준희도 있었다.
주노의 연주에 대한 기대로 그녀의 마음은 부풀어 있었다. 주노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좋은데 심사위원을 맡은 덕분에 제일 가까이서 들을 수 있다는 것.
그런 기회는 결코 쉽게 오는 게 아니었다.
시간에 맞추어 강당에 도착한 준희의 눈에 화려한 가연 예고 강당의 모습이 들어왔다.
돈깨나 들였을 법 보이는 화려한 인테리어에 조명.
단상 위에는 고급스런 그랜드 피아노가 조명을 받아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단상 위에는 다른 심사위원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심사위원에는 음악 선생도 있고 현직 피아니스트도 참여하고 있었다.
“여기 채점 시트와 채점 기준표를 배부하겠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이번 음악 경연 진행을 맡은 윤종범 쌤으로부터 A4 용지 한 장씩을 받았다.
“채점 기준은 미리 메일로 알려 드렸지만, 오늘 다시 한번 읽어 보시고 아무쪼록 공정한 심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좌석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사람이 거칠기로 유명한 종범 쌤도 심사위원들에게는 깍듯한 자세로 안내를 하고 있었다.
심사위원 좌석은 역시나 강당 제일 앞, 연주를 감상하기 가장 좋은 자리로 마련돼 있었다.
준희로서는 쾌재가 나올 뿐이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다시 한 번 채점 기준을 체크해 봤다.
채점 기준표에는 총 5가지 항목이 적혀 있었다.
다소 장황하게 설명돼 있었지만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1.곡의 특성: 작곡자가 의도한 곡 분위기에 잘 맞는가. 장중해야 할 곡이 너무 경쾌하다던지 하면 감점이 된다.
2.박자와 리듬: 박자가 불안정하거가 리듬의 길이가 너무 길거나 짧은 경우 감점이 된다.
3.테크닉: 손가락이나 손목 사용이 유연하고 아르페지오나 스타카토 처리가 매끄럽게 잘되는 지를 평가한다.
4.음색: 피아노의 연주음 하나하나를 보았을 때 매력적이면서 깊이 있는 소리를 가졌는가를 평가한다.
5.전체적 인상: 곡의 여러 요소가 조화롭게 잘 어울렸는지 전체적인 곡의 인상을 평가한다. 부분적인 완성도는 있으나 중간에 흐름이 끊긴다거나 일관성이 떨어진다면 감점이 된다.
‘거 겁나 깐깐하게 보네.’
음악은 마음으로 느껴야지. 이렇게 분석하면 뭔 재미야? 라는 게 준희의 속마음이었지만 그래도 이게 심사 기준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준희는 심사 기준을 꼼꼼히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그 다음으로는 채점 시트를 살펴보며 어떤 이들이 나오나 확인해 봤다.
피아노 부문 본선 참가자는 총 6명이었다.
그 안에서 문득 준희는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1번: 김성철
2번: 이가람
3번: 정수연
4번: 김하진
5번: 이주노
6번: 김민준
‘김민준? 동명이인인가? 하긴 김민준이라는 이름이 좀 흔한 편이긴 하지.’
참가자 이름 체크까지 마치고 음악 경연 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시작 시간인 오전 10시가 가까워지자 학생들이 하나둘 강당 안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용했던 강당 안은 금세 학생들의 저마다 떠드는 소리로 가득 찼다.
“얘들아, 곧 시작하니까 좀 조용히 해라.”
종범 쌤이 매섭게 고함을 치며 애들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자 그제야 학생들은 조용해졌고, 이후 대머리 교감 선생님의 길고 긴 훈화 말씀이 이어졌다.
“가연 예고 학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가연 예고 교감인 나상훈입니다. 오늘은 짧게 말씀 전하겠습니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뭐······ 그런 뜻입니다만. 이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열매가 결실을 맺는 것처럼 가연 예고 학생들의 결실을 빛내는 의미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봄을 지나 여름까지 1학기 동안 은사님, 선배님, 학우들을 만나면서 많은 인연을 맺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2학기 이 청명한 가을에 이르러 그 결실을······ (중략) 모두 한 마음으로 우리 가연 예고 음악 경연 대회를 즐겼으면 합니다.”
저 긴 훈화 말씀은 대본인지 즉석에서 나오는 멘트인지 항상 궁금했다.
드디어 시작된 음악 경연 대회.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보컬 등 다양한 부문 중에서 맨 첫 번째 순서는 피아노 경연이었다.
준희는 이제껏 남들에게 보여 준 적 없는 진지한 얼굴로 심사에 임했다.
* * *
“김하진 학생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다음은 이주노 학생 준비 부탁드리겠습니다.”
심사에 집중하고 있다 보니 시간은 빨리 갔다.
4번 참가자까지 연주를 마치고 다음은 드디어 주노가 연주할 차례가 되었다.
앞선 4명의 연주는 모두 나무랄 데가 없었다.
음악과 애들 사이에서 펼쳐진 치열한 예선을 뚫고 올라온 애들인 만큼 모두 나무랄 데 없이 연주를 잘했다.
가끔 긴장해서 실수를 하는 녀석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다들 수준이 높았다.
준희는 가장 좋은 자리에서 연주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는 데 만족했다.
물론 그녀의 마음 한편에는 빨리 이주노의 연주를 듣고 싶다는 생각도 있긴 했지만.
준희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강당에 모인 다른 학생들도 이주노의 출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주노가 나와서 다른 학생들과는 차원이 다른,
예술적인 연주를 보여 주는 것을.
“다섯 번째 차례는 이주노 학생입니다. 학생 여러분들은 박수로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열띤 박수와 함께 이주노가 단상으로 올라왔다.
그랜드 피아노 위에 앉아 한동안 심호흡을 가다듬던 주노가 연주하기 시작한 곡.
그것은 쇼팽의 발라드 1번(Ballade No.1 In G Minor, Op.23)이었다.
1836년에 작곡된 쇼팽의 첫 번째 발라드로 그가 작곡한 4개의 발라드 중에서 가장 유명하며 많이 연주되는 곡이었다.
피아노 곡 중 최상급의 난이도는 아니나 완벽하게 연주하려면 상당한 기량이 요구되는 곡이었다.
잔잔한 느낌의 도입부에 비하여 코다(종결부)의 난이도가 악랄하기로 유명했는데, 빈번한 옥타브 도약, 왼손과 오른손의 동시 도약 등. 고도의 집중을 유지하지 않으면 미스가 날 만한 함정 구간이 많았다.
그러나 이주노가 괜히 음악 신동이라 불리우는 건 아니었다.
빠르면서도 섬세한 터치로 발라드 1번 중 그 어려운 코다 부분도 미스 없이 연주해 냈다.
서정적인 부분에서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소리가, 격정적인 부분에서는 천둥처럼 힘차면서 강렬한 소리가 연주장 내에 울려 퍼졌다.
‘역시 주노야······.’
미술과인 준희가 듣기에도 주노가 치는 피아노 연주는 확실히 앞선 4명과는 천지차이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연주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선 주노가 청중들을 향해 인사하자 학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와······ 나 눈물 나는 줄 알았어.”
“이건 뭐 볼 것도 없이 주노가 1등이네.”
학생들은 모두 주노의 우승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다른 학생들에 비해 압도적인 연주였으니까.
“이주노 학생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오늘 피아노 경연의 마지막 참가자를 모시겠습니다.”
종범 쌤의 소개와 함께 한 남학생이 단상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새하얀 조명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낸 그를 본 준희의 눈이 커졌다.
‘엥······? 쟤가 왜 저기에 있어?’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자세를 가다듬고 있는 남학생은 김민준이었다.
동명이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 김민준이었다고?
천천히 손을 올려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하는 민준.
쇼팽의 발라드 1번의 도입부와는 180도 다른······.
웅장한 반주가 강당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민준이 연주하기 시작한 곡은······.
슈베르트의 마왕(Erlkönig)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