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satile herald genius RAW novel - Chapter 55
55화 전학생 (1)
* * *
그날 점심시간 교내 식당.
나는 엘레나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가연 예고가 일반 고등학교와 다른 점 중 하나.
그것은 학생 식당은 배식제가 아니라 각자 원하는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한식, 중식, 일식, 양식 등 그 메뉴도 다양하다.
“어떤 거 먹고 싶어?”
“······한식.”
“한식이 먹고 싶구나. 외국에서 와서 피자나 이런 거 먹고 싶을 줄 알았는데······.”
“로마에서는 로마. 한국에서는 한국.”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라는 속담을 말하고 싶은 걸까.
“음식 받으면 저쪽 테이블로 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응.”
나는 오늘 중식이 먹고 싶었기 때문에 짜장밥을 주문했다.
그리고 군만두까지. 음식을 받은 후 테이블에 앉아 엘레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얼마 후 엘레나가 트레이를 위태위태하게 들고 온다.
“조심해야지.”
“응.”
뭘 주문했으려나······ 하고 녀석이 가져 온 음식을 확인해 봤다.
커다란 스테인리스제 그릇에 담겨 있는······ 고사리, 당근 등 푸짐한 야채.
먹음직스러운 반숙 계란 위에 고추장이 듬뿍 올라와 있다.
‘얘 괜찮으려나······.’
불안했는데 역시나 괜찮지 않았다.
섞지도 않고 숟가락으로 밥과 고추장 덩어리를 퍼서 입에 가져가는 것을 보고서······.
나는 바로 엘레나를 저지했다.
“어머니가 한국인이더니 집에서는 한식 안 해 주냐?”
“응. 우리 엄마 요리 싫어해.”
아하······ 그래서 비빔밥을 안 먹어 본 거군.
숟가락을 들어 시계 방향으로 돌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응? 뭐 하고 있어?”
이거 참······ 직접 보여 주는 게 빠르겠네.
나는 숟가락으로 비빔밥을 직접 비벼 주었다.
점점 빨간 색으로 변하는 비빔밥.
좀 맵긴 할 것 같다.
“매울 텐데 괜찮아?”
“매운 건 괜찮아. 멕시코 요리 좋아해.”
“멕시코도 매운 요리로 유명하긴 하지. 그럼 다 됐으니까 먹어 봐.”
“응.”
아니나 다를까.
한 입을 먹은 엘레나의 얼굴이 몹시 빨개졌다.
* * *
“매운 거 먹었을 땐 우유가 최고야. 한국에서 살려면 꼭 기억해야 하는 생활 팁. 알았지?”
“응.”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그녀는 500밀리 우유를 빨대로 흡입하고 있었다.
점심도 먹었겠다. 본격적인 학교 안내를 할 차례다.
학생 식당에서 나와 운동장을 가로 질러 강당으로 향했다.
각종 콩쿠르나 음악회가 열릴 정도로 크고 화려한 가연 예고 강당.
“어때. 웬만한 극장 못지않지?”
“응. 멋있어.”
해외에서 지냈던 엘레나도 감탄한 듯 DSLR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 댄다.
그랬지. 이 녀석은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했다.
삼명 아트리움에서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달려가 사진부터 찍고 본다.
그다음에는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니 점심시간 틈틈이 농구를 하고 있는 남학생들이 있다. 농구에는 별 관심이 없는지 사진은 한두 장 찍고 만다.
체육관 다음으로 가연 예고의 명소를 이곳저곳 돌았다.
식당에 딸린 식물원이라든지.
커플들의 명소로 알려진 강당 옆 화원이라든지.
이곳저곳을.
“그럼 이제 본관으로 돌아갈까?“
“응.”
본관도 대충 설명은 해 두어야 할 것 같다.
교무실 위치나 미술실, 음악실, 도서실, 정보화실 위치 등등······ 그리고 동아리 방도.
나는 본관 이곳저곳을 엘레나와 함께 둘러보면서 소개했다.
역시 엘레나는 외모 때문인지 어디를 가도 쳐다보는 시선이 많았다.
“쟤가 그 전학생이야?”
“예쁘게 생겼다. 확실히 혼혈이라 뭔가 다르네.”
엘레나는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내 뒤에 숨어서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이쪽은 동아리 방인데······.”
동아리에 대해서도 간단히 소개했다.
가연 예고에는 다양한 동아리가 있다.
독서, 밴드, 연극, 클래식, 미술, 축구, 농구, 배드민턴 등등.
동아리에 대해서도 간단히 설명을 해 주었다.
띵동댕동.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
슬슬 반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엘레나가 뒤에서 내 소매를 잡았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 그림······.”
그녀의 눈앞에는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엘레나는 그 앞에 서서 카메라를 들고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뭐길래 하고 봤더니 교내 사생 대회 수상작이 걸린 액자였다.
금빛 액자 안에 들어가 있는 내 그림.
사생 대회 때 석촌 호수에서 그린 마법의 성.
하늘색 성과 흰 벽돌 다리. 흩날리는 단풍잎이 어우러진 한 폭의 수채화.
엘레나는 그 그림이 마음에 들은 모양이다.
카메라를 들고는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었으니까.
“이 그림······ 네가 그렸어?”
“응. 뭐······ 그렇긴 하지.”
“그림 잘 그리는 사람.”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해맑게 웃는 엘레나.
뭔가 쑥스러우면서 뿌듯한 기분이었다.
* * *
방과 후 가연 예고 후문.
가연 예고 학생들은 술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후문에 주차돼 있는 페라리 때문.
“대박. 이 페라리 뭐냐?”
“누구 차야?”
웅성거리면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학생들.
그리고 페라리 안에서 걸어 나오는 한 남자.
턱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중년의 외국인 남자.
걸음걸이부터가 당당했다.
“무슨 영화배우 같아.”
“맞아. 마벨 영화에 나오는 누구 닮은 거 같은데.”
엘론은 선글라스를 낀 채 씨익 미소 짓고 있었다.
학생들의 열띤 반응에 만족한 듯했다.
이제······ 선글라스만 벗으면 자기 사인을 받으러 몰려 들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선글라스를 벗는다.
하지만······ 그런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명색이 예술고라는데 알아보는 애가 없네.’
극사실주의 그림의 대가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나름 국제 미술계에서는 꽤 유명한데······.
살짝 실망했지만 오늘 여기 온 목적은 자신의 인지도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바로 딸 엘레나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아내는 유명 미술 대학교 강사로 초빙되어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한국어를 못 하는 데다 그림 그리는 것 외에 딱히 일이 없는 엘론은 집을 지켰다.
요즘 그림은 하루 2-3시간만 그리고 대부분은 네플릭스를 보거나 콜오브두티나 피파 같은 비디오 게임을 하면서 보냈다.
고로······ 딸 엘레나를 등하교 길에 태워다 주는 것은 엘론의 몫이었다.
후문으로 걸어 나오는 엘레나에게 손을 흔드는 엘론.
그녀는 엘론을 발견하고 그의 페라리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표정을 보니 별로 좋지 않다.
“이 차는 너무 눈에 띄어.”
엘론은 한숨을 쉰다.
4억이라는 거금을 들여 샀건만 한국인 아내도 너무 사람 이목을 끈다고 싫어한다.
좋아하는 사람은 엘론 자신뿐이다. 하지만 엘론이 이 차를 꿋꿋이 타고 다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뭐야. 엘레나 아버지야?”
“와······ 차 봐. 집도 엄청 잘사나 보다. 부럽다······.”
한국어를 몰라서 뭐라 하는 지는 거의 알 수 없었지만.
표정만 봐도 확실히 알 수 있다. 부러움이겠지.
엘론은 바로 이 맛에 페라리를 타고 다녔다.
엘론 부녀를 태운 페라리는 용산 한남동 자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전방을 주시하며 엘론은 딸에게 말을 걸었다.
“학교는 어땠어?”
“······.”
질문에 좀처럼 잘 대답해 주지 않는 딸이지만 그래도 자주 말을 걸어야 했다.
엘론은 엘레나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담임교사가 해 주었던 얘기를 가끔 떠올리고는 했다.
엘레나가 말수가 적어진 것. 그림에만 몰두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내에서의 괴롭힘이 원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어와 한국어가 동시에 사용되는 환경이었던 까닭일까. 다른 학생들보다 말을 배우는 게 늦고 감정 표현도 서투르다 보니, 어린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던 듯하다.
미리 알고 대처했어야 하는데······ 하고 후회할 때도 있었지만, 요즘 들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점이었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은 멀었지만······.
“엘레나, 아빠가 얘기하면 들어야지.”
“······듣고 있어.”
“내 말은 듣지만 말고 대답도 해야······ 이런. 또 딴짓을 하고 있군.”
카메라를 들고서 오늘 찍은 사진을 살펴보고 있는 엘레나. 오늘도 사진을 잔뜩 찍었나 보다. 중학생 때 카메라를 사 준 뒤부터 줄곧 이렇다. 하지만 사진 찍는 취미는 좋은 것이라고 엘론은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면 오늘 찍은 사진 좀 보여 줄래?”
“알았어.”
사진을 통해 엘레나와 소통할 수가 있었으니까. 그녀는 사람과 직접 말하는 것은 꺼려 하지만 자기가 찍은 사진이나 직접 그린 그림을 보고 싶다고 하면 잘 보여준다.
사진이나 그림이 부녀 사이에서 일종의 소통 창구 역할이 되어 주고 있었다.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고급 빌라.
주차장 안에 엘론의 페라리가 미끌어져 들어간다.
주변에는 전부 고급 외제차만 가득했다.
수십 억대 고급 빌라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간간이 마주칠 때 보면 거주자들도 전부 이 나라에서는 상류층인 듯했다.
80평짜리 고급 빌라.
손가락으로 지문 인식 패드를 살짝 누르니,
띠리링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엘론은 넓은 거실 한가운데 있는 ㄷ자형 소파에 앉아,
엘레나로부터 카메라를 건네받았다.
“그럼 어디 한번 볼까······.”
카메라 안에 저장된 사진을 살핀다. 오늘이 첫날이었음에도 수십 장이 넘는 사진이 담겨 있었다.
식물원이 딸린 세련된 학생 식당에다 음악회라도 열 수 있을 만한 화려한 2층짜리 강당. 간간이 교복 입은 학생들을 찍어 놓은 사진도 보인다.
“나름 이곳저곳 돌아다녔나 보네. 혼자 다닌 거야? 아니면 예린이랑 같이 다녔어?”
한 때 절친이었던 강예린이 있어서일까 엘레나는 가연 예고에 가기를 희망했다. 프랑스 국제 학교 시절 그녀가 없었다면 엘레나는 졸업도 힘겨웠을 지 모른다.
“음······.”
“아니야? 그럼 누구야?”
“······예린이 맞아.”
다행이다. 남학생이거나 했으면 얼굴이 싸늘히 굳었을 지도 모른다.
혈기왕성한 17살 남학생만큼 이 세상에 위험한 존재는 없으니까.
늑대들의 달콤한 사탕발림을 걸러 듣기에는 엘레나는 너무 순수한 애다.
“예린이라면 확실히 믿을 만하지.”
씨익 웃으면서 다른 사진들을 확인했다.
그중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성을 하나 그려 놓은 그림으로 금빛 액자 안에 들어가 있다.
“이건······ 꽤 잘 그린 수채화네.”
액자에 든 다른 수채화에 비교하면 몹시 눈에 띈다.
색채 활용도 화려한 데다 흩날리는 단풍잎을 이용해 몽환적인 느낌도 잘 주었다.
무엇보다 구도와 원근법을 잘 활용하여 입체감이 상당했다. 고등학생이라기보다는 거의 프로 화가 급의 수채화.
“응. 나도 마음에 들어.”
해맑게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는 애틋한 눈으로 사진 속 그림을 바라보는 딸.
자신의 그림을 보여 줬을 때는 저런 얼굴을 한 적이 없었는데······.
‘뭔가 질투 나는구만.’
그 수채화를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할 때.
엘레나는 이미 카메라를 들고는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엘레나, 벌써 들어가는 거야?”
“응. 그림 그리러······.”
방문이 닫힌다.
딸이 방 안에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 지는 짐작이 갔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어 놓고 그것을 그림으로 모사하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이렇게 짧았던 딸과의 대화도 끝이다.
‘휴······ 딸 키운다는 게 참 쉽지 않구만.’
한숨을 쉬는 엘론.
엘레나가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다면 훨씬 편했을 것 같았다.
캐치볼이나 농구 같은 스포츠나 2인용 게임도 같이 하고.
남자애들이 딸에게 이상한 짓 하지 않을까 걱정할 일도 없고.
아들이라······ 생각해 보면 아직 늦지 않았나. 입양이라는 길도 있으니.
밤에 아내한테 한번 얘기해 볼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
엘론은 휴대폰을 켜서 메신저를 확인했다.
[제프: 엘론. 자네 요즘 한국 생활은 어떤가?]연락을 해 온 것은 시카고 미술 대학(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동창인 제프 버클리. 마벨 코믹스의 편집장이었다.
시카고 미대는 전 세계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명문 미대. 제프 외에도 광고, 패션 디자인, 영화 등 각계각층에서 활약하는 동창이 많았다.
대학교 때부터 마당발이었던 엘론은 같은 대학교 출신 유명 인사들을 개인적으로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런 인맥이 화가로서 명성을 얻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엘론: 지낼 만하네. 음식도 생각했던 것보다 잘 맞고.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을 했나?] [제프: 다른 게 아니고 한국에서 자네 전시회를 한다면서?] [엘론: 응. 그렇게 됐어. 삼명 아트리움이라는 곳에서. 뉴욕에 있는 몇몇 미술관 못지않은 규모의 아주 멋진 곳이지] [제프: 그거 잘 됐군! 이번에 출장으로 한국에 가게 됐는데 자네 전시회도 꼭 들러야겠군] [엘론: 꼭 그렇게 하게. 그 미술관에는 내 전시회 말고도 볼 게 많으니까] [제프: 그런가? 어떤 전시물이 있지?]저번에 삼명 아트리움에 방문했을 때 보았던 전시물을 상기해 보던 엘론.
그는 문득 그림 하나를 떠올렸다.
[엘론: 그래. 직접 보면 놀랄 만한 그림이 하나 있긴 하지]어느 남학생이 그린 프로 화가 수준의 인체 소묘 작품.
그것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엘론은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