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t Druid RAW novel - Chapter (113)
* * *
도대체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모헨 대공은 한참 멍하니 있었다.
“그거라면 공녀께서는 아직 없습니다.”
“후, 다행이군요.”
대답하던 모헨 대공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몸에 지닌 거라고 콕 집어서 말한 것에 순순히 대답했다니, 방금 자신이 누군지 인정해 버린 거다.
‘말려들고 말았다.’
그것도 아들뻘밖에 안 되는 자에게.
딸이 어려서 그렇지 모헨 대공의 나이는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
‘이 자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스스럼없이 라일라스를 치료해 줬다.’
자신이라면 이럴 수 있었을까?
아니, 자신뿐만 아니라, 동지 중에 이럴 자가 있을까?
심지어 자신이 몸 바쳐 떠받들고 있던 원로원조차 조건을 내걸지 않았던가?
눈앞에 있는 자를 없애면 딸아이를 위한 포션을 주겠다고.
그리고 사실 그 포션의 능력도 믿지 못하겠다.
마커스를 바라보는 모헨 대공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어느 정도 아시는 거 같으니 말을 꺼내기가 쉽군요.”
“말씀하십시오.”
마커스가 이렇게 나올 수 있었던 건, 이 자리에 오기 전에 올보그 황제에게 상황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좀처럼 왕래가 없던 모헨 대공으로부터 왕진 요청을 받은 올보그 황제는 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지 않아도 블랙리스트에 들어가 있던 모헨 대공이어서, 상황 파악이 빨리 끝났다.
모헨 대공의 고명딸이 아프다는 건 사실이라는 것과 모헨 대공이 원로원으로부터 파문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
올보그 황제는 이 기회에 제피크 마탑이 있는 베일에 싸인 빌리드 공국 분위기를 보고 오는 게 어떻겠냐고 마커스에게 말했다.
이에 마커스는 잘됐다고 생각하고 왕진을 수락했다.
사실 마커스는 거기서 더 나아가 생각했다.
스파이.
모헨 대공을 자신의 정보원으로 끌어들이기로 생각했던 것.
“사실, 지금 내 상황이 조금 복잡합니다.”
마커스는 모헨 대공의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도록 경청한다는 뜻으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모헨 대공의 이야기는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자에게 내 상황을 털어놓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 대륙 연합조직이, 노아 교단이 마신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역으로 원로원을 비롯, 마신의 수하들이 그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도 잘 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자들이지.’
모헨 대공은 마음을 다잡았다.
“말하기에 앞서 약조를 해 주면 좋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나는 상관없습니다. 부디 내 가솔은 살려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공국민들도.”
마커스는 모헨 대공의 눈을 직시했다.
‘거짓이 없는 말이다.’
판단을 내린, 마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단, 공녀님은 요양이 필요하겠습니다. 제가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을 알아보겠습니다.”
명백한 도피처를 마련해 준다는 뜻.
모헨 대공의 눈빛이 촉촉해졌다. 그렇다면.
“원로원이라는 집단이 있습니다.”
모헨 대공의 이야기는 마차가 제피크 마탑에 향하는 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마차가 제피크 마탑에 도착할 무렵, 모헨 대공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단한 자다. 나라면 당장 목에 칼부터 들이댔을 텐데, 하긴, 그러니까 저 나이에 그만한 위치에 오른 것이겠지. 이자라면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마커스를 바라보는 모헨대공의 눈빛이 변했다. 신뢰하는 눈빛이다. 거기에 의지하는 마음도 아주 조금.
“좋습니다. 율리시즈 대장의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저 또한 모헨 대공 일가의 신변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커스와 모헨 대공, 두 사람은 후련한 표정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 * *
“우와 여긴 엄청나군요.”
상공에서 내려다볼 때 짐작을 했지만, 제피크 마탑의 규모는 엄청났다.
“하하하, 우리 빌리드 공국의 자랑이지요.”
“그럴 것 같습니다. 제가 많이는 아니지만, 마탑 몇 군데를 다녀봤는데, 제피크 마탑을 능가하는 곳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 이건?”
마력이 넘쳐나는지, 입구부터 본관까지 무빙워크가 깔려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무빙워크를 타고 주변을 둘러봤다. 계절을 알 수 없는 풀과 나무, 그리고 꽃들이 만발했고, 분수에는 색색으로 물들인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력이 넘쳐난다는 걸 과시하는 거로군.
“대범하다고 하시더니, 정말이군요. 다들 이걸 타면 놀라시는데.”
우리를 맞이하러 입구까지 나온 마탑주가 입을 열었다.
“하하, 전 이걸 처음 타고 어찌나 놀랐는지. 옆에서 이 사람이 손을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넘어졌을 겁니다.”
데빌몬스터의 실험장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제피크 마탑은 밝고 온화했으며, 마탑주 또한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곳에서 그런 악독한 놈들이 만들어졌을까.
의문이군.
“자, 들어가시죠.”
본관에 들어가면서 팅거, 벨라 그리고 카이에게 지시를 내렸다.
-카이는 나를 따라 들어오고, 팅거와 벨라 너희는 외부를 돌아다녀. 알지? 조금이라도 수상한 곳이 나오면 자세히 돌아다녀 보는 거.
팅거와 벨라는 쿨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야, 나는 조금 더 큰 걸 걸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게 뭐야? 콩알만 해서 어디 자랑이라도 할 수 있겠어? 난 다음번에 크게 만들어 줘.]카이가 퉁명스럽게 불만을 토로했다.
[카이, 네가 좀 참아. 마커스 쟤가 좀 그래. 통이 작아.] [네가 이해해. 어쩌겠어. 천성이 쩨쩨한걸.]-뭐야?
허, 말이 안 나온다.
-카이야, 네 목에 걸린 그건 말이다. 목걸이가 아니란다. 감시 카메라 같은 거라고!
나는 카이에게 목에 걸린 수정구가 뭔지 설명해 줬다.
[흥, 하여간에 돌아가면 이따만 한 거 해 줘. 자고로 보석은 크고 번쩍이는 게 좋지.]-알았어. 오늘 일 잘하면 네가 원하는 크기대로 만들어 주지.
[정말이지?]-그래.
[에헴. 그럼 가 볼까?]모습을 지워서 눈엔 보이지 않지만, 거만하게 고개를 쳐들고 들어갔을 게 뻔하다.
그렇게 나는 세 녀석을 마탑을 수색하라고 보낸 후, 사람들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와!”
이번에는 진심으로 놀랐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건 온통 책이었다.
중앙 로비는 텅 비어 있었고 사방으로 원통형으로 둘러가며 책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도대체 몇 층이야?
“4층이죠. 모두 다 책장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내 궁금증을 알았는지, 모헨 대공이 말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지하에 있는 책까지 포함하면 우리보다 장서를 많이 보관하고 있는 마탑은 없을 겁니다.”
옆에서 마탑주가 말을 얹었다.
“그래 보이네요.”
나는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며 책을 찾고 있는 마법사들에 시선을 돌렸다. 책을 찾고 있는 마법사, 책을 읽고 있는 마법사, 책을 들고 어디론가 가는 마법사.
“마법사도 아주 많아 보이는데요?”
“하하하, 우리 마탑은 마법사에 대한 처우가 좋은 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졸업한 후에도 계속 남아서 연구하길 원합니다.”
자랑하는 마탑주를 따라 걸어가면서 주변을 훑었다. 낯선 사람이 등장해서 그런지, 우리 쪽을 힐끔거리는 마법사들이 제법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그렇군요. 여긴 어떤 연구를 주로 하지요? 콘스턴 왕국의 마밸리의 경우엔 마도구 위주로 연구하는 마법사가 많던데.”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특히, 콘스턴, 마밸리라는 단어가 잘 들리도록.
주벨로에게 들었던 이야기인데, 마법사들은 한 번쯤은 마밸리에 가 보고 싶어한다고 했다. 하긴 샤렌도 마밸리에 간다고 했더니, 좋아했었지.
그래서일까, 마법사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들려왔다.
“마밸리? 나 거기 꼭 한번 가 보고 싶은데.”
“나도. 기회가 되면 거기 연구소에 가 보고 싶어.”
“너도? 나도 요즘 연구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여기선 안 될 거 같아.”
“나도 그래. 이딴 거나 연구해야 한다니.”
흐음, 저 팀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가 보군. 나는 불만을 토로하는 무리를 눈에 담았다.
“난 우리 마탑이 좋아. 여기만큼 실습 환경이 좋은 곳이 또 어딨겠어?”
“하긴, 콘스턴 왕국에서는 사람도 아닌 동물들에게 마법을 시전해 보려면 허락을 받아야 한다던데?”
확실하군. 여긴 동물 실험을 하는 곳이 맞군.
그렇다면 연구실은 어디지? 동물들은 어디에 갇혀 있는 거지?
이 건물 안에 있다면 소리가 들릴 건데.
나는 설명을 들으면서 감각을 끌어올렸다. 눈, 귀, 그리고 마나감응력까지.
“자, 여기까집니다. 그럼 제 방으로 갈까요? 마침 좋은 차가 들어온 게 있는데…….”
마탑주는 4층에 다다르자 본인 방으로 가자고 했다.
“위층은 뭘 하는 곳이에요?”
“아, 거긴 그냥 마법사들 휴식 공간입니다. 올라가 봤자, 볼 게 없습니다. 하하하.”
마탑주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지만, 나는 그게 거짓말인 걸 안다.
왜냐하면.
[크윽! 아프다.] [아포오!] [괴로워.]동물들이 괴로워하는 소리가 바로 내 머리 위에서 들리니까.
게다가 카이가 화를 내고 있었다.
[와, 인간들 나쁘다. 야, 마커스!]팅거와 함께 다녀서 그런지, 이제는 말투까지 똑같냐.
-왜? 애들이 괴롭힘 당하고 있어?
[그래. 여기 쓸어버릴까?]-안 돼.
[왜? 기분 나쁜데?]-기분대로 살면 안 돼. 지금 네가 기분 나쁘다고 입김을 불어버리면 네가 싫어하는 인간들은 물론이고 동물들까지 다 죽는다.
[쳇.]-나중에, 걔들 구하고 나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일단은 참아 준다.]-장하다. 걔들 불쌍하면 마나나 불어 넣어 줘. 조금만 참으면 구해 준다는 말도 해 주고.
[알았어.]-알지? 내가 널 자랑스러워한다는 거.
[흥, 당연하지.]짧은 앞다리를 옆구리에 갖다 대면서 거만하게 으쓱거리는 카이 녀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도 저렇게 칭찬을 해 줘야 말을 잘 들으니, 카이에겐 반드시 칭찬의 피드백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공 전하.”
마탑주가 운을 띄우면서 뜸을 들였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모헨 대공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눈치였다.
“마탑주님, 밖에 나가봐도 될까요?”
“예, 무빙워크를 자세히 보고 싶어서요.”
“자동보도를 말하는 거군요?”
“아. 예. 아무래도 부모님이 연로하시다 보니, 관심이 가네요. 하나 설치해 드리고 싶은데.”
정정한 율리시즈 백작 부부를 떠올리자, 살짝 죄책감이 들었다. 뭐, 지금부터 신경을 쓸 연세니까.
그리고 진짜로 하나 만들어 드릴 생각이다. 이왕이면 계단에도.
“이야, 효자시군요. 알겠습니다. 둘러보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나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줬다.
딸깍, 문을 닫자마자 대화가 시작됐다.
“로이튼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로이튼 님이?”
누구길래 모헨 대공이 ‘님’이라고 부르지? 3층으로 내려가면서 귀를 기울였다.
“오랜만이오, 모헨 대공.”
“로이튼 님을 뵙습니다.”
말투에서 두 사람의 지위가 느껴졌다.
“율리시즈 공자와 함께 왔다고?”
“예. 그렇게 됐습니다.”
“아, 사정은 들었소. 딸이 아팠다고?”
“예.”
“대공 얼굴을 보니, 괜찮아진 거 같군.”
“예, 고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 이제 치료만 꾸준히 잘 받으면 희망이 있다더군요.”
“안 됐군. 어린아인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든, 좋은 기회인 거 같소. 이참에 그자에게 운을 띄워 보시게.”
“운이라 함은 뭘 말씀하시는 건지요?”
“젊은 사람이니, 힘, 권력, 그리고 능력 좋아하지 않겠소? 보아하니, 이 나라, 저 나라 왕들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다던데. 우리 쪽으로 끌어와 보시게.”
“아…….”
“그자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모헨 대공에게는 큰 상을 내리지. 아, 미리 말을 해 두겠는데, 이건 플린 의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오, 알겠소?”
플린 의장은 원로원 의장이라고 모헨 대공이 말해 줬다. 그렇다면 원로원도 분열이 생긴 건가?
이거 좋은 기회인데?
밖으로 나오니, 나무 위에서 팅거와 벨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저기 갇힌 동물들은 괴로워하고 있는데 실실거리기냐?]팅거가 버럭 화를 냈다.
-아, 좋은 생각이 나서. 그런데 동물들이 아파한다고?
[그래. 걔들이 얼마나 아파하는데.]대화를 들어보니, 바로 끝날 건 같진 않네.
“은신”
은신을 한 후, 팅거와 벨라를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