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t Druid RAW novel - Chapter (300)
“보라색 빛은 분명 드래곤 관에서 쏜 게 틀림없어.”
나는 드래곤 관으로 걸어가면서 전투 상황을 복기했다. 주변이 회색 마기로 시야가 차단되었을 때, 눈을 터 준 보라색 빛. 그건 분명 드래곤의 기운이었으며, 드래곤 상이 쏘아 준 빛이었다.
“올보그 황제도 모르는 일이라고 했었는데. 카이가 위험에 빠진 것 같아서 도와준 건가?”
나는 가끔 나와 눈을 마주치던 석상을 떠올리며 드래곤 관에 입장했다.
후욱. 향긋하고 신선한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이거……!”
애틀리스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기운의 공간이 바로 드래곤 관이었다.
마나, 신성력, 거기에 충만한 드래곤 기운까지.
그렇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향긋하고 고결한, 거기에 성스러운 기운이 밀려든 적은 없었는데.
갑자기 강렬한 빛이 내 눈앞에서 번쩍였다.
“성물?”
나는 빛을 따라 걸어갔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강한 빛이 쏘아지는 드래곤 관은 너무 밝았다.
빛의 정체는 드래곤 상.
드래곤 상에서 뿜어내는 빛에 주변이 뿌옇게 보였다. 팅거, 벨라도 실루엣만 구별될 정도였다.
녀석들이 폴짝폴짝 뛰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카이, 빨리 와.] [여기, 이리로!]녀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장소는 바로 드래곤 상 아래 단상 옆.
-카이는?
그러고 보니, 들어올 때부터 카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걸 이제 깨달은 거다.
[카이, 저기에!]팅거가 날개로 가리키는 곳은 드래곤 상이었다.
드래곤 상의 비늘은 지금까지 보던 색이 아니었다. 선명도가 훨씬 높아졌다고 할까. 당장이라도 승천할 것 같은 사실감이 돋보였다.
“이것도 신성력 덕분인가?”
빛에 적응을 하니, 시야가 넓고 깊어졌다.
“이 정도 시력이라면 어쩌면 마기 속에서도 보일지도 모르겠군.”
고개를 들어 카이를 찾으니, 카이는 드래곤 상에 구슬이 있던 자리, 앞발에 가 앉아 있었다.
카이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고 있었다.
나도 자연스럽게 카이가 보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빛?”
정말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때.
훌쩍. 카이가 뛰어내렸다.
톡. 바로 내 옆으로 떨어졌다. 그 옆으로 팅거, 벨라까지.
쏟아지던 빛은 모조리 두 개의 드래곤 상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네 개의 드래곤의 눈동자에서 빛이 쏘아졌다.
바로 내가 어둠 속에서 봤던 보랏빛이었다.
네 개의 보랏빛 줄기가 각각 우리 넷에게 떨어졌다. 빛은 이어 투명하게, 노랗게, 파랗게, 초록으로, 붉게도 변했다. 지금까지 유리아가 내뿜었던 모든 색의 빛의 색으로 변하면서 몸으로 스며들었다.
유리아가 소환됐구나.
다섯 개의 성물 역시 우리 주변을 유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단상 위에 서서 떨어지는 빛을 온몸으로 받았다.
그렇게 끊임없이 몸으로 스며들던 빛이 화악. 내 몸에서 뿜어져 나갔다.
마치 드래곤 상이 빛을 내뿜는 것과 같이 내 온몸이 발광했다.
그건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카이, 팅거, 벨라까지.
우리는 강한 빛을 내뿜으며 서 있었다.
마치 드래곤 상이 빛을 발하는 그것과도 같이.
몸속으로 계속 파고들던 빛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빛은 사라졌고 손에 띠가 둘러졌다.
카이는 나와 같은 위치인 앞발에. 팅거, 벨라에겐 목에 선명한 띠가 생겼다.
방금 스며든 기운의 띠라는 건 그냥 알 수 있었다.
“이 띠가 바로 테페론의 축복이군.”
이것 역시 저절로 알게 된 사실. 그리고 이 띠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도 안다.
그렇다면 이 능력, 당연히 써야지.
나는 손으로 띠를 건드렸다.
디이잉.
명쾌한 진동음.
이어 보이는 장면.
넓은 호수가 보였다. 호수에서 물결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이 뭍으로 걸어 나왔다.
내가 아는 장소였다. 그리고 저놈들은 사람이 아니다.
[데스케이드다!]벨라가 외쳤다.
[다들 저리로 도망쳤군. 비겁한 놈들!]카이가 빈정거렸다.
[마신은? 그놈은 어딨지?]팅거의 목소리와 함께 장면이 바뀌었다.
마신이 웬 놈과 함께 서 있었다.
역시 내가 아는 장소.
데스케이드에 있는 마물의 지부였다.
디이이…… 잉.
진동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품에서 울린 것.
테페론의 훈장, 그리고 드래곤 구슬. 거기에 테페론의 눈물이 담긴 병까지.
이 모든 것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어, 저기. 저놈 주변에 검은 띠가 보여.]카이가 소리쳤다.
[마기다, 마신 놈이 마기를 흡수해 몸을 완전히 감싼 거다.]용사님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의 목소리와 상반된 분위기.
-마신에게 원래 마기가 많잖아요. 그걸 두른다고 하는 거예요?
마신에게 마기가 흘러나오는 게 굳이, 새로울 게 있나?
[저건 다르다. 암흑의 방패. 신성력, 마나를 완벽하게 흡수해 버리는 거다.]-파이테스 방패와 다른 거예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냥 마구 빨아들이는 놈이다. 저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희생했는지 모른다.]-그럼 그때도 저 방패를 둘렀다는 말이네요.
[그랬지. 그러니 지금은 상관없다. 너희들에겐 테페론의 축복이 있으니까.]순간 테페론의 축복을 어떻게 사용하면 될지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마신이 어디 있는지, 아는 상황에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지.
* * *
마신은 데스케이드 지부 2층 창가에 서서 온천호수를 내려다봤다.
지난번 앨빈, 에반과 대화를 나눴던 방이었다.
촤아악. 촤아악, 쏴악.
데스케이드의 온천호수에서 마물이 걸어 나왔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마물들이 쉴 새 없이 뭍으로 빠져나왔다.
시간이 지나도 마물들이 호수에서 뭍으로 빠져나오는 행렬은 계속 이어졌다.
마신은 안광을 번뜩이며 그들을 하나하나 주시했다. 그러다 쏴아! 강한 마기가 풍기면서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앨빈이었다.
후웅.
앨빈은 즉시 마신에게로 날아왔다.
“주인님.”
“룬데릭과 에반이 소멸했군.”
마신이 앨빈의 생각을 읽은 것.
“죄송합니다.”
“그놈들을 너무 얕잡아 봤을 뿐이다.”
사실이었으니, 앨빈은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래도 룬데릭과 에반은 최선을 다했다.”
마신이 쫙! 손뼉을 쳤다.
그러자 그들 앞에 낯선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피크 삼인방이 그들이었다.
블록이 마신을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손이 올라갈 것 같았지만, 블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두 손, 두 발이 마기 족쇄로 꽁꽁 묶여 있었다.
“이 사람들은 상관없다. 풀어 줘라.”
블록과 마찬가지로 사지가 묶인 칼레이가 소리쳤다. 옆에 같은 처지인 세니아는 그저 두 마물을 노려볼 뿐이었다.
마신은 그들을 지켜보며 입꼬리를 귀 끝까지 치켜 올렸다.
“네놈은 천천히 죽여 주지. 기다려라.”
마신은 호헨 베이크의 후손에게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 줄 참이었다. 그래서 그가 바라 마지않았던 인간 세상이 어떻게 멸망하는지 보여 줄 것이다.
“너는 네 세계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지켜보게 될 것이다.”
짝! 마신이 다시 한번 손뼉을 쳤다. 제피크 삼인방이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앨빈은 알고 있다. 그들은 앞으로 마신이 행하는 모든 것을 지켜볼 운명이라는 것을.
앨빈은 다시 조금 전 이야기로 돌아왔다.
“놈들은 지금 승리했다고 기뻐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방심한 틈을 타서 다시 공격하면 승산이 있을 거로 생각됩니다.”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마신은 온천 주변에 빼곡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마물들을 내려다봤다.
앨빈이 말한 대로 어설픈 인간들은 자신들이 마물을 없앴다며 승리를 자축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모든 인간이 다 같은 생각을 할까?
마신은 자신을 향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검을 날렸던 인간을 떠올렸다,
‘그놈은 분명 나를 향해 던진 것이다. 보이지도 않는 나를 향해.’
마신은 그 당시, 자칫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장 이리로 도망쳤다.
그건 지금까지 늘 해 왔던 일이었기에 그리 어렵지도, 치욕스럽지도 않았다.
마신에게 제일 중요한 건 생존이니까.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것이고.
“그러시다면 주인님께서 저들을 소환한 걸 아는 인간이 있기라도 하다는 말씀입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룬데릭과 에반이 동시에 소멸했다. 만약 그들 둘을 한 인간이 소멸시켰다면 그놈은 보통 인간이 아니야.”
마신은 앨빈에게 말하면서 마커스를 떠올렸다.
‘만약 한 놈이 두 녀석을 다 죽였다면 그 녀석밖에 없다. 아니 애초에 룬데릭이나 에반을 건드렸던 놈은 영웅들밖에 없었다.’
마신은 그게 걱정이었다.
도대체 그놈이 얼마나 강한 놈인지. 그리고 과연 테페론 신과 관계가 없을 것인가.
“상황을 설명해 보라.”
유리아가 돌아다니고, 신성력이 강하고, 게다가 드래곤 기운이 폭발하듯이 강했다는 말이 앨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보고를 받는 마신의 눈동자가 점점 붉게 변했다. 타오르듯 변한 눈빛.
마신은 남겨 놓은 마기 조각으로 대륙을 훑었다. 만약 그놈이 테페론의 선택을 받았다면 지금 데스케이드로 오고 있을 터.
카이스가 많은 영웅과 사제를 데리고 데스케이드로 쳐들어왔을 때처럼.
그런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륙은 움직임이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움직임이란 마나나 신성력을 지닌 기사들을 말했다. 애도식에 참석한 인간들이 돌아가는 것만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이런 건 예상 밖인데.’
마신이 눈을 굴리며 대륙 곳곳을 훑으면서 앨빈의 보고를 들었다.
“아, 주인님께서 입구를 열어 주셨을 때, 갑자기 드래곤 기운이 들이닥쳤습니다. 하마터면 그대로 기절할 뻔했습니다.”
“드래곤의 기운이?”
“예. 여태 그렇게 강한 드래곤 기운은 처음이었습니다.”
“흠, 드래곤 놈들이 깨어났단 말이냐? 하긴 나의 파이테스들이 속절없이 죽어 버리긴 했지.”
마물들이 드래곤 기운을 무서워하긴 하지만, 파이테스는 드래곤 기운에 유난히 약하다.
“드래곤 기운이라, 지금까지 그렇게 강했던 적이 있었나?”
“없었습니다.”
“인간들이 드래곤 비늘을 먹고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했었지?”
“예. 마기중독에 강한 것도 다 그런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 소문의 중심이 바트롱가 후손이라고 했었지?”
“예.”
“그놈이군.”
이제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바트롱가 놈이 괴물을 낳았군. 그렇다면 더 크기 전에 죽여야지.”
마커스가 자신이 짐작했던 대로 괴물일지, 아니면 애틀리스 후손의 꼭두각시인지 모른다.
알 필요도 없었다, 죽이면 되니까.
마신이 바라는 건 테페론의 모든 것을 없애는 것.
마신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지팡이 손잡이 부분에 지금까지 없던 구슬이 붙어 있었다. 데스케이드에서 건져 낸 암흑의 구슬, 마신이 마기를 응축해 놓은 구슬이었다.
마신이 지팡이를 바닥에 찍어 내렸다.
쾅. 소리와 동시에 온천호수 주변이 새카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물들이 흡수한 순도 높은 마기였다.
마기는 마물 지부 2층으로 빨려 들어갔고, 마신은 고스란히 그 마기를 흡수했다.
마신의 몸과 지팡이의 구슬이 번쩍번쩍 검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마신은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안광을 번뜩였다.
화르륵.
불꽃은 순도 높은 마기를 집어삼키면서 덩치를 키워 나갔다.
어느새 불꽃은 띠가 되어 마신을 에워쌌다.
한 겹, 두 겹, 세 겹.
그 후로 두 겹의 띠가 더 만들어졌다.
쾅!
마신은 불이 넘실거리는 지팡이를 내려쳤다.
화르륵. 마신 주위의 불꽃의 띠가 순식간에 마신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암흑의 방패. 마신만이 지닐 수 있는 방패가 드디어 완성되었다.
“아하하하하하!”
마신의 웃음소리가 지부 밖으로 퍼져 나갔다.
쾅!
마신이 또다시 지팡이를 내려쳤다.
지팡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 불꽃은 옆에 꿇어앉고 있는 앨빈으로 날아가 몸을 에워쌌다. 방패를 입은 것.
그러나 마신과는 달리 한 겹으로 끝났다. 앨빈의 마기 수준으로는 한 겹이 한계였던 것.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마물에겐 크나큰 영광이었다.
“주, 주인님!”
앨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마신을 부르며 감동했다. 그러나 그 감동의 순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후우웅.
갑자기 앨빈의 몸에 둘러진 방패가 일렁였다. 따라 앨빈의 몸이 휘청거렸다.
이어 순식간에 마기가 훅! 하고 빠져나갔다.
“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앨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쩌저적!
방패가. 마기로 둘러진 방패가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극심한 통증, 고통이 찾아왔다.
“아, 아아악!”
앨빈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마신은 그런 앨빈을 돌아볼 수 없었다.
그에게, 마신에게 둘러싸인 암흑의 방패가 일렁거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