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on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175)
마운드의 빌런-175화(175/285)
마운드의 빌런 175화
지명타자.
투수를 대신하여 타격만 전문으로 하는 타자를 말한다.
이런 지명타자제도는 베이스볼의 역사와 함께한 건 아니었다.
메이저리그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내셔널리그에서는 이 지명타자 제도가 없었다.
투수도 타석에 들어서야 했고 그것이 본래 룰이었다.
하지만 아메리칸리그가 들어서면서 리그의 흥행을 위해 타격이 약한 투수보다는 또 다른 강타자가 들어서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졌지만, 내셔널리그는 여전히 지명타자제도를 도입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교류전이나 월드시리즈같이 다른 리그의 팀이 맞붙을 때는 홈팀이 속한 리그의 규정을 따르게 되어 있었다.
[정하성 선수, 오늘 경기에서 앞서 두 번의 타격기회가 있었습니다만, 한 번은 삼진, 한 번은 중견수 플라이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오늘 때려낸 타구들의 질이 모두 나쁘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타구들이 쭉쭉 잘 뻗어 나갔죠?] [예. 그리고 정하성 선수는 교류전 마지막 경기에서 홈런을 때려냈던 전례도 있습니다.] [만약 오늘 경기에서 안타를 기록하게 된다면 정하성 선수는 한국인 최초로 월드시리즈 안타를 기록하게 됩니다.] [하하! 이거 그렇게 된다면 정말 엄청난 일이 될 거 같습니다.]두 기록을 달성할 가능성이 남아 있는 상황.
희박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경기를 보는 한국 팬들의 마음에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뻐어억-!
“스트라이크!”
[초구 스트라이크가 꽂힙니다. 호수비가 나와준 덕분일까요? 90마일 초반까지 떨어졌던 팀 린스컴의 구속이 95마일까지 찍혔습니다.] [하필이면 정하성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니 구속이 올라오네요.]해설진이 걱정하고 있었지만 하성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제야 좀 칠 만한 속도로 나오네.’
일반적으로 공이 느리면 때리기 쉽다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로 선수들은 공이 느려지면 오히려 적응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팀 린스컴은 오늘 경기 내내 95마일이 넘는 공을 뿌렸다.
그의 평균 구속보다 더 빠른 공들을 던진 셈이다.
하지만 경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점점 구속이 떨어졌었는데, 그게 갑자기 살아난 것이다.
하성 입장에선 오히려 지금이 타이밍을 잡기 더 쉬웠다.
그리고 그건 바로 드러났다.
딱-!!
[2구를 강타!]몸쪽을 파고드는 공을 그대로 당겨쳤다.
[잘 맞은 타구! 쭉쭉 뻗습니다!] [아! 이건 큰데요!]잘 맞은 타구가 외야를 향해 날아갔다.
외야수가 쫓아가는 걸 포기할 정도로 큰 타구였다.
하지만 더 이상한 건 타자인 하성이 타구를 바라보지도 않고 뛰지 않은 것이다.
‘빗맞았어.’
하성은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으로 배트의 중심에서 벗어난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하성의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파울!!”
[아~ 이번 타구 파울이 됩니다. 마지막 순간에 휘어져 나가는 타구!] [아쉽습니다! 아주 약간 휘어져 나가면서 홈런이 무산됐습니다!]무척이나 아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브먼트가 살아 있다.’
린스컴의 볼 끝이 살아 있었다.
그렇기에 배트의 중심에서 벗어났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쉬울 수 있지만, 하성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브먼트의 변화가 일어나는 게 느려졌어.’
본래 린스컴의 무브먼트는 홈플레이트에 도달하기 전부터 어지럽게 일어나는 편이다.
그것이 베스트 컨디션일 때의 린스컴의 공이다.
하지만 지금은 힘이 많이 떨어지면서 그런 공은 나오지 않았다.
무브먼트가 살아 있지만, 홈플레이트의 앞에서 일어난다.
‘즉, 공이 홈플레이트에 도달하기 전에는 스트레이트 패스트볼이란 소리지.’
스트레이트 패스트볼.
한마디로 무브먼트가 없이 홈플레이트 위를 지나는 공을 의미한다.
이런 공의 단점은 타자가 배트의 중심에 맞추기 쉽다는 것이다.
과거 아시아권에서는 이런 공이 직구의 이상향이라 말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쨌든 하성은 린스컴의 이미지를 수정했다.
‘조금 더 스윙을 빠르게 가져간다.’
이게 정답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했을 때 이게 가장 정답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을 내린 하성이 타석에 섰다.
[좋은 타구를 만들어냈지만, 두 번째 스트라이크가 올라가면서 볼카운트가 몰리게 되는 정하성 선수.] [이제부턴 조심스럽게 접근을 해야 합니다.]볼카운트가 몰리면서 린스컴이 빠르게 승부를 들어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성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타구를 보고 바로 승부를 들어올 녀석은 없어.’
예상은 적중했다.
퍽!
“볼.”
[빠지는 슬라이더에 배트를 내밀지 않는 정하성 선수.] [침착하게 공을 잘 보고 있습니다. 좋습니다!]예측하고 처음부터 배트를 돌릴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역시 마찬가지였다.
퍽!
“볼, 투!”
[이번에는 떨어지는 커브에 배트 내밀지 않습니다!] [정하성 선수가 공을 무척이나 잘 보네요. 미동도 하지 않으면서 브레이킹볼을 계속 참아냅니다.]두 개의 유인구에 하성이 나오지 않자 린스컴은 인상을 찌푸렸다.
‘제대로 긁힌 공들을 모두 참아냈다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 공들로 돌려세울 각오를 하고 던진 것들이었다.
그런데 모두 참아냈다.
그것도 전문 타자도 아닌 투수가 말이다.
‘승부를 짓겠어.’
린스컴은 직접 사인을 보내 의사를 확실히 표명했다.
버스터 포지는 그 모습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하성은 타격 자체를 할 생각이 없었어. 유인구가 들어올 거라 예측하고 배트를 돌리지 않은 거야.’
투구 패턴이 읽힌 건 큰 문제였다.
‘만약 패턴을 완벽히 읽힌 상태에서 정면승부를 택하는 건 위험하다.’
포지는 근접거리에서 하성의 스윙을 정확히 본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당연히 그의 스윙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만약 저 스윙이 정확한 타이밍에 터진다면 어떻게 될까?
정말 담장을 넘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린스컴에게 다른 공을 요구할 수도 없어.’
자신이 사인을 내기도 전에 나온 린스컴의 사인이었다.
그것을 거부한다는 건 에이스의 의견을 무시한다는 것과 같았다.
이제 데뷔 시즌을 치르고 있는 자신이 팀의 에이스인 린스컴의 의견을 무시할 순 없었다.
‘제대로 던져. 전력으로!’
‘그럴 생각이었다.’
결국 포지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선 하성은 그런 린스컴과 포지의 행동에서 정답을 찾아냈다.
‘승부가 들어온다.’
당연한 일이다.
지명타자도 아닌 투수를 상대로 승부를 피할 에이스는 없었다.
그리고 포지는 그걸 거부할 정도의 연차가 쌓이지 않았다.
나올 정답은 하나였다.
그걸 정확히 읽어낸 하성이 타격 자세에 들어갔다.
“플레이볼!”
[투볼 투스트라이크에서 린스컴 와인드업!]린스컴 특유의 다이나믹한 와인드업과 함께 그가 5구를 뿌렸다.
“흡!!”
쐐애애애액-!!
린스컴의 손에서 공이 떠났다.
완벽한 공이었다.
구속, 제구 모든 것이 린스컴이 원하던 대로였다.
그러나 단 하나.
후웅-!!
린스컴의 체력이 떨어지면서 악력이 줄었다.
그로 인해 공의 무브먼트가 약해지면서 스트레이트성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하성은 그것을 예측하고 정확하게 배트를 돌렸다.
그가 원하던 대로 배트 스윙을 조금 더 빠르게 돌렸다.
그걸 만들어낼 수 있었던 신이 내려준 하성의 신체였다.
세포 하나하나가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 스윙에 가속을 붙였다.
그렇게 돌아간 배트는 직선으로 날아오는 공을 그대로 강타했다.
따악-!!
[때렸습니다!!]손맛이 제대로 왔다.
그렇게 판단한 하성이 끝까지 팔로스로를 했던 배트를 그대로 던졌다.
휘릭-!!
[그리고 배트 던졌습니다!!]월드시리즈에서 나온 배트 플립.
하성은 타구를 바라보며 천천히 1루 베이스로 뛰었다.
그리고 그가 1루 베이스를 통과하고 있을 때.
“와아아아아-!!”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터졌다.
[넘어갔습니다!! 정하성 선수가 8회 초! 선취 솔로 홈런을 터뜨립니다!!]한국인 최초로 월드시리즈 홈런을 터뜨렸다.
* * *
린스컴이 무너졌다.
그것도 타자가 아닌 투수에게 말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펼쳐지자 기자실에 침묵이 흘렀다.
잠깐 동안 이어진 침묵을 깬 것은 기자의 한마디였다.
“말도 안 돼…….”
상식이 깨지는 순간을 두 눈으로 목격했지만, 그 충격에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말도 꺼내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얼마나 충격이 큰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 기사!”
“맞아.”
“빨리 써야지.”
직업정신을 떠올린 그들은 빠르게 기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인터넷에선 야구팬들의 엄청난 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하성이 솔로 홈런 터뜨린 거 맞음?
-ㅇㅇ
-점수가 안 나니까, 자기가 때려버리네.
-와…… 저게 말이 되냐?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거야?
-내가 직접 보고도 믿기질 않네.
-한국인 최초로 홈런 때린 선수가 타자가 아닌 투수다?
-이걸 믿어야 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순간이었다.
그만큼 지금 터진 홈런은 너무나 충격이 컸다.
-이제 승리투수지?
-조건은 만족했는데. 이대로 경기가 끝나야지.
-아직 자이언츠에게는 2번의 기회가 있음.
-8회 말에 하성이 마운드에 올라올까?
-110구 넘었으니 교체할 듯.
팬들의 예상은 정확했다.
[8회 말, 선취홈런을 날렸던 정하성 선수가 내려가고 어슬레틱스의 불펜이 가동됩니다!] [아…… 정말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네요.] [제가 본 게 맞나 싶을 정도의 일이 눈앞에서 펼쳐졌습니다.] [월드시리즈에서 홈런을 때려내는 선수가 타자가 아닌 투수라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중계를 하는 해설진들 역시 경악스러운 상황.
하지만 아직 경기가 끝난 게 아니니 그들은 직업정신을 발휘해 중계에 힘을 썼다.
‘이대로 끝나면 좋겠네.’
더그아웃에서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하성은 음료로 목을 축이며 생각했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길 말이다.
‘승리투수이자 결승 득점을 올린 선수라니.’
이건 하성으로서도 욕심나는 타이틀이었다.
그리고 그런 하성의 마음을 아는 것일까?
뻐어억-!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그라운드의 동료들도 힘을 내고 있었다.
하성은 그런 동료들을 응원하며 경기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이날.
오클랜드는 실점하지 않고 경기를 마무리했다.
* * *
[오클랜드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샌프란시스코를 잡아내다!] [승리투수이자 결승 홈런을 터뜨린 정하성!]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기록을 달성한 정하성!] [정하성 첫 월드시리즈에서 사고 치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선수가 된 정하성의 업적!]하성이 기록한 승리투수 겸 결승 홈런은 메이저리그 최초의 사건이었다.
당연히도 언론은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메이저리그의 120년 역사에서 최초의 일이 발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웬만한 기록들은 한 번씩 등장했고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색기록들도 모두 문서로 남긴다.
하지만 유독 한 분야의 기록은 공백으로 남은 것들이 많다.
바로 투타 겸업과 관련된 기록이다.
메이저리그 역사에 투타 겸업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레전드 플레이어인 베이브 루스가 대표적인 투타 겸업 선수였고 이후에도 몇 번의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 선수는 없었다.
그만큼 힘든 일이었고 당연히 월드시리즈 같은 큰 무대에서는 나오기 힘든 일이었다.
그걸 해낸 하성의 인지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