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on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200)
마운드의 빌런-200화(200/285)
마운드의 빌런 200화
투수가 타석에 선다.
지명타자제도가 없는 내셔널리그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아메리칸리그에선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9번 타순이 아닌 5번 타순에 배치되는 건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5번 타자 정하성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지명타자를 빼고 넣은 만큼 정하성 선수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지명타자 제도가 있는 아메리칸리그에서 지명타자를 타순에서 제외하는 건 이례적이지 않습니까?] [없다 봐도 무방합니다. 굳이 지명타자를 제외시키고 타격능력이 떨어지는 투수를 타순에 넣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한마디로 정하성 선수의 타격 실력이 다른 타자들을 압도한다 볼 수 있겠군요.] [시범경기에서 보여준 타격실력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캐스터와 해설자가 설명하는 사이.
카메라에 잡힌 하성이 본인의 루틴대로 준비를 끝내고 배트를 쥐고 타석에 섰다.
거구의 그가 자리를 잡자 배터박스가 가득찼다.
‘자칫 몸쪽으로 잘못 던지면 맞겠는데.’
텍사스의 배터리는 하성의 몸집이 생각보다 큰 것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덩치가 크다면 홈플레이트에 몸이 더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몸쪽으로 함부로 공을 붙이다가는 히트 바이 피치볼이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바깥쪽으로 공략하자.’
포수의 리드에 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인을 교환한 텍사스 배터리, 과연 정하성 선수를 상대로 어떤 공을 던질지 궁금합니다.] [조심스럽게 공략할 겁니다. 그들도 시범경기에서 정하성 선수가 보여준 능력을 잘 알 테니까요.] [걸리면 넘어갈 정도로 뛰어난 배팅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타격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파워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타격 자세를 취한 하성은 배터박스에서 투수를 노려봤다.
‘내가 투수라서 그런가. 녀석의 컨디션이 어떤지 눈에 보인다.’
하성은 투수로서 엄청난 업적을 이룬 선수였다.
당연하게도 투수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바깥쪽 패스트볼이 올 확률이 높다.’
이는 단순한 예언이 아니다.
현생과 전생까지 합쳐 경험했던 수많은 경기들 덕분에 뛰어난 통찰력이 생겼다.
덕분에 그는 투수를 보고 그가 어떤 상태인지 보였다.
[투수, 와인드업에 들어갑니다!]와인드업 하는 투수의 컨디션은 좋아보였다.
하지만 한 가지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힘이 너무 들어가 있다.’
긴장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와인드업을 하는 자세에서 힘이 너무 들어가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나를 의식하고 있는 상태다. 어떻게든 잡고 싶은 건가?’
같은 투수다.
아무래도 다른 타자를 상대하는 것과는 마인드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해할 수 있지.’
투수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상대의 생각이었다.
투수가 투수에게 타격으로 진다는 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날 잡고 싶다는 생각에 힘이 더 들어갔다. 저런 상황에서 공을 던진다면 제구력에 문제가 생기겠지.’
하성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흡!!”
쐐애애액-!!
[초구 던졌습니다!]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매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간 탓일까?
뻐억!!
“볼!”
[초구 볼입니다! 너무 빠지는 공인데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정하성 선수가 타격 경험이 적다지만, 저런 공에 배트가 나갈 가능성은 전무하죠.]존의 바깥쪽을 완전히 벗어나는 공이었다.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예상은 확신이 되었다.
확신을 가진 하성은 더더욱 투수의 심리를 예상할 수 있었다.
퍽!!
“볼!”
[이번에도 존을 벗어납니다!] [다른 타자들을 상대할 때는 정상적인 컨디션을 보여주었는데. 유독 정하성 선수를 상대할 때는 컨트롤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누가 보더라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성은 상대의 심리상태를 알고 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런 상태일 때 실투가 빠지는 건 의미없다. 안으로 들어오는 걸 노려야 해.’
밖으로 빠진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볼카운트가 몰리면 투수는 결국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공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공을 제대로 노려칠 수 있다면 장타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투볼까지 몰렸다. 이번에는 분명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공을 던질 거야.’
제구가 흔들리고 있을 때 스트라이크존으로 공을 던지기 위해선 결국 위력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위력이 떨어지는 공이 존으로 들어온다는 건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하지만 3볼이 된다면 투수는 궁지에 몰리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타자는 여기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게 두 가지다. 볼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극적으로 대처하거나…….’
하성은 타석에 서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공격적으로 나서는 것.’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그건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투수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다.
더더욱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이번이 기회다.’
* * *
[투볼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정하성 선수, 여기에선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공 하나쯤은 더 기다려도 될 거 같습니다.] [투수를 완벽하게 궁지에 모는 전략이군요?] [예. 현재 투수의 제구력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럴 때 굳이 스윙을 해서 상대 투수에게 숨 쉴 틈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투수가 흔들릴 때 대응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해설자의 방법은 보수적인 쪽이었다.
물론 하성도 그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그쪽으로는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인을 교환한 투수, 와인드업과 함께 3구 던집니다!]투수는 천천히 와인드업을 하며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의 목표는 하나였다.
‘이번에는 스트라이크를 잡는다.’
볼카운트가 계속 밀린다면 이번 승부는 어렵게 된다.
그렇게 되기 전에 어떻게든 스트라이크를 잡는 게 우선이었다.
‘투수인 녀석에게 질 수 없다!’
같은 투수이기에 질 수 없다.
그러한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곧 그의 공에서 나타났다.
쐐애애액-!!
스트라이크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한 상태에서 던진 공이었다.
구위는 떨어지고 제구력이 올라가게 됐다.
그의 생각대로 공은 스트라이크존을 파고들었다.
문제는 구위가 떨어진 공은 하성에게 좋은 먹잇감밖에 되지 않았다는 거다.
촤앗-!!
스트라이드와 함께 하체를 고정시킨 하성은 그대로 허리를 돌렸다.
후웅-!!
허리의 회전에 이어 상체가 돌아갔다.
그리고 상체를 멈춘 순간, 그 반동으로 배트가 묵직한 소리를 뱉으며 허공을 갈랐다.
‘걸렸어!’
하체와 상체의 회전이 유기적으로 일어나며 그의 배트가 매섭게 돌아갔다.
배트는 마치 먹잇감을 노리고 있는 매처럼 순식간에 공을 그대로 낚아챘다.
딱-!!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과 함께 경쾌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하성은 배트의 스윙을 멈추지 않고 마지막 팔로스로까지 그대로 밀어냈다.
[때렸습니다!!] [아~ 이건 정말 잘 맞았어요!]누가 보더라도 잘 맞은 타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성 본인도 느꼈는지 자신의 등을 때린 배트가 튕겨서 돌아오는 순간.
휘릭!!
그대로 손을 놓았다.
[정하성 선수!! 장타를 직감했는지, 배트를 던졌습니다!!]배트플립이었다.
보수적인 메이저리그에선 여전히 금기시 되는 플레이 중 하나였다.
하지만 하성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당당하게 배트플립을 선사해왔고 그 모습을 본 팬들은 일제히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왔다!!”
“배트플립이다!!”
“저 녀석 페넌트레이스에서도 저걸 진짜로 하네!”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타구가 그대로 넘어갔어!!”
배트플립에 시선이 빼앗겼던 팬들이 다급히 공을 쫓았다.
그들의 시선에는 담장을 넘어 관중석 가장 높은 곳에 떨어지는 타구가 보였다.
[넘어갔습니다!!]“와아아아아아!!”
팬들의 함성 소리가 쏟아졌다.
배트를 던진 하성은 베이스를 돌면서 그런 관중들의 함성 소리를 만끽했다.
[정하성 선수! 엄청난 타구를 만들어내면서 투타 겸업 선언 후 공식전 첫 번째 홈런을 만들어냅니다!] [홈런을 만들어낸 것도 좋았지만, 정하성 선수가 보여준 스윙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스윙의 궤적, 스피드, 그리고 힘을 실어내는 메커니즘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전문가들은 하성이 만들어낸 결과에도 놀랐지만, 그 과정에 더욱 놀라워했다.
그만큼 그의 스윙은 완성도가 높았다.
‘단순히 하루 이틀 연습한 느낌이 아니었어.’
‘저 정도 스윙이라면 엄청난 연습을 했을 거야.’
‘투수로서도 완성도가 높고 거기에 타자까지…….’
‘도대체 저런 녀석이 어디서 나타난 거야?’
하성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한지 어느덧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그는 야구 관계자들을 놀라게 만드는 업적을 이루어왔다.
그렇기에 그의 활약에 더 이상 놀랄 거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한 번 더 새로운 모습을 보이며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정하성은 상식을 넘어선 괴물이다.’
괴물이라 불린 수많은 선수가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괴물이 등장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 괴물이 어디까지 활약할 것인지 기대하면서 경기를 바라봤다.
* * *
투타 겸업을 선언한 하성의 첫 데뷔전.
전 세계 야구팬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당연했다.
하성은 이 경기에서 엄청난 활약을 이어갔다.
뻐어억-!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삼진입니다! 정하성 선수! 오늘 경기 12번째 탈삼진을 기록하며 7이닝 무실점 경기를 달성합니다!!] [개막전부터 홈팬들에게 대단히 좋은 모습을 보여준 정하성 선수, 정말 대단합니다.] [투구 수가 97개에 달했으니 이제 교체가 될 가능성이 높겠죠?] [텍사스와의 점수 차이도 7 대 2로 여유가 있으니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모두가 하성의 교체를 예상했다.
하지만 그런 예상은 가볍게 깨졌다.
[오클랜드의 공격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대기 타석에 정하성 선수가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네요.] [아무래도 타격까지 마무리하고 교체를 할 생각인 듯합니다.] [피로가 쌓였을 텐데. 괜찮을까요?] [투구를 일찍 끝냈으니 큰 무리는 아닐 겁니다. 무엇보다 오늘 오클랜드에서 가장 타격감이 좋은 선수가 바로 정하성 선수였습니다.] [그 말씀대로 2타수 2안타 1홈런을 기록하면서 타점도 3개나 달성했습니다.] [2안타가 홈런과 2루타였으니 장타능력도 정말 대단합니다.] [투수와 타자 모두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정하성 선수, 과연 세 번째 타석에선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요?]개막전 히어로는 하성이었다.
투수에선 7이닝 무실점 12탈삼진을 기록.
투타 겸업으로 인해 투수능력이 떨어질 거라 말했던 전문가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거기에 타자로서도 최고의 활약을 보이면서 자신의 선언이 맞았다는 걸 증명해 냈다.
그리고 마지막 타석.
하성은 또 한 번 사고를 쳤다.
딱-!!
[3구를 강타!!]몸쪽으로 붙는 슬라이더를 결대로 때려냈다.
1루수의 키를 넘어 우익수 앞에 떨어진 타구는 회전이 걸리며 파울라인 밖으로 흘러나갔다.
[파울라인 밖으로 흘러가는 타구! 우익수 타구를 급하게 쫓습니다!!] [아~ 이건 장타 코스예요!!]타구를 앞에서 처리하기 위해 달려나오던 우익수의 옆으로 공이 지나갔다.
회전이 걸려 걸린 공은 빠르게 담장으로 굴러갔다.
1루를 향해 달리던 하성은 그 모습을 발견하고 곧장 속도를 높였다.
[정하성 선수! 속도를 높여 1루 베이스를 통과합니다!] [이거 3루까지도 노려볼 수 있습니다!]하성의 생각도 같았다.
그는 더욱 속도를 높여 단숨에 2루 베이스를 통과했다.
거의 동시에 공을 집은 우익수는 앞으로 달려나오며 추진력을 더해 공을 던졌다.
“흡-!!”
[정하성 선수는 3루로! 그리고 공도 3루로 송구됩니다!!]등 뒤에서 날아오는 공이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오직 3루에 있는 주루코치의 신호에 의지해야 한다.
하성은 주루코치가 양손을 밑으로 내리는 신호를 보내자 일말의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촤아아앗-!!
그의 몸이 미끄러지며 베이스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동시에 3루수의 글러브에 공이 꽂혔다.
퍽!!
아슬아슬한 타이밍.
순간 경기장에 적막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적막을 깬 것은 3루심의 호쾌한 외침이었다.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정하성 선수 엄청난 주루플레이로 3루타를 기록합니다!!] [사이클링 히트까지 단 하나! 안타만이 부족한 정하성 선수입니다!] [개막전부터 사고를 치는 걸까요?!!]사람들의 기대가 하늘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