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on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35)
마운드의 빌런-35화(35/285)
마운드의 빌런 35화
오랜만의 집이다.
“많이 먹으렴.”
“잘 먹겠습니다!”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을 먹으니 귀국의 피로가 싹 풀렸다.
“그런데 하성아, 언론에서 연일 저렇게 떠들어대는데. 괜찮겠냐?”
“여보, 애 밥 먹는데.”
“괜찮아요. 언론이야 저렇게 떠들어도 사실상 저한테 할 수 있는 건 없잖아요? 여론이 나쁜 것도 없고요.”
“음, 그런가?”
아버지가 의아하게 반응하시는 것도 당연했다.
현재 여론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극명하게 갈렸다.
2008년은 인터넷이 발전해 있긴 했지만, 스마트폰이 발달한 미래보다는 덜했다.
‘2020년만 하더라도 종이신문을 보는 사람은 사장되다시피 했지. 만약 그때 이런 일을 터뜨렸으면 여론은 완전히 내 편이었을 텐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대의 흐름이 그런 상황이었으니까.
아침을 모두 먹은 하성은 휴식을 택했다.
거실의 소파에 앉아 마음 편히 TV를 시청했다.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이 시작됐구나.”
아버지가 옆에 앉으며 말씀하셨다.
“누가 이길 거 같니?”
아버지의 질문에 TV를 응시한 채로 대답했다.
“레드삭스가 이길 거예요. 직접 상대했을 때 어려웠던 게 저놈들이거든요.”
“어려웠다는 녀석이 무결점 이닝을 달성했어?”
“그만큼 집중했으니까요. 비록 올 시즌 성적이 명성만큼은 아니지만, 단기전에서는 여전히 강한 모습을 보여줄 가능성이 높아요.”
실제로 경기는 레드삭스가 앞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딩동-!
벨소리가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을 받았다.
“누구세요?”
[KBO 국가대표 기술위원회 소속 이은혁입니다.]“기술위원회요?”
[예. 이른 아침에 죄송합니다. 정하성 선수와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아버지의 시선이 하성에게 향했다.
무언가 알고 있냐는 무언의 눈빛을 받은 하성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과 약속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일단 들어오시죠.”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공동현관이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사이 아버지가 하성에게 물었다.
“국가대표 기술위원회라면 WBC와 관련된 이야기지?”
“아마 그럴걸요?”
“그곳에서 약속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오는 건가?”
“그러게요. 예의를 모르는 사람들이네요.”
두 부자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약속도 없이 이른 아침에 사람이 찾아오다니.
예의가 없었다.
잠시 후.
초인종이 울리고 아버지가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40대 초반의 사내가 서 있었다.
“이른 아침에 죄송합니다. 이은혁입니다. 기술위원회 소속이고요.”
“흠.”
명함을 받아 든 아버지가 찬찬히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약속 없이 이른 아침에 찾아오는 건 좀 아닌 거 같군요.”
“죄송합니다. 조금 급한 일이다 보니…….”
“뭐가 그리 급한지 이야기나 들어봅시다.”
세 가족과 이은혁이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자, 그럼 일찍부터 찾아오신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아, 제가 찾아온 건 정하성 선수의 대표팀 합류를 권하기 위해서입니다.”
“대표팀 합류요?”
“예. 사실 어제 정하성 선수와 통화를 했는데, 본인이 거부를 하는 바람에…….”
아버지의 시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하성을 힐끔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흠,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거짓말이다.
“예? 들으셨다고요?”
“예. 하성이도 생각이 있기에 거절을 했으니 권유를 계속하시면 곤란할 거 같군요.”
하성은 아버지의 연기에 속으로 박수를 쳤다.
어떻게 저리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가실까?
배우가 더 적성에 맞으실 수도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이은혁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혹시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직접 듣는 게 낫겠죠.”
자연스레 하성에게 대답을 미루는 아버지였다.
이것이 무역을 오래 한 아버지에게서 나온 연륜이던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은혁의 눈빛에 그 생각을 잠시 묻어두고 하성이 대답했다.
“어깨가 아픕니다.”
“예?”
주스 잔을 들던 아버지의 손이 움찔거렸다.
어머니는 일어나 하성의 상태를 살펴보려 했지만, 상 밑에서 아버지가 손을 잡아 만류했다.
아버지의 연륜이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여기서 어머니가 처음 듣는다는 반응이 나오면 오히려 약점을 잡히는 거지. 여기서의 이야기는 모두 위에 들려갈 테니까.’
아버지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연기를 하고 계신 거일 테다.
사실 이은혁도 평소와 같은 상태였다면 눈치챘을 거다.
하지만 자리 배치와 현재 하성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발언에 부모님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은 감지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어깨가 아프다니?”
“첫 메이저리그 시즌이라 그런지 힘이 들어갔던 거 같습니다. 정밀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아야 할 거 같아서 차출을 거절했던 겁니다.”
“으음…….”
이은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일단 여기서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군. 알았네. 혹시 알아둔 병원이 있나? 협회와 연결된 유명한 병원들이 제법 있는데. 원한다면 소개해 주지.”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친구분이 대학병원에 계셔서 그쪽을 통해 진료받겠습니다.”
“알았네. 다시 한번 결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예. 다음에는 미리 연락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은혁이 다시 사과를 하고 집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도어락이 잠기자 아버지가 하성을 향해 번개처럼 몸을 돌렸다.
“아들!! 다쳤어?!”
그런 아버지보다 먼저 물어본 것은 어머니였다.
걱정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에 하성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멀쩡해요.”
“엉?”
“이번 대표팀에서 빠지기 위해서 꾀병 부린 거예요.”
아버지의 눈이 커졌다.
“꾀병이라고?”
“예. 이유 없이 대표팀에서 빠진다면 협회와 척을 질 테니까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으니 이유를 만들어준 거예요.”
현재까지 KBO는 자신에게 잘못한 일이 없다.
이번 대표팀 합류에 강압적으로 나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렇게 나올 경우에 대한 생각도 정리해 두었다.
그때 아버지가 말했다.
“이번 WBC는 병역특례 혜택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1회 때도 그랬으니까. 이왕이면 대표팀에 승선하는 게 좋지 않겠니?”
2006년 1회 WBC에서 한국은 4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그리고 이 대회에 참가했던 대표팀 선수들은 모두 병역특례라는 혜택을 얻었다.
문제는 이것이 1회에만 적용된다는 소리다.
“이미 2007년에 개정을 했기 때문에 바뀌지 않을 가능성도 높아요.”
“하지만 국회의원 쪽에서 움직이고 있다더구나. 선수협과 KBO에서도 정치권과 접촉을 하고 있어서 긍정적인 여론이 만들어지면 가능성도 있다.”
현재 여론은 반반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성은 이미 미래를 경험했다.
국방부는 결국 병역특례를 거부한다.
2회 WBC에서 준우승이란 쾌거를 차지했지만, 대표팀은 병역특례 혜택을 얻지 못했다.
‘얻을 게 없는 대회를 굳이 나갈 이유는 없지. 이번 일로 찍히더라도 미국 시민권을 따는 방법도 있고.’
하성은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아시안게임도 있으니 지금은 메이저리그에 집중하고 싶어요. 올해 잘했다고 해서 내년에도 잘 자리가 유지된다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하성의 단호한 말에 아버지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뜻이 그러하다면 알았다. 친구 녀석에게는 말해서 네 진료 날짜 잡아달라고 할게.”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우리는 언제나 네 편이다.”
* * *
[슈퍼루키 정하성! 부상 입었나?!]기사를 본 하성은 피식 웃었다.
‘도대체 정보를 어디서 얻은 거야?’
하루도 채 되지 않아 기사가 나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연달아 기사들이 쏟아졌다.
[고등학교 때 입었던 부상이 재발했나?!] [정하성 서울대학병원에서 정밀진단!] [메이저리그 슈퍼루키도 피할 수 없었던 부상의 악몽!] [정하성의 대표팀 승선은 물 건너가나?] [KBO 기술위원회 긴급회의 소집!]기자들만큼이나 바빠진 건 KBO였다.
“부상이 확실해?”
기술위원장인 박태곤의 말에 이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서울대병원에서 정밀진단을 받은 걸 확인했습니다. 그쪽에 제 지인이 있는데,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분위기가 꽤 심각했다고 들었습니다.”
“흠, 그럼 부상이 거의 확실하다는 소리인데. 거기에서 예전에 토미 존 관련해서 진단을 받았다고?”
“정확히는 염증이 발견됐는데, 그대로 진행됐다면 토미 존 서저리까지 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하더군요.”
“거기에 다시 간 거라면 심각하다는 소리겠군.”
박태곤은 대표팀 명단을 확인했다.
사실 이미 대표팀은 확정된 상태였다.
‘투수 자원은 많을수록 좋으니 억지로라도 쑤셔 넣으려고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화이트보드에 붙어져 있던 정하성의 사진을 거칠게 떼어내며 말했다.
“기존의 명단대로 간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도 협조 요청 구할 때 정하성은 제외시켜.”
“예.”
그렇게 하성의 첫 번째 대표팀 승선은 물 건너갔다.
하성의 뜻대로 말이다.
* * *
준플레이오프가 끝나고 플레이오프가 한창 진행될 무렵.
그제야 하성은 자유를 얻었다.
“흐아-! 이제야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도 사라졌네.”
하성의 대표팀 승선 무산 기사와 함께 아파트 단지에서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이 사라졌다.
주민들의 민원도 큰 도움이 됐다.
“슬슬 움직여 볼까?”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귀국한 이후 집에 있으면서 하성은 놀고만 있던 게 아니었다.
그동안 부모님을 통해 온 계약제의를 하나로 모아두는 데 시간을 보냈다.
‘에이전시와 매니지먼트. 모두 합쳐서 32곳에서 연락이 왔다. 이 중에서 불필요한 애들을 잘라내면…….’
연락 온 회사들이 모두 대기업은 아니었다.
중소회사들도 있었는데, 이런 곳들과 굳이 계약할 필요는 없었다.
‘12곳. 이곳들에 대한 정보를 더 찾아봐야겠어.’
하성은 인터넷을 이용해 회사들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다.
홈페이지를 그럴듯하게 만들어둔 곳들이 제법 있었기에 정보를 찾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몇 곳을 찾던 하성의 눈이 빛났다.
“이 사람은…….”
홈페이지 메인에 뜬 하나의 사진.
미모의 여성이 정장을 입고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긴 생머리가 인상적이었는데,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아니고 먼 미래에 말이다.
“분명 미다스의 손, 김혜령 대표잖아?”
* * *
2020년은 K-문화의 글로벌화가 이루어진 시대였다.
인기 보이그룹인 G.T.S가 빌보드차트를 씹어 먹고 각종 드라마와 영화들이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단순히 해외 진출만 한 게 아니라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다.
‘그리고 김혜령 대표가 거기에 있었지.’
김혜령 대표는 컨텐츠를 세계에 배급하고 배우들을 세상에 알리는 데 전면에 섰던 여자다.
단지 본인의 능력만으로 그러한 성과를 냈기에 한국은 물론 세계에서도 유명세를 탔었다.
‘이 여자는 앞으로 엄청난 성공을 이루게 될 건데. 미리 들어가서 선점하고 있으면 나한테 이득이 되지 않을까?’
스포츠선수도 마케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수익이 천차만별이 된다.
실제 스포츠선수들 중 스타플레이어는 광고로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였다.
그만큼 매니지먼트의 역할이 중요했다.
‘일단 선을 두면 좋을 거 같아. 그런데 이것도 미래 정보로 얻는 수익에 속하나……?’
하성은 슬쩍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면서 손가락으로는 김혜령의 번호를 눌러봤다.
만약 신이 정해둔 규칙에 어긋난다면 무언가 변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없이 통화 버튼까지 누를 수 있었다.
그때 전화 너머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김혜령입니다.]“안녕하세요? 정하성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