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 on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36)
마운드의 빌런-36화(36/285)
마운드의 빌런 36화
김혜령은 떨리는 마음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비서인 이수진이 물었다.
“그렇게 떨리세요?”
“당연하지. 우리 회사 창립 이래로 가장 큰 고객인데.”
“이제 갓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선수잖아요? 아직 그렇게 큰 거물은 아닌데. 왜 그렇게 떨려 하세요?”
“경력은 그렇지만, 스타성이 남다른 사람이야.”
“스타성이요?”
“응. 메이저리그 데뷔 이전부터 야구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렸잖아. 거기에 귀국한 직후에도 팬들의 주목을 끌었고 말이야.”
이수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귀국한 이후에는 관심이라기보다는 논란이 일어난 거 아닌가요? 전 처음 봤어요. 기자회견에서 뻐큐를 날리는 거.”
“두 번째야. 첫 번째는 백영호가 귀국길에서 기자들에게 제대로 날렸지. 하지만 그때와 상황은 달라.”
“다른가요?”
“백영호도 이유가 있었지만, 공개된 장소에서 그런 행동을 한 건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했던 게 커. 하지만 정하성은 빠져나갈 구멍이 많지. 그때의 상황을 재연하기 위해서니까.”
“으흠…….”
“정하성은 사건은 일으키지만, 그걸 빠져나갈 준비를 모두 해둔 상태에서 일으키는 거야. 그런 차이점이 있지.”
이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렇게 큰 논란이 되지 않는 건가요?”
“응. 나이는 어리지만 영악한 사람이야. 거기에 실력도 겸비하고 있고. 이런 사람이 줄타기를 잘하기 때문에 대중의 관심이 계속 집중될 수 있어.”
“하지만 위험하지 않아요? 줄타기에 실패하면 그대로 떨어지는데.”
“그럴 수 있지만, 내 감이 말해주고 있어. 이 사람은 더 크게 될 거라고 말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란 게 있었다.
그리고 이 느낌은 의외로 잘 맞는다는 걸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뚜르르-!
그때 전화가 울렸다.
[정하성 님이 도착하셨습니다.]“그래? 내 방으로 안내해 드려. 최대한 예의를 지키면서.”
김혜령이 전화를 내려놓는 사이, 이수진이 밖으로 나갔다.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끝나고 문이 열리며 하성이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김혜령이에요.”
“정하성입니다.”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았다.
* * *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 중 이야기를 주도한 것은 하성이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아, 네.”
“제가 매니지먼트에 원하는 건 메이저리그 계약에 대한 부분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발생하는 계약 건에 대해 서포트를 해줄 회사를 찾고 있습니다.”
“광고나 모델에 대한 계약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예. 메이저리그 계약이야 당분간 서비스타임이 묶여 있어서 크게 관여할 부분이 없습니다.”
하성은 초반부터 확실하게 못을 박고 시작했다.
괜히 이야기가 돌아가는 게 싫었다.
“그럼 저희들에게 원하는 건 국내에서 활동할 때의 서포트겠군요.”
“맞습니다. 그 외에도 대외적인 활동을 할 때 지원을 원합니다.”
“예를 들면 공항에서의 에스코트와 같은 거 말씀이시죠?”
“예.”
하성이 요구하는 건 심플했다.
‘국내에 한정되는 건 아쉽지만…….’
해외 건까지 묶어서 계약하게 되면 매니지먼트의 수익은 더 늘어난다.
하지만 여기에선 욕심을 내서 곤란하다.
‘일단 이 사람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우리가 능력을 보여주면 해외 건까지 우리에게 맡길 가능성도 있어.’
하성의 발전 가능성을 생각하면 그의 요구 조건을 최대한 수용해야 했다.
“저희는 고객님들의 조건에 맞춰 계약해 드릴 수 있습니다. 매니지먼트의 역할은 고객님이 최대한 편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니까요.”
“그렇군요. 혹시 제가 어떤 광고들을 찍으면 좋을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회사 내부적으로 논의를 했는데,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하는 광고들에 적합할 거 같습니다.”
김혜령이 이수진을 바라봤다.
그러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자료를 건넸다.
“현재 하성 씨를 모델로 기용하고 싶어 하는 기업은 제법 됩니다. 그중에서 저희가 파악한 곳들은…….”
광고업계는 의외로 바닥이 좁다.
그리고 김혜령은 그 좁은 바닥에서 인맥이 넓은 편이었다.
덕분에 하성을 원하는 기업들을 대략적으로 파악해두고 있었다.
‘규모가 작은 우리들은 장점을 최대한 어필해야 해.’
장점은 부각시키고 단점은 보이지 않게끔 한다.
영업의 가장 기본이었다.
자료를 보던 하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네요. 벌써 이런 것들까지 준비하셨을지는 몰랐어요.”
“호호, 저희가 원래 준비성이 투철해서요. 하성 씨가 저희와 해주신다면 철저하게 준비해서 최선을 다해 서포트하도록 하겠습니다.”
경험이 풍부한 사람답게 김혜령은 청산유수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성도 알고 있다.
이 여자는 미래에 성공하는 사람이라는 걸.
재능도 있었고 시간만 주어진다면 세계적으로 커질 사람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럼 계약서에 내용 좀 추가해도 되죠?”
“네?”
“서포트 해주실 부분들 상세하게 적어서 계약서에 모두 추가해도 되는 거죠?”
가장 중요한 건 계약서에 내용을 기입하는 것이었다.
기입하지 않고 주고받는 구두계약은 법적 분쟁으로 갔을 때 인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 하성은 그런 피해를 본 적이 있었다.
‘본사에서 피해보상을 해준다고 했지만, 담당자가 바뀐 뒤에 언제 그랬냐는 듯 안면을 바꾸었지.’
그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런 일을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호…… 호호, 무…… 물론이죠.”
김혜령의 대답을 들은 하성의 미소가 짙어졌다.
* * *
계약은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성이 원하는 조건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 검토를 해야 하기에 시간을 달라고 했다.
하성은 다른 곳들과도 미팅을 한다는 말과 함께 사무실을 떠났다.
완벽하게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다른 곳들과도 비교해 보고 싶었다.
‘김혜령이 차후 성공한다고는 하지만, 현재로서는 규모가 작은 게 사실이니까.’
규모가 큰 매니지먼트들과 계약이 된다면 지금 당장 도움이 될 거다.
하지만.
“원하시는 조건을 계약서에 넣고 싶으시다고요?”
“예. 방금 전까지 실장님이 들어주신다고 하셨으니, 가능하시지 않겠습니까?”
“그……건 조금 어려울 거 같습니다만.”
예상대로 거절당했다.
거절하는 곳은 한곳이 아니었다.
“그건 어렵습니다.”
“관행상 안 됩니다.”
“구두도 계약의 일종입니다. 법적 효력이 있으니 걱정 마세요.”
미팅하는 곳들이 난색을 표했다.
심지어는 하성에게 훈계를 하는 곳도 있었다.
“자네가 아직 어려서 그런가 본데. 이 바닥이 그렇게 굴러가는 곳이 아니야. 서포트? 물론 하지. 하지만 그걸 계약서에 남기는 곳이 어디에 있다고. 그냥 계약서를 찍으면 그 뒤에는 우리가 알아서 잘해주겠네.”
TJ매니지먼트에서 나온 김철호 과장의 말에 하성의 얼굴이 구겨졌다.
“알아서 잘해주실 테니. 계약서에 기입해도 되지 않습니까?”
“에헤이, 이 사람. 뭘 그리 각박하게 그래. 내가 다 해준다니까? 걱정 말고 계약하면 당장 내일부터 광고를 찍을 수 있어.”
“내일부터요?”
“암, 그렇고말고! 자네는 어려서 모르겠지만, 스포츠스타들이 인기 있는 건 한순간이야. 그 타이밍에 최대한 많은 광고를 찍어야 한다니까?”
“오호, 그렇습니까?”
“그래. LA다저스에서 뛰었던 코리안특급 있지? 그 친구도 한창 잘 나가다가 성적 고꾸라지니까, 광고는커녕 TV에 얼굴도 비추지 못하잖아.”
“듣고 보니 그렇네요.”
김철호 과장은 이때다 싶었는지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그러니 성적이 좋았을 때 빨리 광고를 찍어서 목돈 좀 챙기라고. 여기랑 여기에만 사인하면 돼.”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는지 펜까지 들이밀었다.
“자네도 엘리트 선수니까. 잘 알겠지만,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일을 맡기는 게 아주 좋아. 자네는 운동에만 전념하면 나머지 일들은 우리가 알아서 다 처리해서 엄청난 돈을 벌게 해줄게.”
마지막까지 입에 꿀을 바르면서 말하는 그였다.
나이가 어리거나 사회경험이 부족한 사람이면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하성은 아니었다.
“그럼 그것도 보장해 주실 수 있겠네요?”
“엉?”
“엄청난 돈을 벌게 해준다고 하셨으니. 미니멈으로 계약금을 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뭐? 계약금? 매니지먼트에 그런 게 어디 있나? 자네가 사회생활을 너무 안 해서 모르겠지만 이쪽 바닥에선 계약금이란 게…….”
“이쪽 바닥 사정은 모르겠고요. 저는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유일한 한국인이거든요.”
하성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약간은 건방지게 보일 수 있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자세였다.
“그리고 계약이란 건 당사자들끼리의 협의 아닙니까? 이전에 없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없으라는 건 말이 안 되죠.”
“하지만 관행이란 게 있으니…….”
“야구에도 관행이란 게 있죠. 하지만 그것들은 언젠가는 깨지거든요. 참, 그리고 계약서에 독소조항들이 좀 보이던데요.”
“독소조항이라니?”
“계약을 파기할 때 그 피해보상을 왜 다 제가 책임져야 합니까?”
“그건 당연히 자네가 계약 당사자니까 그렇지.”
“매니지먼트의 잘못으로 파기되는 사유는요?”
“당사자가 아닌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하겠는가?”
하성이 피식 웃었다.
“제 이미지와 맞지 않는 계약을 따오거나 했을 때, 제가 거부하면 이것도 제가 배상을 해야 한다는 거네요?”
“그…… 그건…….”
“이런 게 독소조항이 아니면 뭡니까?”
“커흠! 이 계약서에는 문제가 없네. 이건 표준계약서야!”
끝까지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잡아떼는 김철호 과장이었다.
“그럼 이 계약서에 큰 문제가 없다는 거네요?”
“당연하지! 나는 이 업계에 10년이 넘도록 있었어! 그런 내가 사기라도 친다는 소린가?”
“사기는 아니지만, 이런 조항들은 좀 고쳐야 될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흠, 조금 이상한 계약서긴 하네요.”
그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철호 과장이 놀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다소 추레한 복장의 사내가 서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여기는 중요한 자리니……!”
“아, 소개가 늦었네요. 백준기라고 합니다.”
그 사내는 백준기였다.
“당신 이름은 관심 없고! 왜 중요한 자리에……!”
“직업은 기자고요.”
“……기…… 기자요?”
“예. 오늘 여기 있는 정하성 선수와 인터뷰 약속이 잡혀 있어서요. 그런데 이 계약서 혹시 제가 봐도 됩니까?”
“죄…… 죄송합니다. 계약서는 극비자료라서 함부로 유출이 어렵습니다.”
김철호가 다급히 계약서를 챙겼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하성을 바라봤다.
“그…… 그럼 정하성 선수, 계약 건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서 다시 연락 주십시오.”
갑자기 존댓말로 말투가 바뀌면서 부리나케 돌아가는 그를 보며 하성이 피식 웃었다.
백준기는 김철호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혹시 제가 방해했습니까?”
“아닙니다. 계약 이야기는 거의 마무리된 상태였습니다.”
“계약이요?”
“예. 국내에서 제 일을 봐줄 곳이 좀 필요해서요.”
“아~ 광고가 많이 들어오시죠?”
“조금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그럼 저 사람은 매니지먼트 쪽 사람이겠군요?”
“TJ매니지먼트의 김철호 과장님이셨습니다.”
“아…… TJ매니지먼트…….”
백준기는 그 이름을 곱씹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하성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제 알게 됐으니 알아서 취재를 하겠지.’
TJ매니지먼트는 국내 최대 규모의 매니지먼트 중 한 곳이었다.
현재까지는 말이다.
‘앞으로 5년 뒤에 완전히 박살 나지만.’
당시 내부비리가 폭로되면서 TJ매니지먼트는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중에서 문제가 됐던 게 계약서였다.
거의 노예계약에 가까운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어 그 사건으로 표준계약서가 다시 작성되게 됐다.
‘이게 터지면 매니지먼트들과 협상도 더 수월하겠지.’
TJ매니지먼트를 만난 건 순전히 자신의 계약에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함이다.
‘법적으로 내 문제도 없고.’
거기에 모든 책임에서 자신은 자유로웠다.
어떤 자료도 백준기에게 제공하지 않을 거니까.
기자 정신이 투철한 백준기라면 TJ매니지먼트의 비리를 빠르게 잡아낼 수 있을 거다.
“아, 죄송합니다. 바로 인터뷰를 진행할까요?”
백준기의 말에 하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시죠.”
두 사람의 인터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