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109)
먼저 반겼다. 나뭇가지를 따라서 보니 설중매(雪中梅)가 피었다. 계절이 시작할 무렵에 나가, 끝날 무렵에 되돌아왔다. “사형!” 머리를 들어 보니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서악의 화산의 경치조차도 화산제일미 앞에선 수그러들었다. ‘윽, 눈부실 정도로 예쁘다.’ 당혜도 당혜지만 역시 낙소월이었다. 그동안 안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안 본 사이에 더 예뻐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에 비하면 내 얼굴은 영 아니군.’ 나름 준수한 편이지만 정작 장본인은 그리 생각 안 한다. 제갈 형제처럼 미남이 있어 비교된 탓이었다. ‘괜찮아. 나에겐 무공과 인맥이 있다.’ 괜히 능력을 세우며 자위하는 주서천이었다. “오랜만이다.” “약속, 지키지 못했네요. 후후.” 낙소월이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웃었다. “아.” 겨울이 지나 다시 봄이 오면 낙소월도 수선행을 떠난다. 내년에 곧장 사형을 찾아가려 했다. 그런데 그 전에 주서천이 되돌아왔다. ‘사람 일 참 모르는 거지.’ 원래의 역사에 따르면 낙소월은 칠검전쟁 이후 정사대전이 벌어져 수선행에 나가지 못한다. 떠날 당시에 낙소월에게 그런 일은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면서 유감을 표했지만, 섣부른 판단이었다. “미안해.” “……? 뭐가요?” “아니, 왠지 모르게 약속을 못 지킨 것 같아서?” “후후. 뭐에요, 그게.” 주서천의 뜬구름 잡는 소리에 낙소월이 웃었다. 화산파에 눌러앉을까 진지하게 고민될 정도의 예쁨이다. 도대체 어떻게 저리 예쁠 수 있나 싶었다. “혹시 사부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니?” 하나 그 미모도 스승의 안위보단 순위가 낮았다. “네, 그럼요.” 낙소월은 예상했다는 듯이 웃었다. 문을 여니 언제나의 풍경이 들어왔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이 교차했다. 봄이건 여름이건 언제나 찬 공기였다. 사람 흔적 하나 없고, 침상을 빼곤 먼지가 눈처럼 쌓여 있었다. 화산 밖으로 강호 출두했다가 오면 반겨 주는 건 아무도 없었다. 그저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하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 과거와는 확실히 달랐다. 눈처럼 쌓였던 먼지 대신 깔끔하게 정리된 물품들이 놓였고, 얼음장 같았던 지면은 따스하기만 했다. “사부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주서천은 그 누구보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스승에게 하나하나 진심을 담아서 구배지례를 올렸다. “나야 잘 지냈단다. 그보다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그리 열심히 절을 할 필요는 없다.” “아닙니다. 일 년 만에 뵙는 사부님의 존안 앞이거늘 어찌하여 대충하겠습니까. 아무리 이 제자가 불초하여도, 그렇게까지 썩지는 않았습니다.” 평소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본다면 두 눈을 의심할 정도의 광경이었다. 실제로 주서천은 유정목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까지 극진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상천십좌이자 무림맹주에게도 이렇게까지 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예의를 차리면 이 못난 스승이 더 불편해지니, 부디 봐주지 않겠느냐.” 유정목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제야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가 살짝 풀어졌다. “네 활약은 나도 들었단다. 내 그게 자랑스러워 주변에 가슴 좀 펴고 다녔지.” 유정목이 제자를 자랑스럽게 쳐다보며 흡족한 웃음을 보였다. 그 웃음을 보자마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칠검전쟁에서 모습을 숨기지 않고 활약한 것이 다행이었다고 생각됐다. “화산의 다른 제자들에게도 너의 활약상이 알려지긴 했으나, 그래도 조금 세세하게 듣고 싶구나. 방금 온 너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혹시 들려줄 수 있느냐?” 유정목이 미안한 듯이 조심스레 물었다. 제자에게 이렇게까지 대할 필요는 없을 텐데, 하나하나 신경 써주는 그 상냥함과 배려심이 좋았다. 괜히 울적해서 눈물이 나오려던 주서천은 유정목을 걱정시키고 싶지않아 속으로 삼켰다. “예, 사부님!” 주서천은 유정목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쓸데없는 부분을 배제하고 요점만 꼽았다. “천독지체였다고?” “예, 그렇습니다.” “곁에 있었는데도 그걸 이제까지 몰랐다니……” “아무래도 여기에선 중독될 일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독혈곡을 다녀왔다는 대목에선 대단히 걱정했으나, 중독은커녕 상처 하나 없었다 하니 안도했다. 서장에 나가 라마승을 만난 건 말하지 않았는데, 새외까지 나갔다며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 양심이 조금 찔리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니 그래도 덜했다. 폭섬도문이나 묘가검문의 일도 말하지 않았다. 숨겨야 할 만한 것은 숨기고 그 외에는 전부 말했다. “정말로 대단하고, 그런 네가 장하구나. 고생했다.” 유정목이 주서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닌데도 그 손길은 여전했다. 주서천은 아무런 불만 없이 손길을 받아들였다. 이 따스한 손길을 평생동안 그리워했었기에. 설사 중년의 나이가 된다 할지라도 이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언제나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고작 일 년 사이에 많이도 성장했구나.” 유정목이 환골탈태 전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신기해했다. “성장기입니다, 사부님.” 주서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 * * 강호에서는 주서천을 초절정 고수로 알고 있다. 그러나 몇몇은 그의 진정한 무위를 눈치했다. 무곡이 그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남궁위무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화산의 장문인, 검선이었다. “허어……” 우일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슨 일이오, 장문인?” 화산오장로, 지검옹 학송이 의아한 듯 물었다. “강호에서 들은 것과 이놈이 해 준 이야기에 뭔가 차이라도 있는 거요?” 단약사, 영 진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외에도 철혈매검 심옥련, 명수악 조무양, 매화검장 위지결 등 장로 모두 다 의아한 시선이었다. 칠검전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대 관심사였다. 당연히 화산파도 주시하고 있었다. 세간의 소문 외에도 따로 조사해 전황에 대해 실시간으로 들었다. 하지만 제일 신뢰할 수 있는 정보처가 있어 그 이상의 정보를 세세하게 알아볼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수선행에 나가 있던 주서천을 불러들여 물었다. 화산파도 처음에는 그의 활약을 들었을 때 몹시 놀랐다. “아니, 그 아이가 그리 강했던 말인가?” 천하백대고수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다. 괜히 시선이 바뀌고, 별호가 새로 붙은 게 아니다. 특히나 산화일장은 사도천주가 신뢰하는 고수였다. 물론 지쳐 있었다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충분히 대단하다. “매화검수로 삼아야 합니다.” 수련이나 임무 외에 관심 없던 위지결조차 주서천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화산으로 부른 것에는 매화검수로 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주서천은 이미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강호에 나가 사고를 내지도 않았고, 반대로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았는가. 무공, 성품 등 전부 문제없다. “십사수매화검법을 대성했다더군.” “어떻게 일 년 동안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나.” “그렇게 성장하는 건 불가능해. 어쩌면 그동안 감췄거나 굳이 드러내지 않았던 건가.” 이대제자나 삼대제자들이 입을 모아 극찬했다. 강호 특유의 과장되는 소문을 감안하더라도 그 재능이나 무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요한 건 아직 약관도 되지 않았다는 것. 중년이 되면 능히 상천십좌에 오를지도 모른다. “아니오. 아직 어린데도 무공이 고강해 내 감탄했을 뿐이외다.” “아아.” 그러자 장로들이 수긍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궁회의는 일단 주서천을 돌려보내고 계속됐다. 보고를 받았으니 전황에 대해서 논의를 할 차례였다. 며칠 뒤, 회의가 끝나고 다시 부름을 받았다. 이번에도 상궁으로 향했다. 다만 얼마 전에 보고했을 때와 달리 장로들은 없었고, 장문인만 홀로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내 널 추궁하려고 부른 것은 아니니, 그렇게 굳어 있을 필요는 없단다.” 우일문은 주서천이 긴장하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아이였을 적부터 범상치는 않았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살면서 무림 최고의 기재나 천재를 보았지만, 너 같은 아이는 처음이다.” 놀라움 반, 신기하다는 시선 반이었다. “약관도 되지 않아 화경에 오르다니, 얼마 전에 널 보았을 때는 입이 떡 벌어져 닫히지가 않더구나.” ‘휴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경지를 눈치챌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정말로 걱정했던 건 자하신공을 안 건 아닐까 해서다. 하지만 자하신공의 은신이라고 해야 할까, 각성 전 드러나지 않는 능력이 생각보다 뛰어났다. 자하신공을 연공한 장문인의 눈조차 가려 줬다. “화경에는 언제 오른 게냐?” “반년 전, 수선행을 하던 도중 운이 좋아 깨달음을 얻어 오를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천운이로구나. 그런 운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한데……” 영약을 복용하고 대충 감을 재다가 올랐다. “어떠한 도를 깨달았느냐?” 주서천이 흠칫 떨다가 고민했다. ‘영약 먹고 그냥 올랐는데.’ 입이 찢어져도 솔직히 답할 수가 없으니, 전생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대충 그럴싸하게 답했다. “삶과 죽음에서 그리움을 느꼈고, 전부 놓칠 때 떨어지는 매화 사이에서 검을 보았습니다.” “그래 화산에는 매화가 있고, 검이 있지. 어떤 상황에서든 검과 매화, 이 둘만큼은 잊지 말거라.” 우일문이 흡족하게 웃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주서천은 그 말을 머릿속에 담아뒀다. 상천십좌의 가르침은 천금을 주고도 얻지 못한다. “합비에 다녀왔으니 무림맹주님께서도 눈치채셨겠군.” “그렇습니다.” “널 데려가겠다고 이상한 말은 안하셨고?” “손녀를 소개해준다는 등 온갖 말을 들었습니다. 주서천 말고 남궁서천은 어떠냐고 물으시더군요.” “허허허!” 우일문이 예상했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어림도 없는 소리. 화산의 장문인이 될 자가 어찌 혼례를 올릴 수 있겠는가?” “예?” 주서천이 순간 귀를 의심했다. “제 사부님은 한 분 뿐입니다.” “장문인이란 자리가 꼭 장문인의 적전제자만 되는 건 아니다.” 주서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흔하지 않긴 하지만 선례가 있긴 했다. “정말로 가끔씩 너처럼 천재성을 뒤늦게 발휘하는 아이가 있지. 만약 장문인 후보로 인정될 정도면 스승이 있음에도 예외로 자하신공을 전수받는 단다.” 이 후보로 인정될 경우, 차기 장문인으로 확정된다. 그러면 자하신공의 ‘장문인 혹은 차기 장문인’이라는 조건도 채우게 되니 문제 될 건 없었다. ‘장문인께서 절 그리 높이 평가해주시는 건 감사하오나,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조금 정도는 고민할 수 있지 않느냐?” “솔직히 말하자면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제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장문인. 그것도 구파일방의 화산파다.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꿈꿔 본 자리다. 그러나 당연하다시피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건 극소수이고, 자신은 그곳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나 같은 건 장문인이 될 수 있는 그릇이 아니다.’ 남들보다 우수해 보이는 건 두 번째 삶이라는 반칙이 있어서 그렇지, 그걸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전생에서 화산오장로에 오른 것도 인재가 없어 어부지리로 오른 것이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회귀한 이후 그 사실을 잊지 않도록 몇 번이나 되새겼다. 결코 잘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했다.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시작했다고 해도, 그곳에서 자만했다간 곧장 뒤쳐지고 쓰러진다. 이 사실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무엇보다 힘들다고!’ 책임이라는 그 중압감. 그리고 자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