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114)
시선 대신 고개를 돌렸다. 눈이 천에 가려져 있었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분명했다. 눈을 볼 수 없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대답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입도 꾹 다물었다. 피부의 경련 하나조차 보이지 않아서 당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끄덕. 유령이 대답 대신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다행이다!’ 유령곡은 비밀 유지를 위해 목격자를 문답무용으로 시체로 만든다고 하던데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다. 주서천은 속으로 안도하면서 낙소월 근처에 딱 달라붙어 나머지 아홉 명의 광인들을 상대했다. 이 시대의 낙소월이 싸우는 건 처음 보는 것이나 역시 천재이자 차기 매화검수답게 대단했다. 비록 유령 특유의 움직임 탓에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으나 화려한 검술로 전부 받아쳐 냈다. “죽어랏!” 자객이란 건 몇 번이나 말하지만 급습이나 암습에 특화되어 있다. 그 움직임이나 공격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이 일격필살에 집중되어 있고, 만약 실패하여 정면 승부가 될 경우 그 힘은 반절밖에 안 된다. 절정의 자객이라면 초절정 고수의 암살이 가능하지만, 정면 승부라면 일류의 무인에게 패배할 수 있다. 다만 유령들의 경우 신묘한 무공 덕에 이 약점을 다소 축소할 수 있었으나 역시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주서천이 화경에 이르는 고수다 보니 전혀 통하지 않았다. 주서천은 유령과 상대하던 광인의 옆구리에 파고든 뒤, 검을 대각선으로 휘둘렀다. 검이 광인의 가슴팍을 ‘부욱’ 하고 가른다. 천과 피부가 갈라지며 피가 솟구치는 게 눈에 비쳤다. 아홉 명이 여덟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측에서 한 명이 달려들었다. 주서천이 반격하려 했으나, 그 전에 낙소월이 나서서 혼신의 찌르기를 내지른다. 검 끝이 뒤통수를 꿰뚫으면서 이마를 통해 나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광인도 시야에 잡혔다. “뒤를 막아!” 낙소월이 검을 빼 몸을 황급히 돌리려 했다. 하나 그 순간 두 사람 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푸욱! 남성과 여성 유령이 소리 없이 날아와 낙소월을 뒤에서부터 덮쳐 오던 광인의 팔을 베어 날렸다. 그리고 곧장 다른 손으로 쥔 소검으로 찔러 각각 목과 복부를 공격해 목숨을 앗아 갔다. “가, 감사해요……” 낙소월은 설마 유령들이 지켜 줄지 몰랐는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유령들은 인사에 답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 다시 광인들에게 향했다. ‘뭐지?’ 방금 전 광경에 주서천이 의아해했다. 유령곡의 자객들은 저렇게 친절하지 않다. 누가 도와준다고 해도 목격자를 살려 줄 수 없다며 죽인다. 지금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이었는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기까지 했다. 그는 의아함을 뒤로한 채 나머지 광인들을 상대했다. 숫자가 여섯 밖에 남지 않아 처치하는 게 쉬웠다. 특히나 주서천의 검에 절명한 광인이 여럿이었고, 한 식경이 다 지나기도 전에 전멸했다. 열 명이었던 유령들도 전부 무사했다. 다만 몇몇은 부상을 입었는지 금창약으로 치료하는 것이 보였다. 주서천은 그들이 치료를 끝내는 걸 기다려 준 뒤에 다가가 말을 걸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화산파의 사대제자 주서천이라고 합니다.” 정정당당을 추구하는 정파인 입장에서 자객에 대한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다. 비겁하고 음습하다면서 손가락질 했으며, 무엇보다 암살당할 위협에 경계심이 커 적의로 변했다. 주서천이야 유령곡을 아군으로 만들어야 할 입장이라서 적의는커녕 호의를 보였다. 무엇보다 낙소월을 위험에서 구해준 것이 마음에 들었다. “혹시 해서 묻는 겁니다만, 여러분께서는 유령곡 출신의 자객분들입니까?” 유령 중 키가 큰 사내가 머리를 주억거렸다. 참고로 열 명의 유령들은 전부 가지각색이었다. 연령대도 아이부터 노인까지 있었다. 성별 역시 남자와 여자가 섞여있었다. 키가 큰 사람도 있었고, 작은 사람도 있었다. 체구는 대부분이 말랐다. “아마 외부인의 방문에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우선, 이 중에서 대표되는 분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주서천은 포권을 한 채로 예를 표했다. 옆에 있던 낙소월은 자객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는 듯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생각을 입 바깥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없습니다.” 키가 작은 노인이 답했다. 얼굴이나 배 등 노출된 피부에 주름이 가득한 걸 보고 연령을 유추했다. “없다……?” 주서천이 그게 무슨 소리나는 얼굴을 했다. “우리는 하나.” 묘령의 여인이 말을 잇는다. “그리고 모두.”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말을 잇는다. 열 명의 유령들은 한 마디 한 마디 끊으면서 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대화를 이어 갔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뜻인가……?’ 사실상 위계질서가 없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아니, 달라. 다른 유령들은 몰라도 한 사람만큼은 다르다.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존재한다.’ 유령곡주! 그 이름은 오래전부터 내려왔다. 미래에도 유령곡주는 존재했다. 그 유령이 모든 걸 이끌어 왔다. 의뢰를 받고 선택하는 것도 유령곡주다. ‘숨기고 있는 건가?’ 다만 왜 숨기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괜한 생각들만 계속 떠올랐다. 주서천은 고민하다가 직접적인 말은 하지 않고 돌려 말했다. “말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니라, 이 장소에 대표할 수 있는 자는 있습니까?” “있습니다.” 어린 소녀가 답했다. 다른 유령들처럼 그 목소리에선 어떠한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너무 순순히 답하지 않나요……?” 낙소월이 의문이 깃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서천도 속으로는 그 의견에 동의하는 바였다. 물어보면 곧장 답해 준다. 편하긴 하지만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수상쩍어도 아군이 될 사람들에게 협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서천은 그런 속내를 감추면서 말했다. “하오면, 그분과 대화할 수 있습니까?” 이번엔 유령들 모두가 머리를 끄덕였다. 전부 빠짐없이 동시에 끄덕이는데 소름 끼칠 정도로 잘 맞았다. “그럼 부탁드……” 주서천이 뒷말을 이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청년 유령이 손가락으로 주서천을 가리켰다. “무슨……?” 주서천이 혹시 해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온 감각을 개방했으나 이 주변에는 열두 명 외에는 개미 한 마리 없었다. 설명이 필요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으나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청년을 시작으로 다들 검지로 주서천을 가리켰다. 주서천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손가락들도 따라 움직였다. ‘거, 거짓말이죠?’ 낙소월이 경악하는 눈초리로 주서천을 쳐다봤다. “허어……” 주서천도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었다. 유령들이 가리키는 것이 자신이라는 걸 깨닫자, 지금까지 품었던 모든 의문이 절로 풀렸다. 외부인의 방문에도 적개심을 전혀 갖지 않은 것부터 시작해 ‘막아’ 라는 외침에 사매를 구한 것, 그리고 어떠한 질문에도 순순히 답한 것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가능성이 이 모든 의문을 시원스럽게 풀어 줬다. 전생에서 유령곡은 암천회를 따랐다. 아니, 정확히는 암천회주를 따르고 있던 것이 맞았다. “유령곡주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혹시 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유령들이 전부 답했다. “주서천” 머릿속에서 우레가 내리쳤다.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꽉 막혔던 것이 뻥 뚫렸다. 실타래처럼 얽힌 것이 풀려서 머리가 깨끗해졌다. “어, 어떻게 된 거죠?” 낙소월이 당황하면서 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누구도 답변하지 않았다. “유령신공에 대해서 아는 바를 전부 설명해 주십시오.” “유령곡의 일대신공.” 이번에는 곧장 답이 돌아왔다. “유령공(幽露功)과는 그렇게까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남자가 먼저 답하고. “심법이나 보법, 그 외의 암기술 등 난이도나 능력 면 자체로는 비슷합니다.” 여자가 말을 잇는다. “하나 다른 점이 단 한 가지 존재하는데.” “통제 능력입니다.” “어떠한 유령도 그 통제에 벗어날 수 없으며.” “또한 살의나 적의를 가질 수 없습니다.” 열 사람이 말을 이으니 참으로 기괴했다. 그러나 지금 그 광경에 대한 느낌을 표현할 때가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유령신공의 존재 의의였다. ‘전생에서 암천회주가 사망하자 유령곡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던 이유를 알겠구나.’ 유령곡은 곡주를 따른 것이지, 그 단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유령곡을 이끈 건 누구입니까?” “전대의 유령곡주가 행동 강령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걸 따랐습니다.” 유지하는 건 유령들을 기르는 것 또한 포함된다. “도대체 얼마 동안 이렇게 행동한 거요?” “삼백 년입니다.” 생각보다 길었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우두머리 없이 유지됐다는 것이 놀라웠다. “유령선공을 잃어버린 지 삼백 년이나 됐다는 거요?” “잃은 게 아닙니다.” “잃은 것이 아니라니……?” “전대의 곡주가 후인을 위해 숨겼습니다.” “숨겨? 유령곡주가 삼안신투와 아는 사이입니까?” 유령선공이 발견된 곳은 삼안신투의 비석이다. 서적 형태가 아니었으니 떠돌아다녔을 리는 없다. 무엇보다 비고는 삼백 년 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닙니다.” “그럼?” “삼안신투가 유령곡주입니다.” 유령의 대답에 주서천과 낙소월이입을 떡 벌렸다. “……!” “마, 말도 안 돼!” 숨이 멈췄다가 이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낙소월의 목소리였다. 낙소월이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것도 처음 봤다. 그 정도로 방금 들은 사실은 충분히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말이 맞아떨어졌다. 유령곡이 정확히 언제부터 나온 지는 아무도 모른다. 유령곡주의 존재도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유령곡이 신공없이 활동한 것은 삼백여 년 전! 그리고 삼안신투가 활동한 것도 삼백여 년 전! 第十章무심유심(無心有心) 천(天)은 지식이요. 지(地)는 힘이니, 인(人)은 사람이리라. 천지를 갖추었다면 이안(二眼)을 얻은 것이니, 사람인 삼안(三眼)을 찾아서 천하(天下)를 훔쳐라. ……비석에 새겨진 유언 삼안신투는 천하제일의 도둑이었다. 천하에게 쫓기는 일은 당연했다. 관부와 무림인, 심지어 일반인까지 삼안신투의 보물을 탐냈다. 이렇다 보니 삼안신투는 은신처와 더불어서 그들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는 정보가 필요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듣고 도망친다면 결코 잡힐 리가 없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유령곡이었다. 실체를 포착할 수 없는 유령들, 초절정의 고수들이 산하에 있다면 어떠한 정보라도 얻을 수 있으리라. 삼안신투는 이 생각을 도둑질을 시작하기 전부터 했고, 곳곳에 은신처를 만들어서 유령들을 길러 냈다. 그게 지금 유령곡의 전신이다. “비석에 새겨진 글귀의 삼안이란 건 이런 의미였나.” 지식이란 건 정보고, 힘이란 건 순수한 무력이다. 사람이란 건 곧 유령들을 의미했다. “하아……” 낙소월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냐고 묻자, 낙소월은 한쪽 눈썹을 치켜뜨면서 따지듯이 외쳤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묻는 건가요? 화산파의 제자가 유령곡주가 되었으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죠.” “나도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야.” 유령곡의 유일무이한 신공이 설마하니 절대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효능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만약 이게 무림에 알려진다면 어떠한 파장을 부를지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