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127)
영광이오.” 독사검이 태연스럽게 인사를 건냈다. “무음사자!” “어떻게 되는 거지?” 치열하게 이어지던 공방도 잠시 멈췄다. 좌중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참으로 잘됐군. 이 독사검, 무음사자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소.” 독사검이 잠시 검을 내려뜨리고 말을 걸었다. “날?” 주서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소. 무음사자 정도 되는 절대의 고수가 어째서 애송이를 돕는지 이해가 안 가서 말이오.” 독사검은 입꼬리를 살짝 올려 기분 나쁘게 웃었다.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무음사자가 정주에서 손에 꼽는 고수인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 웬만하면 적으론 두지 말아야 한다. 사실 그 전에 접촉하여 회유하고 싶었지만, 행적이 워낙 불분명하여 시도할 수가 없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만 하시오. 이래 봬도 이 정주, 아니 흑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니까.” 독사검 이 자신감 있게 웃으며 콧대를 세웠다. “하하.” 주서천이 아니라 강능초가 대신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만 하라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황당과 의문으로 심각했던 강능초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하오문에서 아무리 잘나 봤자 하오문이다. 문주가 아닌 이상 그 힘은 유령곡과 비교할 게 아니다. “방금 전까지 염라대왕을 보고 온 놈이 말이 많구나. 뒈지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있는 게 좋을 거다.” “그것참 미안하군.” 상황이 재미있지만, 솔직하게 답하는 건 무음사자의 정체를 알려 주는 일이니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내 밑 아니 나와 함께한다면 부귀영화를 약속하겠소. 어쩌면 그대의 힘이라면 흑도의 영원한 이인자가 될 수 있을 거요.” “일인자가 아니라 이인자인가?” “일인자는 포기하시오. 하오문주는 사람이 아니요. 아무리 그대여도 감히 넘볼 수 없을 거외다.” 독사검은 하오문주, 천선의 힘을 엿봤다. 그렇기에 그게 얼마나 변칙적인지 잘 알고 있다. ‘천하 모두가 속고 있다. 흑도라고 무시당하는 하오문주는 능히 천하백대고수 중에서도 열 손가락이다.’ 한때 어리석게도 문주의 자리를 넘봤으나, 그 힘을 맛본 뒤로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나와 그대라면 하오문주의 오른팔과 왼팔이 될 수 있으니 잘 생각해 보……” “그럴 생각 없다. 아무리 그래도 정파인이 흑도의 오른팔이나 왼팔이 될 수는 없지 않나.” “……?” 정파인이라는 말에 독사검은 물론이고 강능초조차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주서천은 어깨를 으쓱이곤, 볼일 다 봤다는 듯이 태세를 정비하면서 비수에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만나서 반가웠다, 독사검.” “자, 잠깐만 기다리시오.” 독사검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겉과 다르게 속은 냉정했고, 역습의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아무리 무공에 자신 있다곤 하지만, 자객이 혼자 와선 몸을 당당히 드러내다니. 참으로 멍청하도다!’ 입 바깥으로 비웃음이 튀어나올 뻔한 걸 참았다. 이렇게 역공해서 승부를 쥔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실제로 수하들만 알아보는 눈짓과 손짓으로 비밀스레 명령을 내리자, 익숙한 듯 공격의 준비를 했다. 아무렇게나 위치해 있던 것 같은 수하 몇몇이 주서천을 향해 조금씩 움직여 포위했다. “독사검.” 주서천이 심드렁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독사검이 은근슬쩍 돌리던 눈동자를 멈추고, 시선을 마주 보던 곳으로 옮겼다. 그러자 주서천은 손목을 튕겨 비수를 던졌다. 다만 그 방향은 정면이 아닌 지면이었다. 지면에 비수가 박히면서 자갈이 튄 것을 본 독사검의 얼굴에 의문이 묻어났다. “암습이란 건 자고로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독사검이 눈썹을 구부렸다가 이내 외쳤다. “눈치챘다! 쳐라!” 파바밧! 정확히 열 명의 무인이 몸을 날렸다. 그들 전부 나름 암습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래 봤자 하오문이다. 자객방, 그것도 천하제일에 꼽히는 유령에 비해선 태양 앞 반딧불이었다. 뒤늦게 강능초가 위험하다면서 소리를 질렀으나 주서천은 듣고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매 안에 숨겨 두고 있는 비수도.나오지 않았고 신묘한 움직임으로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렇게.” 시간이 느릿하게 흘러간다. 너무 느려서 마치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한 사람을 노리고 몸을 던진 열 명 각자 병장기를 꼬나 쥐고 험악한 얼굴로 내공을 끌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이변이 벌어졌다. 눈을 감았다 뜨자 그들의 뒤로 사람들이 나타났다. 눈은 천으로 가리고, 몸에 딱 달라 붙으며 면적이 좁은 옷차림이 특징적이었다. “뭔……” 팟! 암습을 시도한 하오문도의 목에 혈선이 그어졌다. 마치 거울을 마주한 것처럼, 목에 혈선이 그어지는 순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벌어졌다. 푸슈슛! 외마디 비명을 흘릴 틈도 없었다. 앗 하는 사이에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안개처럼 흩어졌다. “……” 좌중이 침묵했다. 아니, 반응할 수 없었다. 눈으로 좇기는커녕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니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암습을 노렸던 장본인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가까스로 참아야만 했다. ‘유, 유령곡!’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챌 수 없었다. 유령곡이야 워낙 실체가 없는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런 거물들이 올 리 없지 않은가. 추측의 가능성조차 전무했다. 그러나 방금 전 벌어진 상황과 암습이라는 말에 가까스로 눈치했다. ‘모른 척해야 한다!’ 의뢰인조차 모른다는 신비의 자객방. 그동안 비밀을 어찌 유지해 온 것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시체는 말이 없는 법. 독사검의 상황 판단은 빨랐다. “대인!” 더 이상 흑도의 일이라고 부르기에도 힘들다. 하오문의 영역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독사검은 주변의 수하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리에 부복하여 빌었다. “제가 어리석게도 대인을 몰라뵈었습니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하오문주도 두렵지만 유령도 두렵다. 여기에서 괜한 반항을 부렸다간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하다. ‘독사검이 졌구나!’ 사굴의 하오문도들이 동요를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도망쳐? 아니면 항복해야 하나?’ ‘무음사자는 자비가 없다던데……’ 지도자의 굴욕 어린 항복 따윈 상관없었다. 애초에 충의가 없었으니 실망감도 없었다. 중요한 건 도망치느냐, 아니면 굴복하느냐다. 다만 간단히 선택할 수 없는 문제였는데, 어떤 자는 패자의 수하를 전부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고 어떤 이는 대표로 삼을 만한 몇몇만 본보기로 죽였다. 후자라면 새로운 기회와 이득을 챙길 수 있지만, 전자라면 그냥 죽는다. 그렇다고 그냥 도망치면 척살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좌중이 침묵하고 긴장했다.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끝났다. 주서천이 머리를 한 바퀴 돌리곤 물러나 강능초의 뒤로 돌아갔다. 주변의 시선이 무음사자에게서 강능초에게로 옮겨졌다. ‘사굴의 새로운 지도자!’ ‘독사검이 인독종에게 졌구나!’ 목숨 줄을 쥐고 있던 사람이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고민하고 있던 하오문 도들이 병장기를 슬그머니 내리면서 눈치를 봤다. 사신보다는 독종이 나았다. “살려 주시오, 인독종. 그대 곁에서 보좌를 설 기회를 주시오. 사굴이 익숙하지 않아 힘들 거요.” 강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다. 살아남는 게 강자다. 설사 무공이 약할 지라도 입장상 인독종이 유리했다. 그의 뒤에는 무시무시한 유령이자 사신이 있었다. 인질을 삼아 볼 생각도 해 봤지만 곧장 포기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괴물이 앞에 있는데 뭘 하는가. “살려 주십시오, 대인!” “인독종 님을 몰라뵈었습니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채앵 챙그랑! 병장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사굴에 붙었던 하오문도들이 항복했다. “독사검.” “예, 대…… 컥!” 인독종의 발끝이 독사검 의 복부에 꽂혔다. “숨긴 재산이 있다면 빠짐 없이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편히 죽지는 못할 테니까.” 유난히 길었던 정주의 밤이 끝났다. 아침이 밝자 정주는 밤에 있었던 이야기뿐이었다. “어젯밤 소식은 들었나?” “그 난리를 피웠는데 모를 리가 있나. 지하 투기장과 사굴 전부 인독종의 손에 떨어졌다며?” “설마하니 하룻밤 사이에 비소돈과 독사검이 당할 줄은 몰랐네. 내 친척이 어제 지하 투기장에 있었는데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더군. 비소돈은 물론이고 그 수하들조차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고 들었네.” “도대체 어떻게 하룻밤 만에 서로 반대 방향에 있는 곳을 처리했지? 인독종이 음살녀 와 손을 잡았나?” “아니. 목격자들에 의하면 무음사자, 그리고 그가 데려온 자객들이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하더군.” “허어!” 어젯밤에 대한 소문이 정주 전체에 파다했다. 심지어 그 소식은 정주를 넘어서 하남으로 퍼졌다. 이후 중원 무림 전체에 퍼지는 건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나 무림 전체에서 보면 그다지 큰 화제는 되지 않았다. “그래 봤자 삼류 밖에 없는 잡배들 아닌가.” “쓰레기들 정리하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무음사자? 하하. 과한 별호로군.” “삼류들밖에 없으니 기척을 못 잡는 건 당연하지. 비소돈이나 독사검도 대단해 봤자 절정이 아닌가.” 정도와 사도, 마도에선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다들 코웃음을 치면서 별거 아니라며 넘어갔다. 그것보다는 혈근경 사건 이후 매서워진 분위기가 더 중요했다. 흑도는 흑도. 제대로 취급조차 못 받는 세계다. 화제가 되는 건 어디까지나 흑도, 그리고 하오문의 중심부인 정주 사람들 정도였다. 여하튼, 이튿날이 밝자마자 강능초는 잠 한숨 자지 않은 채로 잔존세력을 흡수하는 데 힘썼다. 지하 투기장은 힘쓸 것도 없었다. 주서천이 그 잔당을 전부 소탕해서 손쉽게 이루어졌다. 사굴의 경우도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으나 어렵진 않았다. 권좌의 교체에 곧장 순응하며 흡수됐다. 독사검은 지하 뇌옥에 갇혔다. 재물의 위치를 전부 토해 내게 만들기 위해서 고문을 가했다. 그리고 이 일이 있은 직후 하오문에서 한 사람이 움직였다. 암천회의 천선성, 하오문주였다. 선홍 빛깔을 띠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침실의 위쪽에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뒤섞여 널브러져 있었다. 머리가 아찔해지는 향기의 속, 천선에게서 차디찬 분노가 흘러나왔다. “도대체 이게 뭔……” 천선의 입장에선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최근 신홍 강자로 떠오른 인독종이 근시일 내로 삼인방의 권좌에 도전할 것은 대충 예상했다. 그 행위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상처럼 있는 일이고, 과거에도 몇 번 있었다. 비소돈과 독사검이 그랬고, 음살녀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 모두 전에 있던 강자이자 수족을 죽였다. 딱히 수족을 죽인다고 해도 화내진 않는다. 사람이야 바꿔 쓰면 그만이고, 반대로 약자가 아니라 강자라면 그것을 환영하면 환영했지 싫지는 않았다. 전처럼 제안을 하면 되는 것이고 그걸 거부하면 죽이면 된다. 그러면 새 사람이 나타나 수족이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 중 도전자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는데 바로 수입원의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점이었다. 동쪽의 지하 투기장, 서쪽의 암시장, 남쪽의 환락가. 이곳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은 적지 않다. 어차피 권좌를 얻으면 이 수입원도 들어오기에 건들지 않았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고생해서 얻었는데 괜히 싸웠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