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157)
있었지만, 강시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주서천과 낙소월이 힘내야만 했다. 다행히 힘이 부족하진 않다. 도리어 신경이 쓰이지 않도록 제갈승계와 소령이 숨어 있기를 원했다. 주서천은 만중검으로 강시를 머리나 몸까지 베었고, 낙소월은 산검으로 머리를 날렸다. 주서천과는 달리 내공이 무한하지 않은 낙소월은 조금 지친 기색이었지만, 그럼에도 강시들을 어렵지 않게 처리했다. “드디어 숨 좀 돌리겠네.” 검으로 머리를 찔러 확인 사살까지한 뒤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 낙소월은 수통을 꺼내 목을 축였고, 제갈승계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구조를 파악하는 데 힘썼다. “미안하다. 너무 섣불렀어.” 주서천이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도착하자마자 야명주부터 꺼낸 게 잘못이었다. 좀 더 신중해야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누구라도 그랬을 걸요.” 낙소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위로해 줬다. “낙 소저 말씀이 맞습니 다. 아니, 애초에 그곳은 ‘무너지도록’ 설계되어 있었으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냐?” “워낙 순식간이라 자세히 보지는 못 했지만, 빛뿐만 아니라 소리나 무게, 그 외에도 문이 열렸다 닫히는 진동 등 여러 가지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설사 형님이 야명주를 꺼내지 않았더라도 발동됐을 겁니다.” 제갈승계의 설명에 주서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 그렇다면……” “사자림의 입구는 눈속임이었다거나, 아니면 이곳 자체가 함정일 수도 있는 거죠.” 후자가 아니기를 빌어야겠군.” 전자라면 적어도 이곳이 비밀 분타라는 건 변하지 않지만, 후자의 경우면 곤란하다. “그래도 그 정도의 설비를 준비한 거면 적어도 눈속임은 아니지 않을까요?” 낙소월이 치맛자락에 묻은 먼지를 소매로 툭툭 털어 내면서 말했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지.” * * * 암천회에는 살계부(殺戒簿)란 것이 있다. 얼마 전에 이곳에 주서천의 이름이 윗부분에 새겨졌다. 비록 천선의 부재나 대계로 바쁘지만 천기는 주서천에 대해 생각하고,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확실하진 않으나, 주서천이 본 회의 존재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의심의 근거가 되는 건 맹강이다. 맹강이 암천회를 믿지 않았던 것처럼, 암천회 역시 그를 믿지 못했다. 생김새는 뇌까지 근육으로 둘러싸여 있을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문관 뺨칠 정도로 똑똑한 데다가, 성격 또한 세심하고 철저해 결코 얕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는데 성과가 있었다. 몰래 본 회를 조사하려던 것을 포착했다. 당시에는 보고도 모른 척했다. 눈 감아 준 게 아니다. 미리 대비하여 후에 그걸 믿고 무언가 하려는 걸 막을 수 있으니 상관없었다. 도리어 그 믿음이란 걸 이용한 계책을 낼 수 있으니 좋았다. ‘회에 대해서 기억하기 쉬운 거야 남겼을 리 없겠지만, 분타나 첩자 정도는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 천기의 추측은 소름끼칠 정도로 잘 맞았다. 괜히 암천회의 두뇌가 아니었다. 그동안 정보가 너무 제한되어 있어서 그렇지, 이렇게 무언가 실마리 같은 게 보이면 금세 눈치챘다. ‘주서천이 회에 대해서 알건 모르건 간에, 그 수기를 보게 된다면 필히 찾아올 터. 그게 기회다.’ 일류나 절정 정도의 수준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지만, 그 이상이라서 문제였다. 화경의 경지인지는 아직도 의아하나, 적어도 천하백대고수의 무위를 지녔다는 것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사전에 온갖 기관들을 설치해 뒀다. 결코 살아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천기는 전략에만 능한 게 아니다. 진법은 물론이고 기관에도 조예가 깊었다. 암천회의 기관지술은 전부 천기의 머리에서 나왔다. ‘기관괴협이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그렇게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애초에 무림에서 사장된 학문이니 공부하는 데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기관괴협은 제갈세가의 피를 이은 주제에 머리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해제하기는커녕 알아채지도 못할 게 분명하다.’ * * * 석벽에 드문드문 걸린 횃불이 통로를 은은하게 비춘다. 은은한 빛에 의지하며 일행은 앞을 걸었다. “히히히. 여길 봐도 기관, 저길 봐도 기관이네. 그럭저럭 힘썼지만 이 천재님 앞에선 무의미한 말씀!” 제갈승계가 신난 얼굴로 목소리를 높여 웃었다. 암천의 두뇌, 그 천기조차 제갈승계의 이상할 정도로 기관에만 집중된 천재성만큼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기야 이상한 것만은 아니다. 오직 기관에만 집중된 천재성이라니, 고금을 통틀어도 그런 건 없었다. 만각이천의 앞에서는 어떠한 기관도 숨지 못했다.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건 소재가 무엇이 되었건, 그런 것 따위는 아무 의미 없었다. 종류에 상관없이 전부 잡혔다. 제갈승계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침이나 소도 같은 걸로 꾹꾹 누르면서 간단히 해제하고 지나갔다. 처음의 입구 때를 제외하곤 발동된 함정은 하나도 없었다. “정말로 기관이 설치되어 있기는 한 걸까요?” 워낙 순탄하다 보니 의아할 정도였다. ‘괜히 만각이천이 아니란 말이야.’ 언제 봐도 혀를 내두르는 재능이다.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 한들, 지금까지 봐 온 기관을 떠올리면 결코 쉽게 빠져나오진 못했을 것이다. 제갈승계의 안내가 있었기에 시간을 몇 시진, 어쩌면 하루나 이틀이 걸릴 정도를 단축할 수 있었다. 참고로 중간중간 강시들이 등장했는데, 입구에서 마주쳤었던 사강시(死價尸)였다. 사강시는 삼류나 이류는 당해 내기가 좀 까다롭지만, 일류 정도만 되어도 그럭저럭 상대할 수 있다. 주의할 건 시독과 내공을 불어 넣지 않으면 베이지 않는 몸. 움직임도 둔하니 그리 걱정할 건 없었다. 처리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적당히 상대해 쓰러뜨린 뒤 다음 길로 향했다. “응?” 통로가 점차 넓어질 때 쯤. 신난듯이 전진하던 제갈승계가 멈춰 섰다. 눈매도 독수리처럼 매서워졌다. “무슨 일이냐?” 주서천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이 앞, 전부 함정입니다.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니 전부 파악하기도 힘드네요.” “도대체 얼마나 넣어 둔 거야?” 기관을 적극적으로 운용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할까?” “괜찮습니다. 돌아가면 되죠.” “돌아가다니?” “음…… 어디 보자, 여기. 여기를 베어 주시겠습니까?” 제갈승계가 우측 석벽의 곳곳을 가리켰다. 주서천은 강기를 실어 가리킨 곳을 깔끔하게 베었다. “어?” 알려 준 곳을 찔러 베면 다른 곳과 달리 검 끝이 가벼웠다. 석 벽 너머에 빈 공간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고개를 돌려 제갈승계에게 혹시 하는 표정을 지어 주자 그가 머리를 아래위로 가볍게 흔들었다. “여기처럼 좁은 곳에 열 가지 이상의 기관을 쑤셔 넣으면 발동 중 문제가 생깁니다. 그걸 막으려면 여유 공간을 만들어서 대비해야 하죠.” 제갈승계가 말을 끝내면서 석벽을 손바닥으로 밀어내자, 쿵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졌다. 그리곤 머리만 살짝 내밀어 안을 확인한 다음, 손을 들어 표시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기관 장지가 여러 개 있을 텐데, 어둠에 눈이 익숙해진 다음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면 됩니다. 계기가 되는 장치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저기, 제갈 공자님.” 낙소월이 제갈승계를 신기한 듯이 쳐다봤다. “방금 전에 알려 준 부위는 무엇이었나요?” “외부의 잘못된 충격으로 기관이 발동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건드려도 되는 부위를 알려 준 겁니다.” “대단하군요. 도대체 어떻게 안 거죠?” 낙소월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감탄을 흘렸다. 기관에 대해서 모르지만, 제갈승계가 대단한 건 안다. “크흠 크흠.” 제갈승계가 천장을 찌를 정도로 콧대를 세웠다. 가슴을 쭉 내밀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긴요. 당연한 겁니다. 그보다 어떻게 알았냐고요? 그냥 보이잖아요. 낙 소저도 참. 하하.” “……네?” 처음에는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표정이나 분위기를 보고 진담이라는 걸 깨달자 당황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을 때, 자신의 사형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저거 정말 안 좋은 유형이니까 귀담아 두지 마. 혹시라도 배울 생각이면 차라리 독학을 해라.” 진심이었다. 신난 듯이 떠들어 대려는 천재를 진정시킨 다음, 일행은 심호흡을 하고 숨은 공간에 진입했다. 내부에 진입하자 정말로 기관 장치가 여럿 있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장치는 보기만 해도 어지러울 정도였고, 입구에서 목숨을 위협했던 초승달처럼 흰 칼날이나 사람을 곤죽으로 만드는 철퇴도 숨어 있었다. 혹시라도 소리를 내서 잘못 건드릴까 봐 숨소리까지 참아 가면서 기관 장치들을 피해 갔다. 지나가기 전까지는 왜 진작 이런 곳으로 안 왔냐고 물으려다가 몸으로 겪어 보니 의문이 저절로 풀렸다. 여유 공간이 그다지 넓은 것도 아니라 움직임에도 한계가 있어서 그런지 매우 불편했다. ‘진짜 질리도록 넣어 뒀군.’ 아무래도 이 앞에서 마무리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동안 접했던 함정보다 배는 많았다. 약 일각 정도를 조심하면서 지나갔다. 서서히 기관의 숫자도 적어지면서 여유 공간도 사라졌다. 뱀의 몸통처럼 길게 이어지던 기관 장치도 이제 끝났다. ‘잠깐.’ 제갈승계가 외부로 나가려 석벽을 짚으려는 순간, 주서천이 손을 번개같이 뻗어 막았다. ‘바깥에 누가 있다.’ 검지를 들어 입가를 가리고, 귀에 집중하라는 시늉을 보였다. 벽 너머에서부터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청각에 내공을 싣고, 외부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이봐, 최초의 진동 이후 반응이 없는데?” “입구의 기관에 뭉개져서 죽은 거 아니야? 상천십좌가 아닌 이상 그것에서 살아남기에는 힘들지.” 일행의 눈이 크게 떠졌다. 주서천은 머리를 굴리며 상황 파악에 나섰다. ‘최초의 진동…… 그런가, 입구의 기관? 그것보다 우리의 침입을 알고 있는 눈치인데……’ 최악의 경우, 이 장소 자체가 함정일 수 있다. 함정 자체는 무섭지 않은데, 건질 게 없다는 게 문제다. ‘아니, 그래도 이 정도의 준비를 해 뒀는데 아무것도 없지는 않을 거야.’ 그리 생각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부디 최소한의 정보라도 있기를 속으로 바랐다. ‘누구지?’ 석벽 너머에 누가 있냐에 따라 행동이 변한다. 아직 판단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그래서 누가 이야기하기만을 기다렸다. 되도록 빨리 말해 줬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유령신공을 수련한 주서천이나 애초에 자객인 소령은 하루나 이틀은 가볍게 버티지만, 다른 둘은 아니다. “움직여야 하지 않나?” 다행히도 벽 너머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입 좀 다물어라, 개양성.” 중저음의 목소리가 짜증을 냈다. ‘개양성!’ 주서천의 눈이 번쩍 떴다. 칠성사 중에서 고수를 다수 데리고 있는 곳이 이 개양성이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정예 부대다. 참고로 그중에서도 ‘개양’은 회주 다음의 강자가 맡았는데, 지금은 누가 이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원래는 이 당시 암천회가 무선화를 치료해 주고, 무곡을 포섭해 개양에 앉히지만 역사가 바뀌었다. ‘들어 보니 칠성사병 같은데……’ 회 내에서 칠성사의 우두머리 호칭은 후미에 붙는 ‘성’을 뺀다. 그렇다면 그저 개양성 소속이라는 의미. 그러나 방심할 수는 없다. 자신이나 낙소월은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