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227)
보게 됐네요.” 대화하느라 옆에 누군가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뱁새눈을 뜬 낙소월이 보였다. “강호를 유람하시면서 풍류라도 즐기셨는지, 여인의 마음을 농락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시네요.” “…… 말에 가시가 있지 않아?” “흥.” 낙소월이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노려봤다. “어쨌거나, 부담스러우셨다면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러나 한 치의 거짓 하나 없는 의견입니다. 저는, 아니 저희는 제갈 소저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어요.” “믿어 주시는 겁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 공자의 말씀이니까요.” 이래서 명성이란 게 중요하다. 아무리 대단한 힘을 지녀 봤자, 영향력을 끼칠 만한 명성이 없다면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주서천은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튿날. 주서천을 포함해 난주에 잔류한 정파인들이 대대적으로 귀향길에 올라섰다. 화산파가 제일 먼저였다. 참고로 위지결의 경우 정혈대전이 끝나자마자 몇몇 제자들을 데리고 귀환했다. 아무리 전쟁 도중이며 대기 명령이 떨어졌다곤 해도, 사문이 곤혹스러우니 화산오장로로서 갈 수 밖에 없었다. 화산파도 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주서천은 난주에서 등을 맞댄 전우들과 인사했다. “매화정검 대협과 함께 싸울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가문 대대로 자랑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무림맹의 몇몇 무사들이 감격에 겨운 듯 인사해 줬다. 부담스러우면서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홍고의 인사는 담백했다. 그 외에 주요 인사들과도 그럭저럭 인사했다. 시간이 없다 보니 전부 인사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 전날에 대강 가볍게 인사했으니 괜찮았다. 화산으로 향하는 길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난주에서 준비해 준 말을 타고 전력으로 달리다가, 더 이상 달리지 못하게 되면 경공을 썼다. 하나같이 일류 이상의 정예들인지라 속도도 속도고 잘 지치지 않았다. 특히나 매화검수는 압도적이었다. 도적 역시 만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도적들이 마주치고 싶지 않아 숨어 다녔다. 혹시라도 협의라거나 귀찮은 걸 자극할 것 같아 노략도 잠시 멈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산에 도착한다. * * * 화산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소란스러웠다. “왔나.” 주서천은 마음 같아선 사부의 얼굴부터 보러 가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좋지 않아 참기로 했다. 유정목 역시 성격상 좋아하지 않을 터. 그래서 일단은 보고부터 서두르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서천은 상궁회의에 불려졌다. “네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거라.” 위지결도 대충 들은 것이 있었지만, 그래도 당사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또 다르다. 주서천은 흑관이라거나 심상구현을 돌려 말하면서 당시의 일을 세세하게 이야기했다. 제법 지루한 시간이었으나, 화산오장로 그 누구도 한눈 팔지 않았다. 귀를 기울인 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전부 들었다. 종종 의아하여 묻기도 해서 성실하게 답변했다. “……이상입니다.” “후우……”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충격이었다. 그 외의 대체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현재의 난처한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섭정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지……” “어허. 큰일 날 소리.” “어이쿠.” 섭정이란 직접 통치할 수 없는 사정에 빠진 임금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것. 보통 임금이 불치병에 빠졌거나, 혹은 임금이 이렇다 할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어린 나이일 경우 섭정을 한다. 대신할 용어가 없어 섭정이라 표현했지만, 단어 자체는 임금을 뜻하기에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린다. “설상가상으로 자하신공의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거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화산오장로가 하나같이 끙끙거렸다. “그래서, 저에게 생각이 있습니다.” 주서천이 입을 열었다. “생각?” “예. 일단은 자하신공의 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해 보게.” “우선, 정말로 뜬금없지만 전 천재라고 합니다.” “하?” 화산오장로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미쳤냐는 눈초리였다. 눈초리가 비난으로 물들기 전에 주서천이 다음 말을 이었다. “저에 대한 세간의 평가입니다. 그평이 얼마나 허황됐냐면, 제가 태어날 때부터 천골지체였다거나 혹은 영약을 밥 먹듯이 먹었으며 이십사수매화검법조차 일주일 만에 대성했다고 합니다.” 전부 틀린 말은 아니다. 전생이란 비밀이 숨겨져 있지만 따지고 보면 몇 개는 맞다. “그래서 지금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건가?” 명수악, 조무양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지금 장난이라도 치냐면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애초에 그딴 헛소문은 누가 믿는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제 무위 역시 상식적으로 불가능하죠. 억지를 좀 부리면 됩니다.” 약관에 천하백대고수 중에서도 최상위, 그것도 화경에서도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경지에 있다. 그 외의 업적도 생각하면 정말 터무니없다. 반대로 천골지체라거나 여러 타당한 연유가 없다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뭐라 할 것이다. “그러니, 자하신공의 십성 이상의 성취를 빨리 이룬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제 이름이 막 알려진 이후부터 배워서 열심히 수련해서 올렸다고 우기면 됩니다.” “끙,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거 시원하게 말해봐라.” 단약사, 영진이 답답한 듯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전 장문인, 검선께서는 사실 우화등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 철혈매검, 심옥련이 무언가를 눈치챘다. “과연, 무슨 의도인지 알겠다.” 팔짱을 끼고 침묵을 지키던 위지결이 나섰다. “등선에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나 밖에 없는 제자가 어리고 부족하면 문제가 심각하지.그런 경우에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다.” “예. 자하신공을 사문의 누군가에게 전수해서 대신 가르칠 수 있도록 손을 쓰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장문인께서는 너를 따로불러 검을 가르쳐 주셨으니, 이상할건 없다. 그러나 아무리 천재인 너라 해도 전부 맡기는 것은 좀 그러하지 않겠느냐. 아무리 그래도 의심을 받을 게야.” “아니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자하신공을 전수받은 건 저 혼자만이 아니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게 무슨……?” “화산오장로, 전부입니다.” 무림은 화산파의 행보에 집중했다. 역대 최전성기라 일컬어지는 화산파가 장문인을 잃고 어떻게 나올지를 궁금해했다. 얼마 뒤, 화산파에 대대적인 발표를한다. “정휘련을 내세워?” 강호인들이 깜짝 놀랐다. “아니, 뭐 정통성을 생각하면 그게 맞는데……” 정휘련이 다음 대 장문인이 되는건 정해져 있다. 일인전승을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다. “화산오장로가 장문인을 꼭두각시로 내세울 생각은 아닌가?” 그러나 정휘련은 장문인으로 내세워지기는 어리다. 어떤 이들은 섭정에서 흔히들 생겨나는 꼭두각시 지도자를 떠올렸다.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참고로 악소문을 내는 데는 암천회의 손길도 거쳤다. ‘앞으로의 길이 결코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천기는 주서천과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하기로 마음먹었다. 손이 가는대로 온갖 수를 동원했다. 그러던 중 추가적인 소식이 강호를 강타한다. “어째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구먼. 화산파가 아무 생각 없이 정휘련을 앞에 세운 게 아닐세.” “그게 무슨 말인가?” “듣자 하니 화산오장로를 비롯한 수뇌부가 어리고 성취도 부족한 장문인의 교육을 실시한다더군.”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게.” “일단 얼마 전에 혈마와 동귀어진한 검선에 대한 것부터 말해야 하는데……” 화산파의 사정. 검선이 사실은 등선을 앞두고 있었으며, 아직 어린 제자를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는 게 전해졌다. 자하신공을 정휘련 외에도 화산오장로와 다른 한 사람에게 전수한 것. 그 한 사람이란 건 주서천이었다. “허, 전례 없는 일 아닌가?” “그러나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군. 우일문 진인은 생전에 제자를 너무 늦게 들였어.” “한데, 화산오장로는 그렇다 쳐도 주서천에게 전수한 연유는 뭔가? 혹시……” 주서천은 화산오장로와 달리 젊다. 능력도 출중하며, 그 영향력도 단연 손에 꼽혔다. 혹시 제자의 자질에 만족하지 못한 우일문이 주서천에게 맡기려 했던 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이에 화산파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응했다. “헛소문이오. 화산의 미래를 이끌 사람은 정휘련 장문인이외다.” 화산파는 괜한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못을 박았다. 무림, 특히나 정파는 공적인 말이 특히 중요했다. 대문파의 경우 명분이라는 것을 중시해, 직접 한 말은 주워담지 못한다. 주서천 역시 공적인 자리에 가끔씩 얼굴을 비치며 사람들에게 장문인이 될 생각이 없다는 걸 강조했다. “그러면 주서천에게 자하신공이 전수된 이유가 뭐요?” 주서천은 정파의 영웅이지만, 정작 사문 내에선 어떠한 지위도 없다. 화산오장로야 수뇌부이니 자하신공을 전수받는 건 그렇다 쳐도 주서천은 달랐다. 그게 의문이었다. “그건, 화산의 그 누구도 주서천의 천재성을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오. 화산오장로나 매화검수조차도 자하신공을 전수받아도 정휘련 장문인을 가르칠 정도는 되지 못하오.” 화산오장로는 구결을 전수받았으나, 정작 실제로 익히지는 못했다. 이미 연령이 연령인지라 배울 수 있는 시기는 한참 지났고, 자질 역시 맞았다면 장문인 후보가 됐으리라. “사실 기회가 되면 밝힐 예정이었소. 원래는 발표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정혈대전이 일어나버려 본의 아니게 숨기게 됐으니, 강호의 동도께서는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하오.” 똑똑한 사람들은 이 내막을 조금은 눈치챘다. ‘과연 정휘련이 자하신공의 성취를 이루려면, 주서천의 가르침이 필수다. 하나 장로도 아닌, 그것도 사대제자에게 신공을 주는 건 형평성에 어긋나니 화산오장로 전원에게 전달한 건가.’ 정답에 걸맞긴 했다. 자하신공이 정휘련 외에 주서천에게만 전달된 것이라면 눈치가 보인다. 그래서 오장로도 알게 됐다. 다만 검선의 등선 탓에 신공을 전수한 건 달랐다. 우일문은 생전에 매화심공의 비밀과 더불어 주서천이 화경의 끝자락, 현경 직전에 있어 ‘자하’를 스스로 깨우친 것일지도 모른다면서 수뇌부를 납득시켰다. 다행히도 수뇌부는 나름대로 수긍했다. 상천십좌, 정말로 우화등선 근방의 성취를 이룬 절대고수가 그리 말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 덕에 전생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자하신공의 문제를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미스러운 말들이 튀어나왔으나, 화산파가 “번복한다면 봉문에 들겠다.” 라는 강수를 내걸자 잠잠해졌다. 그렇게, 정혈대전의 뒷정리와 더불어 화산파의 사정 등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부터 시작해 수많은 중소 문파가 변화를 겪느라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가을이 쏜살같이 흘러가고 겨울이 온다. 눈이 한참 펑펑 내릴 무렵, 마지막 해가 내렸다. 주서천은 스물한 살이 됐다. * * * 화산의 매화가 눈 속에서 피어났다. 그 색채가 하얗게 물들었다. 가만히 서 있으면 죽립 위로 눈이 쌓인다. 산문 근처는 눈을 치우는 빗질 소리로 가득했다. “얼마 있었다고 또 강호로 나가는겁니까, 사질.” 정휘련의 시선 속에 미련이 뚝뚝 묻어났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장문인. 보는 눈이 많습니다.” 주서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질도 참 고집이 쎕니다. 비록 사질이 스승은 아니오나, 그래도 장문인의 무공 사범이 아닙니까.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은 존경받아야 하는 법. 하물며 정파의 영웅이자 화산의 자랑이니 당연히 그래야지요.” “끄응.” 주서천은 약 넉 달 동안 정휘련의 곁에 바짝 붙어 자하신공을 비롯한 자하검결을 최대한 가르쳤다. ‘천재긴 천재렸다.’ 과연 그 검선이 고른 제자답게 재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