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272)
“홍무제는 몰래 첩보조직을 키워 조금이라도 권세가 있거나, 혹은 야망이나 능력이 출중해 황권에 침범할 수 있는 신하를 일거수일투족 살펴보게 했으니……” 여러 의문들이 풀렸다. 흩어진 조각이 짝을 찾아 맞춰졌다. “아!” 남궁위무도 눈치챈 듯 무릎을 탁쳤다. “관부의 영향이 닿지 않는 곳, 홍무제의 의심을 피할 수 있는 무림을 택한 거로군!” 홍무제 시절에도 무림은 논외에 속했다. 북방의 오랑캐를 비롯해 남만의 대월국 등 외세의 적이 워낙 많지 않은가. 괜한 충돌은 피하고 싶었다. 무림인보다는 원나라의 잔재나, 토착 세력이 더 신경 쓰였다. 내버려 두면 무림도 관여하지 않으려 하고, 무엇보다 성가신 도적의 토벌을 대신해 주니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림을 신경 쓸 시간에 언제 모반을 꾀할지 모르는 신하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나았다. “과연, 그랬나.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남궁위무가 감탄사를 흘리며 눕혔던 몸을 세웠다. “암천회에 동조한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나, 고위 관리가 여럿 있었다면 무림을 위협할 만한 세력을 순식간에 만드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돈도 돈이고 권력도 권력이지만, 황궁무고(皇宮武庫)가 있지 않습니까.” 제갈상이 정리된 생각을 말로 옮겼다. 황궁무고. 무림을 포함한 천하의 법보를 비롯해 무공비급이나 병기서, 그 외에도 각종 무기를 보관하는 장소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황궁무고가 중원의 역사 그 자체라 할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점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미신에 집착한 진시황이 온갖 기서나 법보, 무림의 것을 수집한 것이 시초였다 한다. 그 후로 왕조에서 왕조로 이어졌다 했으며, 지금에 와서는 애석하게도 닫힌 채 버려졌다시피 했다. 홍무제는 공을 세운 신하가 무고에서 무공비급이나 명검을 요구해 권세를 키울 것 같아 경계했다. 그래서 차라리 문을 걸어 잠그고 폐쇄했다. “한두 사람이라면 모를까, 관료 몇이 작정하고 하나씩 빼어온다면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무엇보다 현 황제 폐하가 어릴 때부터 무인적 기질이 남달라 황궁무고에 관심을 보였으니, 문제없었을 거고요. 그 틈을 노렸을 겁니다.” 신하, 특히나 무관이 황궁무고에 관심을 가지면 의심부터 하고 반대하지만 친족의 경우에는 달랐다. 그들이 힘을 키우면 곧 황권이 강화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현 황제처럼 친족들은 허가했다. “황궁무고 안에 있는 것을 몰래 빼오다니, 제정신인가? 절도나 횡령의수준이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모반죄네.” “그런 건 사소한 문제입니다.” 주서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홍무제의 신하, 관료들의 경우는 능력과 존재만으로 의심을 받아 숙청의 대상이 됐습니다. 개국공신까지 쓸려나가는 판국에 어느 누가 무사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살려면 뭐든지 해야 했을 겁니다.” 이러한 생존욕구는 결과적으로 암천회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목숨 걸고 과감하게 행동한 덕에 축적되는 재물이나 힘 또한 그만큼 상당할 수 있었다. “후우…… 머리가 지끈해지는구나.” 남궁위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한 번에 너무나도 많은 걸 들었다. 무엇보다 관부가 개입한 건 무림사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전례가 없으니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잠깐……” 남궁위무가 손을 내려놓았다. 그 얼굴에는 아직 의문이 남아 있었다. 암천회의 탄생 배경이나 저력에 대한 건 어느 정도 해소됐다. 하지만 여기에서 새로운 의문을 낳았다. “암천회가 홍무제의 숙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면, 지금의 암천회는 무엇인가?” 결과적으로 암천회의 목적은 거의 성공한 게 맞다. 목적에 실패해 발각됐다면, 홍무제 성격상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잔존한 것만으로 성공을 의미한다. 암천회의 주체는 맹강처럼 신분을 숨기고 무림에 녹아들어 은거했을 것이 분명했다. “어찌하여, 황제의 숙청에서 살아남기 위한 곳이 무림 정복을 꾀하게 된 건지도 이해가 안 가는군.” 남궁위무가 주서천에게 설명을 요구하듯이 쳐다봤다. 제갈상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앞으로 할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 천마는 목숨이 끊기기 전 핵심만 집어서 설명해 줬다. 전부 듣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다. “암천회가 여태껏 드러나지 않았던 걸 보면, 소기목적을 달성한 건 확실합니다. 입회한 관료나 신하들 대부분이 관부에 닿지 않는 곳으로 은거하는 데 성공했겠지요. 그러나 전부는 아닐 겁니다.” “과연.” 제갈상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남궁위무만 답답한 듯이 그 다음 말을 닦달했다. “암천회는 존재만으로도 역모에 해당합니다. 누군가는 남아서 그 비밀을 끝까지 숨겼어야 했죠.” 암천회의 근간이 되는 홍무제의 신하들은 일찍이 사라졌다. 무림인지 아닌지도 모를 곳으로 은거했다. 숙청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불경한 죄를 저질렀으니, 밝혀질 것을 두려워해 속세와 연을 끊었을 터다. “이후 잔존한 것은, 황궁무고와 홍무제 시절 신하들의 권세로 이루어진 무림의 비밀무력단체. 그리고 이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남은 자입니다.”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전란의 시대. 평화가 찾아온 뒤로도 암천회주에 대해선 알 수 없었다. 아니,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맞았다. 아무리 무림이라 할지라도 암천회의 탄생배경과 그 과정이 밝혀진다면 역모에 휘말릴 수 있으니까. “그 남은 자란 것이……” “암천회주겠지요.” “대체 그는 누구인가?” “암천회주는……” 한림원(翰林院). 당(唐)나라 현종(玄宗) 초기에 설치된 관청으로, 그 유서는 깊다. 지금에 와서는 황제의 칙령을 다듬거나, 문서를 담당하는 등 각종 학문에 관련된 일을 맡고 있다. 과거시험의 합격자 중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야 들어갈 수 있으며, 무려 내각대학사까지 배출했다. 그야말로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천재들만 모인 곳이라 할 수 있으나, 애석하게도 그 취급은 좋지 않았다. “백절불요(百折不燒)하여 한림원에 들어오면 뭐하나. 뒷방 늙은이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늘.” “그러게 말일세.” 한림원 역시 홍무제의 숙청에 벗어나지 못했다. 중원에서 공부로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인 곳이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먹물이 종종 핏물이 됐다. 야망에 뜻을 두지 않아도 능력이 우수하면 숙청당하니 한림원 입장에선 매우 억울했다. 그나마 대부분 직급이 낮아 타 기관에 비해선 피해가 적은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하나 한림원의 상황은 홍무제가 숨을 거두고 난 뒤인 오늘날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아아, 내전의 결과만 달랐어도……” “쉿, 입 다물게. 자네 미쳤나?” 불과 이십여 년 전만 해도 이 나라는 내전으로 몸살을 앓았는데, 홍무제 사후 황위 계승이 연유였다. 홍무제는 장남이었던 의문태자(懿文太子)를 황태자로 책봉하나, 의문태자가 그만 먼저 죽고 말았다. 그 뒤 황태자의 후보로 현 황제가 대두됐으나, 당시 좌천선(左贊善)한림학사(翰林學士)가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이어야 한다며 반대해 손자인 건문제(建文帝)가 황태자로 책봉되어 곧 제위에 올랐다. 이때만 해도 한림원, 아니, 학자들의 시대였다. 건문제가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한 덕에 학자들이 곁에서 보좌하며 힘을 키울 수 있어서였다. 시간이 지나 황위에 등극하자, 어릴 적부터 곁에서 보조하던 학자들은 자연히 정부의 요직을 차지한다. 이후 막강한 군권을 가져 황권을 위협할 수 있는 숙부들, 번왕(藩王)의 세력을 약화하려는 정책을 펼친 건문제가 그렇지 않아도 조카에게 황위를 빼앗긴 숙부들과 격돌하면서 그 규모는 걷잡을 수 없도록 커져 대대적인 내전으로 번졌다. 그러나 결과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학사의 푸념에도 알 수 있다시피 건문제가 패배하고 행방불명됐다. 이로써 달콤하고 짧았던 학자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측근들 대부분은 현 황제에게 숙청되어 사라졌다.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녹존(祿存)?” “예?” 한쪽 구석에 앉아 서적을 정리하던 삼십 대 중반의 한림원 학자, 녹존이 머리를 들어 반응했다. “예는 무슨 예인가. 넋두리를 듣지 않았나.” “이 후배야 나랏일에 뜻을 두고 장원 급제한 것이 아니라, 가난에서 벗어나 재산 좀 모으고 싶은 것인지라 무어라 말씀드리기가 힘듭니다.” 녹존에게 야심이란 너무나도 먼 개념이었다. 누군가는 큰 뜻을 품고 과거를 봤을지 몰라도, 그는 전혀 아니었다. 괜한 정치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고, 그냥 성실하게 일해 녹봉 좀 받아가며 편히 살다 눈을 감고 싶었다. 관지도 한림원에서 제일로 낮은 직급인 종칠품 검토(檢討)였다. “그런가?” 종육품 수찬(修撰)인 선배 학자가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박혀 넋두리나 하는 자신들과 다를 것 없으니 말이다. “그럼 저는 슬슬 일어나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신세? 아아, 그러고 보니 자네 근무일이 금일까지였나…… 그만 깜빡 잊고 있었군그래.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여태껏 정말 수고 많았네. 그래, 낙향한다고?” “그동안 모아둔 걸로 느긋하게 지내보려 합니다.” “사고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길게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군그래.” “어쩔 수 없지요. 그러면 정말로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연이 닿으면 또 만나세.” 녹존은 몇 차례 대화를 나눈 뒤, 한림원을 떠났다. 관직에서 물러나는 게 예정되어 있던 만큼 그 과정은 깔끔했다. 인사도 사전에 끝내 문제없었다. 딱히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림원을 나와 저잣거리로 나왔다. 약 이각 정도를 걸어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낯짝이 험상궂은 왈패 무리가 길목을 앞뒤로 막았다. “이보게, 외팔이 형씨. 가진 게 제법 많아 보이는군그래.” 척 봐도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걸어 나와 비릿하게 웃었다. 눈동자에는 외팔이 학자를 비췄다. “방수찬이 보냈나?” 녹존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인사를 나눴던 한림원의 선배 학자가 방수찬이었다. “……” 왈패 무리의 우두머리가 얼굴을 구겼다. 어떻게 알고 있냐는 듯이 묻는 것 같았다. 녹존은 귀찮다는 듯이 하나 밖에 없는 손을 들었다. 푹! 푸욱! 푹푹! “끅.”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길목을 막고 있던 왈패 무리가 돌연 픽픽 쓰러졌다. ‘자, 잘못 걸렸다!’ 우두머리의 낯빛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는 흑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만큼 눈칫밥이 상당했다. 얼른 도망치려고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이미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흑의인에게 잡힌 이후였다. “저, 전부 말하겠습니다!” 무언가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우두머리의 판단은 빨랐다. “들을 것도 없지.” 녹존이 흥, 하고 코웃음 쳤다. “저녁 시간 때쯤,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을 위해 상당한 재산을 비축한 학자풍의 중년을 털라 했나?” ‘……’ “어차피 종칠품 밖에 되지 않고, 그마저 관직에서 물러나 뒤탈이 없을 것이니, 안심하고 습격해서 재산을 약탈해 나누어 갖자고?” 마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맞는 말이라서 뭐라 답해야할지 몰랐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머리를 굴렸다. “됐다.” “잠……” 서걱! 우두머리가 다급하게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이어지지 못했다. 그 머리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독 검토님.” “됐다.” “천기님.” “그래.” 암천의 두뇌, 천기가 답했다. “사주한 놈을 잡아옵니까?” “아무리 직급이 낮아도 현직에 앉아 있는 관인을 건드리는 것은 성가시다. 내버려 둬라. 그것보다는 회주를 찾아뵙는 것이 먼저다.” “존명.” 명시한 장소에 도착하니 선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