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282)
잔당이 숨어 있다곤 했지만,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 손일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무언가 깨달은 듯 이를 뿌드득 갈며 소리쳤다. “암천회로구나!” “정확히 맞췄다.” 암천회는 각 세력에 간자를 심어두었다. 몇몇은 회유하기도 했다. 혈독노인이 후자의 경우였다. 혈마가 중원을 침공하기 전부터 천기성의 일원으로서 각종 주술로 암천회를 지원해 왔다. “저 둘만 내버려 두고 물러난다면 특별히 너희를 고통 없이 죽여주마.” 혈독노인이 인심 쓰듯이 말했다. 살려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혈교의 마인답게 눈앞의 무인들을 주술의 재료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헛소리!” “쯧쯧쯧. 상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받겠단 말인가. 참으로 어리석구나.” 혈독노인이 왼손을 들었다. 소매가 걷히며 피부 위에 새겨진 기형학적인 그림과 글자가 드러났다. 사각사각! 주변을 포위한 거미가 조금씩 늘어난다. 그 외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칠성사병이 나타났다. “너희를 처리하는 데……” “반 시진도 안 걸린다.” 서걱! 혈독노인은 기이한 경험을 했다. 눈앞에 평생을 함께한 손이 회전하면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아직까지도 손에 감각이 남아 있어,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뭐가……?” “말 많이 하다가 일 망치라고 천기가 가르치디?” 누군가가 등을 보이며 혈독노인을 가렸다. 주변에서 그 누군가를 반기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좋은 말 할 때 인면지주 내려두고 가라. 그거 내거다.” 도감부장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말이다. “은공!” 왕일의 낯빛이 환해졌다. “과연, 저 젊은이가……” 손일산은 검신을 만나는 건 처음이다. 들어본 적은 있어도 본 적은 없었다. “주서천?” 혈독노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손이 잘렸는데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인면지주의 서식지, 기문진 내부는 한낮인데도 언제나 어둡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창한 밀림 지대를 뚫고 오는 건 서식지를 제집처럼 돌아다녔던 도감부원도 쉽지 않았다. 요광과 부딪친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늦을 수밖에 없거늘, 이상하게도 일찍 도착했다. “클클클, 뭐…… 상관없다. 목적은 달성했으니.” 혈독노인은 왼 손목을 짚어 피를 멈췄다. 손을 잃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가의 봉황이 독을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라곤 들었지만, 그래 봤자 계집이니라.” ‘걱정이다.’ 주서천은 고개만 살짝 돌려 낙소월을 살폈다.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해독을 돕는 당혜의 표정도 안좋았다. 독봉이라 일컬어지는 독공의 대가가 애를 쓰는 걸 보면 생각 이상으로 위독한 건 아닐까 걱정됐다. “노부의 만혈독은 한낱 미물이 아닌, 애뇌산의 독물들에게서 피를 뽑아 제조한 것으로……” “닥쳐라.” 혈독노인이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하자, 주서천이 거슬린다는 듯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저 차갑게 쏘아붙인 것만이 아니다. 몸에서부터 흘러나온 기세가 주변을 집어삼켜 압도했다. “……” 검신의 위용에 혈독노인이 몸을 흠칫 떨었다. 방금 전까지 잘난 듯이 떠들던 기세나 기분 나쁜 웃음소리도 없다. 고양이 앞의 생쥐 꼴과 같았다. 쿵! 얼음처럼 굳어져 침묵에 잠겨 있는 사이, 지면이 다시 흔들렸다. 초대형거미, 인면지주가 정신 차리라는 듯 발을 굴러 압도당한 혈독노인의 사념을 없앴다. “건방진 것!” 혈독노인이 주서천을 내려다보며 콧방귀를 꼈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이 정도 되는 수를 상대하며 누군가를 지킨다는건 불가능할 게다.” 계획이 틀어져 화산파의 전멸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최우선 목표인 낙소월의 목숨만이라면 앗아갈 수 있었다. “네 사매는 물론이고 당가의 계집도 저승으로 데려가 주마. 괜히 오지랍 떨지 않았으면 조금이라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 참으로 어리석도다.” 중독자의 해독을 돕는 건 생각보다 위험한 행위다. 자칫 잘못하면 독기가 옮겨질 수도 있고, 운기조식처럼 외부의 충격을 받고 주화입마에 빠질지도 모른다. 전자건 후자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굳이 주서천을 쓰러뜨리지 않아도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지금부터 본 부대는 공격이 아닌 수비에 집중합니다. 낙소월과 당혜의 호법을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해독이 끝날 때까지 버틸 생각이오?” 손일산이 물었다. 거미도 벅찬데 칠성사병까지 나타났다. 수를 대충 세어도 몇십 단위다. 얼마나 버틸지가 의문이었다. “아니오.” 주서천이 검을 빙글 돌려 고쳐 잡았다. “그 전에 끝낼 거요.” 무릎을 접었다 피면서 튀어나갔다. 마치 활시위에 걸어둔 화살이 쏘아진 것처럼 보였다. ‘매화접무.’ 잡초가 발목까지 자라 방해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초식을 전개한다. 나비가 너울거리듯 춤을 췄다. “크아악!” 앞에 서 있던 칠성사병이 비명을 질렀다. 복면이 얇게 잘리면서 턱부분도 위와 아래로 분리됐다. 매화처럼 흩날리는 피 안개 속에서 이십사수매화검법의 매화토염으로 요염한 기운을 내뿜었다. 주변의 광경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혈독노인이 어림없다는 듯 미증유의 힘을 끌어올렸다. 삼단전 중 중단전(中丹田)이라 일컬어지는 심장에서부터 혈기를 뿜어내 혈맥과 기맥으로 동시 순환한다. 혈기가 백회혈을 두드리면서 두뇌를 자극했다. 광기로 일렁이는 안광은 점차 핏빛으로 번졌다. 확장과 축소를 수차례나 반복하는 동공은 기괴하게 느껴졌다. “노부의 혈어술법(血御術法)을 보여 주마.” 혈독노인의 쉰 목소리가 숲 일대에 퍼졌다. 인위적인 감각신호가 말초신경을 통해 척수로 들어간다. 교감과 부교감 신경이 몇 차례나 부딪치면서 여러 작용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척수가 각종 신호를 뇌로 전달해 특정한 파장을 만들어 냈다. 뇌에서부터 흘러나온 파장은 파도가 되어 주변을 집어삼켰고, 그중에서도 거미의 신경에 녹아들었다. 부르르르. 거미 무리가 일제히 몸을 떨었다. 세 쌍을 이루는 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뇌에서부터 내려진 명령은 거미의 혈액을 뒤흔들고 그 육체를 지배했다. 푸슈슈슛! 거미 무리가 일제히 방적 돌기에서 거미줄을 뽑아냈다. 새하얀 실이 그물처럼 퍼져 주서천을 덮었다. 하나도 아닌 수십여 마리가 동시에 뿜어낸 거미줄이 한 곳에 집중되자 설산처럼 쌓였다. “혈어술법!” 개방도 중 누군가가 놀란 듯 외쳤다. “거미를 수족처럼 부리는 것의 정체였구나!” 천하백대고수의 반열에도 올라온 혈독노인은 독공의 고수임과 동시에 타고난 재능을 지닌 주술사다. 혈독노인은 섭혼술을 즐겨 사용하며 그중에서도 혈어술법은 혈교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상위 주술이다. 온몸의 기혈을 비롯하여 심장을 통해 감각신호를 만들어 내고, 대상의 뇌에 침투하고 혈액을 지배해 최종적으로 몸을 조종한다. 그게 혈어술법이었다. 다만, 능력은 강력해도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사람의 경우에는 뇌 구조가 복잡하여 까다롭고, 정신력이 강할 경우에는 잘 통하지 않았다. 소림사처럼 항마가 깃든 심법을 수련했다면 두말할 것 없다. 조금도 침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몇 가지 성가신 점이 있음에도 혈어술법은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과거의 전쟁 도중, 초절정 고수가조종당해 내부에서 날뛰어 전쟁의 패인이 된 경우가 있었다. 여러모로 혈마의 심상구현과 닮았다. 굳이 따지자면 하위호환에 속했다. ‘끝이다.’ 혈목노인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인면지주도 인면지주지만, 그녀의 자식들 또한 영물이다. 체내에서 뽑아낸 거미줄의 끈적임이나 탄력은 보통이 아닌데 그게 집중되었으니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상천칠좌라고 한들……” 파앙! 거미줄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거미집. 그 중심에 사람만 한 구멍이 뚫리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상천칠좌가 뭐라고?” 주서천이 무심한 목소리로 검기를 뽑아냈다. 휘익! 애검인 용연을 휘두르며 초식을 잇는다. 예기를 품은 검기 다발이 정면에 뿜어졌다가 도중에 직각으로 꺾여 위로 치솟고, 이어 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수많은 매화 잎이 떨어지는 것 같은 광경이 혈목노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사초식인 매개이도에서부터 칠초식 매화빈분까지. 순식간에 이십사수매화검법이 펼쳐졌다. 키에에엑! 캬악! 끼이이이익! 어지럽게 떨어지던 매화가 눈을 껌뻑이니 혈우(血雨)로 변했다. 거미의 몸에 수많은 검흔이 남았다. “아아악!” “컥!” 거미만이 아니다. 요광이 배정해준 칠성사병들에게도 어김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 무슨……” 혈목노인이 믿기지 않는 듯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주서천은 거미줄은커녕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호신강기.” 주서천이 아무렇지 않은 듯 친절하게 답했다. 거미줄이 분사되기 직전, 강기의 막을 반구형으로 펼쳐 막아냈다. 그 증거로 사람만 한 크기의 구멍이 뚫린 곳의 내부가 반구형으로 비어 있었다. “이익!” 혈목노인의 피부 위에 새겨진 고문이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싶더니, 격렬하게 움직였다. 핏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던 광채의 세기도 커지기 시작했다. 마치 감정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냐, 주서천! 검신이란 건 허명이 아니로구나!” 분노에 휩싸인 목소리가 숲 곳곳에 울렸다. “하나, 혈마조차 넘어선 이 노부를……” 푹! 혈목노인의 목이 꺾이듯 뒤로 젖혀졌다. ‘무, 슨……’ 주서천이 왼 손목을 털듯이 흔들더니만, 소매 자락 안에서부터 비수가 튀어나와 이마에 꽂혔다. 설마하니 검신이나 되는 정파의 절대고수가 암기를 던질 줄 몰랐는지, 생전의 얼굴은 황당함을 띠고 있었다. 털썩. 육체가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인면지주에 올라 일행을 내려다보던 노마두는 지면으로 떨어졌다. “혈마를 넘어서?” 주서천이 어이없는 듯 코웃음을 쳤다. “혈마를 모욕하지 마라.” 천마도 천마지만 혈마 역시 손꼽히는 강자다. 무공도 주술도 혈목노인은 그 발끝만도 못하다. 만약 혈마와 다시 싸우라고 하면 그 결과는 주서천도 장담할 수 없다. 특히 최후는 재앙 그 자체였다. 흑관이라는 법보를 이용해 육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큭!” “혈독노인이 당했다……” 생존한 칠성사병들이 당황했다. 설마 혈독노인이 저리 허무하게 당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임무를 수행한다.” 천기는 낙소월의 사망이 확인되지 않으면 철수를 불허했다. 이대로 돌아가도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낙소월을 사살한다.” “당혜는?” “포기해도 좋다. 낙소월을 우선으로 해라.” “명.” 칠성사병이 각자 쥔 검병기에 힘을 주었다. 그들은 필사를 각오한 눈으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성가시다.’ 주서천은 칠성사병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연대구품이나 천마군림보처럼 실체와 같은 허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모를까, 그러지 않으니 문제였다. 천기가 목적의 달성을 위해 힘 좀 썼는지, 눈앞의 칠성사병들의 무위가 절정에서 초절정뿐이다. 심지어 합격진에도 능한 건지 각자 조를 짜고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덮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탐색대가 호법을 서고 있었지만, 하나라도 놓치면 큰일이다. “징한 놈들! 겁 좀 먹고 도망쳐라!” 사병인 주제에 개개인의 무력이 몹시 대단한 데다가, 심지어 필사의 각오까지 거리낌 없이 한다. 방심하지 않는다는 점도 여전히 짜증났다. “주서천. 그만 좀 방해하고 죽어라. 부탁이다.” 칠성사병이 진심을 다해 말했다. 주서천 탓에 희생된 동료들만 해도 수백 단위다. 딱히 동료의 죽음에 슬퍼하는 건 아니지만, 그 다음 희생자가 자신이 될 생각에 한숨만 나왔다. “목숨을 걸고 지켜라!” 담향이 호기롭게 외쳤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서천이 탐색대원을 흘겨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殺).” 칠성사병 중 누군가가 명령을 내렸다. 양측이 부딪치려는 일촉즉발의 순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커허억!” 칠성사병이 피를 울컥 토해냈다. “무, 무슨……” 시선을 아래로 천천히 내려 봤다. 가슴에 뻥 뚫린 구멍 사이로 거미의 다리가 보였다. 푹! 푸욱! “커헉!” “아악!” “끅!” 여기저기서 비명이 난무했다. 다행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