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290)
해구 인근, 남도강. 남해와 연결된 강과 해변의 모래사장 사이에서 비명과 금속음이 연달아 터져 나온다. 끼-룩. 백구 떼가 시체더미 위를 원형으로맴돌았다. 그 아래에는 병장기를 휘두르는 무인들로 가득했다. “제기랄!” 빼빼 마르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신장을 지닌 해남검파의 중년 고수, 전수국은 욕설을 내뱉었다. 전수국의 적의로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비춰지는 건, 물빛 머리카락을 찰랑이는 청년이었다. 그 외에도 해남검파와 적대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머리색이 물빛을 띠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남해용문(南海龍門)……!” “남해제이검(南海第二劍)이라는 별호는 허명이 아닌 것 같으나 여기까지다. 이곳 남해에서, 특히나 물을옆에 둔 나, 용조(龍瓜) 적오를 이길 자는 없다.” 적오의 호언에 전수국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함정에 빠질 줄이야……’ 해남검파와 남해용문은 적대, 아니 전쟁 중이었다. 전수국은 바로 얼마 전 남해용문의 은거지에 관련된 정보를 듣고 습격을 준비했다. 사문의 정예를 데리고 습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정보가 고의로 흘린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이백여 명의 정예가 순식간에 백여명으로 줄어들었고, 그에 반면 남해용문의 전력은 끊이지가 않았다. “사람의 욕심과 어리석음으로 바다를 노하게 만들어 용궁을 어지럽힌 죄, 엄히 물을 것이니.” “헛소리!” 전수국은 노성을 내지르며 적오의 말을 일축했다. “신비문파인 척하면서 몸을 사리고 있다가, 본 파와 녹회문(鹿回門)이 다툼으로 세력이 약해진 걸 노리고 나온 주제에 어디서 뻔한 거짓말로 우롱하려 하느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참으로 뻔뻔하도다.” 적오의 산호색 눈동자가 살의로 번뜩였다. “이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용왕의 벌을 내려라.” “용왕의 벌을 내려라!” 남해용문의 문도들이 함성을 외쳤다. “적오!” 전수국이 적오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뛰쳐나갔다. “용의 손톱이 곧 벌이 되리라.” 적오가 역시 몸을 날려 전수국과 격돌했다. “후웁!” 선공은 전수국이었다. 해남검파의 무공은 하나같이 좌수검(左手劍)으로 검을 기울인 뒤 번개같이 휘두르는 것이 특징이었다. 한번 휘두르면 무조건적으로 상처를 보며, 살초가 다분하다 하여 음독하다는 연유가 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초식을 펼치면 반드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해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또한, 무림에서도 흔치 않은 좌수검으로 검까지 기울여서 휘두르다보니 일반무학과 워낙 상이하여 옛적에는 정도에서 어긋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한다. 그래도 꼿꼿이 정도를 표현하며 의협을 중시한 결과 정파의 명문지파가 될 수 있었다. 번쩍! 전수국의 손에서 검푸른 빛과 함께 해남검파의 절기가 펼쳐졌다. 쾌검임에도 그 기세는 강대하였다. 해남검파의 절기인 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의 일초로서 남해의 장대한 물결이 산을 순식간에 무너뜨린다는 해소산붕(海鳴山崩)이라는 검초였다. ‘과연, 남해제이의 검이구나.’ 광오한 태도를 보였던 적오도 전수국의 검초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눈부실 정도로의 빠르기도 보통이 아니건만, 몸을 덮쳐오는 강대한 기세는 압도될 정도이다. 하나 적오도 만만치 않은 건 마찬가지다. 그 전수국을 벼랑까지 밀어붙였던 장본인이 바로 적오다. 용조, 적오의 동공이 파충류의 것처럼 세로로 쩍 갈라졌다. 집중한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검푸른 빛을 뿜어낸 검신이 동공에 비춰졌다. 일초를 펼친 그 순간에 검신에 강기를 실은 게 보였다. “후웁!” 적오의 손 역시 눈보다 빨랐다. 동물을 넘어선 감각이 전수국의 쾌검에 반응해 수직으로 솟구쳤다. 채애앵! 검과 손이 부딪쳤거늘, 이상하게도 금속끼리 부딪치는 마찰음이 들렸다. 심지어 불똥까지 튀었다. 전수국은 검신이 충격을 받고 부르르 떨자, 이를 뿌득 갈면서 적오의 손을 훑어봤다. 그 손은 사람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살색의 피부 같은 게 아니었다. 붉은색을 반사시키는 비늘이 손목까지 둘러싸고 있었다. 손 또한 끝이 뾰족했는데, 벽화에서나 나오는 용의 발톱을 닮았다. ‘남룡조수(南龍凰手)!’ 언뜻 보면 소림사의 용조수의 아류라 볼 수도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완전히 다른 체계의 무공이다. 어떠한 원리인지는 모르나, 남룡조수를 수련하여 상승에 이르면 손이 점차 용의 것을 닮게 된다. 그저 형상만이 아니라, 비늘까지 돋는다. 더 신기한 건 내공을 불어넣을 경우에만 변화한다는 것이었다. “쯧!” 전수국이 혀를 차며 검을 휘두른다. 겉만 보면 사방팔방으로 휘두르는 것 같으나 그 안에는 상승의 묘리가 섞여 있다. 일생이 녹아든 남해삼십육검이 차례대로 초식을 이으면서 적오를 압박했다. “어림없다!” 적오의 눈이 이리저리 바삐 움직인다. 손톱에 맺힌 적색강기가 전수국의 검강을 튕겨 내거나 막아냈다. 남해제이검과 용조의 격돌은 숨 쉬는 걸 잊을 정도로 격하게 이루어졌다. 콰앙! 쾅! 강기가 부딪칠 때마다 그 충격파가 파도처럼 출렁이면서 주변의 야자수가 크게 흔들리며 춤을 췄다. 그 단단한 야자열매조차 버티지 못하고, 중간에 산산 조각나며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과즙이 핏방울에 뒤섞여서 썩 좋지 못한 냄새를 냈다. 하나, 이 격전도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강기란 건 대량의 내공의 집합체다. 절대의 무기인 만큼 소비되는 양도 어마어마했다. 연달아 쓴다면 화경의 고수라 할지라도 금방 바닥을 보이기 마련이다. 일각의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내공의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지친 건 전수국이었다. “쿨럭!” 전수국이 피를 울컥 토해내며 뒤로 물러났다. 내공의 부족에 검강이 도중에 옅어지면서 조강의 충격을 고스란히 맞았다. 내상이었다. 남해제이검의 낯빛은 혈색이 부족한지 창백하게 질렸다. 척 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대사형!” 해남검파의 제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낭패다.’ 치명상까지는 피했지만, 내공이 바닥이 났다. 적오 같은 화경의 고수와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과오구나.’ 전수국은 자책하면서 후회했다. 남해용문과의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그만 섣부른 판단을 하고 말았다. 사문의 최정예이니 어찌할 수 있을 것이라며 과신했다. 아니, 오만에 빠지고 말았다. ‘여기서 전멸한다면 해남검파의 미래는 없다.’ 어떻게든 물러나야만 했다. 하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함정이란 걸 깨달았을 때 진작 했다. “도망칠 궁리를 하는 것 같으나, 소용없다.” 적오가 전수국의 내심을 꿰뚫고 말했다. “이 주변은 남해용문이 자랑하는 사해갱진(沙海抗陣)을 준비해 두었다. 지원 병력은 물론이고 날개라도 달려 있지 않은 이상 개미새끼 한 마리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사해갱진은 남해용문이 자랑하는 기문진이다. 모래사장에서만 펼칠 수 있는 제한이 있으나, 그만큼 강력하기 짝이 없었다. 사해갱진이 발동하면 그 주변 일대가 마치 개미지옥처럼 모래 구덩이로 변하는데, 발을 잘못 디디기라도 하여 빠지면 다시는 위로 올라올 수 없었다. 심지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깊숙히 빨려 들어가는 구조인지라, 발버둥 치면 목숨만 잃을 뿐이었다. 신법의 고수라 할지라도 정작 발걸음을 늘릴수록 더 빨려 들어가니, 살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다. 이 기문진 탓에 후퇴도 하지 못했으며, 초기에 잘못 대응하여 수십 명이 빠져 죽었다. “이럴 수가……” “으으으!” “이대로 죽는 것인가?” 해남검파의 제자들의 얼굴에 패색이 짙어졌다. 전수국의 얼굴도 좋지 못했다. 판단을 잘못해 함정에 빠진 어리석음을 저주하며 절망에 잠겼다. 적오가 손을 쥐락펴락했다. 손가락뼈가 맞물리면서 우드득하고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죗값을 치루거라, 어리석은……” “실례합니다!” 그 순간, 외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가 멈췄다. 해남검파도 남해용문도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귀신에라도 홀린 얼굴이었다. 몇백여 명의 무인들의 시선이 한곳에 몰렸다. “……?” 그곳은 불과 몇 각 전까지만 해도 해남검파의 제자들을 잡아먹었던 모래사장 위였다. 문제는 그 위에 남녀가 산책이라도 하듯이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무슨……?” 전수국은 순간 꿈을 꾸나 싶었다. 절망이 너무 깊어 환각을 보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 정도로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특히, 두 남녀 중 여인은 선녀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의심은 더더욱 깊어졌다. “거기! 좌수검을 보아하니 해남검파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예? 예, 예…… 그렇소만……” 전수국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답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전수국의 태도에 뭐라 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비슷한 심경이었다. 혹시나 남해용문의 또 다른 기문진에 걸려든 건 아닐까 싶었으나, 적오의 태도를 보니 아닌 듯했다. 애초에 다 이긴 싸움에서 이런 번거로운 짓 따위 할 이유가 없었다. “혹시 도움이……” “주 공자. 이 앞에서부터는 우로 칠 보(步)에요.” “아, 네. 거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청년이 선녀에게 무어라 듣곤 양해를 구했다. “……?” 적오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해갱진은 남해용문의 기문진 중에서도 손꼽히는 기문진이다. 아무나 돌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헌데 웬 남녀가 나타나선 산책하듯이 걷고 있다. 상식에서 벗어난 광경에 인지 부조화가 일어났다. 남녀는 사해갱진를 건너왔다. 그리고 남자가 전수국에게 물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그, 그렇소만……” 전수국이 귀신에 홀린 듯 대답하자, 남자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곤 적오를 향해 검을 겨누며 말했다. “안녕, 난 주서천이고 이쪽은 모사이신 제갈수란 소저라고 해. 지금부터 너희를 개박살 낼 거야.” 그 누구도 주서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아니었다. 해남도가 최남단에 있다곤 해도, 외국이 아니니 방언이 있을망정 언어는 같다. 그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서천?’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근데 워낙 현 상황이 어이없어서 떠올리지 못했다. “허……” 길게 이어진 침묵을 깬 건 적오였다. “무슨 수로 사해갱진 내부로 진입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미쳐 있는 모양이로다.” 고작 단 두 사람이었다. 사해갱진 안으로 무사히 들어은 건 둘째치고도, 고작 둘밖에 되지 않는데, 박살 내겠다고 선언했다. 아무렇지 않은 저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아하니, 분명 정신이 나간 것이리라. “그곳에 가만히 있거라, 광인들이여. 남해제이검의 목부터 빼앗은 뒤, 사해갱진에 어찌 들어온 것인지 추궁하도록 하마.” 적오는 주서천과 제갈수란을 무시했다. “……!” 전수국은 적오의 말에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누구인지는 모르나, 사해갱진을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다면 부디 사형제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주게나! 그동안 이 내가 시간을 끌도록 하겠네!” 지원 병력은 없었으나, 그래도 생로를 찾았다. 지금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누가 도와주든 상관없었다. 어둠 속에 피어난 빛은 희망 그 자체였다. “그걸 보고만 있을 줄 아나?” 적오가 어림없다는 듯, 턱짓으로 주서천과 제갈수란을 가리켰다. “포위해라!” 외곽에 위치한 남해용문의 십여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해남검파가 돕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주서천과 제갈수란이 전수국에게 말을 걸려고 중심부에 다가온 탓이었다. “무리해서라도 저 두 사람을 보호해서 빠져나가라!” 전수국이 적오를 경계하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대사형!” “얼른!” 전수국은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를 희생하기로 마음먹었다. 섣부른 판단의 속죄였다. “부디 사형제들을 부탁……” 한껏 비장한 목소리로 외치려던 전수국이었으나, 그 말도 의지도 닿지 못했다. 서걱! 주서천이 움직였다. 눈을 껌뻑이자 본 건 남해용문도의 팔이 잘리면서 공중으로 둥실 떠오른 장면이다. “무슨……” 오른팔을 잃은 남해용문도가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