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302)
못 버텨서가 아니었다. 모래사장 탓이었다. 발목까지 깊게 파였다. 지형이란 게 생각보다 중요하다. 모래 위라는 이유만으로 평소의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다. 무공의 기초는 하체이며 보법이다. 검수의 경우는 발걸음이 더더욱 중요하다. 화경에 이르는 고수라 경험이나 무위로 대충 보완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치명적인 건 마찬가지였다. 호신강기나 강기를 줄기차게 뽑을 수 있다면 문제는 되지 않지만, 누구처럼 내공이 무한한 게 아니다. 승부를 낼 수 있는 확실한 순간에 강기를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파바바밧! 위기의 순간, 측면에서부터 검기의 파도가 덮쳐와 위일해를 도왔다. 단리화의 칠십이파검이었다. 채채채채챙! 수십여 개의 검 줄기가 무수히 교차하면서 그물을 형성한다. 적색비늘 위로 흠집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적해장사는 밀어붙이는 걸 포기하고 얼굴을 구기면서 뒤로 급히 물러났다. “끄응!” 유리한 지형이긴 하나 적수가 만만치 않았다. “어머나.” 단리화가 적해장사의 호흡에서 이상을 발견했다. “숨 쉬는 게 도중에 힘이 벅차 풀죽은 것처럼 불안전한 걸 보니, 지친 것 같은데…… 맞죠?” 외공을 수련한 자는 아무래도 호흡이 중심인 내공보다 지구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방어나 힘이 대단하다고 한들, 쉽게 지치니 그게 또 문제였다. “그러면 이계 슬슬 끝날 때가……” 샤아아아-! 단리화의 목소리는 돌연 울려퍼진 괴성에 묻혔다. “……?” 단리화도 위일해도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니, 이 주변은 아니었다. 정확히말하면 해안 너머의 바다, 여섯 척의 배가 위치한 수면이었다. 소리가 바다 측에서 들려온 건 분명한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이 소리는……” 적해장사가 갑작스레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여태껏 두려움은커녕 살의와 투기를 줄창 뿜어대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으며, 널찍하던 어깨가 좁아지고 목은 움츠렸다. 무언가를 크게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이상한 건 적해장사만이 아니었다. 여태껏 잘만 싸우던 남해용문 무리도 싸움을 멈추고 두려워했다. “바, 바다가 노하셨다……” “히이익!” “요, 용이시여! 부,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덩달아 해남도 세력의 무인들도 의아해하면서 바다를 살폈다. “저건……?” 예의 무표정이던 제갈수란도 놀란 기색을 보였다. 콰아아아! 끼이익. “으아악! 흔들린다!” 바다가 분노했다. 그 외의 표현이 없었다. 몇 겹의 파도가 이어서 출렁이고, 때때론 배의 측면을 힘껏 후려치며 밀어치기까지 했다. 선상 위의 무인들이 바닥을 굴렀다. 하마터면 튕겨져 나갈 뻔했다. 난간을 잡아서 살았다. “으아아아악!” 제갈승계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초련은 제갈승계를 허리춤에 끼고 껄껄 웃었다. “뱃놈들이 바다는 사나우니 뭐니하면서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라고 떠들더니만, 아무것도 아니구먼!” “아냐! 아냐! 무섭잖아! 안 좋아! 안 좋다고!” 제갈승계가 초련의 허리를 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 울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이때다!” 노동력을 대신하던 해적들이 바다로 몸을 던졌다. 이 난리에 바다로 몸을 던지는 건 자살 행위지만, 배 안에서 버텨도 마찬가지다. 실컷 노동력으로 부려지다가 관아로 붙잡혀 가면 어차피 사형이다. 수공을 익혔으니 차라리 바다가 낫다. “어딜 가……?” 화벽승이 놓쳐버린 해적을 보고 소리 지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해수면에 보이는 그림자 탓이었다. 처음엔 구름이나 고래인 줄 알았다. 하나 구름이나 고래치곤 너무나도 길었다. 무언가가 올라오려 한다. “아무거나 붙들어―!” 화벽승은 재빠른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재앙이 배를 덮쳤다. 콰아아아! 무언가가 수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 몸체는 얼마인지 감히 추측할 수 없을 만큼 길었다. 몸통의 굵기 또한 상당하다. 사람은 그 크기와 길이에 압도되어 어쩌지 못했다. 바다로 뛰어든 해적은 몸집에 맞고 정신을 잃어 수면 아래로 떨어졌다. “요, 요, 용?” 제갈승계는 얼어붙은 채 말을 더듬었다. 초련도 놀란 얼굴로 정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세로로 갈라진 동공은 샛노랗다. 물방울에 반짝이는 비늘 위로 파도가 쳤다. 이리저리 꼬인 몸체는 반은 물 밖에 있고, 나머지 반은 수면 아래에 있었다. “아니, 뱀이다.” 물음에 답한 건 난간에 착지한 주서천이었다. 주서천은 물에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웃었다. 다만 웃음과 다르게 그 얼굴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거 의 십삼 년, 십사 년 만인가……?”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으로 지나쳐갔다. 수중동굴, 목재로 된 용구자주, 울음소리. 그리고, 용이라 착각될 크기의 뱀. “오랜만이다.” 수령신과의 파수꾼과의 재회였다. 사람들은 공황에 빠졌다. 해남검파도 남해용문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중원인도 남해인도 뱀의 위용에 압도됐다. “해, 해신이시여!” “용신께서 나오셨다!” “이럴 수가!” 해남도인은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설사 본인이 하지 않는다고 해도 가족이나 일가친척 중에선 몇몇 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뱃사람이 믿는 미신을 접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믿게 된다. 바다에는 여러 신앙이나 미신이 있으나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건 단연 바다의 신인 해신과 용왕이었다. 해남검파와 녹회문이 남해용문과 적대해 괜히 민심을 잃은 게 아니었다. 남해용문은 문파이자 종교다. 그리고 그 용왕의 전신이 바로 용이다. 그런데 용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기겁하지 않으면 이상하다. “정말로 우리는 잘못을 하고 있던 것인가?” “욕심으로 바다를 노하게 만든 것이라면……” 해남검파에 협력한 중소문파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전의를 잃기 시작했다. 저런 걸 보면 싸울 수 없다. 제갈수란이 침체된 분위기를 느끼고 재빨리 외쳤다. “머리를 잘 보도록 하세요! 용이 아니에요!” 용과 뱀은 비슷하면서도 생김새가 다르다. 또한 몸에 다리가 붙어 있어야 하는데 저 뱀은 없었다. 거대한 몸체만 보면 용으로 착각할만했다. 하필이면 머리가 배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무인이라면 조금만 더 집중하면 보겠지만, 사람들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남해용문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아니, 비슷한 걸 넘어서 정도가 심했다. 몇몇 이는 머리를 조아리고 몸을 떠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제갈수란은 바다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주 공자, 조심해요.’ 사람과 뱀은 서로를 바라봤다. 사람의 키만 한 샛노란 눈동자에 주서천이 비쳐졌다. 주서천의 눈에도 뱀의 머리가 보였다. ‘용구자주의 원자재는 수령신과의 신목(神木)이 틀림 없다.’ 남해용문의 대공동을 보자마자 친숙함이 느껴졌다.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기묘한 감각. 기시감과 이질감이 뒤섞인,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비록 장소는 다르나, 어릴 적에 간 곳과 같다.’ 신목이 기둥이 된 것만 제외하면 같은 환경이었다. 주서천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전, 남해용왕에게 바다가 노한 건 언제부터인지 물었다. ‘약 십 년 정도 됐다.’ 시기도 알맞았다. 전에 본 뱀이 맞았다. 아니, 시기 따윈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몸의 감각과 기억이 전에 본 영물이라 외치고 있었다. 저 압도적인 위압감과 눈을 보면 분명하다. ‘문제는 왜 섬서 근처에나 있어야할 놈이 이 먼 남해 바다의 수중동굴까지 왔냐는 점이다.’ 강물에서나 사는 뱀이 바다로 나온건 영물이니 그리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어 이상했다. 지리상 섬서에서 남해를 오려면 장강을 지나서 동해로 빠져나와 남하해야 한다. 만약, 남해의 인근 해역을 떠돌아다녔다면 또 모른다. 헌데 이상한건 용궁, 그러니까 수정동굴의 외벽을 십 년 이상을 들이받은 점이었다. 샤아아아아! ‘지금은 한가하게 생각할 때가 아니다.’ 과거도 과거지만 현재에 와서 봐도 대단했다. 몸집이나 귀청이 찢어질 정도의 괴성. 온 살이 떨렸다. 칠각사나 인면지주보다 위의 영물로 보였다. “용왕과 그 꼬리여! 보았느냐!” 주서천은 눈앞의 대영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십여 년 동안 용궁의 기둥을 무너뜨린 건, 바다의 분노도 용도 아니다! 한낱 미물일 뿐이다!” 주서천은 간야자에게 뱀에 대한 존재를 전해 듣자마자 처리하겠다면서 용궁을 뛰쳐나왔다. 당연히 용을 신성시하는 남해용왕과 용미가 무슨 짓을 할 생각이냐면서 사색이 된 채 뒤따라 나왔다. 노인과 여인은 수면 위로 머리만 내민 채 뱀의 얼굴을 살폈다. “심해에 가려져 있어 머리가 아닌 몸밖에 보지 못했을 뿐, 그 실체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다!” 영물이 된 뱀이 오백여 년 도를 쌓으면 이무기가 되고 천 년이 되는 해에는 용이 되어 승천한다 한다. 몸체만 보면 용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발이 붙어 있지 않고 아직 외관도 뱀인 걸 보면 용은 아니다. 상징인 여의주 또한 없었다. “그런……” 적수수가 당황한 눈초리로 이무기를 올려다봤다. 남해용왕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남해용문이 신성시하는 건 용이지 뱀이나 이무기는 아니다. 물론 용의새끼라고도 불리는 이무기 역시 나름대로 신성시하긴 하지만 사람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다. 남해용문의 역사는 오로지 ‘용’ 밖에 없었다. 그동안 확인을 하지 않으려 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여러모로 문제 탓에 힘들었다. 용궁은 지하에 위치해 있다. 그 지하에서 좀 더 내려가야 용구자주가 자리 잡은 대공동이 나온다. 외부에서 들이받는 이무기를 확인하려면 심해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수압 탓에 할 수가 없었다. 공기가 문제가 아니다. 숨이야 얼마 정도는 참을 수 있다. 문제는 빛 한 줌 없는 암흑과 수압이었다. 또한 자칫 잘못하면 해류에 휘말려서 아무리 수공을 연공했다고 한들 살아 돌아올 수가 없었다. 주서천 정도 되는 절대고수야 좀 더 버틸 수는 있으나 아무래도 수공이 주력이 아닌지라 주의 깊었다. 그래서 조금 거리를 둔 채, 남해용문에게 삼지창을 빌려와 심해 아래의 이무기를 맞춰서 유도했다. “당장 배를 돌려! 도망쳐!” 주서천은 각 배의 선장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쳤다. 전설에 의하면 이무기는 생물의 왕이며 물의 지배자이다. 괜히 용의 전신인 존재가 아니다. 애초에 집채만 한, 아니, 산으로 느껴질 몸집을 정면으로 승부하는 건 자살 행위다. 개조된 대형선박이라고 해도 꼬리 한 번 휘두르면 뒤집어지리라. “도, 도망쳐요?” 제갈승계가 그게 가능하겠냐는 듯이 물었다. “내가 대신 상대할 테니 걱정 마라!” 주서천이 난간 밖으로 몸을 던졌다. “형님!” 웅웅웅! ‘선수필승!’ 검신에서 흘러나온 검광이 회전한다. 물살만이 아니라 대기의 흐름도 거세게 움직이며 파도쳤다. ‘자하개벽!’ 검을 시원스레 쭉 뻗었다. 검광은 자색으로 물들었다가 사라졌다. 무형의 강기가 회전하며 쏘아졌다. 용조의 경우엔 제갈수란이 걱정돼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용궁에서도 무너질까 봐 조심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여섯 척의 선박이 남아 있긴 하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 크게 신경 쓰며 싸우지 않아도 된다. 우르릉! 회전하는 벼락이 이무기의 머리를 후려쳤다. 샤아아아악! 이무기가 머리를 흔들며 괴로워한다. 몸도 뒤척였다. 움직일 때마다 파도가 크게 치며 찰싹였다. “탈 수밖에 없어.” 제갈승계가 초령의 옆구리에 껴선 외쳤다. “이 큰 파도에!” “조종간을 돌려엇―!” “철수! 철수! 노를 꺼내라!” 돛을 걷고 작살 대신 노를 젓는다. 용, 아니 이무기의 난동에 휘말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