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312)
당유기는 권세를 위해서라면 딸자식도 아무렇지 않게 버리는 냉혈한이다. 정도인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 실력만큼은 확실하며, 누구보다 무림맹의 현 정권을 지지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암천회와 권동제는 결코 함께할 수 없는 배인지라 주서천과도 협력 관계로 지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암천회. “크흐흐흐!” 천기의 입가에서 음산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드디어 예상한 대로 움직이는구나!’ 자잘한 일을 제외하고 대계가 성공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항상 중요한 일에는 그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숙적, 주서천이 간섭하여 훼방을 놓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마침 운좋게 주서천이 해남도로 떠났고, 이를 노리고 준비한 걸 실행했다. “잘했다, 천기여.” 암천회주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칭찬했다. 주서천과 관련된 이후 듣지 못했던 칭찬. 정말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환희의 감정에 몸이 무심코 떨릴 지경이었지만, 천기는 기쁨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답했다. “아닙니다, 회주님. 맡은 바 임무를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지요.” “무림 침공의 준비는 문제없느냐?” “물론입니다. 현재 칠성사 전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고 있습니다. 재력, 권력 무력으로 포섭한 배신자들이 각지에서 명령 하달을 기다리는 중이며, 요광과 천추도 제 일을 돕는 중입니다.” “좋다. 드디어, 이 기나긴 준비를 끝내고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겠구나.” 암천회주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압도적이고 위엄 어린 눈빛에 천기가 몸을 떨었다. 개양, 그 천마조차 회주님께 굴복했다. ‘주서천,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회주님 앞에선 한낱 개미새끼일 뿐이다. 무림 또한 마찬가지리라.’ 암천이 무림을 지배할 때가 왔다. “권동제로 인하여 무림맹, 아니 정파가 분열하는 날이 곧 암천이 도래할 날이 될 것입니다.” 며칠 뒤, 무림맹. 무림맹주 집무실이 위치한 건물을나온다. 해는 지났지만 아직 겨울이라 눈이 내렸다. 새하얀 눈이 바닥에 쌓이는 걸 구경하다가, 옆에서 사박사박 하고 눈밟는 소리가 났다. “사형!” “어이쿠!” 푹신한 감각에 무심코 입 꼬리가 올라갔다. “낙 사매.” “오랜만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사매, 낙소월이 미소 지었다. “잘 지내셨어요? 다친 곳은 없어요?” 인사도 잠시, 낙소월은 주서천의 몸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걱정스러운 눈치를 보였다. “당연하지. 날 뭘로 보고?” “툭 하면 행방불명되고, 사라지는 사형이죠.” 낙소월이 쌍심지를 켜면서 엄한 표정을 지었다. “낙 사매는 안 본 사이에 더 예뻐진 것 같네.” “그, 그런가요?” 사실 빈 말이다. 언제 봐도 예쁘다. 낙소월은 부끄러운 듯 뺨을 붉혔지만, 싫지는 않은지 비단과 같은 새카만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아, 맹주님과의 이야기는 다 끝났나요?” “……뭐, 대강 끝났다. 그나저나 네가 여기에 무슨 일이야?” “장문인께서 무림맹의 동향을 알아볼 겸, 사형께 별일 없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보내셨어요.” “그래? 아, 사부님께선 잘 계시고?” “저희 사부님은 잘 계셔요.” 낙소월이 등을 휙 돌리며 모른 척했다. “나, 낙 사매……” “후후, 농담이에요. 사형의 사부님께선 잘 계셔요. 최근에 연락 없이 바쁘게 지내는 사형이 걱정되시는 모양이지만요.” “이, 이런! 얼른 서신을 보내야겠다!” 주서천의 낯빛이 흙빛이 됐다. “농담이에요. 여전히 사부님 관련된 이야기면 안절부절 못하시네요.” 낙소월이 쿡쿡 웃으며 짓궂게 미소를 지었다. “안 본 사이에 무서워졌구나……” “뭐라고요?” 낙소월이 볼에 바람을 불어 넣으며 눈을 치켜떴다. “아니야, 아무 말도 안 했……” “어머나, 설마하니 천하의 검신께서 사매에게 꼼짝도 못 할 줄은 몰랐네요.” 위험한 순간 구원자가 나타났다. “아, 파검봉 소저! 도착하셨습니까?” “도착한 건 어제랍니다. 검신께서 맹주님의 집무실에서 도통 나오지 않아 인사드리지 못했지만요. 아, 혹시 집무실에서 은밀한……” “시간 따위 보내지 않습니다. 전혀요. 예, 절대 아닙니다. 제 성적 취향은 여성입니다.” 단리화가 이상한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그리고 재빠르게 저지하는 주서천이었다. 그 답변에 단리화는 뺨에 손바닥을 올린 채, 곤란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저라도 남들 앞에서 그리 정열적으로 구애하시면 부끄럽지만요…… 게다가, 바로 얼마 전에 배에서 함께 지내며 흔들리는 시간을 보냈잖아요?” “사형……?” 낙소월이 거의 울기 직전, 아니 터지기 직전인 표정으로 주서천을 쏘아봤다. 사매의 악귀나찰처럼 험악해진 표정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배가 흔들리는 시간이니까!” “정말, 그리 거칠게 움직여선……” “입 닥쳐!” 진심으로 입을 다물어 주기를 원했다. 주서천은 다시 일행과 합류했다. “아이고, 주 대협. 무림맹 회의로 고생 많으십니다. 어디 피곤하시진 않은지요? 제가 그럴 줄 알고 해남도에서 가져온 과일로 음료를 만들었습니다요!” 이의채가 헤헤 웃으며 음료를 건냈다. 주서천은 마침 잘됐다면서 남해의 음료로 아직 툴툴거리는 낙소월을 달래주었다. “형님이 걱정돼서 무림맹으로 오긴했는데, 혹시 별일 없다면 산동으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제갈승계가 뭐가 그리 초조한지 발을 동동 구르며 물었다. 그동안 간야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기관을 완성하고 싶어서 그런지, 못 참겠다는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그러라고 말하려 했다만…… 네 형은 안 보고 가도 괜찮겠냐?” “아!” 제갈승계가 무릎을 탁 치며 탄성을 질렀다. “너도 참……” 잘 만나지도 못하는 친형제가 코앞에 있는데도 볼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하기야, 목숨보다 기관지술을 중요시하며 사회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괴인이 아닌가. 괜히 무림에서 기관괴협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마,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제갈승계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그런지 헐레벌떡 뛰어갔다가, 몸을 돌려 되돌아왔다. “그런데 형님께선 어디 계시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랑 가자꾸나.” 제갈수란이 미세한 웃음을 지으며 소매를 잡아당겼다. 천재인지 바보인지 모를 막내가 머리를 긁직였다. “상단주, 앞으로의 일과 관련해 할말이 있습니다.” “이 소상 이의채, 주 대협의 말씀은 귀는 물론이고 머리와 가슴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승계나 간야자 어르신이나 집중하면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상단주께서 절 대신해 조정해 주셨으면합니다.” “물론입니다. 여태껏 해 오던 일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해야 할 일이 있어 따라가진 못할 것 같습니다. 대신해서 전쟁의 준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서천은 이의채에게 여러 사정을 설명했다. “물자가 필요하겠군요.” 전쟁에는 돈이 든다. 그것도 많은돈이 필요하다. “군량미나 병장기는 금의상단의 주품목이지요. 걱정 붙들어 매고 이소상만 믿어 주십시오.” 금의상단의 시작이 쌀이었다. 그뒤로 군량미, 병장기 순으로 넘어가면서 사업을 불려나갔다. 다른 분야도 우수하나 그중에서도 군량미나 병장기는 압도적이다. 옛적에 시장을 독점했다. “이 일이 끝나면 제 지분 일부를 넘겨도 괜찮으니, 돈을 아끼지 말아주십시오.” “저, 저, 저, 정말입니까! 천하제일문파 대화산 유정목의 제자 정도미남 영웅 검신 주서천 대협!” 이의채가 눈을 부릅떴다. 너무 크게 떠서 튀어나올 정도라서 부담스러웠다. “그리 기분 좋은 말만 골라도 지분 더 안 줍니다.” “아, 아, 아, 아니! 저, 절 뭘로 보고!” 이의채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을 심히 더듬었다. “평소대로군요. 다행입니다.” 믿고 맡길 수 있었다. 만약 돈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말했다면, 본인이 맞는지 의심부터 했을 것이다. * * * 날이 지나갈수록 무림맹의 분위기는 침체됐다. “도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같은 주제로 몇 날을 지새웠는지……” “정파인들의 시선이 나날이 차가워집니다.” “하필이면 권동제께서……” 장로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책상 앞에서 회의를 논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위선과 부패를 인정하는 꼴이며, 권동제의 손에 의해 죽는 건 물론이고 사문에 불명예를 끼얹게 된다. 과거야 상층부 전원이 아니라 일부가 문제이기도 했고, 또 신세대가 내부에서 해결한지라 그렇게까지 큰 타격은 아니었다. 교체된 정권의 행보에 사람들이 열광했고, 찬사를 보내어 지지해 주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 창룡, 남궁선유는 한적한 장소에 홀로 앉아 있었다. 날이 갈수록 얼굴에 새겨진 침통함이 심해져 간다. “잠시 옆에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남궁선유는 상체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검신……!” 정도의 영웅이자 무림의 절대자. 상천칠좌, 검신 주서천이었다. 남궁선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극진하게 인사하려 했으나, 주서천이 손을 들어 제지하곤 그 옆에 앉았다. “몸은 이제 좀 어떻습니까?” “아…… 멀쩡합니다. 신의께서 봐주신 덕분이지요.” 작년, 정마대전 때 남궁선유는 천마에게 당하여 큰 부상을 입었다. 관절이란 관절은 죄다 꺾이거나 부러져 버 렸고, 내상도 상당했다. 다행히 그 후 주서천이 극적으로 등장해 살아남고, 신의의 의술을 거쳐 기사회생했다. “검신께서 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전 일찍이 죽었겠지요. 저 역시 검신께 큰 빚을 졌습니다.” 남궁선유가 일어나진 않고 상체만 살짝 돌려, 기어코 포권으로 예우를 담아 인사했다. 주서천은 조금 낯간지러운지, 머리를 긁적이곤 옅게 웃었다. “아닙니다. 반대로 좀 더 빨리 도착하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지요. 그리고 같은 오룡삼봉인데 그렇게 극진하게 대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란의 시대의 영웅, 창룡. 아니, 창검웅(蒼劍雄) 남궁선유.’ 남궁선유와 이렇게 사적으로 만난 건 처음이다. 그러나 주서천은 남궁선유를 나름 알고 있었다. 남궁선유는 당대 최고의 후기지수답게 전생에서도 다양한 활약을 했다. 비록 전란의 시대의 끝을 보진 못했지만,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또한 고수로서 이름을 널 리 알렸다. 생전엔 상천의 후보로 꼽힌 유력한 천하백대고수였으나 최종결전에서 희생되어 끝내 사망한다. “아닙니다. 어찌 검신과 절 같은 선상에 둘 수 있겠습니까.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남궁선유는 놀란 듯 손사래 쳤다. 질투로 비꼬거나 괜히 아부하려고 말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순수한 존경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검신 주서천이라 하면 그야말로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의 위업을 달성했다. 약관이란 연령에 화경에 오른 것도 모자라서 정도의 영웅으로 활약했으며, 상천의 좌를 차지했다. 대단하다는 표현만으론 부족했다. “그에 비해 전……” 남궁선유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떨꿨다. 무가의 자제, 그것도 오대세가의 소가주 출신에 무림맹주이자 절대고수 남궁위무의 손자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온갖 기대와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활약도 하지 못했다. 한때나마 협객으로 이름을 알리긴 했지만 최근엔 별다른 활약도 하지 못하고 꼴사나운 꼴만 보여 줬다. 심지어, 검신이 행방불명 됐을 때 불안해하는 제갈수란에게 주서천이 죽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리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자괴감에 몸부림치던 남궁선유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자신은 위로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솟구치 려 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남궁선유의 뒤편으로 여러 사람의 등이 보였다. ‘그래, 지금의 날 있게 해준 건 영웅들이다.’ 남궁선유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무림맹주의 손자이며 오대세가를 등에 업었음에도 겸손하며, 올바른 성품에 협의를 중시한 영웅이었다. 전란의 시대에서 피를 흘려가며 때로는 흙바닥까지 굴러 사람들을 도와주고 지켰다. 혼란으로 가득한 전장, 남궁선유는 검성의 뒤를 착실하게 이어 사람들의 우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