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343)
그러니 당장 퇴각대를 쫓으시오.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보다 더 이득이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선배님과 힘을 합하면……” “방해요.” 제갈중호가 일축했다. “우리가.” “……!” 운광은 무언가 눈치챈 표정을 지었다. “팔진도도 중궁을 제외하고 후퇴한다.” 팔진도의 운영부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덟 명의 군사는 순간적으로 고심했으나 이내 제갈중호에게 눈인사를 보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갈중호는 입에 묻은 피를 소매로 슥 닦아 내곤, 부채를 든 채 안광을 불태웠다. “어리석군.” 암천회주가 정백을 주시한 채 비웃음을 흘렸다. “심상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곧 근간을 잃어 퇴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태극검과 합공하는 것도 부족하거늘, 혼자 막아 보겠다니 정신을 상실했……” 암천회주의 입가에 맺힌 웃음이 사라졌다. 끝없는 무저갱처럼 깊고 어두운 눈 속에 담긴 건, 머리칼이 새하얗게 변해 가는 정백의 모습이었다. 이변은 머리카락 색만이 아니었다. 그 육체에서부터 이질적일 정도로 정순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선천진기 (先天眞氣)라……” 생명의 기운이 팔문 내를 가득 채운다. 폭풍의 중심, 전 군사가 뒤에서 명한다. “무림맹 소속, 정백.” 좌르륵! 부채를 활짝 펼쳤다. “무림을 위해 죽어라.” “명(命).” 정백이 몸을 날렸다. * * * 권동제, 정백. 정도의 위인이라 일컬어지는 그에게 있어서 정도란 건 인생의 일부요, 또 전부였다. 잘못된 건 하지 않는다. 올바른 것을 행한다. 누구나 아는 간단명료한 사실이나, 이를 지키는 건 극소수에 속했다. 사람이란 살다 보면 언젠가 현실이란 벽에 가로막히기 마련이고, 체념하게 되면서 현실과 타협한다. 그러나 정백에게는 이 ‘타협’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눈앞에 잘못된 일이 있다면 이를 지적하고 고치려 했으며, 올바른 것을 중요시하며 선행을 베풀었다. 고결하고 강직한 신념이지만,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왜냐고 묻는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다. 도저히 사람이 행할 것이 못 된다. 남을 위해서 수고나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도 한두 번이지 수십 년 동안 반복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언젠가, 남궁위무가 물었다. ‘그것이 사람의 도리니까.’ 정백의 사상은 그리 난해한 건 아니다. 어린아이도 이해할 정도로 단순하다. 하지만 현실과 너무나도 먼 개념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이상(理想)이라 칭했다. 원래 이상이란 사상을 지켜 가는 건 어렵다. 목표는 높으나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정백은 그 한계의 벽이 그리 높진 않았다. 상승의 무공이나 명문지파의 인맥, 스승이 없어도 정점에 오를 정도의 재능이 있었던 탓이었다. 둘 중 한 사람을 구해야 할 상황이 오면 압도적인 재능과 노력으로 둘을 구했을 정도였다. 물론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적도 없진 않았다. 좌절할뻔한 적도 존재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체념하지 않았다. 나이를 먹고 좌절한다 해도 자신의 소신을 지켰다. 끝없는 노력이나 순수한 성품 덕이었을까. 무림의 여러 영웅호걸들이 그의 곁에 모이기도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영웅이라 불렸다. 이윽고 세월이 흐르며 변하지 않은 신념은 심상으로 구현되며 절대고수의 경지까지 이뤘다. 하지만…… 몇십 년 동안 변하지 않았던 이상이 흔들렸다. 남궁위무가 무림 공적이 된 날이 기점이었다. ‘그 잘난 정도란 것에 대한 책임을 져!’ ‘어른이 되란 말이다!’ 주서천의 외침이 머리 한구석에 박혔다. 그 말이 머리, 아니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책임을 져라. 그 말을 곱씹으며 무림에 남았다. 신념에 따른 행동의 결과를 보기 위해서. 남궁위무가 일으킨 파문은 파도로 번졌다. 그리고 오늘 정백은 눈치했다. ‘변한, 건가……’ 타협이란 이해이며, 상호 간의 존중이기도 하다. 정백은 관철해 온 사상을 드디어 내려놓았다. 책임이란 이름하에 보통 사람들처럼 타협하게 됐다. 대신 그로 인해서 심상에 문제가 생겨 육체를 포함해 무공이 퇴보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대로 간다면, 내 행동의 책임을 질 수 없다.’ 경지가 현경의 초입까지 퇴보하더니만 이윽고 그 아래까지 떨어졌다. 화경과 현경의 중간이었다. 심상이 무너졌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심상구현, 이상의 응용법 중 하나다. ‘선천진기.’ 선천진기(先天眞氣). 사람, 아니 생명체의 근원이 되는 기운이자 이상적인 힘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내공의 일종이며, 일반적인 내공과 달리 한 번 소모하면 보충할 수 없다. 또한 생명의 근원을 소모한 만큼, 그 대가도 컸다. 바로 목숨이었다. 하수건 고수건 상관없었다. 구 할이 죽으며, 천운이 닿아 산다고 해도 무공을 잃고 폐인이 된다. 그리고 그 대신, 사용자는 막대한 힘을 손에 넣는다. 퇴보한 경지를 메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살날이야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개의치 않았다. “하아압!” 정백의 기합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평소의 대자연에서 끌어모은 것이 아니다. 정백이라는 인간이 품은 생명의 기운이었다. 검에 막혔던 주먹이 암천회주를 밀어냈다. “선천진기를 다룰 수 있을 줄이야.” 암천회주의 입에서 흘러나온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선천진기란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사용한다 해도 수명이 줄어드는 탓에 본능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상천육좌인 현경의 절대고수 역시 마찬가지다. 초인적인 의지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놀란 건 정백도 마찬가지였다. ‘날려 버릴 생각이었는데 밀려나는 걸로 끝냈다.’ 정백의 얼굴이 굳었다. 주어진 시간이 적은 만큼, 탐색전 따위는 무의미했다. 단숨에 밀어붙여 끝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끝내기는커녕, 조금 밀려난 것으로 끝나는 암천회주의 심후한 공력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검신이 그리 경고했던…… 암천회주의 힘인가.’ 주서천은 암천회의 무서움을 몇 번이나 경고했다. 그 목소리를 되새기며 다음 공격에 나섰다. 오른쪽 다리를 앞으로 내디딘다. 쿠웅! 발에 힘을 주자 바닥이 반구 형태로 움푹 주저앉았다. 균형을 잃을 만도 하지만 두 고수는 변함없었다. 부웅. 허리를 반회전하며 꼬고, 좌권(左拳)에 회전력을 실었다. 바람이 아닌 대기가 짓뭉개졌다. 정백은 검을 밀어낸 주먹이 아닌 손으로 일권을 내질렀다. 콰아앙! 주먹이 곧게 뻗은 선을 그려내며 암천회주의 하복부를 정확히 후려쳤다. 깔끔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치명상을 주진 못했다. 맞기 직전에 호신강기를 펼쳐서 막혔다. 휘리릭! 정백은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반바퀴 회전했다. 그에 맞춰 왼 다리를 들어 올려 돌려 차기를 선사했다. 속도나 위력도 수준급이다. 부족한 무공을 채우는 걸 넘어, 그 위의 경지까지 노릴 정도였다. 암천회주는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검을 사선으로 세워 갈비를 후려치려던 돌려 차기를 막아 냈다. 콰아아앙! 힘과 힘이 부딪친다. 기와 기가 충돌했다. 모든 것이 시작된 순간, 대폭발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그 말에 걸맞은 폭발이 벌어졌다. 대기에 포진된 기가 출렁이나 싶더니만, 연쇄적으로 폭발을 일으키며 폭풍을 토해 냈다. 콰르르! 팔문 위의 기왓장이 우수수 떨어지며 깨졌다. 지면 위의 모래가 안개처럼 흩어지고, 바람이 되어 주변을 스지고 지나갔다. 순간 공기가 사라져 숨이 턱턱 막혔다. 절대고수의 대결에 걸맞은 영향력이었다. 사람이라 볼 수 없었다. 이 와중에 팔진도를 유지하는 제갈중호가 대단했다. 파밧! 정백의 몸이 흐릿해졌다가 암천회주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최상승의 경신법인 이형환위였다. “후웁!” 몸 아니 존재에서부터 힘을 끌어내 주먹을 힘껏 내지른다. 목표인 등을 단번에 부술 기세였다. 파앗! 그러나 그 주먹은 닿지 못했다. 암천회주는 뒤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예상했다는 듯 피해 냈다. 심지어 회피한 기술은 이형환위. 암천회주 역시 사라졌다가 측면에서부터 나타난다. 슈우웃! 암천회주의 검이 앞으로 쭉 뻗어나가며 한일 자를 그려 냈다. 여전히 상식에서 벗어난 속도였다. 정백은 급히 몸을 뒤틀었다. “크으읏!” 그의 움직이는 속도 역시 보통이 아니다. 그러나 그만큼 고통이 동반됐다. 근육이 뒤틀리면서 고통이 동반됐다. 근맥이 끊어질 듯이 당겨 왔다. 내장이 저릿하게 아파 왔다. 정면으로 향하던 힘의 방향이 원래부터 측면이었던 것처럼 변했고, 앞으로 뻗었던 팔도 옆으로 휘둘러지면서 손등이 암천회주의 검신을 힘껏 후려쳤다. 째애앵! 충격이 전해진 검이 찌르르 울렸다. 손등의 피부도 물결이 일어난 것처럼 떨려 왔다. 이걸로 공수가 전부 끝난 건 아니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암천회주의 검격이 쏟아졌다. 파바바밧! 손등에 후려쳐진 검은 어느새 원래의 위치를 찾았다. 주인의 움직임에 몸을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시커먼 섬광이 번쩍였다. 사람의 시각으로 따라갈 수 없는 속도의 검이 쏘아졌다. 정백도 그 속도에 맞춰서 주먹을 연달아 휘둘렀다. 파바바바밧! 검격과 권격이 정면의 상대를 향해 쏘아졌다. 채채채챙! 금속을 연달아 두드린 것처럼 마찰음이 나왔다. 섬광이 번쩍이면서 불꽃도 튀었다. 찰나의 순간 동안 세 자릿수의 격돌이 있었다. ‘허억! 허억!’ 숨이 가빠 온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 왔다. 몸이 조금씩 무거워지려 하고 있었다. 콰앙! 정백은 잠시 재정비를 위해서 거리를 벌렸다. “참으로 어리석도다.” 암천회주가 정백의 상태를 눈치챘다. “아무리 선천진기가 대단하다고 한들, 결국 불길 속에 몸을 던지는 나방과 다름없다. 회광반조(回光返照)란 죽기 전에 기운을 돌이키는 것. 차라리 여태껏 살아왔던 것처럼 그 잘난 이상을 관철했어야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도리어 정론(正論)에 속한다. “만약, 끝까지 사고에 변화가 없었더라면 심상도 그대로였을 것이고 본연의 힘을 발휘했었을 것이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건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당장 죽을 일은 없었을 터. 무엇이 그리 그대를 망친 건가?” 암천회주가 물었다. “비록 미쳐 있고 일그러져 있으나, 그대의 신념은 순수하며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비꼬는 것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여타 위선자들처럼 말만 번지르르한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하며 노력하지 않았는가. 한데 그 고결한 신념은 어디에다 두고 약자로 추락했나.” 암천회주는 실망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검을 들었다. 웅웅웅! 대기가, 떨린다. 천지가 뒤흔들렸다. 여태껏 느껴 보지 못했던 진동이 주변을 뒤덮었다. 검에 맺힌 미증유의 힘이 회전하며 주변을 삼켰다. “대답해라, 권동제.” 권동제가 아니다. 정백도 오른손 주먹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생명의 원천이 끓어오르며 남은 수명을 비롯해 무학의 근간까지 분출했다. “나는, 그저 늙은이에 불과하다.” 대자연의 기는 잠잠했다. 이상이 무너졌다는 걸 증명했다. 그래서 언제 운용했는지 모를 단전까지 동원했다. 새하얗게 질린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눈 밑의 피부가 급속도로 주름지기 시작했다. 잘 단련된 근육도 조금씩 줄어든 느낌이 났다. 소년은 청년이 됐고, 청년은 중년이 되며, 이윽고 노년기에 접어든다. “됐다.” 암천회주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암흑밖에 보이지 않는 그 눈동자에선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잘 가라, 무림의 상천이여.” 암천회주가 검을 휘둘렀다. 정백과의 거리가 있음에도 상관없었다. 위에서 아래로 수직선을 그려낸 그 검은 그의 머리를 노렸다. 정백도 동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