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360)
것을 알려 줘도 문제는 없긴 했다. ‘하지만 사파의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듣게 되면 여러모로 충격받을지도 모르고……’ 낙소월이 정파인 특유의 고집이나, 꽉 막힌 부분이 없다 치더라도 담담히 받아들이진 못할 것이다. 주서천은 그 점을 걱정했다. 물론 낙소월이니 사파의 무공을 익혔다고 배신자 취급을 하진 않겠지만,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것이 걱정됐다. 사랑스러운 사매가 그로 인한 내적갈등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매.” 주서천은 고심 끝에 낙소월의 양 어깨를 붙잡곤 마주 봤다. “네, 네?” 낙소월은 주서천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당황했다. 극한의 추위 속인데도 뺨에 열기가 오르는 게 느껴졌다. 마주 본 시선 속에서 무언가가 흘렀다. “미리 말하지만, 사매를 신뢰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다만,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사실을 알려 줄 수가 없어 …… 사매가 그 점을 부디 이해해 줬으면 해.” “가, 가까워요. 사형.” 낙소월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떨렸다. 목소리는 속삭이는 것처럼 작았다. “미안해. 하지만…… 모든 일이 끝나면, 반드시 이야기하겠다고 약속할게.” 주서천은 낙소월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누구보다 소중하기에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사형……” 낙소월도 주서천의 진지한 표정에 말꼬리를 흐렸다. “분위기가 한창인데 죄송하오나, 일이 생겼습니다.” 선두의 막마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낙소월은 그제야 남들이 보고 있다는 걸 깨닫곤, 부끄러운지 황급히 뒤로 물러나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일? 적이군.” 주서천의 예리한 감각 속에 살의가 잡혔다. “아직 남부 산맥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누구요? 사하? 설화?” “둘 다 아닙니다.” 막마르가 검지로 한곳을 가리켰다. “설인(雪人)입니다.” 쿠오오오오―! 막마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으로 가득한 산에 괴성이 메아리치며 울렸다. 쿠구구구. 산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울렸다. 가파른 언덕에 쌓인 눈 더미가 움직일 기미를 보였다. 눈사태인가 싶어 다들 흠칫 놀랐지만, 다행히 최악의 상황만은 면했다.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대신, 괴성의 주인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얼굴을 굳히며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설인……?” 주서천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설인에 대해서 모르십니까?” “아니,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요괴이지 않습……” 주서천은 말을 잇다가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눈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얀 털이 손과 발, 얼굴을 제외하고 뒤덮여 있는 것이 보였다. 팔 척에 이르는 신장에선 위압감이 절로 느껴졌다. 게다가 단순히 큰 것만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근육질이었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원숭이에 가까웠고, 쩍 벌어진 입 안에 강철 같은 송곳니가 보였다. 전설로 전해지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수십에 이르는 설인이 선발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저, 정말로 설인?” 낙소월도 설인을 보고 놀란 모습이었다. “……뭐, 인면지주도 있는데 설인정도야.” 주서천 입장에선 그렇게까지 놀랄 것까지도 없었다. 남해에선 용으로 불리는 이무기도 보고 왔다. “다만, 설인에 대해선 듣지 못해 당황스럽군.” “저희도 설인을 보는 건 처음입니다.” 하와르가 사나운 울음소리를 내는 설인을 보고 말했다. “설인은 낯을 많이 가려 사람과 접촉하기 꺼린다고 들어 북해에서도 목격담이 손에 꼽힙니다.” 하와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북해의 식량난이 사람만이 아니라 설인에게도 영향을 끼친 모양이군요.” “그리고 문제는 그것이 불행히도 그리 좋은 영향은 아니라는 거다.” 동설련이 손에 쥔 검이 새하얗게 빛났다. 쿵! 쿵! 쿵! 설인이 달렸다. 육중한 몸인데도 날쎈 움직임이었다. 대퇴부의 근육이 오그라들었다가 펴졌다. 입에선 지축을 뒤흔드는 괴성이 흘러나왔다. 굶주림으로 인한 포효였다. 쿠웅! 선두에 달리던 설인이 지면을 박차고 높이 뛰었다. “캬오오오!” 설인이 괴성을 내지르면서 양팔을 들었다. 통나무보다 굵은 팔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괴력을 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추락하듯 떨어지는 설인은 팔을 철퇴처럼 휘둘렀다. 콰아앙! “으아악!” 설인이 추락한 순간, 눈으로 된 기둥이 솟구쳤다가 떨어졌다. 지축을 뒤흔드는 충격에 다들 질겁했다. 발밑의 눈이 충격으로 인해 위로 솟구쳤다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 탓에 시야가 좋지 않았다. “크르륵!” 선수를 친 설인이 붉은 안광을 번쩍이면서 웃었다. 지금쯤 주먹 아래에는 다져진 사람이 있으리라. 그러나…… “괴력만큼은 대단하구나.” 설인의 눈이 커졌다. 안개처럼 흩어진 눈바람이 걷히며 나타난 건, 자신의 주먹을 받친 사람이었다. “그런데 착지점을 영 잘못 골랐다.” 주서천은 왼손으로 설인의 주먹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두꺼운 손목을 붙잡은 뒤 힘껏 꺾었다. 으드득! 손목이 돌아가며 근육도 비틀어졌다. 그 안의 뼈가 부러지면서 조각났다. 설인이 미처 비명을 지르기도 전, 주서천은 그 품 안에 재빠르게 파고 들어선 강격권을 날렸다. 파앗! 중소보의 묵직함과 더불어 강맹함을 실은 주먹이 흉부에 꽂힌 순간, 설인의 몸에 구멍이 생겼다. “온다.” 주서천이 빈 구멍 너머의 설인 무리를 보고 말했다. 소리를 친 것도 아닌데 전원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괴력도 괴력이지만, 눈 속에 숨어 있었던 걸 보아 머리도 쓸 줄 아는 놈이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주서천은 앞으로 쓰러지는 설인의 몸을 건너뛰었다. “눈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진동에 유의할 것. 설인에 대해선 북해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세세한 건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눈사태가 언제 일어날지 몰라 목소리를 최대한 줄였다. 주서천은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눈을 빛냈다. “괜찮은 털가죽이야. 사람처럼 이족 보행을 하긴 하지만, 어떻게 봐도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니 부족한 식량으로 대체할 수 있으려나?’ 설인의 수는 대충 세어 봐도 이백을 넘어섰다. 선발대의 딱 반절 정도 되는 전력이었다. 그러나 수가 적다고 얕볼 수는 없었다. 설인의 움직임은 질풍처럼 날렵하고, 힘은 우레와 같았다. “꺄아악!” 빙궁의 여무사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허리가 심히 접힌 걸 보면 뼈가 부러진 듯했다. “쿠오오오!” 설인의 통나무 같은 팔이나 무쇠주먹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자살행위였다. 보통 괴력이 아니었다. 팔 척에 이르는 덩치와 근육 덩어리는 장식이 아니었다. 굶주림으로 포악해진 힘은 무시무시했다. “한 마리에 최소 세 명이 붙어 상대해라!” 동설련이 설인의 허리를 베고 지나가며 외쳤다. 목소리가 제법 크긴 했지만, 설인의 포효에도 산이 잠잠했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괜찮은 듯했다. “죽어라!” “타앗!” 빙궁의 무사와 설인의 격전이 시작됐다. 설인은 육중한 몸인데도 불구하고도 잘만 움직였다. 특히나 위로 뛰어올랐다가 떨어질 때, 눈의 파도를 만들어 시야를 가려 공격을 날리는 점이 섬뜩했다. 주서천이 말한 대로 지능도 보통이 아니었다. “도망친다!” “따라가지 마, 함정이다!” “크아악!” 설인은 빙궁의 무사가 네다섯 명으로 늘어나면 무리하지 않고 도망치거나 동료를 불러 합세했다. 설마하니 미물이 이 정도 되는 전술을 펼칠지 몰랐던 무사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설인은 상상 이상으로 난적이었다. “가죽이 뭐 이렇게 단단해?” “제기랄! 검이 안 빠져!” “버려!“ “내공이야 나중에 회복하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말고 검기를 실어서 베거나 찌르도록 해!” “목숨이 먼저다!” 설인의 털가죽 탓인지 아니면 탄탄하게 단련된 근육질 때문인지는 몰라도 방어까지 만만치 않았다. 각자의 무기가 제대로 박히지 않았다. 권법이나 장법도 마찬가지였다. 내가중수법도 잘 통하지 않았다. “빙공에 내성이 있다!” 동설련이 그 원인을 제일 먼저 눈치챘다. 검에 실린 빙한진기, 아울러 음한진기가 설인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 감각을 통해 느껴졌다. 설인은 오랫동안 북해의 기운을 흡수하며 살아온 덕분에 어떠한 추위에도 영향을 받지 않게 됐다. 한서불침은 아니나 추위에는 불침에 이르는 수준에 오를 정도로 내성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북해빙궁의 무사들이 한층 더 불리해졌다. 콰직! “아악!” “꺄아악!” 설인은 이상 기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문제는 먹을 것이었다. 그들 역시 극심한 식량난 탓에 동족을 먹을 지경까지 왔다. 그러던 와중에 사람의 무리가 나타났으니, 흥분하는 건 당연했다. 하나같이 눈이 벌게져선 입안에 넣어 씹었다. 오도독, 오도독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나며 뜯겨진 몸에서 피가 육즙처럼 나왔다. 깨끗한 눈 위로 핏줄기가 튄다. 난리로 인해 눈 아래에 숨어 있던 흙더미도 나타났다. 대신 죄다 얼어붙어서, 모래처럼 흩어 지진 않았다. 얼음 조각을 연상케 했다. “한낱 미물 따위가……” 선봉장, 동설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눈앞에서 수하를 잃은 분노가 서릿발처럼 몰아쳤다. “쿠오오오오오오!” 인육에 눈을 뜬 설인이 재차 포효한다. 눈처럼 하얀 이는 붉게 물들었고, 그 사이엔 살점이 껴 있었다. 피투성이인 손을 내려뜨리고, 머리는 앞으로 쭉 내밀고 포효한다. 이 설산의 주인은 나이며, 너희는 모두 먹이가 될 것이라고 환희가 섞인 외침을 토해 내는 걸로 보였다. ‘무, 무슨……’ ‘난폭해진 설인이 이리도 위험했던 건가?’ ‘큰일이다. 압도당했다.’ 빙궁의 무사 중에서 비교적 성취가 낮은 이 들은 그 포효에 압도되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일류나 절정에 이르는 실력자임에도 몸이 얼어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런!’ 약 예닐곱 장의 밖, 동설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무려 세 마리의 설인과 대치하고 있는 터라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쿠오오……” “시끄러워.” 퍼억! 설인이 재차 포효하려던 찰나였다. 승모근 위로 붙어 있던 머리가 불현듯 수박처럼 박살 났다. 방금 전, 포효만으로 수십의 무인을 압도했던 괴물치곤 허무한 최후였다. 팔 척 높이로 도약했던 주서천이 설인의 너머로 착지하자,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쓰러졌다. “설인에게는 빙한공이 잘 통하지 않는 듯 싶으니, 급소를 노려서 공격하도록. 또한, 굳이 무리할 필요 없으니 네 명, 다섯 명, 버거우면 예닐곱 명이 힘을 합하도록 해라.” 주서천은 주먹을 쥐락펴락하면서 앞으로 걸었다. “혹여나 도저히 쓰러뜨릴 수 없다면, 어디든 상관없으니 나에게 도움을 청해라. 곧 가겠다.” “으아악!” 전방의 언덕 위, 빙궁의 몇 없는 남무사가 비명을 질렀다. 설인에게 검째로 잡혀 떠오르는 게 보였다. “그래.” 무릎을 굽히는 동시에 상체를 눕힌다. 내부의 흐름이 아래로 떨어지며 용천혈로 향했다. “그렇게.” 타앗! 몸이 활등처럼 굽어졌다가 펴지며 튀어 나갔다. 화살, 아니 유성이 되어 앞으로 쏘아졌다. 유령신공 덕에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지면을 박차고 튀어 나간 순간, 바닥에 닿지 않은 채 날았다. 잔상이 남을 정도의 신속. 눈동자에 담겨지는 광경은 기억의 일부분처럼 잠깐 남겨졌다가 사라진다. 독수리가 저공비행하듯, 눈 덮인 지면 위를 스쳐 지나갔다. “쿠오옷!” 목적지로 향하는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짐승, 아니 영물답게 감각이 예리한 설인이 경로를 막았다. 한두 마리도 아닌 무려 일곱 마리가 몸을 날리는 것이 보였다. 스윽.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 길게 늘어진다. 흐름 역시 느릿해졌다. 사람의 한계를 넘어선 감각이었다. 몸을 던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