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369)
버리지 말아 주세요.” 낙소월은 조금 낯 뜨거운 듯, 뺨을 붉히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똑바로 마주 보면서 올곧고 깨끗한 눈동자를 보여 주었다. “그래, 그 말대로야.” 주서천은 낙소월의 말을 곱씹다가 이내 웃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건, 성공할 가능성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그럴 순 없지.” 상천육좌라고 신은 아니다. 하늘로 빗대어 말하는 현경의 경지이나, 결코 절대적이지는 않다. “분명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머리를 들어 위를 올려다본다. 끝없이 내리던 눈이 멎었다. 새카맣게 끼었던 먹구름도 없었다. “아……” 사형제는 무심코 감탄사를 흘렸다. 극광(極光)이었다. 대체적으로 녹색에 다채로운 빛깔이 낀 장막이 파도처럼 고요하게 일렁이며 장관을 만들어 냈다. 태양이 동산 너머로 막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빛과 어둠의 경계선인 새벽빛을 보는 듯했다. 북해인은 빛의 장막을 보곤 신의 영혼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늑대만한 개가 썰매를 이끌었다. 이상 기후가 사라지게 되면서 돌아오는 길은 보다 빨랐다. 식량난에서 막 벗어나 썰매를 이끄는 설견이 힘을 잘 내진 못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졌다. “그러면 이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 인사드립니다.” 하와르를 비롯한 길잡이들이 극진한 예우로 인사했다. 최초의 만남에서 보였던 불신은 눈 씻고도 찾아볼수 없었다. 그 대신 고마움과 존경이 보였다. “안내해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아닙니 ……” “끝이 나질 않을 것 같으니, 괜한 말은 받지 않겠습니다.” 주서천이 살짝 짓궂게 웃으며 말을 가로막았다. 하와르는 그 말에 멋쩍은 듯 뺨을 긁적였다. “그러면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인사는 빙궁을 떠날 때 충분히 했다. 북입 마을까지 오면서 이야기는 충분히 나눴으니 아쉬울 건 없었다. “조심히 가십시오. 가까운 시일 내로 뵙겠습니다.” 북해궁주가 자리를 비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하물며 내전의 이후다. 뒷정리가 필요했다. 하나 중원의 문제가 시급하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금은보화 등의 재물은 챙겨 주겠다고 했으나, 과한 짐이 되지 않는 한해서 받고 나중으로 미루었다. “중원의 일이 걱정이네요.” 당초 예상했던 시간은 한참 지났다. 그동안 연락도 되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지 않았을까 걱정됐다. 주서천이나 낙소월이나 표정에 근심이 가득했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식사와 수면도 줄여 가면서 달렸다. 내공이 충만한 걸 다행으로 여겼다. 얼마 가지 않아 방한복은 벗어서 넣어 두었고, 중원의 기후에 감사함을 느껴야 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던 설원은 끝났다. 백색의 대지가 아닌 것에 기분이 좀 나아졌다. 하나 얼마 뒤, 인근의 마을에 들러 어떠한 정보를 확인한 주서천과 낙소월의 낯빛은 창백하게 질렸다. 급보(急報). 오악(五嶽)의 일부가 배신함. 화산(華山) 습격(襲擊). 오악검파의 배신 소식에, 무림맹 상층부는 식은땀을 흘렸다. 여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한여름인 것 같았다. 시간을 되돌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검신, 주서천이 북해로 떠난 동안 무림은 불안할 정도로 고요했다. 마치 폭풍 전의 고요와 같았다. 정사 연합과 암천회, 양측 다 재정비로 인해 바빴다. 겉으론 드러나진 않았지만 첩보전 등의 보이지 않는 전쟁을 지속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섬서에서 불온한 움직임?” 최초에는 뜬소문 수준에 불과했다. 명확하지 않은 정보에 움직일 수는 없었다. 확실해질 때까지 어쩔 수 없이 주시하던 도중, 일이 터졌다. 정파의 중소 문파 출신의 배신자들이었다. “끄응 너무 유명해도 문제야.” “현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이지.” 정파의 중소 문파가 대거 배신한 건, 무림의 불합리 탓이었다. 기득권층에 대한 불만이 커진 만큼, 단연 최근에 인지도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진 화산파가 눈에 띄게 됐다. 게다가 중원 곳곳, 각 지방에서 일어난 배신 탓에 골치 아픈 와중인지라 딱히 이상한 건 아니었다. “손이 부족한데……” 무림맹이 합비의 본부를 잃으면서 숨 쉴 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상황이었다. 화산파가 알아서 해결해 주면 좋겠지만, 배신자 세력이 생각보다 큰것이 문제였다. “저희가 돕겠습니다.” 그 와중에 나선 것이 바로 오악검파였다. “같은 오악검파끼리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 발언을 평소에 화산파를 원수 취급하는 항산파가 했더라면 무림맹 상층부도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숭산파와 태산파가 먼저 말하고, 형산파와 항산파도 뒤따라 발언하여 일을 맡겼다. 그리하여 오악검파는 지원 병력을 꾸려 섬서로 보냈고, 무림맹의 여타 세력의 수고를 덜 수 있었다. 하나 그것이 실수였다. 무려 삼악이나 정파를 배신하여, 마중 나온 화산파와 형산파를 제압한 것이었다. * * * 화산파를 필두로 숭산(崇山)파, 태산(泰山)파, 항산(恒山)파, 형산(衡山)파를 흔히들 오악검파라 부른다. 나날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사라진 무림 문파 중에서도 유구한 세월을 자랑하는 곳 중 하나이며, 하나같이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명문정파이기도 하였다. 검파(劍派)라는 이름답게 개파 후 오롯이 검만을 갈고 닦아, 정파에겐 검의 명인으로 존경을 받으며 숙적인 사파에겐 검에 성욕을 푸는 변태들이라 종종 불린다. 그만큼 검공에 대해서만큼은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렇다 보니 오악검파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다음으로 정파 무림에서도 영향력을 크게 끼쳤다. 전 세대의 부패, 내전 이전에는 오악검파 주관으로 비무 대회나 잔치가 열려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하나, 그 친분은 생각보다 깊지 못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오악검파의 결속력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는데, 반어적이게도 유구한 역사, 즉 오랜 시간이 문제였다. “미쳤느냐!” 오악검파, 형산파의 최고수이자 천하백대고수로서 이름이 알려진 섭등(攝藤)이 소리를 질렀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검을 뽑곤 싶었으나 포승줄에 몸이 묶여 자유롭지 못했다. “미치지 않았다, 원비검(猿胃劍).” 섭등의 황당한 시선 앞에는 세 검수가 서 있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다음가는 명문정파가 정파를 배신했는데, 그게 미친 게 아니라면 무엇이냐!” 섭등이 목이 찢어지도록 소리쳤다. “미친 건 무림이지.” 한일 자(一) 눈썹에 마른 체형의 중년인이 답했다. 멀대같이 큰 키나 소매 사이로 보이는 고사리처럼 얇은 손목을 보면 갈대와 같으나, 기세는 명검처럼 날카롭다. 조금만 다가가도 베일 것만 같았다. “그래.” 머리카락을 비롯해 눈썹까지 허옇게 질린 노검수가 답했다. 노인치곤 체구가 장대하며 근육도 대단했다. 두꺼운 눈썹에 각진 턱, 꽉 다문 입술에선 고집스러움이 묻어나 완고한 인상을 풍겼다. 어깨는 떡 벌어지고, 팔다리는 통나무와 같다. 신장은 평범하나 몸집이 장대해 더 커 보였다. “일팔구로(一八九路), 태산파검(泰山破劍)……” 섭등은 둘을 보고 말꼬리를 흐렸다가, 그 사이에 선 중년의 미부인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초예사태(超雜師太)!” 순서대로 숭산파, 태산파, 항산파의 문주였다. 오악검파의 삼문주(三門主)가 한자리에 모였다. 문제는 친목이 목적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원비겁 다시 한번 기회를 줄 테니 잘 듣고 판단해 보게나.” 항산파의 수장, 초예사태가 눈을 차갑게 빛냈다. “최근 무림맹, 아니 정파 무림을 이탈하는 자들이 속속히 발생하는 연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 “무림에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비롯한 기득권층의 불합리한 독점, 약자에 대한 차별에 지쳐 버렸기 때문일세.” 눈가의 주름이 서서히 좁혀졌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아니라면, 실력이 있다 할지라도 어디 가서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지. 반대로 말한다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라면 무공의 성취나 인성에 상관없이 아무리 쓰레기라 하여도 대접을 받네. 그게 현재의 무림이며, 사회일세.” 섭등은 일단 입을 다물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악, 아니…… 화산을 제외한 사악(四嶽) 또한 이 잘못된 무림의 피해자가 아닌가?” 초예사태의 눈이 차갑게 타올랐다. “그동안, 사악검파는 개파 후 최고의 영예를 쥐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분골쇄신하여 노력해 왔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네. 오악검파의 수장은 여전히 화산파이며, 각종 대회나 회담 역시 오롯이 화산에서만 개최되었지. 어째서인지 아나?” 꽈악. “이유는 간단하네. 화산이 구파일방이기 때문일세.” 눈두덩이 안에서 증오와 분노가 끓어올랐다. “무림맹의 열네 기둥 중 하나라는 이유만으로 오악의 수장으로 선택되었네. 그뿐이랴, 마치 사악을 산하에 둔 것처럼 제멋대로 다루었던 행동은 결코 용서할 수 없네.” 오랜 시간이 문제였다는 건, 바로 정파 무림의 중심이라 일컬어지는 기득권층의 독점이었다. 화산파를 제외한 오악검파는 충분한 실력이나 세력을 품고 있었지만, 기득권층에 들지 못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오악검파의 수장 혹은 그에 준하는 위치를 원했으나 그러지 못해 불만을 품게 됐다. 그리고 그 불만은 시간이 지나면서 쌓이게 됐고, 결국 세대에 걸친 부패로 폭발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게 됐다. 특히나 같은 정파이자 오악검파이나, 화산파의 파문제자였던 조사로 인해 악감정이 쌓이게 된 항산파의 불만은 극으로 치달았다. “이 썩어 빠지고 일그러져 있는 무림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일세. 권동제가 무너뜨린 것처럼, 우리 또한 개혁으로 모든 걸 바로잡아야 하네. 그렇지 않은가, 남악제일검(南嶽第一劍).” 초예사태가 섭등에게 손을 건냈다. 섭등은 그 손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치켜들곤 초예사태에게 한마디 했다. “미친년!” 초예사태의 얼굴이 악귀 나찰처럼 일그러졌다. “무림이 일그러져 있다는 것에는 나 역시 동의하지만, 수단을 잘못 선택했다. 지금 너희가 선택한 건, 힘이 부족하니 마교도와 손을 잡은 것과 같다.” “말조심하시오!” 태산파검의 안색이 단숨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개혁이란 것이 무림의 그림자에 숨은 채, 교묘한 혓바닥으로 사람의 마음을 우롱하고 학살까지 자행하는 족속들과 손을 잡는 것이었나? 오악검파가 언제 이렇게까지 추락했나?” 섭등은 멸시 가득한 시선으로 세검수를 노려봤다. “욕심을 합리화하지 마라, 삼악.” 남악제일검, 원비검이 콧방귀를 끼며 말을 계속했다. “오악검파의 수장에 변화가 없던건, 분하지만 화산파가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매화검수처럼 정예 및 고수는 물론이요, 상천 혹은 여러 이름의 절대고수까지 배출해 오지 않았느냐. 화산파가 왜 무당파와 나란히 검의 제일로 불리는지 생각해 봐라.” 형산파도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힘의 법칙에 따라 마음에 들진 않아도 수긍했다. “왜, 아주 그냥 노력이 부족했다고 대놓고 말하지 그러느냐?” 일팔구로가 살의로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장이라도 벨 것 같은 기세였다. “일팔구로. 이상이나 꿈을 이야기하기에는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생각하지 않냐?” 섭등은 일팔구로와 마주 보며 반문했다. “무림은 무릉도원도, 지상 낙원도 아니다. 힘, 곧 무공의 차이로 인해 권리를 누리는 세상이 아니겠나.” 섭등의 말에는 여러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너희가 말한 대로 무림, 아니 이 사회는 잘못되어 있다. 권세라 해도 비합리적인 것을 짚지 않고 넘어간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거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학살 집단과 손을 잡고, 배신하는 건 미친 짓이란 말이다.” “섭등!” 스룽! 일팔구로가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았다. “진정하시오.” 초예사태가 손을 들어 일팔구로를 막았다. “비키시오, 초예사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