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424)
얼마가지 않아 허탈함으로 줄어들었다. “소, 소령 교두님?” “……” 화산파의 사대제자를 맞이한 건, 사부가 아닌 두 눈을 천으로 가린 묘령의 여인이었다. “사부님은 어디 가시고 교두님이 여기에 왜……?” “손님.” “아, 손님이 찾아오셔서 자리를 비웠다고요?” 끄덕. “과연.” 불경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사부는 무인으로서 그리 유능하지 않다. 툭 까놓고 말하면 무능하다. 아는 것이라곤 매화심법과 매화검법뿐. 누구나 알고 있는 기초 중의 기초뿐이었다. 사부는 미안하다면서 대신 무공을 가르쳐 줄 사람을 붙여 주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화산파의 사람은 아니고 언뜻 듣기로는 암살 단체의 수장이라고 한다. 왜 여기서 지내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처음에는 말수도 적고 표정에도 변화가 없어 무서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감정 표현에 서툴러서 그런 것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녀는 기초적인 체력 단련부터 시작해 오감의 단련이나 보법, 기척을 지우는 법 등을 가르쳐 줬다. “오늘의 수련, 내가 대신.” “오늘은 뭐죠? 보법인가요? 아니면……” 제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소령이 마치 원래부터 옆에 있던 것처럼 나타나더니, 목덜미를 낚아챘다. “증진 체조.” “네?” 제자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 안 돼요!” “오늘, 늦었어. 괘씸해. 벌칙이야.” “자, 잠깐만요! 교두님! 사정이 있었어요!” 증진 체조. 이름만 들으면 몸을 푸는 운동 같지만 그 실상은 다르다. 그 어떠한 훈련보다도 악랄하다. 몸 안의 내공을 전부 소진한 뒤, 맨손으로 절벽을 등반한다. 악마나 구상할 법한 훈련 방식이었다. “안 돼.” “사정이 있었다니까요? 사부님께 전해야 할 말이 있어요!” “반 시진이나 늦었으니까, 강도를 높일 거야. 오감의 발달도 함께하도록 해.” 교두는 수련생의 말을 무시한 채, 눈을 가린 검은 천을 풀어 그에게 씌워 주었다. “으아악!” 두 시진 뒤. “사조께서는 악귀셨을 것이 분명해.” 구름 낀 가파른 절벽을 오르며 든 생각이었다. 입에선 욕이 감돌았지만 차마 내뱉지 못했다. 증진 체조의 창안자가 스승의 스승, 사조였던 탓이다. 사조는 물론이요 고인에 대한 모독도 될 수 있다는 불손한 생각에 머리를 털어 지워 냈다. “절벽은 싫어, 절벽은 그만, 잘못했어요……” 정상에 오른 제자는 무릎을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눈은 죽은 동태눈 같았다. “괜찮니?” “살려 주세…… 앗, 사고(師姑)!” 제자는 여인의 목소리에 놀랐다가 안도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눈부신 미모. 구름이 낀 탓인지 어딘가 모르게 신비로움이 가득했다. “얼굴이 엉망진창이네.” 제자에게는 사부의 사매, 즉 사고되는 사람인 낙소월은 ‘쿡’ 하고 엷게 웃었다. “제자를 절벽에 홀로 내버려 두다니, 사형도 참.” 슥슥. 낙소월이 얼굴에 묻은 흙을 소매로 닦아 주었다. ‘우, 우와.’ 쿵쾅쿵쾅.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정말로 선녀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의 미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 사고……” “응?”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이를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몇 살로 보이는데?” “삼십 대 중후반……?” “후후. 그래?” 낙소월은 제자의 궁금증을 풀어 주지 않았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사고는 사질의 머리를 귀엽다는 듯이 쓰다듬었다. “자, 그럼 잡담은 그만두고 슬슬 수련을 시작해야지?” “수련이요?” 제자가 귀를 의심했다. 방금 전 두 시진을 걸쳐 절벽을 등반했다. 그런데 슬슬 수련을 시작해야지, 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순간 그녀가 선녀가 아니라 지옥의 악마로 보였다. 낙안지옥의 교두들도 혀를 내두를 가혹함이었다. “저, 사고.” “안 돼.” “사부께서 보이시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나에게는 안 통해요.” 낙소월이 어림없다는 듯이 웃었다. “손님이 찾아오셨거든요. 아름다운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아름다운 사람?” 낙소월의 입가에 웃음이 싹 가셨다. “네. 교두님이 그랬어요.” 거짓말은 아니다. 손님이 찾아오기는 했다. 뒷말은 추측이지만 말이다. “……” “……” “사질.” “네, 사고.” “정말로 미안한데, 급한 일이 생각나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응, 나중에 봐.” 휘리릭! 낙소월이 손을 흔들곤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우와……” 제자는 낙소월이 경공을 펼치는 건 둘째 치고, 절벽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떠나는 걸 보며 감탄했다. ‘사고는 언제 봐도 대단하시네. 제자인 내가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왜 사고같이 굉장한 사람이 사부님처럼 무능한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제자에게 사부는 변변치 않은 사람이었다. 물론, 아쉬움을 느낄망정 불만을 가지는 건 아니었다. 사부가 거둬주지 않았더라면 굶어 죽었으리라. 생명의 빚을 진만큼 감사와 존경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였다. “사고의 말에 의하면 사부님은 위인이라고 하시지만, 솔직히 믿을 수 없단 말이야……” 제자에게 사부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가르침이라고는 무림에 대한 기초상식, 사대제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매화심법과 매화검법뿐이었다. 무인인데도 취미는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독서. 특이 사항이라고는 머리가 새하얀 것뿐이었다. 사부의 말에 의하면 젊었을 적에 고생 좀 해서 이십 대 무렵부터 머리가 하얗게 질렸다고 한다. 가끔, 인생에 대해 물어봐도 ‘때가 되면 알게 된다.’라면서 대답해 주시지 않았다. “아, 집이다.” 평소라면 길게 느껴질 거리였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오다 보니 짧게 느껴졌다. “휴, 이 지긋지긋한 곳은 언제 벗어나나.” 끝없이 펼쳐진 돌계단을 따라가니, 몇 시진 전에 다녀간 오두막이 보였다. 험준한 산 한가운데 지어진거라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두 사람이 살기에는 충분했다. 집 자체야 좋다. 사부의 말에 의하면 솜씨 좋은 장인이 지어 주셨다고 한다. 다만 화산파가 위치한 낙안봉과는 제법 거리가 있어 왕래가 힘든 건 물론이고 깎아내린 듯 한 절벽이나 산등성이, 산림이 우거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런 곳에서 지내시는지 여쭤봤더니 옛날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사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제자의 입장에선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화산파의 제자이면서 정작 화산파에 가 본 적은 아주 어렸을 적을 제외하곤 없으며, 본 적도 없다니. 종종 낙소월처럼 사부가 아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외롭지는 않지만, 역시 동년배를 만나보고 싶었다. 수련에 열심히 임하는 것도 하루라도 빨리 인정받아 강호에 출두하기 위해서였다. 사부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싶기도 하고. “다녀왔…… 히, 히익!” 제자는 무심코 문을 열었다가 식겁했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건 분노로 인한 살의, 독기로 번들거리는 표독스러운 눈빛이었다. “으아악! 악귀다!” “악귀? 누구 제자 아니랄까 봐, 건방지구나.” 흥! 방 한가운데, 악귀는 없고 미부인이 있었다. 청순하고 신비한 분위기의 낙소월과는 달랐다. 눈매는 칼날처럼 매섭고, 머리를 절로 조아리게 만드는 위엄, 분위기는 고고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 “으, 으응?” “왜 그러니, 네 사부를 똑 닮은 표정을 짓고서는.” “아!” 제자는 그제야 미부인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누구인지 알아봤으면, 차를 내오는 건 어떤가 싶네. 방금 전 발언을 못 들은 걸로 해 줄 수도 있으니 말이야.” 눈빛, 태도, 몸가짐에서 권위적인 자태가 느껴졌지만, 흔히 보이는 귀부인과는 사뭇 달랐다. “네, 넵!” 아이에게도 가차 없는 독설. 그 사람이 분명하다. 저 말이 농담이 아닌 진심이란 걸 알고 있기에, 제자는 평소 단련했던 보법을 펼쳐 차를 내왔다. “그 사람은?” “손님이 오셔서 자리를 비우셨어요.” “흐응.” 미부인은 차로 목을 축였다. “분명, 오늘 방문한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네, 네?” “나와의 선약을 무시하고, 자리를 비운 거에 대해서 묻는 거란다. 제자인 네 의견을 듣고 싶네.” ‘오 원시천존이시여!’ 사부를 향한 존경심이 줄어들었다. 그 대신, 속에서는 원망감과 공포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정도로 불편한 자리였다. ‘후우, 후우. 침착해.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사부 가라사대, 어느 때에도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 상단주 할아버지의 조언을 떠올리는 거야.’ 머릿속으로 푸짐한 살덩어리의 노인이 떠올랐다. ‘상단주 가라사대, 아부가 싫은 사람 없다!’ 제자는 각오한 듯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사부님은 너무하……” “뻔한 아부를 한다면 각오하렴. 독지에 넣어 단숨에 내성을 길러 주도록 하마.” “흠……” 미부인은 아부를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네 의견을 물어본 거야.” 문을 열어 둔 것도 아닌데도 소맷자락이 펄럭였다. 바람 탓이 아니다. 공력을 끌어 올렸다는 증거였다. 제자는 땀을 폭포처럼 흘리면서 말을 더듬었다. “사, 사모님…… 저, 그게……” “……뭐?” “히익! 죄, 죄송해요! 사모님! 용서해 주세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다. 목은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으나, 낙소월처럼 무공의 극의에 오른 고수 앞에선 도망쳐 봤자 소용이 없다. “얘.” “네, 네?” “사모(師母)란?” “네?” “대답해.” “사, 사부님의 부인이요……” 제자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누가?” “그…… 당 혜자가 되시는 분입니다만……?” 미부인, 당혜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제자는 혹시 잘못 말했나 싶어 얼른 수정하려다가 멈췄다. 당혜의 입 꼬리가 씰룩였기 때문이다. ‘이거다!’ 당혜의 반응에 제자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모님, 사모님. 불초자가 사부님의 부인이신 당 사모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정말로 그 스승에 그 제자구나. 주둥아리 놀리는 솜씨가 아주 똑같네, 똑같아. 좋아, 용서할게.” 당혜의 입가는 소매로 가려져 볼 수 없었지만, 귀가 벌겋게 달아오른 걸 볼 수 있었다. 눈썹도 씰룩이는 것이 웃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한창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또 한 사람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피부는 하얗고 비단처럼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은 굴곡 없는 일직선이었다. 눈은 호수처럼 맑으면서도 잔잔하고 깊었는데, 도를 쌓은 현인과도 같았다. “오랜만이네요.” 제갈수란이 두 사람을 보고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당혜도 제갈수란의 인사에 답했다. 방금 전까지 짓고 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제자가 그녀에게 선생님이라 부르는 까닭은, 어릴 적부터 갖은 학문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도사인 사부가 맡은 도학을 제외하곤, 유학이나 성리학부터 시작해 전략 등 다양한 공부를 가르쳐 줬다. 낙소월이나 당혜의 미모에 비견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면서, 무척이나 똑똑한 사람이었다. 참고로 그녀의 하나뿐인 동생이자, 동시에 사부와 의형제이기도 한 제갈승계는 재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사부가 자신을 불러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지금부터 너에게 기관지술을 가르칠 사람이 올 건데, 정말 재수 없는 녀석이란다.” “사부님,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남을 깎아내리시면 안 돼요.” 하지만 사부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자, 이 주변부터 보고 시작할까? 저기 설치된 거 보이지?” “안 보이는데요?” “이게 왜 안 보이지……? 이상하네. 딱 봐도 보이지 않아?” “아뇨.” “넌 재능이 없구나?” ‘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