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61)
여기서 이럴 시간은 없다. 이백여 개의 석회암 계단을 내려가 온천에 다가갔다. 피부가 달아오를 정도의 열기가 확 와 닿는다. 주서천은 끝까지 내려가진 않고, 적당한 곳에 서서 기감(氣感)을 비롯해 모든 감각에 집중했다. ‘찾았다!’ 반 시진 뒤, 물속을 돌아다니는 그림자가 보였다. 물고기치고는 몸집이 제법 크다. “만년화리!” 만년화리가 정말 만 년을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만큼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영물이다. 이곳처럼 고열의 환경에 서식한다는 것 자체가 범상치 않았다. “고맙다, 암천회.” 전란의 시대에는 영약이나 영물 등이 숱하게 발견됐다. 워낙 난세였는지라 무인들이 이곳저곳을 쑤셔 댄 탓도 있었지만, 암천회의 손길 때문이기도 했다. 암천회는 도감부(圖鑑部)라 하여, 영약과 영물을 수집해 기록하는 조직을 따로 만들어 활동했다. 그만큼 영약이나 내단을 중요시했다. 그들이 괜히 강한 게 아니다. 내력증진용이나 외부의 고수들을 섭외하기 위해 수집해서 사용했다. 이 도감부의 기록은 전란이 끝난 이후 주로 수뇌부 등의 일부에게만 공개됐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조금이라도 회복하라는 의미에서였다. 주서천도 장로의 권한으로 열람할 수 있었다. 다만 암천회가 영약이란 영약, 영물이란 영물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쓸어 담아 그다지 쓸모는 없었다. “전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읽었는데, 그게 이렇게나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도감 외에도 읽은 건 정말 많다. 지식은 곧 힘이라고 했는데, 틀린 말 하나도 없었다. 실은 그다지 유능하지 못하다 보니 시간이 남았다는, 눈물겨운 사정이 있지만 그건 잊기로 했다. 잉어! 시위를 몇 번이나 튕겼다. 도합 십여 개의 화살이 바람 소리를 내면서 날아가 만년화리를 노린다. 콰앙! 첫 번째 화살이 수면을 뚫고 바닥에 처박혔다. 일 할의 공력을 담았는지라 파괴력이 남달랐다. 양기건 음기건 별 소용없을 것 같아 순수하게 쏘기만 했다. 그래도 파괴력이 대단했다. 물이 승천하듯이 솟아올라 분수를 만들었다. 수면이 일시적으로 낮아지면서 만년화리가 보였다. 성인 남자 팔뚝만 한 몸체, 눈처럼 흰색. 확실히 도감에 나온 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파바밧! 두 번째 , 세 번째 화살이 연달아 꽂힌다. 물기둥도 늘어났다. 하지만 만년화리는 보이지 않았다. 스스슥! 만년화리가 헤엄을 쳤다. 눈으로 겨우 좇을 수 있는 수준의 빠르기다. 과연 영물은 영물이지만, 도망쳐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다. 이곳 간헐천에 도망칠 곳 따위는 없다. “어딜!” 내기의 흐름을 용천혈로 바꾸면서 온천으로 뛰어들었다. 안 그래도 뜨거웠던 열기가 한층 더 심해졌다. 왼발이 수면에 닿는다. 그 순간, 재빠르게 오른발을 뻗으면서 힘껏 달렸다. “하압!” 목청껏 기합을 터뜨린다. 그런다고 가라앉지는 않는다. 그 대신 경공의 상승 기법을 이용한다. 등평도수(登落渡水)다. 암향표를 대성하면서 자연히 쓸 수 있게 됐다. 만년화리가 헤엄친다면, 주서천은 뛰었다. 다리를 바꿀 때마다 첨벙하고 물이 크게 튀었다. “내단!” 주서천의 검이 만년화리의 꼬리를 노렸다. 김이 잔뜩 껴 앞을 가렸지만, 문제는 전혀 없었다. 검이 수면을 가르고 들어간다. 물의 저항력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공력을 잔뜩 넣어 완전히 배제했다. 하지만 상황이 마음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첨벙! 만년화리가 직각으로 튀어 올랐다. 수면 바깥으로 새하얀 몸체를 자랑하듯이 내보였다. ‘맙소사!’ 주서천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놀라워했다. 설마하니 이 일격을 피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이르다. 휘익! 만년화리가 포물선을 그렸다. 그런데 그 방향은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였다. 눈처럼 새하얀 잉어는 자신을 공격한 자에게 분노하듯이 덤벼들면서 꼬리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퍼억! “억!” 비명이 절로 나왔다. 당혜에게 기습을 당했을 때도 이 정도로 놀라지는 않았다. 하마터면 내공의 운용에 실패해 가라앉을 뻔했다. “……” 꼬리로 맞은 뺨이 얼얼하다. “하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요 몇 년 동안 무공 수련한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을 위해서다. 부글부글. 수면이 끓는다. 기포가 생겼다가 터지기를 반복했다. 온천의 열기 탓이라고 하기엔 끓는 것이 심했다. 일 갑자를 넘는 내기가 외부로 방출된다. 도가 무학의 정순한 기가 고요하게 퍼지다가 주변을 휩쓸었다. 쓰지 않던 내공들을 폭발시켜 힘으로 전환했다. 살아서 돌아가진 못할 것이다! 어차피 죽이려고 했지만 그냥 말해봤다. 주서천은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만년화리는 뒤에서 움직임을 포착했다. 만약 사람이었다면 한껏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동족도 아니고, 발 달린 미개한 동물이 따라온다. 헛고생이다. 이 주변은 자신의 영역이다. 날개 달린 미물도, 팔이 길고 털이 수북한 미물도, 자신을 잡기는커녕 농락만 당했다. 만년화리는 몸체를 수류(水流)에 따라 춤을 추듯이 흔들어 정면을 향해 미끄러지듯이 쭉 전진했다. 만년화리는 저 미물을 좀 더 농락하자고 마음먹고 여유를 부렸다. “제일식” 그러나! “자하개벽!” 우르릉! 마른하늘에 벽력이 쳤다. 산새들이 놀라 비상했다. 위이잉! 검에 맺힌 기가 무섭게 회전하면서 굉음을 낸다. 그 속도가 워낙 빨라 눈으로 도저히 좇을 수 없었다. 만년화리는 영물로서 그 심상치 않은 기를 느꼈다. 전력을 내 범위에서 벗어나 사라지려 했다. “제이식, 화우선형!” 앞으로 쏘아진 검이 부챗살처럼 퍼진다. 하나였던 검기가 수십 개로 나뉘어져 동시에 앞으로 날아갔다. 펑! 펑펑펑! 검기 다발이 떨어지면서 수면이 엉망진창이 됐다. 가라앉아 있던 자갈들이 위로 솟았다. 충격의 여파로 인해 파도가 일어나서 주변을 집어삼키듯이 훑었다. 만년화리가 질겁하면서 몸체를 마구 흔들었다. 목숨이 걸려 있어서 그런지 그 속도가 대단했다. 생전 이렇게 움직였던 적은 없었다. 그래도 열심히 한 덕에 위에서 떨어진 재앙들을 겨우 피했다. 영역의 끝자락까지 몰린 만년화리는 한숨 돌리기 위해 아가미로 호흡하려 했다. 부웅! 주서천의 다리가 직각으로 크게 올라갔다. “하아아앗!” 이번에는 조금 길게 이어지도록 기합을 낸다. 동시에 올라갔던 다리를 아래로 찍어 내렸다. 쿠아아앙! 발꿈치가 수면에 닿은 순간, 여지껏 없던 굉음이 터지면서 밑바닥이 보일 정도로 파도가 크게 쳤다. 만년화리는 순간 당황하면서 몸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헤엄쳐 빠져나가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 몸은 수중이 아닌 공중에 떠 있었다. “생선!” 공중에 뜬 만년화리를 노리고 검을 휘두른다. 퍼억! 검의 날이 아닌 등으로 쳐서 그런지 절삭음 대신 둔탁한 소리가 났다. 만년화리가 제대로 된 음성 기관이 있었다면 ‘컥’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을 지도 모른다.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의 세월을 산 잉어는 바닥에 내팽개쳐지며 퍼덕퍼덕하고 격렬하게 날뛰었다. “하하.” 주서천이 만년화리를 살포시 밟으면서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었다. “봤느냐, 만년화리여.” 주변에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자랑하듯이 목소리를 높여 중얼거렸다. “설사 영물이라도 인간 앞에선 한낱 미물일 뿐!” 입가에 침이 고였다. ‘잉어는 무슨 맛일까?’ 포식할 생각에 들떴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뺨을 후려친 만년화리에게 그동안 숨겨왔던 가학심을 먼지 한 톨까지 끄집어내서 복수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물 바깥으로 꺼냈다고 내단에 변화가 올 것을 걱정해서 그만두기로 했다. 주서천은 날뛰는 만년화리를 손날로 후려쳤다. 안에 있는 내단이 다칠까 봐 힘조절 정도는 했다. 최후의 발버둥이라는 듯, 마구 날뛰던 만년화리는 별 힘도 쓰지 못하고 기절했다. 주서천은 만년화리의 입을 벌려 검지와 중지를 집어넣어 안을 마구 헤집었다. 손가락에 닿는 물컹한 느낌이 불쾌했지만, 괜히 해체하다가 내단에 손상이라도 가면 곤란하다. 내장 헤집기를 몇 번. 손가락에 무언가 닿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곤 손가락에 닿은 것을 꺼내 확인했다. 손가락 마디만 한 크기에 몸체처럼 눈부실 정도로 흰 구(球)였다. “응?” 내단을 빼자마자 만년화리에 변화가 일어났다. 팔뚝만 한 길이도 길이지만, 몸통도 상당했던 만년화리가 체내에 뼈와 내장을 빼낸 듯 홀쭉해졌다. 총명한 빛이 언뜻 감돌던 눈도 죽은 동태 눈깔로 변했다. “맛없겠네.” 살생(殺生)에 대한 사과나, 내단을 내줘서 고맙다는 인사 같은 건 없이 헌신짝처럼 냉큼 버렸다. 자고로 인생…… 아니, 생물이란 건 약육강식이 아닌가. 결코 뺨을 맞아 화나서 그런 게 아니다. 주서천은 내단을 품에 갈무리하고 적절한 곳을 탐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적한 동굴을 찾았다. 안쪽까지 들어가 박쥐 등 방해할 만한 동물이 없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만년화리의 내단은 입에 물었다. 그리고 사천에서 받아 온 빙한독이 담긴 철통을 꺼냈다. 입구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긴 다음 마개를 연다. “으음!” 마개를 열자마자 한기가 빠져나온더. 북해나 서장의 대설산을 가보지는 않았지만, 간다면 이 정도의 한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 냈다. 쓸데없는 생각이나 호기심 같은 건 전부 치웠다. 철통은 바닥에 내버려 뒀다. 입구에서 빙한기(氷寒氣)를 머금은 연기가 빠져나와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오더니 몸을 휘감았다. ‘후욱! 후욱!’ 심호흡을 해 본다. 그것마저 괴롭다. 빙한기를 머금은 극독이 코와 입을 통해 몸 전체로 퍼진다. 오래걸리지 않고 그야말로 찰나다. 딱딱딱! 추위에 몸이 떨린다.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턱뼈가 부딪치면서 소리를 냈다. 꿀꺽! 입에 물고 있던 내단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정신 차려!’ 이 이상의 떨림은 운기조식에 방해가 된다. 성가신 정도가 아니라, 목숨에 직결됐다. 정신을 집중해서 몸의 조정에 나섰고, 떨리는 몸을 꽉 쥐어 잡아서 고정했다. 빠드득! 눈썹에 허연 서리가 끼고, 낯빛은 창백해졌다. 빙한기가 신체의 내외부로 감돌아 생명을 잡아먹으려 한다. ‘내단!’ 화르륵! 몸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자그마한 불씨가 아니다. 내장을 녹여 버릴 정도의 열기와 화기를 품었다. 빙한독에 중독됐는데도 이 정도다. 그냥 복용했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빙한독으로 화기를 중화하고, 화기로 빙한독을 해독한다.’ 이독제독(以毒制毒). 독을 없애는 데 다른 독을 쓴다하지 않았는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보다 알맞은 말이 없었다. ‘당가의 독이 무시무시하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만년화리가 흔하게 널려 있는 영물도 아닌데 , 그 내단의 화기를 능히 중화할 수 있다는 건 대단했다. 물론 자기 자신의 내공도 필요로 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한다 해도 보통이 아니었다. 주서천은 속으로 짐짓 감탄하면서 내기의 운용에 힘썼다. 중도만공 덕에 타기(他氣)도 자기 것처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어, 화기와 빙한기를 완벽히 운용했다. 눈썹에 쌓였던 서리가 사라졌고 몸의 떨림을 더 이상 잡아 둘 필요도 없었다. 꽁꽁 얼어붙었던 혈맥과 기맥도 원래대로 돌아와 다시 순환한다. 뼛속까지 태워 버릴 것만 같던 화기도 없다. 양측 모두 적절하게 섞여 중화된 찌꺼기만 남았다. 이 찌꺼기를 긁어모아 내단에 남은 수기와 적절하게 배합해 순환시켜 단전에 쌓았다. “…… 후웁!”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