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70)
미친 소리다. 확실히 바람은 대설산의 기후치곤 잔잔했다. 그러나 바람에 실린 한기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북해처럼 사계절 내내 겨울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균 기온은 낮은 편이었다. 대설산은 고도가 워낙 높다 보니 더더욱 그렇다. 높은 곳으로 등반할수록 북해와 다를 것 없었다. 이제 막 대설산에 진입하는지라 덜 추운 것은 확실하다. 물론 계절도 겨울이 아니니 얼어 죽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방한의에 대한 고마움을 저버릴 정도로의 기온은 결코 아니었다. 인근이 따스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주서천의 감각이 마비된 것도 아니다. 한서불침이라 그렇다. “이게 대자연인가. 나라는 것이 얼마나 자그마한 존재인지 깨닫게 해주는구나.” 주서천이 뒷짐을 쥐고 대설산을 지켜봤다. 두 눈에 보이는 것은 빙산의 일각밖에 되지 않는다. 좋아. 올라 볼까. 강풍이 불어 머리를 매만지고 지나갔다. “천년설삼은 대설산 정상 근처에서 발견되는 시체들 주변에 묻어 있었다고 했었지. 갈 길이 멀군.” 등반은 이제 막 시작됐다. 눈 위로 발을 내디디니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봉우리 중 제일 높은 곳을 향해서 걸었다. 바람이 불기는 했으나 강하지는 않았다. “응?” 한 시진 정도를 걸었을까, 눈 속에 파묻힌 시체 몇 구가 보였다. 뼈만 남거나, 혹은 추운 날씨 탓에 반쯤만 부패하거나 완전히 얼어붙은 시체 등 가지각색이었다. 공통된 것이 있다면 다들 이 광활하기만 한 눈더미 위에서 목숨을.잃었다는 점이다. ‘저들은 무슨 연유로 이곳에 온 것일까?’ 대설산에서 살고 있는 생명체는 몇 없다. 이곳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설산 초입이나 그 아래 고원에 동물이나 식물이 있으니 사냥을 위함이라면 여기에 올 이유가 없었다. 호기심에 그 의외의 이유를 생각하고 있을 때, 그 상념이 어떠한 신음소리에 의하여 깨졌다. “끄으으으으!” 똥 누려고 힘을 주는 소리인가? 아니다. “현실 부정하지 말자. 나 외에 누군가가 대설산을 등반하는 것 같은데, 그리 썩 좋은 소식은 아니지.” 주서천이 체중을 줄여 가면서 조용히 걸었다. 기척을 최대한 숨기고, 호흡도 느리게 했다. 소리가 들려올 정도라면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다는 뜻이다.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레 이동했다. 위로 오르기를 잠깐. 얼마 가지 않아 중턱에 엎드려 있는 사람 한 명이 눈에 밟혔다. 청각에 집중하니 숨소리와 심장 박동도 들렸다. 그 소리가 미세하긴 했으나, 살아 있는 게 분명했다. “엮이지 말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대설산, 그것도 초입도 아닌 중간에서 발견됐다. 여기에 올 수 있는 것 자체가 보통이 아니라는 증거다. 저런 자를 구하게 된다면 대체로 무언가 일에 휘말리게 된다. 강호 무림이 보통 그런 동네다. “차라리 안 봤으면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투덜거리면서도 이미 정신을 잃은 것 같은 행인에게 다가가서 발로 툭툭 건드려 봤다. 반응이 없다. 무기를 숨기고 기습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행인을 들어 등에 업었다. “젠장.”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욕이 나왔다. 第十二章포달랍궁(布達拉宮) 햇빛을 반사해 빛나는 머리,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 초승달처럼 흰 눈썹은 무척이나 깔끔했다. 처음에 봤을 때는 얼굴도 보지 않고 그냥 등에 업었다. 언제 죽을지 몰라 급히 하산하는데만 신경을 썼다. 하지만 하산한 다음 그 몸을 바닥에 내려 두었을 때, 범상치 않은 용모에 불길함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방한의를 벗겨 보니 붉은 법복(法服)을 입고 있었다. 불길함은 현실이 됐다. “이 못난 중의 목숨을 구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시주.” ‘하필이면 포달랍궁(布達拉宮)의 라마승일 줄이야!’ 무림이 중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단연 바깥에도 존재하고, 이들을 새외무림(塞外武林)이라 칭했다. 그중 포달랍궁은 새외무림, 서장을 대표하는 무림 단체인 동시 소림사와 같이 불가 무학의 사찰이었다. 다만 중원의 불교와는 그 성향과 종파가 달랐는데, 이들을 라마교라 통칭했다. 문제는 라마교의 행보가 썩 좋지만은 않았다는 점과 포달랍궁의 라마승이 상당히 포악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몇 차례나 중원 침공을 노렸을 정도이니, 공격성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대해와 같은 마음을 지녔다는 그 소림사조차도 라마승을 이야기하면 눈살부터 찌푸리기 일쑤였다. “그럼 갈 길 갑시다. 짧지만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주서천은 이 라마승과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포달랍궁은 상상 이상으로 귀찮다. “어허, 시주. 뭘 그리 서두르십니까?” 라마승이 너털웃음을 흘리면서 손을 번개같이 뻗어 주서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제가 많이 바빠서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거 놓으시죠, 스님.” 주서천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정색했다. “시주께서는 저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입니다. 별다른 보답도 해 드리지 못했는데, 어찌 떠나려 하십니까. 이 못난 중의 체면도 좀 봐주시지요.” “빚은 안 갚으셔도 됩니다. 이름도 밝히지 않고 떠날 생각이니 저 좀 내버려 두십시오, 스님.”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합니다. 부디 이 못난 중의 이야기를 들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옷깃만 스치는 인연으로 끝냅시다.” 주서천이 대놓고 싫은 내색을 했다. “보아하니 시주께서는 이 대설산을 등반하시려는 것 같이 보입니다만, 맞지 않습니까?” “지나가던 길이었을 뿐이요.” “잘됐군요. 이것도 인연이라도, 괜찮다면 대설산 정상까지 함께하지 않겠습니까?” “이보시오, 스님. 내 이야기 듣고 있소?” 처음에는 멀쩡하게 생겼다 싶었는데, 역시 라마승이다. 머리가 이상하다. “중원에서 오신 시주께서는 이곳 대설산이 초행이지 않습니까? 괜찮다면 이 불쌍하고 힘없는 중을 데려가시는 건 어떤지요. 길의 안내를해 드리겠습니다.” 주서천이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어떻게 알았나는 의문이 담긴 눈초리를 보냈다. 라마승이 홀홀, 하고 인자하게 웃었다. “자고로 세월이란 건 곧 경험이기도 하오. 중원인을 본 건 시주가 처음이 아니외다.” 주서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는 지금 여러 가지를 떠올리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쩌지?’ 현지인이 동행해 주는 건 좋았다. 적어도 길을 안내할 수 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길의 안내를 받는다면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고생을 덜할 수 있으니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역시 이 라마승에 대한 신뢰도다. ‘나보다 하수인 건 확실한데……’ 경지를 대충 가늠해 보면 초절정을 앞에 둔 절정 정도로 추측된다. 기습을 당해도 질 걱정은 없었다. “제 목적지는 정상 근처입니다. 그곳까지 길의 안내는 불가능하실 텐데요?” “갈 수 있는 곳까지 안내해 드리고 원하시는 장소를 알려 준다면 길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정상까지 가 보신 적이 있습니까?” 주서천의 질문에 라마승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러나 과거에 포달랍궁이 주목랑마를 등반한 적이 있어, 그 기록과 지도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머리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만약, 동행한다면 어디까지 데려다주면 되겠습니까?” “시주께서 정확히 어디가 목적지인지는 모르나, 정상 근처라 했으니 그곳에서 조금 낮은 구역입니다.” 주서천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신중하고 또 신중했다. 혹시 모를 사태까지 대비해 봤다. 그러고 나서야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좋습니다.” * * * 원나라 시절, 라마교는 국교(國敎)였다. 그 영향력과 권세에 대해선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문제는 이 탓에 라마교는 힘에 심취하여 온갖 패악을 저지르고 막장을 걷게 됐다는 것이다. 포달랍궁은 그중에서도 선두였고 결국은 안 좋은 쪽으로 변질되어 악명을 떨치게 됐다. 그리고 그 인식은 아직까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할 수 없었다. “라마교도, 그리고 포달랍궁도 과거의 영광이라는 허영과 어둠에 아직까지도 빠져 있는 탓이지요.” 라마승이 염주를 엄지로 매만졌다. “처음 봤을 때 느꼈지만 스님은 참 특이한 것 같습니다.” 또라이라는 걸 돌려 말해 줬다. 주서천은 라마승과 함께 대설산을 다시 올랐다. 길을 알고 있다는 건 거짓이 아닌 듯 했다. 라마승을 따라가니 본 적 있던 곳에 보다 빨리 도착했다. “무릇 잘못된 것이 있다면, 똑바로 마주 보고 이를 인정해야 하지요. 그러지 않는다면 우치(愚擬 :어리석음)에 잠겨 현상과 사물을 바로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게 될 것 입니다.” 말하는 것이 범상치 않았다. ‘이 노친네가 포달랍궁에 불만이 있는 것 같은데, 또라이 같은 성격 탓에 따돌림을 당한 게 분명하다.’ 척 보면 척이다. ‘일행도 없이 혼자 온 걸 보면 포달랍궁에서도 그렇게까지 신분이 높은 자는 아닐 거다.’ 괜히 관여되고 싶지 않은 입장에서는 최적이었다. “한데, 시주께서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스님, 저희가 통성명할 정도로 친분 있는 사이는 아닌 것 싶습니다. 그냥 스쳐 가는 사이로 끝냅시다.” “허어, 시주께서는 북풍한설처럼 차가우시구려.” 차가운 남자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사문 한정으로는 따듯하다. “이 또한 라마가 이어 준 연. 부디 자비를 베풀어 저에게도 따스함을 가르쳐 주시지 않으렵니까?” “라마승은 묵언 수행 하지 않습니까? 있다면 지금부터 시작하시는 걸 추천드리겠습니다.” 해가 진다. 빛이 사라지고 어둠의 장막이 꼈다. 밤하늘에 휘황찬란한 보름달이 나타났으나 애석하게도 운해(雲海)에 가려 볼 수 없었다. 주서천도 밤이 되자 멈춰야만 했다. 라마승 탓이었다. “후욱, 후욱. 여기에서 이십여 장만 가면 동굴이 나옵니다. 그곳에서 밤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는 이거나 입고 기다리십시오.” 주서천은 방한의를 벗어서 라마승에게 건냈다. “시주께서는 혹시 추운 나머지 정신이 나가신 겁니까?” 라마승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추위 속에서 방한의를 벗는 건 미친 짓이다. “됐으니까 얼어 죽지 않도록 정신이나 바짝 차리십시오.” 주서천은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동굴 바깥으로 나갔다. 눈보라가 쳤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동굴 근처에 쌓인 눈을 한꺼번에 모았다. 그리고 검을 휘둘러 적당한 크기의 벽돌 모양으로 자른 다음, 엇갈리게 쌓아 올렸다. 눈을 소재로 한 벽이 입구를 채웠다. 빈틈은 동굴 안에 쌓인 눈으로 막았다. “허어, 내 오랫동안 살아왔지만 그런 건 처음 봅니다.” 라마승이 신기한 듯이 눈을 껌뻑였다. 즉석에서 세운 눈 벽이 차가운 공기와 칼날보다 매서운 바람을 차단했다. 마치 남만의 주술 같았다. “북해의 건축법이라 하더군요. 원래는 원형으로 쌓아 올려 집을 만듭니다.” 전란의 시대에서 싸우다가 이것저것 배운 것 중 하나였다. “시주께서는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은데, 무공도 보통이 아닌 데다가 지닌 지식 또한 대단하군요.” 라마승의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동공이 고요하게 빛났다. 그 눈에 묻어나는 감정은 호기심이었다. “중원의 지나가는 행인들은 원래 그 정도 합니다.” 주서천이 소맷자락 안쪽의 매화가 보여지지 않도록 신경 썼다. “자, 슬슬 잡시다.” 배낭을 베개 삼아 누웠다. 모포는 필요 없었다. “그나저나, 스님께서는 무슨 일로대설산에 오르시는 겁니까?” 엮이기 싫어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