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88)
의리나 신뢰라는 것은 보기 힘들다. 전장에서의 신뢰는 더더욱 그렇다. 사파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뒤의 압박 탓에 처음에만 싸우다가 혼란스러움을 틈타 도망칠 것을 속으로 맹세했다. 와아아아! 구릉에서 무인과 무인이 충돌했다. 묘가검문과 폭섬도문이었다. 폭섬도문 역시 낭인들을 대거 고용 한듯했다. “흐랴압!” 철삼이 앞장서서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에 폭섬도문 측의 낭인이 컥 하고 신름을 흘리며 쓰러졌다. “어딜!” 그 뒤로 곧장 낭인이 철삼에게 덤벼들었다. 그 숫자가 무려 셋이었다. 휙! “끅!” 달려오던 낭인의 목이 뒤로 확 꺾였다. 그 이마에는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박혀 있었다. “…… 허어?” 철삼 뒤에 있던 낭인이 놀란 듯 입을 떡 벌렸다. “봐, 봤어?” “보이지도 않았다.” “화살이란 게 저리도 빨랐나……?” 눈을 껌뻑이면 이마에 화살이 꽂혔다. 속도도 속도지만 단 하나도 빗나가지 않았다. 무림인에게 화살이란 건 숫자만 많지 않으면 충분히 피하거나 쳐낼 수 있는 것이다. 괜히 활이 안 좋은 취급받는 게 아니다. 아무리 혼란스러운 전장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피하거나 막는다. 그런데 주서천의 화살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대부분이 어떻게 죽은 건지도 모르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파바밧! “컥!” 화살이 바람을 가르면서 날아갈 때마다 비명이 터졌다. 그 화살에 빗나감이라는 것은 결코 없었다. “대단하군!” “이렇게 도와만 준다면……!” 철삼을 비롯한 십인대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처음에는 기회만 엿보고 있었지만, 근처에 위험이 생길 때마다 제지해주는 걸 보니 마음이 움직였다. “으하하하!” “와라! 네 이놈들!” “내 뒤엔 궁신이 계시다!” 십인대가 의기양양하게 외치며 주변의 적들을 몰아붙였다. 근처에 있던 다른 낭인이나 사파의 무사들도 이를 눈치채고 주서천의 십인대 측으로 모였다. 무림에서 활은 원체 쓰이지 않다 보니 눈에 뛸 수밖에 없다. “도대체 이 화살들은 뭐…… 컥!” “어디서 날아오는 거냐!” “궁수부터 찾아!” 눈을 껌뻑이면 옆에 있던 동료가 화살에 맞아 쓰러진다. 보이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니 소름이 끼쳤다. “저기다!” 높아 봤자 무릎 정도의 풀이나 꽃 밖에 없는 구릉이고, 아군에게 눈에 띈다면 적군에게도 마찬가지다. 문도나 고용된 낭인들은 핏대가 서도록 소리를 지르고, 주서천을 삿대질하며 척살 명령을 내렸다. “거기, 활잡이! 앞으로 나오지 마라!” 낭인들을 이끄는 묘가검문의 고수도 주서천을 발견하고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 호위까지 붙여 줬다. ‘오! 무공을 수련할 좋은 기회군!’ 검법이야 과거의 경험이 있으니 상대가 없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궁술은 처음이니 실전 경험이 필요했다. 주서천은 이 기회를 수련에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미리 준비해 둔 화살통을 바닥에 두고 한자리에서 일월신궁을 운용했다. 전쟁이란 건 하루 종일 계속되지 않는다. 보통 해가 지게 되면 양측 다 지쳐 퇴각해 재정비한다. 보통 공격 측이 먼저 물러나는 것으로 휴전을 알린다. “그만!” 묘가검문주의 명령으로 퇴각했다. 그 목소리는 기분 좋은 듯, 무척 들떠 있었다. 오늘 아군의 피해는 다른 날보다 적었고, 적군의 피해는 반대로 많았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주서천은 환대를 받았다. “십인장! 아니, 형님!” “따르겠습니다! 대장!” “저희를 거두어 주십시오!” 사파인이나 낭인들은 자존심을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특히 하수들은 더더욱 그렇다. 그들은 약삭빠르게도 주서천에게 달려가 다른 날의 싸움을 위해서 고개를 숙여 댔다. “알았다. 일단 일당이나 받으러 가자.” 은자 두 냥을 받을 때,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왔다. “반갑다. 묘진배라 한다.” “묘가좌검 (苗家左劍).” “그래.” 이름을 대자마자 주서천이 자신을 알아봐 주자 묘진배가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묘가검법을 좌수로 펼치는 검수로, 사파에서도 나름 보기 힘들다는 초절정 고수로서 천하백대고수다. 동시에 묘가검문주의 친동생으로 선두에서 최전선의 지휘를 맡고 있다. “무슨 일이오?” “아까 전에 보았는데 그 궁술이나 지휘가 범상치 않더군. 괜찮다면 내일부터는 백인장이 되어 지휘를 맡아 주지 않겠나? 물론 그에 합당한 보수도 내주겠네.” “좋소.” “무공뿐만 아니라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좋군. 그럼 잘 부탁하지, 음호사궁(音皓死弓).” 묘진배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음호사궁?” “아직 듣지 못했나? 오늘 전투에서 자네에게 붙은 별호일세. 소리가 들리면 죽는 활이라고 말일세.” “난 검수요.” “하하. 농담도 잘하는군. 더더욱 마음에 들어.” 묘진배가 주서천의 어깨를 두들기곤 떠났다. 얼마 걷지도 않은 묘진배에게 부관이 다가와 뭐라 말했다. 청각을 집중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봤다. “저자는 누구입니까?” “음호사궁 주 머시기란 놈이다. 어차피 내일 죽을 놈이니 신경 쓰지 마라. 놈을 앞에 내세워 주목시킨 다음, 따로 본대를 움직이도록 하게. 어차피 활이나 쓰는 놈이니까.” “알겠습니다.” 목소리도 줄였고, 주변이 시끄러워서 잘 안 들릴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과연, 그런가.” 활로 실전에서 공을 세웠다고 한들, 오랫동안 쌓인 인식이 쉽게 사라질 리 없다. 처음부터 자신을 치켜세우기에 성격 좋은 놈인가 했는데 단순히 이용하려고 그리한 듯했다. “묘가좌검이 아닙니까!” “대단합니다, 형님!” 처음에 지휘를 맡았던 십인대 수하들이 다가왔다. 그 뒤로도 몇십 명이 잇따랐다. 오늘 함께한 백 명이 주서천을 따르고 있었다.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다.” “꾸엑!” 주서천의 손바닥이 철삼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쪽팔리게!’ 철삼이 순간 화가 나 눈을 부릅떴다. 아랫것들이 있는데 망신을 준 것에 화가 났다. “팍! 씨.” 주서천이 손을 들자 철삼이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내일, 아니 오늘부터 내가 백인장이다. 아마 오늘 함께한 너희는 내일 나와 또 함께할 것이다.” “오오오!” 무사들이 좋아했다. 반은 낭인 출신이고, 반은 문도가 열도 되지 않는 사파의 약소 문파였다. 일류가 둘, 이류가 여덟, 삼류가 구십이었다. 한숨이 나오는 전력이었다. “너희 이름은 이제 철일과 철이다.” 주서천은 일류의 무인 둘을 한 명씩 가리켰다. “미친놈!” 새로이 철일이 된 사파의 무사가 기가 막힌 듯 코웃음을 쳤다. 그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내일 네놈이 죽으면 이 백인대를 내가 고스란히 흡수하려고 가만히 있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겠구나.” “아까부터 네 눈깔을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급조된 백 명이 곧장 신뢰를 보이며 따를 리 없다. 특히나 사파에서 욕심에 눈이 멀어 뒤통수치는 건 흔한 광경이었다. “고작 활 쓰는 놈의 말을 따르라고?” 철일이 검을 뽑는다. 일류의 무인답게 그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화산파의 검수다.” “흥! 네놈이 활잡이라 말하면 고용되지 않을까 봐 거짓을 고한 건 알고 있다. 그것도 장식이겠지!” “진짜다. 난 정파인이라니까.” “헛소리! 본때를 보여 주마!” 철일이 덤벼들었다. 전장을 돌아다니 며 무기나 군량을 파는 이들을 ‘전쟁상인’이라 칭한다. 그리고 그 부류에서 최근 이름을 떨치는 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금의상단이었다. 금의상단은 애초에 귀주에서부터 활동한 만큼 이쪽 분야로는 잘 알려져 있었다. 상단이 커진 이후로도 여전히 전장을 찾아다니면서 장사를 했다. 다만 정파와 사파, 적아의 구분 없이 파는 것이 눈엣가시였다. 그 탓에 좋아하지 않는 자들도 많았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의상단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끝없이 애용되었는데 이는 금의상단이 필요한 상황에 알맞은 물품을 원하는 품질로 확실히 보급해 주는 점 때문이었다. 가끔 전쟁상인들 중에는 일부러 하급품을 가져와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아치우는 악질이 종종 있다. “싫으면 사지 마!” 괜히 전쟁 물자가 값비싼 게 아니다. 공급은 적은데 수요는 많은 상황에서 안 사면 당장 전멸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살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은 보복이 두려워서 하지는 않지만, 가끔은 그들이 전멸할 것을 생각하거나 혹은 큰돈을 벌고 잠적할 것을 계산하고 저지르는 자들도 제법 있었다. 사람들은 그 운 나쁜 경우를 피하고 싶어 영 달갑지는 않지만 신뢰는 확실한 금의상단과 거래했다. “그러니까 너희도 살 게 있다면 무조건 금의상단에서 사라. 다른 놈들은 전부 사기꾼이야.” “……예.” 철일이 음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뺨은 벌겅게 부어 있었고, 어째서인지 손에 쥔 검은 반 토막이 났다. 그리고 그 뒤로 백인대원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낯빛 역시 썩 좋지 않았다. 다들 우울해 보였다. “보수를 받으면 술이나 기녀에게 전부 날린다니, 그야말로 하루살이가 아닌가. 우선 무기나 약 같은 것에 투자해라.” “고수는 무기를 따지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너희가 고수냐?” “아니요.” “그렇지?” “……” 무언가 속는 느낌이었다. “백인장. 난 여기에 오기 전에 검을 장만했소만.” 삼십 대 중반쯤 된 사내가 물었다. 주서천의 시선이 옮겨졌다. “어디서?” “복안에서……” “누구에게 구입했나?” “복안에 실력 좋은 대장간이 있다고 하여……” “누구에게 소개를 받았지?” 주서천이 집요하게 묻자 사내가 목을 자라처럼 움츠리면서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을 흐렸다. “묘가검문의 무사에게……” “흠.” 주서천은 주변을 슥 둘러보곤, 묘가검문의 문도가 없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 속삭이듯이 중얼거렸다. “그거야 동네 상권과 짜고 친 것이 아니겠는가? 품질이 의심되니 새로 장만하도록.” “백인장. 난 방금 전 싸움에서 노획했소. 이도 나가지 않았고, 몇 번 쓰지 않은 것 같은데……” “시체를 뒤져서 가져왔나?” “그렇소” “분명 무기가 좋지 않으니 패배한 게 틀림없군. 버리고 새로 장만하는 게 좋아. 품질이야 두말할 것 없이 금의상단이 최고지.” 궤변도 이런 궤변이 없다. 너무 이상하니 의심하는 자도 나왔다. “정말…… 이오?” “너 나보다 고수야?” “……그건…… 아니지만……” “그럼 말을 말아! 콱!” 백인대가 돈을 탈탈 털어 무기를 장만했다. 그래도 정말 나쁜 건 아니다. 실제로 하수들이 괜히 하루가 멀다 하고 죽는 게 아니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하루살이 인생이기에, 대부분 보수를 쾌락을 위해 사용했다. 그것을 제외하고 무기나 약 등에 쓴다면 생존률은 몰라보게 상승한다. “자, 이제 내일을 위해 쉰다. 자자.” * * * 날이 밝았다. 구릉 위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든다. “흠.” 묘진배는 눈을 매섭게 뜨고 구릉 위에 세워진 진지를 노려봤다. 저 진지를 보는 것도 오늘로 끝이 다. “가자!” 와아아아! 묘진배의 외침에 아군이 답한다. 그들은 각자 결사의 심정으로 무언가를 위해서 검을 휘둘렀다. 구릉 위로 피바람이 불었다. 시체가 썩어 가는 악취와 비릿한 피 냄새가 바람에 뒤섞여 있었다. “음호사궁부터 처리해라!” 어제의 활약이 적군에게도 알려져서 그런지 주서천부터 경계하는 외침이 튀어나왔다. “백인장을 지켜라!” “와아!” 백인대가 주서천을 호위하듯 서서 검을 들었다. 백 명과 백 명이 부딪쳐 뒤섞였다. 손에 쥔 무기 덕에 적아를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화살 따위를 두려워하다니, 어리석은 놈들!” “너희가 그러고도 사내대장부라 말할 수 있느냐!” “꺼져라, 이 겁쟁이들!” 폭섬도문 측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사형제가 커다란 도를 휘두르면서 전진했다. 그들이 도를 휘두를 때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