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23
언젠가는 죽겠거니 하고 하루하루 마지못해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 적엽명이 잠자던 삶을 일깨워 놓았다.
비가보를 다시 일으킨다?
할 만한 일이다. 그 일이야말로 여족 제일의 꾀주머니라는
황함사귀가 진가를 발휘할 일이다.
지금부터 다시 일으킨 비가는 그가 사랑하는 의붓아들, 적엽
명의 것이 되리라.
공로를 알아주는 것 따위는 관심에도 없다.
여족인이 한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면 바보라고 멸시하는
풍조가 있지만 신경 쓰지도 않으리라.
재건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권을 장악한 해남파의 거세게 방해할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래도 좋다. 적엽명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돕고 싶
다. 황함사귀는 세상을 다시 사는 기분이이리라. 인간에게 희
망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목부들이 꽤 있습디다?”
“히히! 사왔지. 일손이 있어야 될 것 아냐? 커억! 나도 한
물 갔나? 고것 먹고 취하네.”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그까지 것…… 겨우 과하마 일곱 필 값인데 뭘.”
“전에 일하던 목부들은?”
“히히! 여족인에게 자유가 있었던가? 돌아오고 싶은 놈들도
있겠지만 사정이 안 되지. 암, 사정이 안 돼. 커억!”
그가 뇌주반도에서 사온 종은 모두 스무 명.
사람 세 명이 과하마 한 마리 값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과하마 한 마리가 은 네 정, 종 한 명이 싸게 사면 은 한 정이
고 조금 비싸게 산다고 해도 동전 몇 닢만 더 얹어주면 된다.
노예상(奴隸商)에게 팔린 자들은 평생을 노예로 지내야 한
다. 그들이 맞이한 부인도, 자식도 모두 노예가 된다. 마음씨
좋은 주인을 만나 면종이 된다면 몰라도 그들은 인생은 가시밭
길의 연속이다.
“말은 좀 아는 놈들이오?”
“알기는 제까짓 것들이 뭘 알아? 내가 있고, 이랑이 있
고…… 꺼억! 필요 없어. 튼튼하기만 하면 돼. 말 잘 듣고 힘
잘 쓰는 놈들이면 되지. 히히!”
황함사귀는 많이 취한 것 같은데도 술 단지를 집어들고 입
속에 털어 넣었다.
“그만 마시쇼. 그러다 서둘러 황천길 갈라.”
“가면 좋지 뭐. 마누라도 보고.”
황함사귀는 건초더미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열을 헤아리기도
전에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아내…… 혜……!’
술도 옹기를 집어들고 술을 들이켰다.
아내가 보고싶다. 아내가……
무너진 비가가 일어서려면 양보다 질로 승부해야 한다.
황담색마.
암말은 봄과 여름에만 임신이 가능하다. 지금이 딱 그 계절.
잘만 사면 단숨에 배로 불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나이는 세 살짜리부터 열 다섯, 여섯짜리까지 임신할 수 있
지만 가급적이면 교미를 가져본 놈이 좋다. 말은 다른 가축보
다 난산(難産)이 적지만, 반대로 유산(流産)은 무척 높아 거의
이 할에 육박한다. 다른 때 같으면 어린놈을 고르겠지만 지금
은 임시변통으로 당장 유산이 적게 될 놈을 골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말은 네 살짜리.
세 살짜리의 경우 교미두수(交尾頭數)는 이십 두(頭)에 불과
하다. 네 살은 사십에서 육십 두, 다섯 살짜리는 팔십 두까지
교미시킬 수 있다.
그러나 말의 발정이 이십삼일 주기로 칠 일간 지속된다는
점. 발정이 시작되었다 해도 임신 가능한 날짜가 반나절에 불
과해, 발정이 시작된 삼일 후부터 발정이 끝날 때까지 이틀 간
격으로 계속 교미를 시켜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적어도 두
세 마리는 사야 한다.
백석산 황유귀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가 무슨 방법으로 귀하디 귀한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모른
다. 그것만은 황유귀의 비밀로 남아있을 게다.
어쨌든 황유귀 덕분에 아쉽지만 일곱 마리를 구했다.
황담색마 일곱 두와 과하마 이십 두가 돌보아야 할 말의 전
부였다.
말의 임신 기간은 이백팔십칠 일에서 최장 사백십팔 일.
내년 여름이 되어야만 결실을 맺을 수 있다.
그 때는…… 황담색마 열한 두, 과하마 서른 다섯 두가 되어
야 한다. 그래봤자 비가가 일어설 기반을 마련한 것이 지나지
않지만.
바람 또한 허황한 것이다.
황담색마 일곱 마리를 가지고 새끼 다섯 마리를 얻겠다니.
말을 잘 아는 목부는 미친놈이라고 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
으리라.
말의 수태기간은 이백 팔십 일에서 삼백 사십여 일로 일 년
에 한 마리밖에 낳을 수 없다. 또한 유산(流産)이 다른 가축보
다 심해 이 할 가량이 유산을 한다. 황담색마의 경우만 하더라
도 수태할 수 있는 암말이 여섯 두 뿐. 그 중 다섯 두에게서
새끼를 얻겠다니.
욕심이 지나치다는 것은 알지만 시간이 얼마 없으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제야 적객으로 유배되어 온 황(黃) 노인이 의서 세 권을
전해준 까닭을 알았다.
간헐경, 본원진경, 약초비경.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황담색마를 관리
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의서들이었다.
황노인은 수발을 들어준 수귀에게서 비가보가 몰락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게다. 그리고 적엽명이 돌아오면 어쩔 수 없이
비가보에 손을 댈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직감했을 테고.
적엽명은 흙담 벽에 등을 기대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
았다.
마방 안에서 가끔씩 술을 들이키는 소리와 황함사귀의 코고
는 소리가 들려온다.
황함사귀는 쌀을 팔아 모았던 돈을 한 푼 남김없이 모두 썼
을 게다.
돈이 남았다면 종을 더 사오든지 아니면 과하마라도 사왔으
리라.
고마웠다. 모두 고마웠다.
그러나 고마움은 내색하지 않으련다.
사귀는 친 혈육과 다름없으니까. 그리고 혈육에게는 고맙다
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니까. 대신 그들을 위해 피를 흘려야 될
때가 있다면 기꺼이 흘리리라.
황유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행위는
뭐란 말인가.
황함사귀와 황유귀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본 적이라도
있었던가. 그들은 진정한 우정을 쏟아주고 있는데……
적엽명은 발길을 돌렸다.
황유귀가 물어오는 소식은 비가보를 재건하는 일보다 중요하
다. 지난 한 달 동안 해남도에서 죽은 사람들에 관한 소식……
하지만 지금은 듣지 않으련다.
황유귀의 마음 또한 황함사귀와 다름없을 테니까.
* * *
“헤헤! 이랑을 돕는 분인 듯 한데…… 통성명이나 합시다.”
황함사귀가 적엽명을 찾아온 낯선 사내들에게 말을 건넨 것
은 비가에 들어선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곰같이 우람한 덩치에 단삼을 입어 겉으로 드러난 울퉁불퉁
한 근육, 얼굴마저 험상궂어 비위라도 틀리는 일이 있으면 당
장 주먹질을 할 듯한 거한과 시골 훈장님처럼 단정한 용모에
의복도 깔끔하게 차려입었지만 날카로운 눈매가 섣불리 접근하
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
그들과 가장 빨리 만난 사람은 백석산의 황유귀였다. 그는
적엽명과 같이 비가에 도착했고, 그 날 두 사람과 대면했다.
그로부터 이레가 흘렀다.
다음 날은 만천강의 수귀가 얼음장같은 얼굴로, 감은성의 호
귀가 여인이나 지어낼 듯한 간드러진 웃음과 징그러운 눈웃음
을 흘리며 나타났다.
수귀와 호귀는 두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하물며 수귀와 호
귀보다 이틀이나 늦게 도착한 황함사귀야 말해 무엇하랴.
그는 황유귀의 전서를 받은 즉시 황담색마와 신체가 건장한
종을 구하러 돌아다닌 탓에 가장 먼저 만났으면서도 가장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비가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호기심에 불을 지핀 것은 낯선 사
내들의 정체였다.
적엽명은 웃기만 했다.
취영은 무서웠다고 말하면서 눈살을 찌푸렸고, 황유귀는 범
상치 않은 놈들이었다는 말을 사용했다. 황유귀가 범상치 않았
다고 말할 정도라면 적어도 사귀와 버금가는 기도를 지닌 자들
이라고 믿어도 좋다. 황유귀가 사람을 보는 눈은 십분 정확하
니까.
두 사람의 신비스런 행적은 더욱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해남도에 관한 소문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까지 세세하게 알
고 있다는 황함사귀도, 황담색마 열한 두의 소재를 알고 있던
황유귀 술도 낯선 두 명의 정체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해남
도에서 이레동안 무엇을 했는지도.
두 사람은 마치 땅으로 꺼진 듯 행방이 묘연했다.
황유귀의 말을 빌리자면 이레 전, 적엽명과 무슨 이야기를
수군거린 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걸어갔
다고 하던데.
그런 자들이 오늘 불쑥 나타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엽명이 데려왔다는 말이 옳다. 점심을 먹
은 후 슬그머니 사라진 적엽명은 해가 서녘으로 거웃거릴 무렵
에야 나타났고, 그의 뒤로 두 사람이 따르고 있었으니까.
염소수염의 사내는 적엽명을 바라보았다. 인사를 나눠도 되
겠느냐는 뜻을 담고.
이들 두 사람은 나타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행동이 그랬
다. 마치 적엽명의 허락을 얻지 않으면 말 한마디도 크게 할
수 없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런 행동은 적엽명의 지난 행적을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지
만 묻지는 않았다.
적엽명이 해남도를 떠날 때 수중에 소지했던 것은 검 한 자
루와 동전 열 문.
태어나서 자랄 때까지 해남도를 벗어나지 않던 그가 어떤 행
로를 걸어야 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험난한 가시밭
길을 걷는 중에 수하인들 거두지 못할까.
문제로 수하로 보이는 두 사내는 기도가 범상치 않다는 것이
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경망스러워 보이는 거구와 보통 사람보
다 훨씬 신중해 보이는 염소수염의 사내는 해남파에서 내놔라
하는 고수와 비교해도 하등 손색이 없을 듯 했다.
“그리고 보니 아직 인사도 하지 않았군. 이 쪽은 한백(罕
栢), 작호는 무자음사(撫字陰士)라고 하지. 삼고구류(三古九
流)의 학문을 익혔지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고 해
서 붙여진 별호지.”
적엽명이 염소수염의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백은 스스로 귀곡자(鬼谷子)의 후인이라고 말하지만 믿을
만한 것은 못돼.”
“이런!”
“푸! 하하하!”
한백은 섭섭한 표정을 거구의 사내는 마시던 술을 허공 가득
히 뿜어내며 대소를 터트렸다.
“저기 불곰같이 생긴 사람은 화문(禾雯)이라고 해. 작호는
일도일사(一刀一死). 삼국시대에 태어났다면 장비(張飛)와 한
판 승부를 벌였을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성정이 폭급하
고 술을 너무 좋아한다는 점을 빼면 장비와 겨룰만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어.”
“엥?”
“크하하하!”
이번에는 화문이 인상을 일그러트렸고, 한백은 배꼽을 부여
잡고 웃어 제쳤다.
사귀는 적엽명과 그들 사이에 진한 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것은 상관과 수하라는 관계를 떠나서 인간적인 교
감이 이루어졌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더군다나 나이도 자식
또래 밖에 되지 않는 사람에게 하대를 받는 입장에서는.
적엽명은 한백과 화문을 소개했던 방식 그대로 사귀를 소개
하기 시작했다.
여족 제일의 꾀주머니, 뱃속 검은 능구렁이. 오뉴월 삼복더
위에도 서리를 몰고 다니는 물귀신, 속이 물러터진 허깨비. 해
남도에서 황함사귀와 함께 소식통을 다투는 싸움꾼, 보다시피
꿈에 볼까 두려운 못생긴 놈. 감은성 청루의 실질적인 주인,
아래 매달린 물건만 떼어내면 영락없는 계집.
화문과 한백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백은 막 먹으려던 오리구이를 입에 문 상태로, 화문은 술
독을 든 채로 두 눈만 멀뚱거렸다.
적엽명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것이다. 그를 잘 안다고 생
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비록 입가에 실 웃음을 흘리며 어색하게 말하고 있지만 진한
농담을 했다는 자체만으로 큰 충격이었다. 그는 언제나 할 말
만 하고는 입을 다물어버리는, 근엄한 편이었으니까.
사귀는 치부라면 치부랄 수 있는 부분이 들춰졌는데도 아무
렇지 않은 듯 했다. 전부터 그런 소리는 익히 들어왔다는 듯
‘그 말만은…… 제길!” 어멋! 섭섭해라. 이제 외상 술은 안줄
줄 알아.’하며 역시 농으로 받아넘겼다.
일곱 사람은 오래 전부터 사귀어왔던 지우(知友)라도 된 냥
마음을 풀어놓고 술잔을 주고받았다.
말 젖으로 만든 마유주(馬乳酒)는 맛이 독했다.
시큼하기도 하면서 혀끝을 톡 쏘는 맛이 목젖은 간질였다.
“우리 냉정히 생각해 보자.”
모두가 껄끄러워 하는 부분을 제일 먼저 입 밖으로 꺼낸 사
람은 만천강의 수귀 탄(彈)이었다.
그는 편하게 누워 검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이야
기를 꺼냈다.
“듣기 싫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지. 적엽명, 너는 한족이면서
도 한족이 아니다. 너의 몸 속에는 한족의 피와 우리들의 피가
같이 흐르고 있어. 그것도 우리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지
해남파는 아냐. 다른 사내의 씨를 밴 채 일가의 가주를 우롱한
계집…… 여자의 자식쯤으로 생각하고 있을걸?”
수귀 탄은 성격만큼이나 하는 말도 매몰찼다.
해남파는 한족 이외의 민족은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지주(地主)와 서민(庶民)의 구분이 해남도처럼 확실한 곳도
없을 것이다.
몽고족(蒙古族)이 중원을 장악하여 원(元)이라는 나라를 세
웠고, 한족 여인들을 유린하여 그들의 몸 속에도 다른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현실을 생각하면 웃기는 행동이었다.
해남도만 해도 그렇다.
원나라가 중원을 지배할 당시, 호광행성(湖廣行省) 남도선위
사(南道宣慰司)로 구분되어 몽고인들의 지배를 받지 않았는가.
한족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순수한 한족 혈통을 이어받
은 사람은 찾기 드문 게 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남파는 여
족과 한족이 결합하는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극도로 예민한 반
응을 보였다.
한족 여인들은 여족청년과 혼인하려 하지 않았고, 한족 청년
들은 여족 처녀들을 노리갯감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행동양식도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해남파는 한족들의 공동모임과 같아서 한족이 무슨 일을 할
때는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지만 다른 민족이 상권을 거머쥐려
할 때는 철퇴를 가하곤 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아주 교묘
히.
적엽명은 자신에 대해서 혹독한 평을 하고 있는데도 목석처
럼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형님이 비가를 일으킨다면 간섭하고 나설 명분이 없지만 네
가 움직인다면 달라지겠지. 더군다나 우리까지 가세해 있으니.
어쩌면 여족에 대한 경고 차원에서 모조리 도륙 하려고 덤빌지
도 모르지.”
침중한 침묵이 흘렀다.
적엽명으로부터 비가 재건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부터
쉽지 않다고 생각했던 불안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비가보를 재건하는데 해남파와의 연관을 빼놓을 수 없다. 한
족과 여족의 기본적인 틀을 깨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사귀가
여족인이기에. 아니, 적엽명에게 여족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에. 그것이야말로 우화가 주장하는 여족 자존(自存)이지 않은
가.
“해남파에는 삼십육검이 있다. 검을 맞대보기 전에는 승부를
점칠 수 없다는 최강자들. 검을 지니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지
검귀가(持劍歸家)의 단계를 넘어선 자들이다.”
모두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지검귀가(持劍歸家)!
검신(劍身)이 일체가 되어 자신의 마음으로 돌아온다는 경
지.
검을 들면 번뇌도 욕망도 승부욕도 없어 오로지 무심(無心)
으로 검신이 합일되는 상태.
사부(師父)의 검을 벗어나 자신만의 검을 가진 경지였다.
그런 자가 해남파에는 서른 여섯 명이나 있다.
“아니지. 청천수 비해가 무너졌으니 삼십오검이라 옳겠지.
그들이 과연 가만히 있을까? 비가가 재건되도록 팔짱끼고 있겠
냐고. 그렇지 않겠지. 그럼 그들과 정면승부를 벌인다면 승산
은 얼마나 되지?”
“물을 필요도 없지.”
황유귀 술이 작게 진저리를 치며 중얼거렸다.
사귀는 분명히 보았다. 해남파의 무서운 저력을. 팔 년 전
적엽명이 해남파를 탈출할 때 동원되었던 백여 명중에 지검귀
가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단 한 명, 일검분혼(一劍焚魂) 유전
일(劉塡一) 뿐이었다.
적엽명은 지리적인 이점을 취하고도 몸에 다섯 군데의 치명
적인 검상을 입은 끝에야 유전일을 죽일 수 있었다.
만약 지검귀가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 한 명만이라도 더 가세
했다면?
해남파와의 정면승부.
머릿속에 그리기도 싫지만 생각해두어야 한다.
그 때였다.
“해남파는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해남파가 멍청한 가요. 섣불리 움직이게.”
모두의 시름을 단숨에 달려보내고도 남을 소리를 한 사람은
뜻밖에도 적엽명을 찾아온 낯선 사람 중 염소수염을 가지런하
게 길러 깨끗하게까지 보이는 사내와 여족 제일의 꾀주머니라
는 황함사귀 찬이었다.
둘은 거의 동시에 말을 토해냈다.
순간 염소수염의 사내와 찬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서로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
찬이 지모가 뛰어나다고 자부한다면 염소수염의 사내도 그와
비슷한 지모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해가 안 돼. 해남파가 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거
지? 움직이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황유귀 술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지.”
한백이 거기까지 말하고 찬을 쳐다보았다.
“당금 해남십이가의 무력(武力)을 비교해보면…… 아! 실례!
버릇이 되어놔서…… 비가를 제외한 해남십일가의 무력을 비교
해보면 아시다시피 상중하로 나눌 수 있습죠.”
찬도 한 마디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한백이 그랬던 것처
럼 한백의 입을 주시했다.
“강성오가로 구분되는 다섯 가문. 그들이 해남파를 구성하는
주축이란 사실은 누구나 다 압니다. 문제는 그들의 힘이 비슷
하다는 데 있습니다.”
“힘이 비슷한데도 장문인은 한가에서만 나온다? 속 상하죠.”
“권력은 무력과 재력에서 나옵니다. 무력으로 비슷하다면 재
력으로라도 앞서야 하는데 그것조차 비슷하니.”
“헤헤! 그래서 비가의 몰락을 방치했던 게죠. 황담색마만 가
질 수 있다면 단번에 강성오가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으니까.
헤헤!”
“이제 사실을 보겠습니다. 비가가 몰락한 지 이 년.”
“헤헤! 그런데도 해남도 특산인 황담색마는 늘지 않았지.”
한백과 찬은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앞뒤가 척척 맞았다.
“해남도에 남아있는 황담색마는 모두 열두 필. 관부에 세 마
리, 우화가 두 마리, 해남파에 일곱 마리뿐.”
“헤헤! 내 차롄가? 수가 늘어나지 않는 것은 종모마 관리를
엉망으로 했기 때문이지. 황담색마는 의외로 예민한 놈이거
든.”
“비가가 몰락하는 것을 방치한 것은 비가 대신 황담색마를
키우고 싶은 욕심이 한 자리를 했죠. 증거가 있습니다. 해남파
에서는 비가가 몰락한 바로 그 해, 비가에서 일하던 목부들 대
부분을 수용했죠.”
“아무도 없는 허공에 헛손질한 셈입죠. 헤헤! 황담색마의 관
리만은 가주가 직접 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겁니다. 알 턱이 없
죠. 헤헤! 오래 전에는 제가 했습죠. 조금 지나서는 이랑께서
하시고…… 이랑께서 떠나신 후에는 가주님이 직접 손대셨고
이제 와서 말이지만 대공자께서는 상재(商材)가 아니었습죠.
무공에만 전념케 한 것도 그런 이유. 헤헤! 건방졌다면 실례.”
결국 찬과 한백의 생각은 똑 같다는 결론이다.
“해남도 특산 중 하나인 황담색마를 사장시킬 수 없다.”
“황담색마는 돈이 됩죠. 그렇다고 명마가 태어날 때까지 하
늘만 쳐다보고 있기는 답답할 테고. 헤헤!”
“황담색마 중 서로 궁합이 맞는 짝을 찾는 방법은?”
“비가가 흥성하도록 내버려두자. 헤헤! 조금 머리가 돌아간
다면 도와주는 방법을 택할 테고.”
한백은 적엽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을 잘 안다는 목부 두어 명이 상주할 지도 모릅니다. 아
니,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이쪽에서는 거절할 명분이 없을 겁
니다. 어느 문파나 머리가 뛰어난 자는 있기 마련이니……”
“헤헤! 하파란 자죠. 그 자의 잔꾀는…… 휴우!”
찬은 어깨를 들썩이며 항복한다는 시늉을 했다.
“하파는 나도 좀 알지.”
적엽명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황담색마의 종부에 관해서 세세히 파악하려면 그 방법 밖에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시한부 입죠. 짝짓기 계절에 한해서. 짝짓는 방법을 모두
알고 난 다음에는…… 킥!”
황황사귀는 오른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로 긋는 시늉을
했다.
“새끼가 태어나고 태어나지 않고는 상관없습니다. 어떤 기준
으로 종부마를 선정하고 어떤 놈을 고르며 어떤 방식으로 종부
하느냐만 알면 되니까요.”
“주둔한 놈이 멍청해서 종부비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운이 좋
은 것입죠. 그렇게 되면 일 년 더 생명이 연장되는 게고.”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항구가 철저히 통제될 겁니다. 해남
도에 황담색마가 들어오는 것을 막자는 의미죠. 자칫 방심했다
가 정말로 비가가 재건에 성공이라도 하는 날에는 제거할 명분
이 없어질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닭 쫓던 개꼴이 되는 겁입
죠.”
“당분간은 도에 지나치는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안전합니
다.”
적엽명은 아무 응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위험도 없습죠. 나중에야 정면으로 칠지, 암습을 가할지 모
르지만 지금이야…… 헤헤!”
한백과 찬은 주고받듯이 말을 나눈 후, 적엽명을 쳐다보았
다.
2
공동묘지처럼 황량하기만 하던 비가보에 사람이 북적거리는
것은 두 손을 들어 반길만한 일이다. 하지만 화화부인과 취영
은 좋은 기분으로만 대할 수 없었다.
앞 뒤 좌우를 둘러봐도 온통 여족인이란 것이 마음에 걸렸
다.
전에도 여족이 득실거렸지만 지금과 사정이 틀렸다.
그 때는 주인이 분명했다.
비가보.
비가보를 거슬릴 목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지금은 여족이 주인이다. 형식으로는 적엽명이 주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돈을 댄 사람은 종으로 있다 면종된
황함사귀였고, 황담색마가 있는 곳을 알려준 사람은 백석산의
황유귀다.
이제 해남파에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그것 역시 적엽명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부인마님, 이제 그만 침소(寢所)에 드시죠.”
아직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중년부인이 가까이 다가와 말
했다.
그녀는 남편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비가보에 머물기로 했다.
상처가 나으면 여모봉으로 숨어들 수도 있지만 중상(重傷)을
입은 몸으로는 무리였다.
그녀는 화화부인을 대부인으로, 취영을 소저로 깍듯이 모시
며 자잘한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앞으로 서른 명에 가까운 식
솔들의 먹을 것을 장만하고, 빨래를 해야 하기 때문에 큰 일이
라면 큰 일. 그녀의 도움은 컸다.
“휴우! 그래요.”
화화부인도 예전처럼 함부로 부리지는 못했다.
모두가 은인인 셈이다.
“비해는?”
“벌써 잠자리에 드셨어요. 대공자님은 큰 마님께서 워낙 정
성을 다하는 바람에 별로 도와드릴 일이 없네요.”
“수고 많았어요. 이제 그만 리(貽)아에게 가봐요. 어린것이
하루 종일 엄마와 떨어져 있어도 안 좋아요.”
“호호! 그 애는 지금 한참 책을 읽느라고 정신 없을텐데요,
뭐.”
“책을?”
중년부인은 실수를 했다 싶었는지 얼굴색이 급격하게 굳어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