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5
해남도가 대만도(臺灣島) 다음으로 큰 섬이라고는 하지만
대군(大軍)으로 몰아치면 칠주야(七晝夜)만에 초토화 될 일
개 섬에 불과하다. 섬에 상주한 관부(官府), 무가(武家)를 장
악한 다음 사단이 벌어진 이유를 조사하면 모든 일이 깨끗이
해결될 터인데 대장군(大將軍)은 왜 어려운 길을 택하는가?
그 정도 파악하지 못할 노장군이 아니다.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이 존재했다.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은 지주(地主), 독서인(讀書人)
의 협력을 받아 명왕조(明王朝)를 창업하였다.
왕조 초기라는 특수한 상황에 따라 강력한 군주지배체제(君
主支配體制)를 수립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왕조의 기반
이라 할 수 있는 지주, 독서인을 다독거리는 일도 무시할 수
없다.
모순된 정사(政事)다.
무엇보다 통수권(統帥權)은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가 가지
고 있지만 파견권(派遣權)은 병부(兵部)가 거머쥐고 있다. 군
을 통솔은 하되 병부의 허락 없이는 움직이지 말라는 뜻. 병
부는 군대를 움직일 권한은 가지되 통솔은 군에 맡기라는 뜻.
모든 권력의 중앙에는 황제가 있다.
상황이 그러니 황제의 기반인 강남(江南) 지주들을 자극할
수가 없다. 남만(南蠻)이 우려된다는 명분(名分)으로 광서(廣
西)까지는 군대를 몰아왔지만 광서를 넘어 광동(廣東)으로 진
군한다면 황명(皇命)을 거역하는 일이 된다.
참장은 혈기에 치우친 나머지 올바른 정세(政勢)를 파악하
지 못하고 있다. 이해할 수 있다. 싸움터에서 잔뼈가 굵은 무
장들이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오류니까. 또한 대도독부(大都督
府)에서 오군도독부로 개편된 것이 얼마전이니까.
노장군은 강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참장을 바라보았다.
“자네 말은 십분 이해하네 만…… 홍암 장군은 우군(右軍)
운남도사(雲南都司)에서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네. 비록 가족
처럼 사랑했던 마수광의이지만 밀정이 죽었다고 해서 운남도
사를 비울 홍암장군이 아닐세. 그래서도 안되고.”
“인편을 보내겠습니다.”
“그래서?”
“……?”
“홍암이 가만있지 못하겠다면 어찌할 텐가?”
“사람을 계속 보내야지요. 해남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감히 일군의 부장들을 계속 죽이고 있는
데……”
노장군은 참장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 홍암장군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홍암 장군은 적사(赤獅) 장군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그 때 나이 겨우 열 일곱.
하지만 용맹(勇猛)만은 따를 자가 없었다.
싸움이 벌어진 전장에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
았다. 제일 선두에서 쌍검(雙劍)을 휘두르며 질풍처럼 달려가
는 웅휘한 모습을 보면 숨이 콱 막혔다.
사내는 역시 강해야 한다. 강한 사내는 아름답다.
홍암장군은 모든 병기를 능통하게 사용하지만 가장 애착을
가지는 병기는 쌍검인 듯 하다.
특히 홍암 장군의 마상쌍검(馬上雙劍) 십이세(十二勢)는 관
우(關羽) 장군의 화신(化身)이란 칭송을 받고 있다.
광담과오관참육장(光談過五關斬六將).
관우가 조조(曹操)에게서 벗어나면서 위나라 장수 여섯 명
을 무찌른 무용담(武勇談).
거기에 필적하는 무용(武勇)이라지?
그는 신들린 듯 싸웠다. 목숨이 서너 개라도 되는 듯 사지
(死地)가 분명한 싸움터도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임무를 맡을
때도 가장 위험한 부분만 도맡았다. 전투 시에는 선봉(先鋒)
을, 후퇴 시에는 후미(後尾)를, 소강상태일 때는 기습공격을.
– 홍암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지 마라. 십 중 팔,구는 죽는
다.
군병(軍兵)들 사이에 떠도는 말.
그러나 조금이라도 전쟁을 겪어 봤다는 군병들은 오히려 홍
암장군의 휘하에 들기를 자청한다. 홍암 장군은 어느 전투에
서도 지지 않으니까.
베어낸 적장(敵將)의 수급만 여섯 개이니 무훈(武勳)이 혁
혁하다 할 것이다.
홍암 장군은 젊은 나이에 종사품(從四品)의 높은 직책에 올
랐으며, 노장군이 품을 벗어나 운남도사에서 병권(兵權)을 쥐
고 있다.
“참모(參謀)들과 상의를 해보게. 우리의 연락망에 이상이
있다면 그 부분부터 해결해야돼. 그렇지 않으면 희생만 늘어
날 뿐이야.”
노장군의 결심은 단호했다.
2
유소청과 잡무공(雜務工:잡역부) 서른 두 명은 진시초(辰時
初)를 일각(一刻) 앞두고 선착장(先着場)에 도착했다.
사람과 물화를 실을 범선(帆船)은 포구에 정박해 있었다.
문제는 날씨였다. 예측했던 대로 동녘이 환히 밝았는데도 햇
살이 비치지 않는다. 하늘은 검은 먹구름이 가득해 금방이라
도 폭우를 퍼부을 기세다. 바람도 그렇다. 비릿한 비냄새를
실어온 바닷바람이 강하게 머리칼을 휘날린다.
“배는 예정대로 출발한데.”
선표(船標)를 구하러 갔던 범위가 돌아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해남십이가(海南十二家) 중 하나인 범가(凡家)는 일찍이 바
다로 눈을 돌렸다.
천 오백 년 전, 진시황(秦始皇)의 이주정책(移住政策)에 따
라 해남도로 강제 이주된 한족(漢族)은 만여 명에 달했다. 개
중에는 해남십이가처럼 뿌리를 내린 가문도 있지만 들끓는 해
적, 배타적 성향이 심한 원주민, 만연하는 악성 역병(疫病)을
견디지 못해 뇌주반도로 다시 건너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註1][註1:진시황 33년(기원전 214), 서북쪽의 흉노를 쫓아내고
“신진중(新秦中)”을 얻어 44개 현을 설치하고 “사람들을 이곳
에 이주 시켰다.” 『史記』
같은 해에 남월(南越)을 평정하고 많은 중원 백성을 계림
(桂林), 남해(南海), 상군(象郡)으로 이주시켜 “그들이 백월
과 함께 있게 했다.”『漢書』]
범위의 조상은 원래 광동에서 알아주는 대목(大木:집 짓는
목수)이었는지라 조선(造船)에 눈을 돌린 것은 당연했다. 섬
에서 뭍으로, 뭍에서 섬으로 오고갈 때는 범선이외에 다른 수
단이 있을 수 없으니까.
당시, 원주민인 여족들은 범선을 만들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배를 만드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바다를 가로막는
해적(海賊)들과 맞서 배를 운항할 힘이 없었다.
해남십이가는 그런 점에서 달랐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해적과 싸웠고, 그런 와중에 어느덧 하
나의 무림문파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현재, 범가는 광선(廣船:범선의 일종. 광동지방에서 쓰임)
열두 척과 비조선(飛鳥船:쾌속선) 예순 네 척을 보유하고 있
다.
해남도와 뇌주반도를 오가는 범선들의 대부분이 범가 소유
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유소청이 예정보다 하루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남의 배를 이용해야 하니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범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뇌주반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유소청이지 않은가. 폭풍이 온다고 어제 아침 배를 타겠다고
하더니만 낮 배도 아니고, 저녁 배도 아닌…… 하루를 온이
뇌주반도에서 지내다니. 할 일이 있는 것도 없으면서.
폭풍이 눈앞에 임박했는지라 범가에서 관장하는 범선들은
일체 출항을 중지시킨 상태였다.
“선장(船長)은 누구예요?”
“해경(海鯨:고래). 워낙 돈을 밝히는 사람이지만 믿을만
해.”
범위는 아직 눈곱도 떨어지지 않은 눈으로 방파제 한 귀퉁
이 쭈그려 앉는 사내들하고는 많이 달랐다. 그의 지금 모습만
보고는 밤새도록 사내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였다고는 도저
히 믿을 수 없었다.
언제나 복장이 깨끗하다는 점은 유살검과 비슷했다. 단지
유살검은 백색무복을, 오진검 범위는 청색무복만 입는다는 점
이 달랐지만.
서로 상대를 의식한 고의적인 행동이었다.
유살검과 오진검은 서로를 좋은 적수로 생각했다.
해남도 사람 쳐놓고 그런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갓 태어난
갓난아이밖에 없을 게다.
두 사내는 여러 부문에서 비슷했다.
키도 헌칠하게 컸고, 용모가 빼어난 점도 비슷했다. 나이가
스물 여섯인 것도, 해남십이가 중 한가(翰家)와 범가(凡家)에
서 막내로 태어난 것도, 후기지수(後起之秀) 중 가장 걸출하
다는 해남오지의 일원이 된 것도…… 무엇보다 유소청을 사모
한다는 점에서 둘은 양보할 수 없는 호적수였다.
“아무래도 폭풍을…… 피할 수 없겠죠?”
“그렇겠지. 하늘에 맡길 수밖에. 웬만하면 폭풍이나 피하고
가지 그래?”
“아니에요. 그래도 집이 편하죠.”
‘어제 출발했으면 됐을 텐데.’
범위는 목구멍까지 치민 말을 도로 삼켜 버렸다.
바다 물결이 매우 높아졌다. 먼바다는 이보다 더욱 심하리
라.
어제 낮 배는 반은 출항하고 반은 정박했다. 저녁 배는 일
절 출항하지 않았다. 그런 점을 잘 알고 있고, 해안소에 머물
러 있기도 싫으면서 하루를 더 묶은 까닭이 무엇이랴. 하지만
그런 물음이 유소청을 난처하게 한다면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때,
“외지인이지?”
“그런 것 같은데?”
“해남도로 들어갈 생각인가?”
“아님 무엇 하러 댓바람에 선착장에 왔겠어.”
“옆에 데리고 다니는 놈은 뭐야? 늑대 같은데?”
“설마 늑대를 데리고 다니려고…… 개는 아닌 것 같고……”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범위와 유소청은 사람들 음성을 쫓아 선착장으로 눈길을 돌
렸다. 순간,
“아!”
유소청은 부지불식간 놀란 탄성을 토해냈고, 범위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늑대!
어깨가 딱 벌어져 일견하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사내와 덩치
가 황소 만한 늑대는 뭇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
다.
“누군지 알아?”
“전들…… 알겠어요? 늑대를 데리고 다니다니 희한한 사람
이군요.”
범위는 유소청의 말이 몹시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늑대 운
운한 것도 이상했다. 유소청은 중언부언하는 성격도 아닐뿐더
러 유교(儒敎)를 맹종하는 유가(劉家)에서 자란 탓에 좀처럼
감정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본인은 의식하
고 있는지 모르지만 눈가에 잔 떨림이 일고 있다.
‘누군지 알고 있어. 내가 모르는 사내?’
범위는 유소청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
녀 곁에서 한시도 떠난 적이 없으니까.
그는 낯선 사내에게 진한 호기심을 느꼈다.
낯선 사내는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거칠어 보인다.
실제로 거칠기 짝이 없는 뱃사람들도 낯선 사내 근처에는 얼
씬거리지 않는다.
해안소에서는 일생에 한 번 볼까말까한 늑대의 등장도 한
몫하고 있으리라.
“내가 가서 알아보지.”
범위는 사내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켰다.
“저!”
범위는 유소청의 얼굴을 보다가 자신의 옷소매로 시선을 돌
렸다. 소매 끝을 살짝 잡은 옥수(玉手)가 보였다. 그제야 유
소청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살그머니 손을 움츠렸다.
“유살검과 외관영주(外關營主)…… 소식은 들었어요?”
옷소매까지 붙잡으면서 물은 것이 고작 유살검과 외관영주
의 소식?
유살검 한광과 오진검 범위, 그리고 취옥검 유소청은 서로
가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상대에 대한 말은 꺼내지 않곤 했다. 그런데 지금
은 유살검에 대한 소식을 묻고 있다.
‘저 사내 때문인데…… 도대체 누구지?’
범위는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아직 듣지 못했어. 왜?”
“아뇨. 괜히 궁금해서요. 같이 뭍에 나왔잖아요.”
역시 유소청은 지나가는 바람처럼 말한다. 관심 없다는 증
거였다. 그녀가 정작 관심 있어하는 부분은 선착장에 털썩 주
저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낯선 사내다.
‘누군지 알고 있어. 내가 알면 안 되는 사람? 누굴까……?
서둘 것은 없어. 배를 탄다면…… 해남도에 들어가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어제 밤을 샜더니 졸립군. 눈 좀 붙여야겠는데, 들어가지
않겠어?”
“저도 간밤에 잠을 설쳤더니 피곤하군요. 들어가서 쉬어야
겠어요.”
유소청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몸을 돌렸다. 그러나 범위
는 그녀가 낯선 사내를 흘낏 쳐다보는 눈길을 놓치지 않았다.
“저…… 저것 늑대 아냐!”
승객들로부터 선표를 챙기던 우림(愚林)은 놀란 눈으로 황
소 만한 늑대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앞발을 절룩이는 늑대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놈은 사람들이 두려운지 사내의 뒤에서 못난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왔다. 그래도 늑대는 늑대. 갈색 갈기는 곤두섰고, 날카
로운 송곳니는 금방이라도 목젖을 물어뜯을 듯한 위압감을 주
었다.
“정말 늑대네.”
“아악!”
이제야 늑대를 본 사람들이 작은 소동을 일으켰다.
늑대를 봤던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와 가까이 있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사내가 뒤로 다가온 줄도 모르고 배를 타기 위해 줄을 섰던
승객들은 기겁을 하고 물러섰다. 어떤 아낙은 너무 놀란 나머
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오돌오돌 떨기만 했다. 약간 퇴
색한 듯한 노란 눈빛을 접한 사람 치고 태연할 수 있는 사람
은 드물었다. 더군다나 뇌주반도에서 일생을 보낸 사람들은
늑대를 본적이 없기에 공포감은 더욱 컸다.
사내는 이런 일을 예상한 듯 태연하게 걸어와 우림에게 선
표를 내밀었다.
“배…… 배를 타려고……?”
우림이 떠듬거리며 물었다.
이런 일이 있기 전까지 그의 기분은 상당히 좋았다. 어제
저녁에는 해남도에서 건너온 마부들과 어울려 공짜 술을 거나
하게 얻어먹었고, 오늘 아침에는 해남파 무인들이 관례처럼
집어주는 소비(小費:팁)를 스무 문이나 받았다. 그것도 청루
(靑樓)에 있는 계집들은 비교도 되지 않을 기막힌 미인에게.
승객에게 선표를 받으면서도 바닷바람에 머리를 휘날리고 있
는 여인을 훔쳐보기에 여념이 없지 않았던가. 그 곁에 있는
사내놈이 바다에 빠져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단 한 가지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선녀
(仙女)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흉물(凶物)을 같은 배에 태울 수
없다는.
그러나 사내는 얄밉게도 고개를 끄덕인다.
우림은 엉겁결에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에게는 힘이 되어줄 동료가 많다. 가진 것이라고는 힘밖
에 없는 선원 사십여 명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람은 탈 수 있지만 늑대는 안 돼!”
단호하게 말했다. 재론(再論)의 여지도 없다는 듯 고개조차
돌려버렸다. 하지만 은연중에 늑대를 흘겨보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흉폭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이 금방이라도 달려들면
어쩌나.
“상표(上標:일등표)요.”
적엽명이었다. 그는 찬의 권고를 무시하고 보표(普標:이등
표) 대신 상표를 구입했다. 맹수인 늑대를 데리고 들어가는
방법은 그 방법 밖에 없으니까. 찬은 ‘늑대를 해안소에 맡겨
라. 당분간 맡아 줄 사람이 있다.”자칫하면 늑대 때문에 해
남 무인과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다. 십삼대 해남오지 중 네
명이 해안소에 나와있는데 피하기는커녕 사서 부딪치려고 하
느냐.’며 만류했지만 오랜 세월동안 동고동락(同苦同樂)한 늑
대를 떼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힘들고 고독하다 여겨질 때마
다 친구가 되어주었으니까.
“상표?”
우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선표를 바라보았다. 과연 사내가
내민 것은 빨간 색 선표 두 장. 상표 한 장에 은자 두 냥을
주어야 구할 수 있다. 돈이 있다고 전부 상표를 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상실(上室)은 네 개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해남
파에서도 지체가 높은 듯한 귀빈(貴賓)이 승선하는 날에는 천
하갑부라도 차지하기 어렵다. 그런데 상표를 지참하고 있다
니.
“이, 이걸 어떻게……?”
“승선해도 되겠소?”
사내의 음성을 듣고 있다보면 엊저녁에 얹힌 것도 시원하게
뚫리는 듯 했다. 목청이 탁한 듯 하면서도 음폭(音幅)이 넓고
깊어서 듣기에 썩 좋았다.
“드, 들어가시오.”
우림은 어쩔 수 없이 승낙하고 말았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
지가 달리 없었다. 상실은 모두 네 개. 그 중 두 개는 해남파
에서 소금을 수송해온 두 사람이 차지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를 허름하기 짝이 없는 사내가 차지한 것이다. 그것은 볼품
없는 사내가 해남파 제자들과 비등한 위치에 있다는 말이 되
지 않는가.
이 때, 우림을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 선표, 내가 삽시다.”
느릿한 음성, 진중한 걸음.
그는 백설처럼 새하얀 무복을 입었다.
머리에는 하얀 영웅건(英雄巾)을 질끈 동여맸고, 허리에는
언뜻 보기에도 보검(寶劍)으로 보이는 장검을 소지했다.
하얀 무복을 벗겨내고 여장(女裝)을 시킨다 해도 미인이라
칭송 받을 얼굴. 그러면서도 은연중에 내뿜는 기도는 세상에
거칠 것이 없다는 패도(覇道). 중원 천지 어디에 내놔도 대접
을 받을만한 외모다.
또 한 사람, 미공자 옆에 선 사내는 흡사 소불(笑佛)을 연
상시킨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 모습이 썩 훈훈
하다. 오관(五觀)도 단정해 전체적으로 깨끗한 인상이다.
하지만 하얀 무복을 입은 사내가 너무 빼어난 까닭에 봉황
(鳳凰)과 까마귀가 나란히 선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단
지, 키가 조금 작고, 체구가 약간 왜소해 보인다는 이유만으
로.
외모로 평가했을 때 이야기다.
감색 무복을 입은 사내도 장점은 있었다.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것.
만약 초행길에 나선 사람이 길을 묻는다면 하얀 무복을 입
은 사내보다 감색 무복을 입은 사내에게 말을 건넬 것 같았
다.
적엽명은 늑대의 목덜미를 가볍게 어루만질 뿐 별다른 반응
을 나타내지 않았다.
“선표 한 장에 석 냥을 쳐주지. 물론 은자로. 어떤가?”
이번에도 적엽명은 미공자(美公子)를 바라보지 않았다. 대
신 늑대에게 친구처럼 다정히 말했다.
“염왕(閻王)! 바람이 세니 어서 들어가자.”
늑대는 양순했다. 잘 길들여진 강아지처럼 빨간 혀를 날름
거리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양도해 주었으면 좋겠지만…… 미안하오. 낮 배는 뜨지
않을 것 같아서……”
늑대를 어루만지던 적엽명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침 동녘에 환히 드러난 하늘은 금방이라도 폭우를 퍼부을
듯 우중충했다. 바다 멀리는 태풍이 몰아치고 있으리라. 범선
(帆船)은 틀림없이 바다 가운데서 비바람을 맞을 것이고. 폭
풍을 바다 한 가운데서 맞으리라 각오하고 출항하는 배였다.
“하하하……!”
미공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앙천광소(仰天狂笑)를 터트
렸다. 눈빛은 깊숙이 가라앉았으되 입꼬리만 일그러진 웃음.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거북스러웠다. 그러나 그 모습조차
여인의 방심을 설레게 만들만큼 매혹적이었다. 그렇다. 깨끗
한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가 그와 사귀고픈 충동을 일게 만
들었다.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 아나?”
“해남도로 가는 줄 아는데?”
“아는데? 혓바닥이 반토막이군. 외지인인가 본데…… 해남
도에는 무슨 일로 들어가나?”
반위협적인 말투였다.
“관원(官員)이오?”
“뭣이! 건방진!”
“관원이 아니라면…… 건방진 것은 당신이라 생각하지 않
소?”
“하하하!”
미공자의 웃는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안색은 백짓장처럼 하
얗게 변했고, 손끝은 가늘게 떨렸다.
적엽명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늑대의 목덜미를 어루만
진 후, 우림에게 억지로 떠 안기다시피 선표를 쥐어주고는 발
판을 디뎠다.
“음…… 한광!”
범위가 중얼거렸다.
그는 선착장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만 아니라면 여인들끼리 머리끄덩이를 움켜잡
고 진흙탕을 뒹군다 할지라도 돌아보지 않았을 게다. 하지만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인물과 연적(戀敵) 한광이 다툰다면 문
제는 달랐다.
“한광!”
상실을 향해 계단을 밟아 올라가던 유소청도 사뭇 놀란 듯
눈을 치켜 뜨고 걸음을 멈췄다.
놀래도 너무 놀란 표정이었다.
백색 무복을 입은 사내.
깔끔했다.
정성을 다해 다림질을 한 듯 구김살 하나 없었다.
선착장에 나타난 사람은 유살검 한광과 석두였다. 그러나
유소청과 범위의 눈에는 한광만이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그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새로 나타난 무인
을 바라보았다.
승선해 있는 여인과 사내가 해남파 무인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도 상당한 지위에 있는 고수(高手).
상표를 끊은 것도 그렇고, 선남선녀(仙男仙女)가 하강한 듯
뛰어난 모습이 의심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런 여인의 입에
서 ‘한광’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잔혹한 솜씨로 여덟 명을
격살(擊殺)한 바 있는 유살검을 떠올리기가 어렵지 않았다.
유독 적엽명만 한광이라 불린 사내를 쳐다보지 않았다.
‘겁쟁이들. 목돈을 스스로 버리다니.’
선장(船長) 추형(秋鎣)은 불어오는 바람냄새를 맡으며 폭풍
의 강도를 계산했다.
남해(南海)에서 생성되어 북상(北上)하는 태풍.
받을 엄두가 나지 않는 큰 폭풍이 틀림없다. 더군다나 맞바
람이다. 이런 날씨에 배를 띄운다는 것은 겁쟁이들 말대로 미
친 짓이다.
‘이보게, 이런 날씨에 배를 띄우는 것은 바다에 대한 예의
가 아닐세. 쯧쯧!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자네가 태산같은 파도라도 타고 넘을 만큼 항해술(航海術)
이 뛰어난 것은 틀림없네. 그러나 바다는 조심에 또 조심을
거듭해도 모자라지 않은가. 처자식과 생이별하려고 그러나?’
다른 선장들은 한결같이 겁에 질렸다.
추형은 반대로 생각했다. 이런 날씨야말로 오랜만에 목돈을
거머쥘 좋은 기회다.
해안소에서 해남도 해구(海口)까지는 겨우 백 리가 조금 넘
으니 눈을 찔끔 감고 두 시진 반(한 시진=2 시간) 정도만 버
티면 된다. 폭풍이 몰고 온 맞바람을 맞는다 할지라도 넉넉잡
아 네 시진이면 도착한다. 그래봤자 한나절에 불과한 것을.
배 삯을 두 배로 불려도 승선할 사람들은 많다. 해안소에
머무는 것보다 싸게 먹힐 테니까. 해안소에서 대엿새 동안 머
물 만큼-폭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보통 십여 일은 꿈쩍도
못하니 대엿새도 짧게 잡은 것이다- 노자(路資)가 넉넉한 사
람이라면 승선을 포기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바쁜 일이
있거나 머물만한 노자가 없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배를 타
야만 하리라.
그들은 선장을 하늘처럼 믿는다. 적어도 바다에서만큼은.
폭풍이 닥쳐 배가 전복된다면 죽는 사람은 자신들만이 아니
다. 선장을 포함하여 선원 전원이 익사(溺死)할 게다. 죽을
것을 번연히 알면서 배를 띄울까? 선장이 배를 띄운다고 하면
무지렁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배를 타게 되어있다.
추형의 생각은 옳았다.
승선 시각이 가까워지면서 선착장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
렸다. 불공정한 뱃삯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으레 그럴 줄 알
았다는 듯 군소리 한 마디 없이 두 배나 되는 배 삯을 지불했
다.
‘돛을 잘 활용해야돼. 자칫하면 정말 고래 밥이 되지.’
해안소에서 해남도로 건너가는 길목은 경주해협(京州海峽)
이라 부르는 곳으로 물살이 완만한 편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바다바람이 비릿할 때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된다. 모르긴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