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68
을 벤다는 것은 너무 요원해 보였다.
“그리고 그냥 갔어. 한백 아저씨는 말이 없고. 심심해서 그
냥 나왔지 뭐. 아저씨는 우리가 가는 것도 모르던 걸.”
적엽명은 떠났다.
말을 들어보면 생사를 건 출행(出行)인 것 같은데……
복수는…… 복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송지는 석두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상하다. 그토록 사랑했
던 님인데 얼굴이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전체적인 윤곽
은 어렴풋이 떠오르는 데 세세한 윤곽은 잡히지 않는다. 이
미…… 잊어가고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처럼.
2
퓨우웃……!
“컥!”
예기는 강했고, 신음소리는 짧았다.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달리던 마차가 천천히
달리더니 이윽고 섰다.
뇌공검 한민은 바깥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건만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천천히…… 천천히…… 모든
일은 천천히 이루어져야 순리다. 무슨 일이든 급박하게 진행
된다는 것은 순리에 역행한다.
‘해남파는 무적이야.’
한민은 빙그레 웃었다.
“나오시지요.”
바깥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놈들아! 마차문 정도는 열어주는 것이 예의 아니더냐!”
한민의 고함이 쩌렁하고 대지를 울렸다.
마차문이 열렸다.
“후후후! 지산(紙傘)은 준비하지 못했소이다. 탓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나…… 비 좀 맞으셔야 겠소이다.”
“건방진 놈……”
한민은 못마땅한 눈빛을 보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이미 마차는 섰고, 바깥에는 열네 명
의 무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한민은 마차에서 내려 푸른 풀밭을 밟고 섰다.
부슬비가 내려 사방이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황록색
의 푸른 물결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초원
은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숨쉰다. 꽃향기 한 줌 풍기지 않으
나 싱싱하고 젊고 탄력에 찬 몸짓들이 야성을 일깨운다.
“흠! 비가는 좋은 곳에 세워졌어. 처음 알았군. 허허허!”
한민은 싱그러운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키며 초원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어울리지 않는 냄새도 풍겨온다.
어자석에서 풍겨오는 냄새. 머리를 잃어버린 몸뚱이 하나가
비스듬히 뉘어져 있다. 그의 잘린 목에서는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좋은 장소를 택했군.”
“이만한 장소라면 장문인도 만족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좋아. 맘에 들어.”
한민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장소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돗자리를 깔아놓고 술이라도 한 잔 들이켰으면……
그는 친구들이 그리웠다. 범장…… 무식한 놈. 유질은 너무
고지식해서 재미없고, 석중은 하도 잔머리를 굴리는 통에 방
심할 틈이 없었다. 그 친구는 가산을 정리해서 해남도를 떠나
일가(一家)를 세울 계획인 것 같던데. 죽은 전팽과는 그래도
가깝게 지냈다. 무리(武理)도 상통하고, 성격도 맞았다.
비가주 비사는 가장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본인은 조상
의 음덕(陰德)을 입었다고 했지만 약삼가에 속하던 가문은 중
오가로 이끌어 올린 것은 순전히 그의 능력이다. 너무 놀라
질투심까지 일었는데.
하금…… 못난 친구 같으니. 아무리 탈혼검이 사이하다고
하지만 아들 뻘밖에 되지 않은 놈에게 목숨을 잃다니. 그럴
줄 알았으면 지난 회합에서 면박을 주지 않는 건데.
언제나 말이 없는 악빈, 대력검을 잃어버렸을 때 이제 어떻
게 하늘을 이고 살겠냐던 박홍, 아버지의 명성에 짓눌려 아직
까지 뚜렷한 검을 만들지 못한 조후.
단성은 요즘 아들놈 때문에 골치를 썩는다고 들었는데 이
집이나 저 집이나 그 놈의 자식놈들이…… 그래서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던가? 후훗! 강청도 생각나는군. 그 놈의 염왕
채는 언제까지 받아먹을려는지.
지금은 모두 일가를 이루고 있는 친구들.
서로 ‘내가 잘났다”내 검이 더 강하다’고 으르렁거릴 때가
엊그제 같은데.
“장문인을 베기 위해서는 연수합격이 불가피합니다. 양해하
여 주시기를.”
“쯧쯧! 이 놈아, 그리도 성급하더냐? 그렇게 급한 성질머리
가지고 어떻게 지금까지 참았누. 기다려.”
한민은 부슬비를 즐기는 듯 천천히 걸었다.
십여 명에 이르는 무인들은 둥글게 둘러싼 채 한민의 걸음
을 따라 움직였다.
“허허! 손님이 있군. 미련한 놈. 기회를 잡으려면 완벽하게
잡아야지. 어쩌다 이런 실수를 했누.”
한민에게 말을 하던 무인은 당황한 빛 역력했다.
다그닥, 다그닥……!
초원을 질주해오는 말발굽 소리는 아무리 귀가 옅은 사람이
라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우렁찼다.
“허허! 그렇군. 적림 무인들이군. 가만…… 그래. 자네야.
자네가 저들을 불렀군, 그래.”
한민은 무인들을 둘러보다가 그 중 유독 복장이 두드러진
무인 한 명을 가리켰다.
얼굴을 완전히 가려버린 방갓, 온몸을 휘감고 있는 듯한 피
풍의.
비파무인이다.
“그렇군. 하하하!”
한민과 이야기를 나누던 무인이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적림 무인이 나섰다는 것은 유가 전체가 총동원되었다고 봐
도 된다. 무인들뿐만 아니라 염전(鹽田)에 종사하는 모든 사
람들이. 특히 유가는 다른 가문들보다 일하는 여족인과 부리
는 한인 사이가 돈독하기로 유명하다.
그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다면 무인 한 명쯤 찾아내는
것은 식을 죽 먹기다. 더군다나 비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섬전삼검(閃電三劍)은 복장도 갈아입지 않았다. 눈에 띨 수밖
에 없다.
“장문인, 저들이 온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습니
다.”
“귀령(鬼靈), 아니지. 자네, 본래 이름은 뭔가?”
“중원에서는 귀령공(鬼靈公)이라고 불렸소.”
“흠……! 그럼 이름자는 속이지 않은 셈이군. 나도 귀령공
이라고 불러주지. 귀령공. 자네는 이십 년 이상을 내 그림자
로 있었네. 그런데도 나를 모욕할 셈인가?”
“후후후! 모욕이 아니오. 장문인이 해남제일검이라고 하나
우리도 그만한 준비가 되어있소.”
“그렇겠지. 그러니까 내 앞에 나타났겠지.”
귀령은 추운단주다.
추운단 열네 명.
그들이 나타나 한민에게 검을 들이민 것이다.
“미련한 사람들. 손을 털고 해남도를 떠나주기 바랬건
만……”
“그러기에는 힘이 너무 커졌소.”
귀령은 등뒤에 맨 검을 뽑아들었다.
다른 추운단원들도 검을 뽑아들었다. 그들은 모두 등뒤에
검을 매고 다녔다. 해남무인들이 허리에 차는 것과 사뭇 대조
적이었다.
“후후후! 그냥 물러났다면 뒤통수를 얻어맞았겠지. 우리 비
파원들처럼.”
섬전삼검이 비웃으며 역시 검을 뽑았다.
모두 열 다섯 명이다. 십오 대 일. 하지만 한민은 전혀 동
요하지 않았다.
두두두두두……!
어렴풋이 들리던 말발굽 소리가 우렛소리처럼 들려온다.
전력을 다하여 질주해 오는 열 다섯 무인.
이제는 그들의 얼굴도 알아볼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단 일 검! ?!”
귀령의 말을 신호로 열 다섯 무인은 일제히 날아들었다.
머리, 등, 어깨, 다리…… 노리는 부위는 각기 달랐다. 하
지만 빗살처럼 다가오는 빠름은 누가 낫다 못하다 할 수 없었
다.
한민의 신형이 빙글 돌았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얼핏 비친
검의 그림자가 사면팔방으로 비산했다.
다수의 적을 상대로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한다는 환우검법
(環雨劍法)의 정수.
파파팍……!
둔탁한 음향이 터져나왔다.
말을 타고 전력으로 달려오는 적림 무인들이 단 이 장을 움
직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짙은 혈향이 초원 구석구석으로 퍼져갔다. 보슬비 사이로
붉은 피안개가 퍼지는 광경은 아름답기조차 했다.
“장문인!”
말을 타고 달려오던 금잔서생 유광은 빽하니 고함을 질렀
다.
붉은 피보라 속에서 장문인이 비틀거린다.
유광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일검을 교환한 추운단 무인들과 섬전삼검은 적정거리를 두
고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면서 호흡을 가다듬어 다음 일격
을 노렸다.
첫 번째 접전의 결과는 사망 네 명으로 나타났다.
그래도 검에 숨결을 모아놓았다는 검인들이 장문인의 단 일
검에 네 명이나 무너지고 말았다.
장문인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장문인의 왼쪽 허벅지에서는 붉은 피가 훌훌 흘러내려 푸른
색의 검붉은 자줏빛으로 채색해 놓았다. 네 명의 목숨 값치고
는 너무 싼 대가이지 않은가.
“준비한 것이 이거라면 실망이 크네.”
장문인은 이마를 찡그렸다.
정말 실망했다는 표정이다.
두두두두……!
지척에 다다른 유광 일행이 추운단을 둥글게 에워싼 다음
말에서 뛰어내렸다.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추운단은 섬전삼검까지 더해봐야 겨우 열한 명이다. 반면에
적림 무인은 열 다섯 명이고 한결같이 기세가 등등하다. 또한
무서운 신위를 발휘한 장문인이 아직도 살아 숨쉰다.
누가 봐도 살아 돌아갈 가망은 없어 보였다.
허나 귀령은 담담했다. 추운단원들도, 섬전삼검도 담담했
다. 그들은 마치 죽을 사람은 너희가 아니냐는 듯 장문인을
향해 쳐든 검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장문인, 한 수 잘 배웠습니다.”
순간,
“조심햇!”
“전환!”
두 가닥의 말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열한 명의 무인은 장문인에게 겨눴던 검을 돌려 적림 무인
들을 베어갔다.
파팟! 파아악……!
일순간에 서로들 위치를 바꿨다.
적림 무인들은 장문인을 향해 검을 겨눈 상태고 추운단 무
인들은 아무도 없는 바깥을 향해 검을 겨눴다.
한민은 자신을 향해 부릅뜬 눈을 보았다.
입에서 실핏줄이 흘러내리는 자는…… 심장이 베였다. 피가
역류하는 현상이다. 한 손을 배에 대고 있는 자는 복부를 베
였다.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온다. 벌써 땅에 드러누운
자도 있다. 그의 목은 생선 입처럼 벌어져 있다.
풀썩! 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적림 무인들이 쓰러졌다. 추운단 쪽도
상황이 비슷했다. 이름도 없는 초원에는 순식간에 서른 구 가
까운 시신이 널브러졌다.
해남오지의 일원이었던 금잔서생 유광도 성하지 못했다. 그
는 왼쪽 가슴을 손으로 누르고 있는데 하얀 유삼에는 붉은 피
가 흥건히 스며들었다.
유광과 검을 섞은 사람은 섬전삼검.
그는 검을 땅에 박은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검을 쥐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린다. 푹 숙이고 있는 고개
를 좀처럼 들지 못한다. 큰 방갓은 땅에 떨어져 뒹굴고 있다.
검은 피풍의만 아니라면 경련하고 있는 등도 볼 수 있었을 게
다.
“카악!”
섬전삼검은 입으로 핏덩이를 뱉어냈다. 그리고 그만이었다.
그의 몸은 썩은 고목처럼 무너져버렸다.
적림 무인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유광을 포함하여 네 명,
추운단은 귀령까지 두 명뿐이다. 스무 명이 죽었다. 서로를
베고 베이고…… 양패구상(兩敗毆傷)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처
참했다.
“귀령…… 너무 많은 피를 흘리는구나.”
한민은 노기를 억누르며 말했다.
“후후후! 그럼 우리만 죽어야 된다 그 말이오?”
“……”
“장문인, 물러서 계시겠습니까? 적림과 우리들은 아무래도
전생에 원수가 졌던 모양입니다.”
귀령은 유광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흥어시(興於詩), 입어예(立於禮), 성어음(成於音).”
유광은 살아남은 적림 무인 세 명을 향해 싱긋 웃었다.
“형!”
시로써 마음을 흥겹게, 예로써 행동을 바로 세우고, 음악으
로 마음을 완성시킨다.
유광은 승부를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없을 수도 있
다. 아니면 가슴을 베인 상처가 뜻밖으로 깊을 수도 있다. 부
상당한 몸으로 추운단주와 맞서 싸우기는 무리인지 모른다.
두 명 다 남해삼십육검 중 일 인.
적림 무인 세 명은 한참동안 유광을 바라보다가 검집을 끌
러냈다. 그리고 검으로 두들기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재시관건부요재유예부결(現在才是關鍵不要再猶豫不決)
”
바로 지금이야. 다시는 머뭇거리지 마.
“양광지하파심창개(陽光之下把心敞開)”
햇살 아래 마음을 활짝 열고
한민은 한 발짝 물러섰다.
유광이 비록 좋은 상태가 아니지만 그는 싸우려고 한다. 이
럴 때 위험하더라도 싸우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그의 검을 욕
되게 하지 않는 길이다.
‘유질…… 당신은 좋은 사람들을 뒀어.’
한민은 한가를 생각했다.
누가 이들과 견줄만한 사람이 있을까.
한가에도 적림에 필적할 만한 무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득검 했다고 인정해 줄만한 무인들이 꽤나 있다. 허나, 이들
이 보여주는 무공은 이미 무공이상이다. 이들은 몸의 무공이
아닌 정신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
전해오는 말이 있다. 유가의 검에 살기가 깃들이면 해남제
일의 검이 될 것이라고.
한민은 유가의 검을 인정했다.
“대구호흡자유자재(大口呼吸自由自在)”
크고 자유롭게 숨을 쉬어라.
“반정최후총시잉하아자기(反正最後總是剩下我自己)”
어쨌든 마지막으로 남는 사람은 늘 나였으니
유광이 심호흡을 크게 한 다음 검을 들었다.
귀령이 조금씩 조금씩 다가선다. 유광도 조금씩 다가섰다.
이윽고 두 사람은 일족일검(一足一劍)의 거리에 들어섰다.
한 걸음만 다가서면 공격할 수 있고, 한 걸음만 물러서면
공격할 수 없는 거리.
“급아감각(給我感覺)”
느끼게 해줘.
“급아급아(給我給我) 진적감각(眞的感覺)”
내가 정말 느끼게 해줘
노래 소리는 점점 고조되었다.
“타앗!”
“하앗!”
유광과 귀령이 동시에 움직였다. 유광은 비천검법 중 섬
(閃)을 펼쳐 일검에 아홉가닥의 검기를 쏘아냈고, 귀령은 밑
에서 위로 쳐올리는 간단한 일식을 펼쳤다.
“이런……”
한민은 탄식을 토해냈다.
귀령이 전개한 검은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법이다. 피할
수도 없다. 피하게 되면 검의 흐름이 끊기게 되고, 그 때야
말로 귀령의 검이 몸을 베어버릴 것이다.
“허억!”
“크으……!”
답답한 신음소리가 울렸다.
“헛!”
노래를 부르던 적림 무인들이 노랫가락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그래도 유광이 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하
다.
정작 검을 맞대고 유광과 귀령이 동시에 풀썩 무너져 버리
자 얼굴색이 샛노랗게 변해버렸다.
세 무인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일시에 달려갔다.
“노…… 래를…… 계속……”
유언치고는 너무 싱거운 유언인가.
유광은 그 말을 끝으로 숨을 멈춰버렸다. 왼쪽 갈비뼈를 파
고들어 몸의 중앙까지 치올린 검은 단 한 순간의 숨도 용납하
지 않았다.
한참동안 망연자실하던 무인 중 한 명이 검집을 앞으로 끌
어놓으며 검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두 명도 같이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양아통쾌적곡출성음(讓我痛快的哭出聲音).”
시원하게 소리내어 울게 해 줘.
“부거상검도결료과(不去想劍都結了果)”
검에 모든 끝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
“사취사(死就死) 수능조지아문개회(誰能阻止我們開懷)”
죽을 땐 죽자. 누가 우리 활짝 열린 마음을 막을 수 있겠어
노랫가락은 구슬프게 초원을 흘러갔다.
한민은 세 무인이 시신을 모두 묻을 때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었다.
세 무인은 추운단과 적림 무인을 구분해서 묻었다.
아마 장문인이 지켜보지 않았다면 추운단원들의 시신은 들
개 밥이 되도록 내버려두었을 게다.
마침내 둥그런 봉분 두 개가 만들어지자, 세 무인은 멀찌감
치서 포권지례를 취해보였다.
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림 무인들에게 바란 것은 비파원을 죽이는 것뿐이다. 그
것도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비파원들은 해남파의 무공은 속
속들이 알고 있느니 만치,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많은 출
혈이 불가피하리라.
그것만해도 유가주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그런데 추운단까지……
적림 무인들이 죽고, 유광과 유화가 죽었다. 유소청은 적엽
명에게로 가버렸다.
유가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다.
어제의 영화를 다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족히 십 년의 세
월이 소모되리라.
그래도 낫다. 한가에 비한다면……
적림 무인들이 떠난 다음에도 한민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임자 잃은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지만 거들떠보
지도 않았다.
신발과 버선을 벗고 맨발로 풀을 디뎠다.
상쾌했다.
그러나 이곳은 싫다.
피냄새가 아직도 풍기고 있는 듯 하다.
그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오십보(五十步) 백보(百步)가 아니던가.
한민은 멀리서 다가오는 인형을 보았다.
그는 혼자였다.
검을 어깨 위에 걸치고 휘적휘적 걷는 모습이 눈에 익다.
한민은 그를 향해 걸었다.
“너는 차기 장문인으로 확실해졌거늘…… 뭐가 부족했느
냐?”
“나는 장문인이 되지 못합니다. 이대로 가서는.”
건곤검 한혁은 싱그럽게 웃으며 커다란 보따리를 한민의 발
밑에 던졌다.
먼저 떠났던 적림 무인들의 머리가 푸른 풀밭에 뒹굴었다.
“이들까지 죽였는가.”
“뿌리를 남겨두면 잡초는 자랍니다.”
“허허……!”
건곤검 한혁의 나이는 사십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그만한 나이에 내린 결정이라면 확고한 자신이 있으리라.
“혹시……? 한광도……?”
“맞습니다. 제가 아니면 누가 전수해 주겠습니까.”
“그렇겠지. 그게 궁금했네. 하파가 탈혼검을 익혔다면 벌써
비무를 청해왔을 게고. 진득하게 눌러 참으면서 완벽한 기회
를 엿볼 사람이라면, 너 밖에 떠오르는 사람도 없더군.”
“그래서 비파를 죽이는데 유가 무인들을 동원했습니까?”
“……”
“잘못했습니다. 유가는 우리 무군이 유일하게 침투하지 못
한 가문이죠. 늘 신경이 쓰였습니다. 적림무인들의 무공이 얼
마나 강한지. 모험을 해봤는데…… 걸려들더군요.”
“무군이라……”
“전쟁 때문에 몸살을 앓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은
늘 피를 그리워하죠. 모으기가 힘들었지만 막상 모아놓고 보
니 쓸모가 많군요. 워낙 성난 늑대들이라. 제 작품이 어떻
게…… 마음에 드십니까?”
“그렇군. 나는 하파인줄 알았지.”
“하파는 지혜가 뛰어났죠. 자고로 머리가 뛰어난 자 치고
일대를 풍미한 자는 없습니다.”
“허허허! 그럼 자네에게는 무엇이 있는가?”
“행동할 줄 압니다. 결단을 내릴 수도 있고.”
“결단을 내린 겐가?”
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빠르군.”
“제 장점 중에 하나죠.”
장문인의 머릿속에 적엽명이 스쳐갔다.
건곤검 한혁은 늑대다. 그러나 적엽명은 호랑이다. 늑대가
거느린 양떼 속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는 적엽명.
“허허허! 자네는 결단을 잘못 내렸군.”
“두고봐야 아는 일이죠.”
“무엇이 부족해서……”
“둑을 쌓아서 물길을 막는다면 얼마나 버틸까요. 물길을 터
줘야 합니다. 해남파는 근 천 년 간이나 물길을 막아왔습니
다.”
“대륙진출인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해남파를 대륙 제일문파로 키우겠습니
다.”
“허허허! 그럼 내가 적림을 잘못 끌어들인 거로군.”
“사람이 죽은 다음에 후회하는 것은 늦는 법이죠. 후후후!
적림은 반격할 수 있는 유일한 보루였습니다. 적림을 죽이는
데 추운단과 비파 정도라면…… 손해가 아니죠.”
“그렇군.”
“장문인은 제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하파. 하
파의 머리가 없었다면 한가 사람들을 휘어잡을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도 소리소문 없이 대륙으로 건너가 잠적
하는 것이 고작이었을 겁니다.”
한혁은 웃었다.
한 여인을 사랑한 죄는 엄청난 결과를 불러왔다.
오늘의 이 피바람은 모두 자신 때문에 일어났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탈혼검은 십검 입전수수에 이르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허허! 그런 검을 무엇 때문에 익혔나?”
“하하하! 누가 입전수수에 이르렀습니까? 그런 사람이 무림
사에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허황된 환상을 쫓느니 강한 검을
갖겠습니다.”
“네가…… 이 정도밖에 안됐었군.”
한민은 검을 치켜들었다.
“어디 탈혼검이 어떤지 견식 해볼까?”
“견식 시켜 드리죠. 감상할 만한 시간이 있을지는 모르지
만.”
한혁은 오른 손을 약간 뒤로 밀쳤다. 그러지 검집만 뒤로
빠져나가고 어깨 위에는 시퍼런 검광을 토해내는 건곤검만 남
았다.
한민은 대념검법(大念劍法)의 기수식(起手式)을 취했다.
탈혼검은 사검(邪劍)이다. 사검을 상대하는데는 부처님 같
은 정심(定心)이 필요하다. 천둥번개가 옆에 떨어져도 눈썹
하나 까닭하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을 지녀야 한다.
대념검법이다.
대념검법은 인간이 지닌 정신을 하나로 집약시킨다. 손과
발에서 터져 나오는 기(技)가 아니라 정신으로 정신을 베라고
말한다. 마음으로 적을 베고 검이 뒤따라야 대념검법을 익혔
다고 할 수 있다.
“마하라 사바하 바마사간타 이사시체다 가릿나이나야 사바
하……”
한혁은 너무 나직해서 자세히 귀를 기울여야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제일 먼저 눈동자가 변했다.
흑백이 분명하던 눈동자였는데 검은 동공이 사라지고 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