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69
위만 남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한민은 쇠망치로 이마를 두들겨 맞은 것과 같은 충격을 느
꼈다.
눈앞에 번갯불이 번쩍 하고 빛나더니 세상천지가 새까맣게
변해버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초원도, 푸른
풀잎들도, 건곤검 한혁의 모습도.
‘위험!’
한민은 위험에 빠진 자신을 자각했다.
자각이란 정신이 움직일 때만 느끼게 된다.
텅 빈 동공 같았던 머릿속이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한민
은 다시 밝은 광명(光明)을 찾았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도, 푸른 초원도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헌데…… 한혁이 보이지 않는다.
파앗!
한민은 한혁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신형을 옆
으로 움직였다. 단숨에 일 장이나 물러서는 쾌속한 신법이었
다. 그러나……
한혁은 백 년이래 한 번 나올까 말까한 기재라는 말이 옳았
다.
한민이 움직이는 순간, 어느 새 옆에까지 지쳐왔던 검은 꼬
리를 물고 따라왔다. 그는 한 번 잡은 선기(先機)를 결코 잃
지 않았다.
쉬익! 쉬익! 창! 창! 창……!
검과 검이 부딪치며 작은 불똥을 일으켰다.
한민은 연속해서 다섯 번이나 검을 휘둘러 위기를 모면하려
고 했다. 그러나 역부족이다. 처음 한혁을 놓친 것이 실수다.
탈혼검인 줄 알았으면서도.
‘이건 최면(催眠)이야. 강력한 최면…… 이지(理智)를 망실
시킨 다음 검을 쳐내는…… 이게 탈혼검……’
한민은 다시 한 번 탈혼검과 부딪친다면 말려들지 않을 자
신이 있었다.
다시 한 번……
그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머리에서부터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화끈했다. 건곤검 한
혁이 가장 능통하게 구사한다는 건곤검법이다. 하늘과 땅을
단숨에 갈라버릴 만큼 위력이 강하다는 중검(重劍).
“후후! 정도(正道)를 벗어난 자는 장문인이라 할지라도 용
서하지 않는다. 장문인, 좋은 말이오. 하지만 그 말 때문에
나는 대륙으로 건너갈 뻔했소. 장문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탈
혼검을 익힌 것이 발각되면 해남문도 전체의 공격을 받게 되
니까. 설마 나를 그렇게 높이 평가한 것은 아니겠지?”
한민은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
머리뼈가 부서지는 감촉을 느꼈으니 틀림없이 즉사다. 하지
만 한혁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듯이 중얼거렸다.
“장문인이 또 하나 실수한 것이라면…… 우리 한가는 이백
년 동안이나 장문인 직을 이어왔소. 그러면서도 해남도를 열
두 조각으로 나눠 갖고 있으니.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지 않
소? 세상에 이런 문파가 어디 있단 말이오. 장문인이 하늘보
고 땅이라 하면 그대로 믿어야 하거늘. 하하하! 내가 그런 문
파를 일구어 내리다.”
한혁은 피묻은 검을 어깨 위에 올려 놓고 걷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3
바다가 거센 숨을 토해낸다. 평소에는 갈매기의 날갯짓처럼
너울거리던 물결이 힘찬 어깨춤처럼 오르내린다.
철럭거리며 바위를 두들기는 파도.
적엽명은 깎아지른 암벽 위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장마에 휘말린 바다는 회색 빛이다.
하늘도 바다도 온통 암울한 빛으로 가득 차있다. ‘바다’하
면 떠오르는 검푸른 물결은 어디에서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다.
“해남도를 와본 적이 있지. 아주 어렸을 적이네. 스승님을
따라 천하에 널린 약초며, 풍토며…… 그 때는 모든 게 신기
했었네. 휴우! 열두 살인가, 세 살인가? 이 바다를 건너면서
참 넓다고 생각했지. 이런 바다물결을 옆에 두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적객으로 유배되어 와서 생존하는 사람은 어의로 있었던 황
역 혼자 뿐이다. 적엽명이 해남도에 들어올 때만 해도 네 명
이나 살아있었건만 잠시 신경을 못쓴 사이에 세 명이 운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보니 황역 옆에서 시뻘건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어제 저녁에 죽은 노인.
한참 때는 도찰원(都察院) 우부도어사(右副都御使)라는 막
중한 직첵에 있었지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해남도에까지
유배된 죄인.
그는 저 세상에 가서 조상들을 대할 면목이 없다며 화장(火
葬) 해주기를 간청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을 태우는 장작 불빛, 세상을 촉촉이 적시는 보슬
비.
세상은 이렇게 모순덩어리인가 보다.
“바다는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바다지만…… 허허! 답답
해 보이네 그려. 그냥 늙은이의 푸념이라고 생각해 주게. 바
다에 갇혀 사는 늙은이의 푸념. 허허허!”
“적사장군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응? 허허! 알지. 그 사람도 내가 묻어줬는걸. 대륙에서나
섬바닥에서나 천직은 버리지 못하는 모양일세. 어딜 가나 시
신을 만지고 병자를 돌보고……”
“어디다 모셨는지?”
“내가 안내해 줌세.”
“아닙니다. 극히 위험한 일. 말로만 일러주십시오.”
“허허! 늙은이가 살면 얼마나 살겠다고…… 조금만 기다리
게. 이 친구, 뼛가루나 바다에 뿌려주고……”
황역 노인의 눈에는 이슬 한 방울 맺히지 않았다.
자신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이제 유배지도 텅 비었으니
혼자서 쓸쓸히 시신을 처리했을 게다.
지금 노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노인은 삶에 대한 애착을 잃어버렸다. 적객으로 와서 일이
년 동안은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성은이 내리기를 기원했겠지
만, 지금은 체념을 넘고 절망을 넘어 무념의 경지에 이르러
있으리라.
만약 황상이 다시 부른다면 달려갈까?
아니다. 노인은 이제 어의가 아니다. 노인은 적객 생활에
길들여졌고, 싫다 싫다 하면서도 조그만 초막을 벗어나지 못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적엽명은 노인과 같이 갈 수 없다.
자신마저 목숨을 내걸고 찾아가는 길이지 않은가. 노인이
같이 간다면 빠르면 오늘 저녁이라도 싸늘한 시신으로 변할
지 모른다.
죽는 것이 오히려 편해 보이는 노인이지만 조금 편하자고
노인을 죽음으로 이끌 수는 없다.
적엽명은 기다렸다. 시신이 다 탈 때까지.
노인이 지금 말해준다고 해도 그는 무정하게 등을 돌리지는
않았으리라. 도찰원 우부도어사였다는 노인은 그에게 글을 가
르쳐 주었다. 노인은 자신이 지녔던 학문을 온갖 성의를 다해
쏟아 부었다.
사부…… 사부다. 적객으로 유배되어 온 죄인들은 모두 사
부다.
불꽃 속에 드러누은 검은 물체.
살이 타는 냄새는 지독히 노리다.
개를 잡을 때도 노린내가 심하게 풍기지만 사람을 화장할
때는 그보다 훨씬 지독한 노린내가 풍긴다.
거의 두 시진 동안이나 타오르던 불길이 사그라졌다.
노인은 뼈마디를 찾아 절구에 넣고 곱게 빻았다. 그리고 바
다에 한 줌씩 털어 넣었다.
노인의 고집은 정말 말릴 수가 없다.
그토록 위험하다고 말했는데도 노인은 한사코 앞장을 섰다.
적엽명은 적객으로 유배된 사람들의 심정을 알지 못했다.
사람은 사람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외롭기 때문이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고적감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없다.
노인은 적소로 돌아가기 싫은 것이다. 아무도 없는 허전한
적소로.
적사장군의 무덤은 과히 멀지 않았다.
바다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언덕에 돌멩이 몇 개
얹어놓은 도톰한 돌무더기가 일대를 풍미했던 적사장군의 영
원한 안식처다.
황역 노인은 준비해 온 향을 살랐다.
절은 하지 않았다. 노인에게는 죽은 자나 산 자나 모두 하
나였다. 아마 술이 있었다면 향 대신 술을 권했을 터였다.
적엽명은 돌덩이들을 하나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응? 자네 지금 뭐하는 겐가?”
“확인할 게 있습니다.”
“이런……!”
황역 노인은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하면서 앞
을 가로막았다.
“망자(亡者)의 원혼까지 괴롭힐 심산인가!”
“저에게는 모두 사부님이십니다. 적사 장군께는 무공을 배
웠고, 오늘의 제가 있게끔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런 은
덕을 받은 제가 사부님의 묘를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황역 노인은 뭔가 이상한 기미를 알아챈 듯 조금 전처럼 완
강하게 만류하지는 않았다.
“그럼……?”
“시신을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제게는 중요한 일입니다.”
적엽명은 황역 노인에게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었다.
“꼭 봐야 하는가?”
“……”
“좋네. 보세나. 어차피 죽은 인간인데……”
황역노인은 손수 돌멩이를 드러냈다.
돌멩이를 다 드러내고 흙을 파내고……
유해는 곧 드러났다.
적사장군을 묻을 적에는 얼기설기 만들기는 했지만 목관(木
棺)을 사용했다고 들었는데, 관은 다 삭아서 없어졌다.
반은 썩고, 반은 썩지 않은 시신.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이지만 생전에 보여주었던 위엄
이 그대로 나타나는 듯 했다.
“장군께서 돌아가실 때 별다른 사항은 없었는지요? 예를 들
어 피살 흔적이라거나……”
“장군이 피살됐다는 말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허허허! 그런 일이라면 지금이라도 확인할 수 있지.”
황역노인은 민첩하게 손을 놀렸다.
먼저 썩은 진물이 묻어있는 옷가지를 드러냈다. 흙과 벌레
와 살점이 썩은 진물이 묻어있는 옷가지를 드러내면서도 황역
노인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병자를 돌보다보면 시신보다
더 흉한 상처를 많이 보게 된다. 의원도 비위가 강해야 하는
모양이다.
옷가지를 다 드러낸 적사장군의 몰골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웬만큼 비위가 강한 사람이라도 뱃속의 것을 게워
버릴 만큼 구역질이 치밀었다.
황역 노인은 사람이 아닌 듯 냉정한 표정으로 유해의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살펴나갔다.
그의 시선이 허리 부근에 머물렀을 때였다.
노인은 눈빛을 빛내더니 뼛조각 몇 개를 집어들었다.
“자네 말이 맞구먼. 장군은 피살당했어.”
적엽명은 노인이 내민 뼈를 받아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뼈가 흙의 무게에 짓눌리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
고 서서히 부러진다. 생전에 타격을 받아 부서진 뼈는 일시지
간에 부서져 나가기 때문에 부러지는 모양이나 조각난 흔적이
다르다.
황역 노인이 내민 뼛조각은 단번에 부서진 듯 부러진 흔적
이 둔탁하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죽기 직전에 부서진 뼛조
각이 분명하다.
“허허허! 이 친구…… 세상 살기 싫어서 일찍 떠난 줄 알았
더니……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있겠구먼.”
황역 노인은 손에 묻은 진물을 옷에 쓱 문질러 닦으며 말했
다.
적엽명은 조금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적사장군이 피살당했을 가능성은 농후했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하고자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아니다. 그는 다른 것을 기
대했다.
등하불명(燈下不明).
자신이 수귀 탄에게 해준 말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비밀리에 활동하기 위해서는 막
대한 은자가 필요했으리라.
그들은 종적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노름꾼이든, 아니면 농
장에서 일하고 있는 일꾼이든 현재 자신이 있는 곳에서 조금
도 의심을 받지 않아야 한다.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움직이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
까.
돈이다. 역시 돈 밖에 없다.
그들은 모험을 했다. 뇌주반도로 나가 황상에게 진상하는
공물을 강탈했다. 대담한 수법이지만 해남도에 들어온 무장을
암살한 것에 비하면 그리 큰 일도 아니다.
그들은 관부조차도 눈 아래 두고 있다.
해남도라는 특수한 지형이 과감한 행동을 유발시켰으리라.
나라에서는 웬만한 일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섬덩이
에 불과하니까.
그러던 것이 지난 이삼 년간은 조용했다.
황상에게 올라가는 공물이 강탈당하지 않았다.
적사 장군이 죽고, 관충장군이 무장들을 파견하는 시점이
다. 그리고 그 때, 아버지가 울화병으로 돌아가셨고, 막대한
은자를 넣어두었던 은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적엽명은 적사장군의 무덤을 생각했다. 유배된 장군의 무덤
이야말로 은궤를 숨겨놓기에는 적당한 장소가 아닌가.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조만
간 기습을 가해와야 한다.
자신들의 모든 활동자금이랄 수 있는 은궤가 발각된다면 다
른 원인을 다 제쳐놓고라도 죽여야 한다. 그래서 적엽명은 죽
음을 생각했다. 그래서 황역 노인을 데려오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무덤을 파보니 적사장군의 시신밖에는 아무 것
도 없지 않은가.
죽음의 위험에서는 벗어났지만 정체 모를 자들을 압박할 수
있는 단서는 끊긴 셈이다.
“도로 모셔야겠어요.”
“그러지. 불쌍한 친구 같으니. 그래,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보니 반가웠네. 자네도 그렇지? 자네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았으니 이제 이승에 남긴 원혼일랑 잊어버리고 푹 쉬게. 구
천에서 떠돌지 말고 천당이든 지옥이든 빨랑 가.”
황역 노인은 무덤을 열은 김에 적사 장군의 역겨운 시신을
닦아주었다.
적엽명은 말없이 적사장군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죽으면 모두 한 줌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인생인 것을.
그러다 문득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송판(松板)!
적사 장군을 받치고 있는 송판이 거의 썩지 않았다. 아주
질이 좋은 송판을 사용했다는 말이 된다. 황역 노인은 말했
다. 적사장군의 몸이 커서 널빤지를 구하기 힘들었다고. 그래
서 얼기설기 만든 관에 넣었다고.
“잠깐만요!”
적엽명은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시신을 들어올리자 예상대로 은궤가 나타났다.
어렸을 적부터 많이 보았던 은궤다. 아버지는 말을 팔아 받
은 은덩이는 모두 이 은궤에 넣어두었다.
은궤는 철(鐵)로 만들어졌다. 은을 넣어두는 궤라고 해서
은궤라고 부를 것이지 은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은궤만 장정 두어 명이 맞들어야 들 수 있다는 무게다. 거
기에 은을 가득 넣으면 대여섯 명이 달려들어도 끙끙거릴 정
도다.
이게 이 곳에 있다니.
역시 생각이 맞았다. 관충장군이 제일 먼저 보낸 시종은 적
사장군의 묘에 분향이나 하려고 왔었다. 그런데 죽었다. 그것
이 시작……
‘모든 일은 시작이 있습니다. 저 쪽은 어디가 시작인지 모
르지만 우리는 적사장군의 죽음이 시작입니다. 적사장군의 묘
는…… 반드시 열어봐야 합니다.’
한백이 옳았다.
아버지의 죽음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버
지 역시 적사장군처럼 죽임을 당했다. 돈 때문에.
적엽명은 위급함을 느꼈다.
생각이 들어맞은 이상 반드시 적이 공격해 오리라.
역시…… 황역 노인과 함께 온 것이 잘못이다.
막다른 골목으로 쫓긴 쥐는 고양이를 문다. 그것만이 살 수
있는 방도이기 때문이다.
적엽명은 황역 노인을 들춰 업고 신법을 전개하기 시작했
다.
귓가로 바람이 스쳐간다.
“이보게, 아직 적사를 묻어주지도……”
황역노인은 무덤을 열어놓고 온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
지만 무덤이나 단장하고 있다가는 죽기 십상이다.
적엽명은 달리고 또 달렸다.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한다. 어디까지? 그건 모른다. 단
지 이 자리만은, 바다가 보이는 이 해안만은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쉬익!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화살!
적엽명은 달리는 속도를 늦추기 않고 몸을 틀어 피했다. 직
감이다. 천강십이검으로 알고 있던 전검을 익히면서 몸에 배
인 감각이다.
피잉! 타악!
화살은 오른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 적송(赤松)에 틀어박혔
다.
‘대단한 강궁이다. 한백이 와선형으로 깎인 화살에 당했지.
?ㅣ사 문공일 거라고 하더만……’
적엽명이 생각해도 소름이 오싹 끼치도록 힘이 살아있는 화
살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은 일시사 문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역시 황에 일가견이 있기 때문에 화살이 날아오는 속도만
보고서도 상대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십 장이다. 오십 장에서 날린 화살…… 일시사 문공이라
면 피하지 못한다.’
쉬익! 쉬익!
이번에는 연달아 쏘았는지 몇 대의 화살소리가 들려왔다.
문공정도 되는 궁수라면 상대가 어디로 피할지도 예상했으
리라. 전후좌우 상하, 피할만한 방위에는 모두 화살이 날아들
고 있으리라.
적엽명은 땅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쉬익!
화살 한 대가 등을 훑고 지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혼자 몸이라면 한결 수월할 텐데, 황역 노인을 등에 업고
있으니 운신하기가 더욱 어렵다.
문공에게는 목표가 그만큼 큰 것이고, 적엽명에게는 그만큼
움직이는 폭이 둔해진 셈이다.
적엽명은 해안을 향해 치달렸다.
유배지와 가까운 해안.
그는 이 곳 지리를 잘 안다.
적사 장군과 함께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 아닌가. 당시에는
꿈도 없고, 희망도 없는 상태에서 단지 무공이 좋아 부지런히
익혔다. 아니다. 그것보다는 사람의 정에 굶주렸다는 편이 정
확하다. 그는 자라면서 적객들만큼 다정하게 정을 쏟아주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사귀와 혈배를 든 것도 정에 굶주렸기
때문이지 않은가.
“이, 이 쪽은 절벽이야!”
황역노인이 다급하게 외쳤다.
쉬익!
다시 화살이 날아온다.
쫑긋하게 세워진 귀는 화살이 날아오는 속도를 잡아냈다.
문공은 약간의 시간을 두고 시위를 당기고 있다. 적엽명이
어떻게 피하나 본 다음 결정적인 화살을 날릴 생각이다. 자신
도 그랬다. 여우처럼 약삭빠르게 피하는 적장을 만나면 일단
그가 몸을 움직이도록 유도해 낸 다음에 결정적인 화살을 날
렸다.
파앗!
적엽명은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이럴 경우 대부분의 궁수들은 허공에 대고 확살을 쏘아댄
다.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는 번개와 같아서 공중에서 충분히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조금 요령있는 궁수라면 그가 착지할 만한 곳에 화살
을 날린다. 떨어져 내릴 시간을 정확히 계산한 다음에.
적엽명은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땅에 착지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땅바닥
으로 뒹굴었다. 그 순간,
파악……!
화살 한 대가 바로 그가 내려섰던 자리 조금 앞에 박혀들었
다.
적엽명은 망설일 틈이 없었다.
땅에서 일어서기 무섭게 곧장 신법을 전개해 바다로 뛰어내
렸다.
“아!”
바다에서 떨어져 내리던 적엽명은 암울한 눈으로 무섭게 출
렁이는 물결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예측했다는 듯 비
조선(飛鳥船:쾌속선)이 떠있었다.
풍덩!
바다에 빠진 적엽명은 떨어지는 속도에 밀려 깊이 빠져들었
다. 마치 바다 밑에 귀신이 있어 발목을 끌어당기는 기분이었
다.
이런 경우에는 바다에 들기 전에 아무리 깊은 호흡을 해도
숨이 곧 막혀온다.
바다 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적엽명이 발이 바닥에 닿는 것을 느끼자 힘차게 차고 올랐
다.
한 손은 등 뒤, 황역 노인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두 발과 한
손만으로 헤엄을 쳐야 했다. 더군다나 그는 위로 솟구치지 않
았다. 바다 위로 머리를 내밀기만 하면, 화살이 창이 기다렸
다는 듯 날아들 텐데. 그것은 그래도 낫다. 수전(水戰)에서
물에 빠진 적장을 사로잡을 경우 수병(水兵)들은 그물을 사용
한다.
비조선을 타고 있는 자들이 전쟁경험이 있는 자들이라면 분
명히 그물을 덮어씌워 올 게다.
적엽명은 숨이 막혀 가슴이 터지는 듯 했다.
황역 노인이 본능적으로 목을 힘껏 움켜잡고 있기 때문에
특히 그랬다.
적엽명은 자신이 뛰어내린 절벽까지 유영해 가서 머리를 내
밀었다.
“저기닷!”
피융!
고함소리와 화살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고함은 비조선에서 터졌으되, 화살은 절벽 위에서 날아왔
다.
어느 새 달려온 문공이 절벽 위에서 화살을 쏜 것이다.
적엽명은 황급히 물 속으로 들어갔다.
부우욱……!
바다 속으로 들어온 화살이 눈앞으로 지나갔다. 조금만 더
정확했다면 정수리에 꽂혔을 화살. 오십 장을 치달려온 문공
이 숨을 고르기 전에 떠올랐던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일까.
다시 유영했다.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이라 한결 수월했다.
황역 노인도 극히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지만 숨을 들이쉴
만큼 들이쉬었는지 전처럼 목을 꽉 움켜 잡아오지는 않았다.
비조선이 다가오는 속도는 적엽명이 유영하는 속도보다 훨
씬 빨랐다. 십여 척에 이르는 비조선은 적엽명이 얼굴을 드러
낸 곳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좁혀왔다.
‘으음……!’
비조선 밑으로 해서 포위망을 빠져나가려던 적엽명은 난감
해지고 말았다.
역시 그물이다.
비조선 십여 척은 바다 밑까지 닿는 그물을 끌면서 다가왔
다.
숨도 다시 막혀왔다.
그러나 떠오를 수도, 계속 유영해 나갈 수도 없는 입장.
비조선을 공격할 수도 없다. 비조선 한 척쯤이야 탈취할 수
있지만 화살의 지원을 받는 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가망이
거의 없다.
적엽명은 마음을 굳히고 바닥까지 깊이 잠수했다.
눈은 다가오는 그물에서 떼지 않았다.
그물을 검으로 잘라버릴까? 그럴 수도 있다. 허나 그렇게
되면 비조선에 타고 있는 자들은 당장 손맛을 느껴버린다. 포
위망은 다시 펼쳐질 것이고……
그물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적엽명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그물이 등위를 훑고 지나
가지를 바랬다.
그물에 휘감기지 않도록 버터야 한다.
비조선 열 척이 끌어당기는 힘을 이겨내야 한다.
그는 황역 노인을 등에서 잡아 당겨 옆에 뉘였다.
순간 그는 보았다. 황역 노인의 벌어진 입을. 위로 치켜 뜨
고 있는 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