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75
했다.
그들은 죽음을 보았다. 그들은 누구를 죽여보지 못했고, 죽
임만 당해왔다.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시신이 되어 차디차게
굳어 가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죽음이 무엇인
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두려운 게다.
반면에 해남 무인들은 죽여보기는 했어도 죽음을 당하는 경
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번에 대혈겁이 있었지만 비가보에 있
는 무인들은 장문인의 안배에 따라 용케도 사지를 빠져나온
사람들이다.
혈겁의 현장을 구경하지 못한 무인들.
그들은 평소대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운공조식(運功調息)에
몰두하고 있다.
누가 좋고 누가 나쁜 것인가.
“내 부인이 되어줄래?”
“싫어.”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난 아무 것도 못하는 여자야. 난…… 여자가 아냐.”
“사랑하니?”
“……”
“말해봐. 날 사랑해?”
“……”
“하하! 그럼 됐지, 뭐가 문제야.”
“난 창기고……”
“난 장군이라?”
“……”
“그만큼 나이를 먹고 세상을 알았으면서도 바보구나.”
“사실이잖아. 명문규수(名門閨秀)들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
는데.”
“마음이 끌리느냐가 문제지.”
“나하고 살면……”
“행복해질 수 있어. 자신을 가져.”
취채는 하늘을 나를 듯 기뻤다.
자신에게 이런 행운이 돌아오다니. 이런 사내를 만나게 해
주다니. 나이가 조금 많으면 어때? 사랑하는걸.
“안아 줘.”
화문은 취채를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
힘껏 안으면 으스러질 것 같아서.
* * *
구월 사일.
무인들은 날카롭게 갈아진 병기를 또 들여다본다.
실없이 농담도 하고 웃고 떠들기도 하지만 마음 속으로 활
짝 웃지는 못하고 있다.
단 나흘 동안, 그것도 잠깐 연습해본 진형(陣形)이 얼마만
한 위력을 나타낼까. 당부에 당부를 거듭했지만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이들 중에는 무공을 익힌 자도 있고, 생전에 검
이라고는 처음 잡아보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과 싸우러 가는 것이 정말 잘 하는 일일까.
오늘은 출발해야 하는 날인데.
각 가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비전검공을 꺼내놓았다. 자
신을 죽더라도 가문의 검공은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가의 적노검법, 일지검법, 환우검법, 건곤검법, 대념검
법. 석가의 무음검법, 암암검법. 전가의 일참검법, 일망검법,
일혼검법, 쇄각대팔검. 범가의 사검법, 해광검법, 해랑검법,
단각검법, 대검법. 유가의 비천검법. 비가의 일장검법. 단가
의 용봉쌍검법. 강가의 잔월검법. 조가의 자전야검. 하가의
이십사로음린검법, 투천환일. 박가의 대력검법. 악가의 낙성
검법
모두 이십사검이다.
살아남은 사람은 이십사검보와 서른 여섯 자루의 명검을 회
수해서 해남파를 중흥시켜야 한다.
한백은 해남도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소상하게 기록했다.
기사청 장군…… 해남도에서 죽은 기사청 장군의 참장……
그리고 해남도에 무장을 들여보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
던 소장……
싸움이 벌어지는 내일, 무군의 눈이 무뎌진 틈을 타서 창기
한 명이 해남도를 빠져나가리라. 나머지는 관충장군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적엽명은 허름한 마의를 걸치고, 말똥냄새를 푹푹 풍기면서
다가온 송지를 보고 활짝 웃었다.
“용서한 건 아니에요. 싸우는 모습을 보겠어요. 그리고 난
다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어요.”
“궁바의 안식처에…… 가겠다는 말이오?”
“저희는 저희끼리 따로 갈 거예요. 하지만 제가 지켜보고
있다는 점…… 잊지 말기 바래요.”
“석두형이 투혼을 불태울 때보다 더…… 아니, 꼭 석두형만
큼만 싸우겠소.”
“보면 알겠죠.”
송지의 음성은 여전히 싸늘했다.
“부탁이 있소.”
“……?”
“황담색마를 부탁하겠소. 황함사귀의 영혼이 깃든 말들이
오.”
송지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인
후, 여인들이 있는 곳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그녀들은 유소청이 지키고 있으니 괜찮을 게다. 그것이 유
소청으로 하여금 전장에 끼여들지 못하게 하는 방편이니.
“이 놈아, 이제 너도 제발 늑대다워 봐라. 어디 가서 구박
당하지 말고.”
적엽명은 늑대의 목줄을 풀어주었다.
그렇다고 해도 놈이 갈 곳은 없으리라. 분명히 민가를 습격
하여 닭이나 잡아먹다가 맞아죽던지 하겠지. 하지만 유소청에
게 자신의 기억을 되새기게 할만한 것은 남겨두고 싶지 않다.
끄릉……!
염왕은 가기 싫다는 듯 발을 핥았다.
“바보 같은 놈!”
적엽명은 냉정하게 발길로 걷어찼다.
염왕은 장난인 줄 알고 도망쳤다가는 돌아오고, 발길질을
하면 또 도망치고 하는 일을 반복했다. 하지만 정말로 쫓아내
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구슬프게 울어 제친 다음 제 갈 길
로 걸어갔다. 연신 뒤돌아 보면서.
“잊지 마. 만약 한혁에게 죽는다면 내가 죽여버리겠어.”
전방이 한 소리를 하며 먼저 앞서 나갔다.
“대검법이라고 들어봤니?”
“……”
“너를 꺾을 검이다. 그 검으로 한광을 꺾어보지. 잘 봐둬.”
범위는 웃어주었다.
“적엽명. 너는 나를 살검(殺劍)으로 만들었어. 소검(笑劍)
이 살검으로 변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봐둬.”
석불의 얼굴은 점점 냉막해졌다. 마치 전혈처럼.
* * *
구월 오일.
하늘도 싸움을 아는 것일까?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폭우가 뚝 멎었다.
호평평야는 검은 재로 가득했다. 어른 허리춤까지 치올랐던
감자(甘蔗:사탕수수)들은 모두 불태워진 다음이었다. 하기야
전가를 장악한 한인들이 불태운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랴.
구경나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멀리 빙 둘러서서 향후 해남도를 이끌어갈 두 집단
의 싸움을 구경했다.
누가 이기기를 바랄까?
그건 모른다. 우화 탄이 적엽명에게 가세하고, 노인들이 여
족 청년들을 보내주었지만 무군은 오래 전부터 한인과 여족인
이 어울려 지내왔다.
호평평야에 나타난 무군의 수는 근 오백여 명에 달한다. 해
남십이가를 몰락시킨 소외 받은 한인들도 그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이건 싸움이 안 되는데……”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 소리는 모두의 가슴을 소리 없이 적셨다. 모두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쪽은 무군들에 비하면 꼭 절반이었다. 해남 무인들이 이
백여 명에, 탄이 데려온 우화대원 사십여 명. 그리고 노인들
이 보낸 청년들이 이백여 명. 하지만 노인들이 보낸 여족청년
들은 대부분이 무공을 접해보지 못한 청년들이었다.
한유가 다가와 말했다.
“저 놈들은 줄곧 우리만 감시했네. 하기는 저만한 인원이면
대군(大軍)인데 노방 같은 것을 팔 리가 없지. 아마 우리가
노방을 만들까봐 수단을 부린 모양일세.”
적엽명은 고개만 끄떡여주었다.
그는 무군들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누군가? 누가 저들을 이끌고 있는가?
이윽고 그는 한 인물을 찾아냈다.
“화장군!”
“존명(尊命)!”
화문은 어느 새 군인으로 돌아왔다.
“싸움이 시작되면 제일 먼저 저 자를 죽여.”
화문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이런 일은 수차에 걸쳐서 해본 일이다. 적엽명이 지적한 자
는 틀림없이 적의 머리일 것이다. 머리를 베어내면 몸뚱이를
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둥! 둥! 둥……!
정오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무군은 미리 북까지 준비해 놓고 한껏 기승을 부렸다.
무군과 소외 받은 한인들이 호평평야 중앙으로 걸어오기 시
작했다.
적엽명은 삼십육검인 유가주, 범위, 석불, 한유 그리고 옛
친구였던 여섯 명의 소가주, 삼십육검과 무공이 필적한다는
다섯 명, 수귀와 호귀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들 열일곱 명에게 여족인과 해남무인을 고루 섞어
스물 네 명 혹은 스물 다섯 명씩 나눴다.
십칠대(十七隊)를 만든 것이다.
제일 앞에는 적엽명과 화문이 섰다.
그 다음에는 대(隊)를 이끄는 대주가 섰고, 대에서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섰다. 원 안에는 여족인들
중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갔다.
각 대마다 둥그렇게 형성된 원은 크기가 비슷했다.
비가보에서 무공을 할 줄 아는 자를 고루 분배했기 때문이
다.
동그라미 열 일곱 개가 연이어져 있는 진형.
이런 진형은 병법에 없다. 난전을 처음으로 치르는 사람들,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급조한 진형이다.
적엽명이 막 움직이려고 할 때, 헐레벌떡 달려오는 사람과
느긋하게 천천히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황유귀.
그는 오자마자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서신 한 장을 아무도
보지 않게 살짝 내밀었다.
적엽명도 무인들이 볼 세라 등을 돌리고 살짝 서신을 읽었
다. 서신에 적인 이름은 물경 이십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이
적과 마주친 상황에서 등을 찔러온다면…… 소름이 오싹 끼쳤
다.
“수고했다.”
“내 자리는 어디야?”
“쉬어.”
“그럴 수 있나? 난 저놈에게 가 있을게.”
황유귀는 호귀 옆으로 갔다.
또 한 사내.
큰 키, 날카로운 눈매, 강퍅한 입술…… 전혈이다.
“청혼검!”
“말하지 마라. 싸움이 끝난 다음에 보자.”
전혈은 쳐다보지도 않고 석불과 범위 곁에 가서 섰다.
“황유귀가 왔으니 대형 하나를 늘린다. 지금부터 거명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도록. 남(南)!”
여족인 중 한 명이 어슬렁거리며 나왔다.
기골이 장대하여 무공을 할 줄 아는 쪽에 섰던 사내다.
“화(譁)!”
또 한 사내가 걸어나왔다.
눈매가 날카롭게 찢어진 것이 성질께나 있어 보였다.
“밤( )!”
또 한 사내……
불려나온 세 사내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무엇을 느꼈는가?
그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들고 냅다 무군 쪽으로 뛰기 시작했
다.
“이 놈의 새끼들! 어딜 도망가려고!”
화문이 그들의 앞길을 막아섰다. 아니 막아섰다고 느낀 순
간 그가 늘 자랑하던 월도가 허공을 갈랐다.
“크윽!”
“컥!”
무공을 익힌 사내들도 화문에게는 어림없었다. 선천적인 신
력(神力)에서 뿜어져 나오는 월도는 병장기까지 단숨에 잘라
버린다.
소란은 대형 쪽에서도 일어났다.
자신들의 신분이 발각됐다고 느낀 무군들이 일제히 검을 뽑
아들고 좌충우돌, 아무나 찌르기 시작한 것이다.
소란이 가라앉았을 때, 이십여 명의 사내가 낭자하게 피를
흘린 채 죽어있었다. 그리고 또 그만큼의 사내들이 거꾸러져
있었다.
그래도 피해가 이만하길 다행이다. 싸우는 도중에 기습을
받았다면 치명적인 피해를 당했으리라.
한가지 효과가 더 나타났다.
피를 본, 사람을 찔러본 사람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런
증상은 아주 좋다. 싸움을 하는데는.
무군과 소외된 한인들은 이미 호평평야 중간지점까지 나와
있었다.
적엽명은 손을 들었다.
대주들은 신속히 진형을 바꾸기 시작했다. 간자가 있어 한
혁에게 대형을 일러주었을 것을 대비하여 대주들에게만 알려
준 진형이었다.
맨 앞에는 대주, 그 다음은 무공이 강한 자 두 명, 그 다음
부터는 세 명씩 길게 늘어섰다. 가운데 선 자는 무공을 모르
는 자다. 그 자는 장창을 들었다.
“가자!”
드디어 싸움이 시작되었다.
적엽명이 급조한 진형은 가위와 같은 역할을 한다.
대주를 선두로 해서 일직선으로 곧게 나가면 상대는 열여덟
토막으로 나뉘게 된다.
대주 뒤에 늘어선 무인들은 각기 전면에 있는 적만 상대하
면 된다. 가운데 장창을 들고 선 자는 마음에 내키는대로 아
무나 찌르면 된다. 허나 적은 앞뒤로 공격을 받는 형상이 된
다.
“죽엇!”
“어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고함소리, 비명소리……
요란한 소리가 호평평야를 적시기 시작했다.
“너 이 새끼! 네 놈 상대는 나야.”
화문은 적엽명이 지적한 자를 놓치지 않았다.
“미련한 곰이 왔군.”
“뭐야!”
“일도일사 화문! 홍암의 선봉은 늘 네 놈이 섰지. 좋아, 월
도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볼까?”
적엽명이 지적한 자는 몽이었다.
몽이 사용하는 병기는 편사(鞭 ).
표창 끝에 둥근 고리를 만들고, 고리에 얇은 밧줄을 묶어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기형병기였다.
화문은 상대의 병기를 보고 한 사내를 떠올렸다.
“염화사(炎火 ) 몽?”
“하하하! 눈은 썩지 않았군.”
화문은 쉬운 상대가 아니란 걸 직감했다.
염화사 몽은 잔인한 사내다. 너무 잔인해서 같은 군인들도
치를 떨었다고 한다. 무공이 워낙 탁월하여 전쟁에서는 꼭 필
요한 사람. 하지만 그는 성격이 너무 자유분방해서 군율이 엄
격한 군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군을 떠났다. 그런데 해남도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타앗!”
화문은 월도를 쳐갔다.
싸움은 한 시진 동안 이어졌다.
인원은 무군 쪽이 훨씬 많았지만 몽이 화문에게 붙들려 있
는 통에 진형을 제대로 짜지 못했다. 반면에 적엽명은 눈앞의
먹이에 현혹되지 않고 끝까지 진형을 유지시켰다. 그가 검을
쳐낼 때는 적이 먼저 공격해 올 때뿐이었다.
소외 받아온 것이 한이 되어 해남십이가에 검을 들이댄 한
인들 쪽은 더욱 심각했다.
해남무인들에게 소외된 한인들은 불구대천지수인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차이가 나는 무공, 마음속에 독을 품고 전개
하는 검, 그러는 가운데도 적엽명의 일갈을 끝까지 듣는 자
세.
기적은 또 있었다.
소외 받은 무인들 중에도 가주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세부족(勢不足)에 밀려 반란을 저지하지 못했다. 허
나, 가주의 남은 혈육과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마지막으로 결
전을 하는 마당이지 않은가.
그들 중 해남파 총관으로 있던 천애해붕 막과는 삼십육검에
드는 강자다. 그가 남은 사람들을 규합하여 출전했다.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은 당연히 환영했다. 그들이 바로 자
신들의 등을 찌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해남십이가에 반기를 들었던 한인들은 불과 며칠만에 차디
찬 시신이 되어 드러누워야만 했다.
이윽고 패색이 짙어진 무군은 정신 없이 흩어졌다.
“한광……”
“오늘은 중양절이 아닌데…… 어쩔 수 없군.”
범위가 상대하겠다던 한광.
그는 적엽명 앞에 섰다.
그의 유살검에는 붉은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얼마나 많
은 사람을 죽였으면.
“내 검이 탈혼검이란 것은 알고 있지?”
“알고 있다.”
“흐흐흐!”
한광은 많이 변했다.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얼굴이
죽은 시신처럼 시퍼래졌다. 눈가는 누구에게 두들겨 맞은 것
처럼 검은 멍이 가득했다. 늘 깨끗한 백의만 입던 한광이었건
만 오늘 그가 입은 누런 옷에서는 썩는 냄새가 코를 진동시킨
다.
“소로소로 못쟈못쟈 모다야 모다야……”
한광이 주문을 외면서 검무(劍舞)를 추듯이 춤을 추기 시작
한다.
일정한 형식은 없는 듯 하다.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춤을
추고 있다. 어찌 보면…… 미친 사람이 추는 춤 같기도 하다.
한광의 고개가 빠딱 들려졌다.
흰자위만 가득한 눈.
적엽명은 머릿속이 텅 울리는 충격을 받았다. 세상이 깜깜
해지고 고요해졌다. 이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는 듯 아무 소
리도 들리지 않는다. 순간,
‘위험!’
적엽명은 환상을 보았다.
막대기를 물 속에 집어넣고 쭉 그었을 때 나타나는 물결처
럼 어둠이 물결치며 밀려난다.
손을 움직이려고 있다. 검을 쳐내야 한다. 그러나 손과 발
은, 육신은 천근추(千斤錘)를 달아놓은 듯 꼼짝도 하지 않는
다.
어쩔 수 없어진 적엽명은 반사적으로 물결을 피해냈다.
몸이 꿈틀!
순간, 그의 몸은 날개를 단 듯 활활 날아올랐다. 자유로웠
다. 이 세상 어디든지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런 기분으로 다가오는 물결을 향해 검을 쳐냈다.
“크윽!”
답답한 신음이 터진 순간 적엽명은 환상에서 깨어났다.
이름 없는 묵검이 한광은 목을 직통으로 관통한 상태였다.
한광은 눈동자를 굴려 바라보았다.
“꺼륵……”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한광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붉은 핏물뿐.
검을 뽑아내자 한광은 스르륵 무너져버렸다.
그때서야 알았다. 한광의 의복이 누런 이유…… 시신이 썩
으면서 흘려내는 진물이다.
한광은 무엇을 한 것일까. 시신을 껴안고 뒹굴기라도 한 것
일까.
적엽명은 건곤검 한혁을 찾았다.
무군 쪽은 거의 도주한 후였고, 해남무인들은 즐거워서 서
로 껴안고 소리를 질러댔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너무 놀라 한달음에 뛰쳐나갔다.
“석불!”
무음검과 암암검을 합친 그의 검은 탈혼검을 깨지 못했다.
석불의 몸에 검을 틀어박은 한혁은 지긋이 웃으면서 다시
한 번 틀어넣었다.
“끄윽……!”
석불의 뚱뚱한 몸이 잔경련을 일으켰다.
“너희 같은 애송이들은 안 된다니까.”
“비, 빌, 빌어먹을……”
석불은 난생 처음으로 욕이란 것을 내뱉었다. 이승에서 마
지막으로 남긴 말치고는……
“한광을 베는 모습…… 봤다.”
“전검의 극(極)이요.”
“극? 극…… 하하! 하하하하!”
적엽명은 웃거나 말거나 검을 뽑아들었다.
이번에 사용하는 검은 파랑검이다. 아버지의 원한과 형의
복수를 위해서 파랑검을 사용하기로 했다.
“형님을 치고 난 다음…… 왜 한광이 쳤다고 소문냈소?”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 문제라고. 탈혼검을 처음으로 가르
쳐 줄 때였지. 놈에게 줄 선물이 필요했거든.”
“선물. 선물 때문에 형을…… 너무 많은 피를 흘렸어.”
“전검의 운명은 어떻지?”
“……”
“전검을 익히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느냐 말이다.
후후! 말을 못하겠지. 이게 전검과 탈혼검의 운명이야. 전검
과 탈혼검은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검이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어있어. 재미있는 이야
기 하나 해 줄까? 네가 전검을 익혔다는 소문은 해남도를 벗
어나 중원 대륙에까지 퍼졌다. 이제 조만간 찾아오는 사람들
이 많을 게야. 너와 나. 둘 중에 누가 살아남든 살아남는 사
람은 편히 살지 못해. 하하하!”
“그만…… 합시다.”
“좋아. 야야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
한혁의 검은 한광과 달랐다.
똑같은 탈혼검인데 한광이 사이한 반면 한혁은 묵직하면서
끈끈한 철사(鐵絲)가 몸을 칭칭 감아오는 느낌이다.
개의치 않았다. 한광과 겨루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광의 검
을 본 다음이라서 탈혼검의 검력(劍力)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
파앗!
검이 날아온다.
환상이라고 느낀 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그는 한광의 검을
똑바로 보았고, 빈틈을 찾아 검을 찔러 넣었다. 전신의 모든
감각이 극대화되었기에 아름답게까지 느껴졌을 뿐이다.
탈혼검은 인간의 정신을 파고드는 검.
전검은 인간의 정신을 극대화시키는 검.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은 충격은 서로 상반된 검력이 부딪치
면서 일어난 현상에 불과한 것.
종류는 다르지만 한혁의 검도 보인다.
적엽명은 한광과 똑같은 빈틈을 찾아 검을 찔러 넣었다.
“끄륵……”
한혁의 입에서도 한광과 똑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3
늠름하신 모습, 손에 쥐고 있는 헝겊.
취채는 오열을 터트렸다.
차라리 혼인하자는 말이나 하지말고 가실 것이지.
그녀는 화문이 굳게 움켜쥔 손을 꼭 감싸안았다.
손에 쥐고 있는 헝겊은 그녀의 채대 조각이었다. 어쩐지 채
대 조각을 가지고 있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고 했는데.
이게 좋은 일이란 말인가.
취채는 화문의 이마 한가운데 박힌 표창을 뽑아냈다. 그리
고 있는 힘껏 자신의 가슴속으로 밀어넣었다.
“앗!”
뒤에서 오열을 터트리고 있던 유소청이 깜짝 놀라 취채의
몸을 안아 일으켰다.
“이…… 사람…… 내가 싫어…… 도망갔어. 쫓아…… 가야 해.”
유소청은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이럴 것 같아서 데려오고 싶지 않았는데. 기어이, 기어이
시신을 보겠다고 하는 바람에……
무인들의 길이란 모두 이런 것인가.
송지는 돌아섰다.
“복수는 하지 않는 거야?”
큰 아이가 천진하게 물어왔다.
“앞으로는 농사만 짓는 거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농사는 싫은데.”
작은 아이가 투덜거렸다.
송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시무룩히 앉아 있는 한백을 보았
다.
그는 화문이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 역시 앞으
로 군에는 돌아가지 못할 몸.
송지는 한백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말했다.
“같이 살래요?”
“나, 적엽명 저 놈을 좋아했어.”
“사내로?”
“응.”
“풋! 사내가 사내를 좋아할 수 있나?”
“있어. 말도 못해보네.”
“저 놈,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
“류?”
“……”
“류!”
“……”
“제길! 빨리도 가는군.”
술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탄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누군가를 찾고 있다. 아마도
자신들이겠지.
‘저 놈은 훌륭한 우화가 될 거야. 제길! 그나저나 적엽
명…… 그 놈의 아이는 안아봐야 되는데……’
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전혈은 평야 한 구석에 서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시체, 시체, 시체……
그는 자신의 검을 보았다.
피, 피, 피……
그는 은전 닷 잎을 주고 산 청강장검을 버렸다.
석불은 죽었지만 범위가 살아있다.
그는 장문인직을 잘 수행하리라. 그래, 장문인은 범위 같은
놈이 이어받아야 하는 것을. 가문도 걱정할 것이 없다. 전방
형님이 잘 이끌어 나가실 테니.
그는 홀홀히 떠나가기 시작했다.
적엽명은 떠나가는 사람들, 남은 사람들을 모두 지켜보았
다.
화문, 황함사귀, 황유귀, 호귀…… 한백…… 석불……
그는 울고 있는 유소청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나…… 말이나 키울까봐.”
“말똥냄새가 너무 날 것 같애.”
“깨끗이 씻을게.”
“흑! 나…… 오늘 일…… 못 잊을 것 같애.”
‘나도 그래.’
적엽명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쾌청했다. 기나긴 장마가 물러가고 가을이 오려는가 보다.
앞으로 나흘 후면 중양절인데…… 술 한 잔 같이 할 놈들은
어디 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