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Mine RAW novel - Chapter 186
186화
그 목소리가 들렸다.
한때는 모두의 가슴을 가득 채워준 목소리였고, 이제는 원망과 애증만을 남긴 바로 그 목소리였다.
천야평에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끝끝내 꿋꿋함을 유지하던 화산파 도사들이 걷잡을 수 없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왜 조금만 더 빨리 오지 않았단 말인가.
정파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속가와 흑회 무인들이 검성에게 처참하게 죽어나갈 때, 차라리 그때 나타났더라면.
그랬다면 그저 나타나 준 것만으로도 고맙고 감사히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늦었다.
전 강호를 뒤흔들었던 싸움은 이미 결착을 향해 가는 때였다.
검성이 꺾이고 정파 연합은 이미 붕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북검회의 무인들은 물론 동성국 무인들마저 모든 것이 끝났음을 받아들이고 물러선 때였다.
예기치 못한 조력자가 있었지만 본질은 화산파 스스로 모든 것을 감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사태의 시작이자 원인인 그가 다시 화산에 온 것이다.
천살마군, 염세악!
차라리 오지 않았더라면.
이대로 잊힐 수 있다면, 화산의 누구라도 가슴속 그리움과 원망을 끌어안고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다시 나타났으니 어쩌면 싸워야 할지 몰랐다.
어찌 되어도 그는 마인이며 화산파는 정도를 받드는 육대문파의 하나였다.
그것이 변치 않은 한 천살마군과 화산파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익숙한 그 목소리 한 번에 화산파는 더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화산파의 그런 분위기는 다른 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방관자일 뿐이었다.
화산에서 시작했으니 이 모든 것 역시 화산에서 끝을 내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천야평에 남은 수많은 이는 약속이나 한 듯 숨죽이며 기다렸다.
곧 모습을 드러낼 천살마군 염세악을.
“쩝!”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염호가 나타났다.
언제부터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염호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화산파 본산으로 이어지는 산로의 초입이었다.
좌중의 시선이 한꺼번에 염호를 향해 쏘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그 정도 시선 따위에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을 염호였지만, 지금은 겸연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늘 그렇듯 패왕부를 등에 멘 모습으로 자기 볼을 슬쩍슬쩍 긁던 염호의 눈이 화산파 도사들을 스윽 훑었다.
“태사……!”
어린 삼대제자 하나가 울컥해 목소리를 토했지만 바로 옆에 있던 이대제자가 얼른 그 입을 손으로 막았다.
마음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절대로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염호를, 아니, 천살마군을 태사조로 부르는 순간.
이 싸움이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누구 하나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라고 온 건 아닌데…….”
염호도 딴에는 전혀 면이 서질 않는 듯 더 이상 화산파 제자들을 쳐다보지 못했다.
다만 그들 곁을 휘적휘적 지나가며 수많은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눈빛들을 맞았을 뿐이었다.
아주 잠깐 힐끗 눈알을 굴려 본 진무는 결국 넋이 나간 모습이었고, 신응담은 당장에라도 검을 날릴 듯 매서운 눈빛이었다.
기영도는 그저 무심해 보였지만 그래도 그 눈가에 한 줄기 따스함을 읽을 수 있었다.
장로 손괴도 범중도 서림도 유학선도 모두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글픔, 원망, 그리움…….
염호는 그들의 감정들을 부러 외면한 채 천야평의 중심을 향해 걸어 나갔다.
슥!
땅에 박힌 파천도를 꺼내 든 야도가 천천히 일어서며 염호를 맞았다.
“오셨소?”
“끙!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 놈!”
염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야도는 그런 것엔 전혀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척!
도 끝이 염호를 향하자 염호의 눈가가 한 차례 크게 씰룩였다.
“꼭 여기서 해야겠냐?”
“보는 눈이 없는 곳으로 가시겠소?”
“아니다. 쩝! 기왕 이렇게 된 거…….”
염호가 슬쩍 말끝을 흐리더니 주변을 스윽 훑었다.
움찔!
간신히 안색을 회복한 검성 엽무백이 염호와 눈이 마주치는 그 짧은 순간 부르르 몸을 떨었다.
“딴 건 몰라도 넌 용서가 안 돼…….”
나직한 목소리에 검성의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고, 염호는 쯧 혀를 차며 다시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오! 산홍이!”
염호가 손을 번쩍 들어 아는 체를 하자 좌중의 시선이 한꺼번에 연산홍을 향해 몰려들었다.
당황한 연산홍이 뭐라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얼굴만 붉게 변해갔다.
이 판국에 ‘산홍이’라니.
대체 저 인간 머릿속이 어떻게 된 건지 뚜껑을 열어서라도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한테 선물 있다!”
“……?”
“화산파에 있어. 사실, 그거 땜에 잠깐 들른 건데……. 이긍!”
염호가 다시 한 번 제 볼을 긁적거리는 동안 연산홍의 눈빛은 더없는 혼란에 빠졌다.
대관절 이런 상황에 나타난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느닷없는 선물 타령이라니.
연산홍은 더욱더 천살마군이란 탈을 뒤집어 쓴 소년 염호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 끝났소?”
그 순간 야도의 날 선 음성이 염호를 향해 이어졌다.
염호의 눈이 야도를 향하더니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변해갔다.
고요하게 가라앉아 그 끝을 측량할 수 없이 깊어지는 눈길.
반면 야도의 눈썹이 거칠게 흔들렸다.
“파천십이결, 어때? 쎄지?”
“…….”
“근데 그거 아냐? 그걸론 백 년 전에도 나한테 안 됐다는 걸?”
꿈틀!
파천도를 움켜쥔 야도의 손 등 위로 힘줄이 터질 듯 부풀었다.
“아직 더 할 말이 남았소?”
“쯧! 재미없는 놈!”
“가겠소.”
일순간 파천도를 겨눈 야도 주변으로 엄청난 풍압이 휘몰아쳤다.
후아아앙!
도끝으로 휘몰아친 풍압이 순식간에 기세와 엉키더니 번쩍 하는 섬광으로 변했다.
캉!
너무 빨라 어떻게 염호를 공격했는지, 또 염호는 언제 흑뢰정을 꺼내 그걸 튕겨냈는지 알아챈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묘한 일이 벌어졌다.
“크억!”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이다.
검성 엽무백!
그의 우측 어깨 위로 핏물이 번지더니 오른쪽 팔 전체가 힘줄이 끊긴 것처럼 축 늘어져 버렸다.
야도의 얼굴은 더없이 굳어졌지만 염호는 손에 든 흑뢰정으로 뒷머리를 박박 긁었다.
“에구구! 하필 그게 그리로 튀냐!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그런 일이 우연일 거라고 믿는 사람은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또 그걸 의도했다고 윽박지를 수 있는 이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순간 야도의 도끝으로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소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츄츠츠츠츠츠츠츳!
도신 전체가 공명하며 수십만 마리의 벌레 떼가 나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촤아아아아악!
파천도가 베어가는 궤적을 따라 수천 개의 빛무리가 쏘아졌다.
마치 은하수를 도끝으로 뿌리는 듯한 너무나도 찬연한 빛이 염호를 향해 휘몰아쳤다.
“이크!”
정말 놀란 것인지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과장된 소리를 뱉은 염호가 재빠르게 등 뒤의 패왕부를 꺼내 들었다.
후웅! 후우우우우웅!
가운데 도낏자루를 잡고 엄청난 속도로 패왕부를 휘돌리는 염호!
카캉! 카카카카카카카카캉!
도끝에서 뿌려진 빛이 휘도는 패왕부와 부딪히며 강렬한 불꽃을 끝도 없이 일으켰다.
그리고 또다시 비명이 이어졌다.
“컥!”
“크억!”
“크아아아아아아악!”
뚝뚝 끊기는 비명은 모두 한 사람, 검성 엽무백의 목소리였다.
싸움이 인 곳과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쉴 새 없이 터진 비명, 그 결과를 본 좌중은 아연실색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검성의 전신에 시뻘건 반점이 생겨 버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뻘겋던 반점은 점차 더 크게 번져 갔다.
핏물이었다. 작은 핏물이 끝도 없이 번져 가는 것.
풀썩!
무릎이 휘청 꺾인 검성의 온몸이 일순간 축 늘어진 문어 새끼마냥 흐물흐물 늘어졌다.
“왜 자꾸 그쪽으로 튕겨. 이거 미안! 본의는 아니었어.”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은 채 눈만 꿈뻑거리는 검성을 향해 염호는 친절하게 손까지 들어 보였다.
그 일을 지켜 본 모두가 경악했다.
처음이야 만에 하나라도 우연일 가능성이 있다지만 이번엔 의심할 필요조차 없었다.
검성의 전신 근맥을 가닥가닥 모조리 끊어버린 것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야도의 무시무시한 공격을 튕겨내는 방법으로.
“나를 모욕하지 마시오!”
야도의 입에서 전에 없이 강렬한 기세가 담긴 목소리가 뿜어졌다.
모든 것을 걸고 임한 싸움에서 치욕을 당했다 여긴 야도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전과 다른 지독한 살기마저 줄기줄기 피어올랐다.
염호를 상대로 공력의 대결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초식만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염호가 철저히 무시했다.
무인으로서의 수치, 야도에게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굴욕이었다.
야도는 이제 전심전력을 다한 생사결을 택했다.
처음 염호와 마주 상대했던 그때처럼.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야도의 기세가 천야평에 모인 모두를 숨죽이게 했다.
그 순간만은 세상에 누가 있어 저만한 무인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염호였다.
“모욕?”
싸늘한 목소리 한마디가 야도의 엄청난 기세를 단번에 쓸어버렸다.
“지금 모욕이라고 했냐?”
염호가 삐딱한 눈으로 야도를 쳐다봤다.
굳건하던 야도의 표정 역시 그때만은 크게 흔들렸다.
알 수 없는 한기가 온몸을 엄습해 뼛속까지 얼려 버린 기분이었다.
“내가 여기 있는데……, 나 염세악도 여기서 이 꼴을 하고 참는데, 모욕이라고?”
후우우우우우웅!
염호의 장포가 광풍에 휩쓸린 뒤 거칠게 펄럭였다.
파천도를 움켜쥔 야도의 전신이 덜덜 떨리기 시작할 즈음 염호의 시선이 순식간에 좌중을 휩쓸었다.
“뭘 쳐다보고 지랄들이야!”
너무나 갑작스레 터져 나온 염호의 일갈이 삽시간에 천야평 전체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웃기는 놈들. 정파? 네놈들이?”
염호의 검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먹물이 번지듯 흰자위를 잠식해 갔다.
더불어 전신으로 뿜어진 어둠보다 짙은 암흑이 끝도 없이 하늘로 치솟았다.
마기였다.
염호가 뿜어낸 엄청난 마기가 하늘을 뒤덮을 듯 치솟아 오른 뒤 서서히 하나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으으으으!”
“으헉!”
“사… 살려……!”
“제발!”
곳곳에서 공포에 완전히 잠식되어 버린 신음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천야평 가운데 치솟아 연화봉 꼭대기 높이만큼 자라난 시꺼먼 마기.
그 마기의 형상을 확인한 이들이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물며 풀썩풀썩 쓰러져 갔다.
거대한 뿔이 난 머리.
태산처럼 끝없이 치솟은 육중한 상체.
그 몸통에서 뻗어난 여섯 개의 팔에는 무시무시한 크기의 도끼가 들려 있었다.
그대로 도끼를 휘두르기라도 한다면 천야평은 물론 화산의 봉우리들마저 단숨에 잘려 나갈 것 같았다.
엄청나게 거대한 형상의 마기에 휩싸여 모습마저 사라져 버린 염호.
대신 산자락처럼 자라난 거대한 악마의 형상에서 하늘의 울부짖음 같은 노성이 토해졌다.
똑똑히 기억해라.
이미 두려움에 짓눌려 버린 이들이 고막이 터져 나갈 듯 울리는 목소리에 다시 한 번 혼비백산했다.
봐주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짓눌러 죽일 수 있는 네놈들을 내가 그냥 봐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이어진 음성과 함께 이제 멀쩡히 두 발로 선 이는 고작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거기에는 화산파의 도사들 역시 예외가 없었다.
그래, 나 마인이다.
그래서 어쩔 건데? 이 씹새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