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Mine RAW novel - Chapter 187
187화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바뀌며 또 세월은 물처럼 끝없이 흘러갔다.
오래전 과거 핏빛으로 물들었던 천야평 가득 초록 풀이 무성하게 자라났으며 이름 없는 들꽃들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우뚝 솟은 화산 연화봉은 청명하고 맑은 하늘 아래 여전히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만, 그 아래 화음현의 모습은 과거와는 전혀 딴판이 되어 있었다.
여느 대도시나 성도 못지않게 번화하게 변했으며 높다란 전각들이 곳곳에 즐비했고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끝도 없이 분주했다.
삼삼오오 모여든 상인들은 물론 말과 수레에 짐을 가득 실은 상행의 무리를 보는 일은 이제 화흠현에서 일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화흠현의 저자 가운데 위치한 연화객잔 안에서 할아버지와 손자로 보이는 두 사람의 두런두런한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조부님!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또랑또랑한 눈을 가진 열 살 어름의 소년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묻자, 맞은편 중후한 기품을 지닌 초로인이 입가에 미소를 가득 지었다.
“원 녀석! 별 걱정을 다하는구나.”
“하지만… 대화산파의 속가제자를 뽑는 대회잖아요. 저는 아직 무공이 약해서…….”
“허헛! 청아원에 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공이 아니란다.”
“넷? 그럼요?”
“물론 자질을 따지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성품을 보지.”
“성품이요? 바른 마음가짐이 중요하단 것이죠?”
소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이 한마디를 더했다.
“뭐, 그것보단 독기지.”
“넷?”
“달리 근성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런저런 걸 본단다.”
“…….”
“운이 너는 너무 올곧아 본산에서 좀 독하게 배워야 해. 그래서 속가로 들여보내는 게다.”
초로인의 음성은 인자했지만 소년은 당최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창밖으로 우뚝 솟은 연화봉을 쳐다보는 소년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 찾아든 모습이었다.
그러다 소년이 문득 무언가 떠올린 듯 노인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조부님, 저도 검신(劍神) 사조님을 직접 볼 수 있을까요?
“하하하하! 걱정 말거라. 이 할아비가 그 분과 엄청 친하단다.”
“넷? 저…정말로요?”
소년은 너무나 놀란 눈이었다.
당대의 검신 신응담!
천하제일인으로 추앙받는 검신 사조는 강호인이나 세인들에게 그저 신선처럼 여겨지는 전설적 인물이었다.
그 검신 사조와 자신의 할아버지가 친하다는 말에 소년은 흥분을 도저히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노인은 그런 소년을 보며 피식하고 웃어 보였다.
옛날 생각이 나서였다.
노인 역시 과거 화산을 처음 찾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화산에는 검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검신이 지금의 화산을 만들었고 지금의 강호를 만들었다.
주마등처럼 흘러간 지난 세월에 빠진 노인을 향해 소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정말이에요?”
“……?”
“큰 조부님이랑 조부님께서 화산파를 구하기 위해 일만 명이 넘는 적들과 싸웠다는 이야기요.”
“일만? 누가 그리 허풍을 치더냐?”
“허풍이요? 설검대주가 그러던데요? 그때 우리 설매산장의 무사도 많이 죽었다고…….”
“크흠. 그때 형님과 이곳에 온 건 사실이다. 저기 천야평 가득 화산파를 겁박하는 적이 몰려든 것도 사실이고.”
“와!”
“하지만 운아! 우리는 그냥 싸운 것뿐이다. 지금의 화산은 오직…….”
노인이 된 설매산장의 은호열, 그 눈가로 수십 년이 지나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얼굴 하나가 스쳐 갔다.
커다란 도끼를 등에 걸치고 자신을 향해 해죽 웃던 앳된 얼굴.
“네? 뭐요?”
“아니다. 할아비가 괜한 소리를 했다.”
“진짜 궁금해요, 할아버지.”
소년이 살갑게 응석을 부려보지만 노인의 얼굴이 일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운아!”
조부의 눈빛과 얼굴이 달라지자 소년의 표정에도 갑자기 긴장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평소 인자하기만 한 조부였지만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명심해라. 본산에 입산한다 해도 과거는 절대 언급해선 안 된다. 특히 천야평 혈사에 관련된 일은!”
“네에……?”
“그 일과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화산파뿐 아니라, 이 강호를 사는 모든 문파와 무인들의 금기다. 절대로 깨져서는 안 되는!”
잔뜩 굳은 은호열의 목소리.
소년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거렸지만 그렇다고 감히 되물을 수 없었다.
조부의 굳어버린 얼굴이 너무나 낯설고도 두렵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하하하하! 이 친구! 뭘 그리 겁을 주는가?”
객잔 안으로 들어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초로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기다란 흑염을 멋스럽게 기른 또 다른 초로인이 막 객잔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얼굴을 가로지른 희미한 칼자국만 아니라면 조정의 높은 관리 같은 인상을 지닌 노인이었다.
“홍 방주가 아닌가?”
은호열이 놀라 목소리를 높이는 사이 칼자국 노인을 따라 중년 사내와 다섯 살 어름의 꼬마 하나가 뒤따라왔다.
“꼭 십 년 만이군. 군자검(君子劍), 그 친구와는 몇 해 전 한번 손을 겨루긴 했는데 말일세.”
칼자국 노인이 일행과 함께 다가오자 은호열이 일어섰고 덩달아 소년도 긴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의 큰 조부인 군자검 은호청은 북칠검(北七劍)으로 불리는 강호 최강의 검객 중 한 명이었다.
거기다 산서제일검으로 칭해지며 지금의 설매산장을 산서제일장원으로 우뚝 세운 실로 위대한 검객이었다.
그런 큰 조부와 따로 비무를 할 정도의 인물에다 설매산장의 전대 가주인 자신의 조부와 인사를 나눌 신분이라면 대단한 인물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운아! 인사드려라. 흑야(黑夜) 홍 장주님이시다.”
“으헉!”
소년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둘러 예를 갖췄다.
“안… 안녕하십니까.”
흑야 홍화순, 어린 소년의 귀에도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주 들은 이름이었다 .
밤무림의 지배자인 흑룡방의 주인 흑야. 중원 상권의 절반을 움켜쥐고 있으며, 남천팔강(南天八强)라 불리는 강남 팔대고수 중 하나라는 것이 바로 흑야라는 별호의 의미였다.
그런 엄청난 존재를 직접 눈앞에서 본 소년은 얼른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설매산장의 은강운이라 합니다.”
소년을 본 칼자국 노인 홍화순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뒤따라온 일행을 향해 돌아섰다.
“너희도 인사해라. 설매산장의 전대 가주님이시다.”
“일심관의 관주 홍이진이 삼우검 (三友劍) 은호열 어르신을 뵈옵니다. 이 아이는 제 자식 놈입니다.”
중년인을 따라 온 어린 꼬마가 은호열을 향해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군자검 은호청과 삼우검 은호열은 따로 산서이검으로 불리며, 그 명성이 장강 이남까지 자자한 고수들이었다.
더구나 산서이검은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라 형은 동생에게 장주의 자리를 거리낌 없이 양보했고, 동생은 검에 빠진 형을 대신해 설매산장을 산서제일의 문파로 우뚝 세우는 데 평생을 쏟아부었다.
그 둘의 일화는 훈훈한 미담이 되어 아직까지도 설매산장의 성세와 함께 세인들에게 누누이 회자되고 있었다.
“어려 보이는데? 벌써 입문시키려고?”
은호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홍화순이 피식 웃었다.
“속가가 아니라 본산에 입적시킬 생각일세.”
“으응?”
“과거의 은혜를 갚아야지. 게다가 나는 자식이 많지 않은가.”
“하하하, 자네 내외 금슬이야 산서에까지도 들려오지.”
은호열이 기꺼운 모습으로 대답하자 홍화순이 옆에 선 자식과 손주를 흘겨봤다.
“금슬은 무슨! 고 여편네 떼어내고 오느라 죽는 줄 알았네.”
“하하하하! 자네, 내자 성격은 여전한가 보군.”
“쯧! 한평생 후회하는 두 가지 일 중 하나가 바로 마누라를 얻은 일일세. 내가 미쳤지! 그때 눈에 뭐가 씌웠던 거야!”
“으하하하하하!”
홍화순의 푸념에 은호열은 객잔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천야혈전이라 기록된 대회전 끝나고 두 해가 지나 홍화순은 화소옥과 혼인했다.
그렇게 흑회와 보화전장이 병합되며 흑룡방이 탄생했고 그 발판은 지금의 흑야 홍화순을 있게 만들었다.
“이럴 게 아니라 본산에 오르면서 천천히 이야기 하세. 송장문인은 잘 계시려나?”
“이 친구는! 금분세수를 벌써 여러 해전에 하셨는데 소식도 못 들었나? 자네 너무 산서 땅에만 처박혀 있는 것 아닌가?”
“헉! 진짜 몰랐네.”
“농일세, 농이야! 본산은 본래 조용하지 않는가. 나도 소문으로 들었어. 지금은 조세걸이가 장문인이고 매화검수장은 양소호 그 아이라네.”
“하아~! 참, 세월이 빠르긴 빠르구먼.”
“그러게, 눈 감았다 뜨니 사십년이 흘러 버렸어…….”
홍화순과 은호열이 두런두런 앞서 나가자 그 식솔들은 서둘러 뒤를 따랐다.
산책하듯 천천히 화흠현 저자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천야평에 도달하자 약속이나 한 듯 멈춰 섰다.
잠시 말없이 연화봉을 올려다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 너무나 쓸쓸해 보였다.
“함께 떠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가?”
“…자네도?”
“어쩔 수 없었지. 형님과 나는 설매산장을 재건해야 했으니.”
“…….”
은호열도 홍화순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한 해만 더 지나면 정말로 꼬박 사십 년이 되지만 떠난 이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잘들 계실까?”
“글쎄… 그래도 그분께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건 상상이 안 되질 않는가?”
“하긴… 세상 끝… 지금쯤은 보셨으려나…….”
“뭐,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때쯤 다시 오시려나?”
“하하하하! 그러실 테지.”
“이만 올라가세.”
홍화순과 은호열은 다시금 입가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천야평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화산의 초입까지 도달한 두 사람의 얼굴은 수십 년 만에 고향을 다시 찾은 이처럼 포근한 미소로 가득했다.
***
엄청난 크기의 배 한 척이 유유히 바다 위를 가로질렀다.
여인의 치마폭을 덧대놓은 듯한 수십 개의 돛이 잔뜩 달린 거대한 배였다.
새하얀 돛 가운데마다 붉은색 십자가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는 배였다. 배의 갑판 옆구리엔 화포까지 줄지어 장착된 범선이었다.
그런 큰 배의 위용과 달리 선상에 널브러진 선원들은 피죽도 한 그릇 제대로 못 먹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색목인 선원들은 죄다 곧 쓰러져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입술이 바짝 말라 가뭄 뒤의 땅처럼 쩍쩍 갈라진 황금색 머리칼의 선원 하나가 뱃머리에 기대 퀭한 눈으로 바다 끝을 응시하다 화들짝 놀라 머리를 치켜들었다.
망망대해 끝에 삐죽 솟아난 육지를 본 것이다.
“Captain! Captain!”
순간 널브러졌던 선원들이 하나둘 고개를 쳐들었다가 육지를 발견하고 미친 듯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Jesus!”
“Oh~! God!”
“Oh! Oh! Oh my God!”
선원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미친 듯이 소리치는 그때 선실 문이 벌컥 열렸다.
“왜 이리 시끄러!”
“……!”
“……!”
날뛰던 선원들이 일제히 움찔하더니 자물쇠를 채운 것처럼 입을 닫아버렸다.
선실 안에서 나온 이는 당장 관작 안에 누워야 할 것 같은 꼬부랑 노인이었다.
하지만 색목인 선원들은 그 노인이 얼마나 무서운지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었다.
선원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손끝을 가리키자 노인의 눈이 번쩍 하고 치켜떠졌다.
“잉? 육지?”
노인 역시 크게 놀란 얼굴로 선실 안을 향해 소리쳤다.
“나와보십시오! 육지입니다. 중원입니다. 드디어 중원! 크흐흑!”
노인 역시 순식간에 온갖 감정이 복받쳐 오는 듯 눈가에 눈물이 고여 버렸다.
노인의 목소리를 듣고 가장 먼저 갑판으로 나온 이는 희끗한 머리칼의 중늙은이였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철컹거리는 쇳소리가 나는 중늙은이 역시 바다 끝에 삐죽 솟은 땅을 보며 순식간에 그렁그렁 눈물을 쏟아냈다.
“운산아! 드디어 중원이다. 크흑!”
“육조 어르신! 흑!”
육조와 반운산이 서로 얼싸안은 채 점점 가까워지는 육지를 지켜봤다.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었다.
무려 사십 년 만이었다.
사정은 전혀 달랐지만 어쨌든 염호를 따라나설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긴 세월이 걸릴 줄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냥 서역 구경이나 한 번 간다고 생각했으니…….
평생 종으로 살겠다고 약속한 육조야 어쩔 수 없다지만, 세상을 구한 염호에게 자신이라도 은혜를 갚겠다고 나선 길이었다.
반운산과 육조는 삼목신안의 거처에서 천마나 흑제에 얽힌 모든 비밀을 소상히 알 수 있었다.
영생불사의 존재 천마.
그에 대한 믿지 못할 기록들이 그곳에 있었다.
더불어 그를 제거하기 위해 마지막 싸움에 임했던 이들의 기록도 남겨져 있었다.
그중 화산의 검신 한호가 있다는 것은 반운산에게 무한한 긍지이며 자부심이었다.
신수궁의 취벽선자, 천사맹주 귀성, 그리고 삼목신안.
그들 넷이 천마의 영혼을 봉인하기 위해 나선다는 마지막 기록이 그곳에 남겨져 있었다.
천야평 혈사가 끝난 이후 반운산은 그 같은 사실을 두루 알렸고 한동안 많은 이가 천마의 준동을 대비하기 위해 골머리를 맞댔다.
그러다 알게 됐다.
염호가 귀해도를 벌써 찾았고 환혼주 또한 바닷속 깊은 곳에 수장시켰다는 사실을.
강호는 이미 염호가 구해버린 것이다.
마인이 구한 세상.
그리고 마인이 존재하는 화산.
하지만 누구도 그 마인을 떠받들 수는 없는 때였다.
그래서 따라나선 것이다.
그 고마움을 자신이라도 홀로 갚아야 한다고 반운산은 염호를 따랐다.
“쩝~! 걱정 마라 이놈들아! 나 간다. 나랑 같이 세상 끝까지 놀러 갔다 올 사람?”
그때는 서슴없이 선택했다. 그리고 그때는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은 돌아왔다.
평생 이역을 떠돌며 온갖 모험과 고생을 하면서도 늘 그리웠던 사문으로 드디어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반운산과 육조가 감회에 젖어 얼싸안고 있는 그때 선실 안에서 또 다른 백발의 노인 하나가 걸어 나왔다.
허리춤에 서역에서 쓰는 커다란 칼을 차고 있는 건장한 덩치의 노인이었다.
야도 이화룡.
그 또한 바다 끝에 솟은 육지를 뚫어져라 쳐다본 뒤 툭 하고 한마디를 뱉었다.
“중원에는 과연 지천(止天)을 받아줄 적수가 있을까?”
파천십이결로 염호에게 어림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야도는 끝끝내 염호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는 결국 함께 배를 탔고 도의 끝이라는 지천까지 완성했다.
하늘을 멈추게 한다는 천고의 도법, 지천.
하지만 그러면 뭐하겠나.
지천을 얻었다고 염호를 이길 수는 없는 것을.
또한 앞으로도 영원히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만을 지난 세월 동안 깨달았다.
끝없이 부딪쳐 깨지고 나서야 이젠 더 덤벼볼 이유조차 없다는 것을 완벽히 인정한 것이다.
그러니 염호를 빼고 다른 누군가를 애타게 찾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야도에게는 염호 말고 누구라도 원 없이 싸워줄 이가 절실하단 사실이었다.
그런 때 중원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야도 또한 새로운 강자를 만날 수 있다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그때였다.
“하아암~! 진짜 중원이야?”
선실에서 이제 스물 정도로 보이는 헌양한 청년 하나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걸어 나왔다.
사십 년이 흘렀지만 네 살쯤 더 먹은 것처럼 보이는 염호였다.
염호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눈을 치켜떴다.
“저기가 중원?”
“……!”
“……!”
“자기야! 나와봐!”
염호가 목소릴 높이자 선실 밖으로 천상의 선녀 같은 모습에 농염함까지 겸비한 절색의 여인 하나가 나섰다.
풍만한 가슴골이 반쯤 드러난 서역의 궁중 예복을 입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염호나 다른 이의 눈치도 보지 않고 염호의 허리춤을 살포시 껴안으며 가볍게 품에 머리를 기댔다.
“중원에 저런 산이 있어?”
염호의 물음에 여인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눈을 가볍게 치떴다.
“중원 땅이 아니네요.”
“응?”
“저기 저쪽, 안 보이세요?”
“뭐? 어디?”
“저 끝에 말 탄 애들 말이에요.”
염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눈빛이 변했다.
“아! 머리에 이상한 깃털 잔뜩 달고 있는 애들? 호오? 도끼를 써?”
염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리는 그때 여인이 염호의 품에 풀썩 파묻혔다.
“가가! 전 어디라도 상관없어요. 가가와 함께라면.”
“크흐음! 쩝~! 애들 보는데…….”
“뭐 어때요! 우리 다시 들어갈까요?”
“어흠흠! 그… 그럴까!”
여인이 염호와 선실로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쌩하니 들어가는 그때 육조와 반운산은 혼이 빠져 버린 얼굴이었다.
중원이 아니라니.
중원이 아니면 저 땅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망연자실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린 두 사람과 달리 야도의 얼굴은 소태를 씹은 것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야도가 느닷없이 등 뒤의 도를 휙 하고 뽑아 들었다.
“연! 산! 홍!”
야도가 조금 전에 염호와 함께 선실로 들어간 연산홍을 소리쳐 불렀다.
두 해 전 먼저 반로환동을 해버린 그녀였다.
염호가 거의 매일같이 달라붙어 악착같이 돕더니 결국 그렇게 되었다.
온통 시꺼먼 피부의 사람들만 사는 검은 대륙에서의 일이었다.
실력은 분명 자신이 연산홍보다 훨씬 윗줄이었다.
그런데 반로환동은 연산홍이 먼저 했다.
뭐, 염호가 천래궁에 붙잡혀 있던 아비 연경산을 구해내 준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니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그 고마움에 그녀가 염호를 따라 나선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화가 나는 건, 이십 년 전부터였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다는 것이다.
결국은 반로환동까지……, 오직 염호가 시켜버렸다.
그 세월 동안 참고 참았던 야도의 울화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연산홍! 너하고라도 한판 붙어야겠다.”
야도의 목소리에 범선의 돛이 크게 휘청거리며 펄럭이는 그때였다.
슝!
선실에서 검은 벼락이 쏘아져 야도 얼굴에 꽂혀왔다.
캉!
파천도를 들어 간신히 막아내긴 했으나 야도의 신형은 그 충격을 못 이기고 그대로 바닷물까지 튕겨 풍덩 빠져 버렸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야도를 향해 염호의 나직한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붙긴 뭘 붙어?”
“…….”
“니들은 왜 또 그렇게 죽상이야? 때 되면 어련히 알아서 돌아갈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