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02
102화
손잡이만 남은 술병을 들고 선 여인이 허리에 손을 얹고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보이는 건 뒷모습뿐인데 이거 뭐 제법 참신하다.
자세 하며, 욕설을 내뱉는 가락이 아주 차진 걸 보니 한두 마디 해 본 솜씨도 아니고.
다소 감탄하며 구경하고 있는데, 뒤를 이어서 녹빛 무복을 입은 십여 명의 사내들이 객점으로 들어왔다.
‘당가?’
진무가 그들의 복장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저렇게 대놓고 지들 가문의 복장을 입고 돌아다니는 놈들인데 모를 수가 있나. 진무는 그들의 옷차림을 확인하는 순간 몸을 날려 이 층으로 올라갔다. 아무도 눈치 못 채게.
그들은 다름 아닌 사천 당가.
아주 똘끼로 가득 찬 놈들이다.
누대를 걸쳐 오며 사천의 주인 자리를 한 번도 타인에게 내어 준 적이 없는 독한 것들.
원래 염소 우리가 비어도 개는 살지 못하는 법이다. 독해서 그렇다.
당가도 그런 곳이다.
암기술과 용독술만을 그들이 가진 최강의 능력이라고 꼽지만 실제로 당가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들의 집요한 독기다.
이 미친놈들은 어른부터 애새끼까지도 제 가문에 충성하느라 물불을 안 가린다.
어릴 때부터 세뇌라도 당한 것인지 한번 원수를 지으면 제 놈들 다 죽을 때까지 덤벼드는 끈질긴 놈들이니 웬만해서는 처음부터 연을 맺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렇기에 산적이나 수적들도 구파와는 척을 져도 당가와는 척을 지지 않는다.
정사의 경계와 관계없이 지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눈깔 뒤집고 달려드는 독한 것들.
그 때문에 정파나 사파 모두 사천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뭐, 청성이나 아미는 도가에 불가이기도 하고, 당가보다 역사가 더 오래되었으니 논외로 치지만.
“이것들이, 안 그래도 요새 이상한 새끼들이 사천 땅에서 나댄다고 해서 돌아 버리겠구만!”
당의를 입은 여인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진 막청의 대가리를 발로 짓밟아 뭉개듯 비빈다.
“야, 막청! 너 내가 한 번만 더 사천 땅에서 사고 치면 뒈진다고 했냐 안 했냐?”
술병 한 방에 정신을 잃어버렸는지 막청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와중에 손가락을 조금 움직이는 걸 보면 정신을 잃은 척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거, 발에 밟혀 비벼지면 꽤 아플 텐데 잘 버티네.
잘한다. 끈기 있다. 사파라면 응당 그래야지.
괜히 상대가 안 되는데 나섰다가는 명줄만 짧아지는 법이다.
어쨌든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싸움은 순식간에 끝나 버렸고, 문태석을 포위했던 구룡파의 무인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내, 냉심독녀(冷心毒女).”
누군가의 겁먹은 중얼거림에 아무도 모르게 이 층에 숨어 지켜보던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명호하고는, 참.
당가의 여인답게 정말 어지간히 독한 모양이다. 얼마나 차가우면 냉심(冷心)인가? 게다가 웬만큼 독해서는 별호에 독(毒)자를 쓰지도 않는다. 즉, 보통 미친년은 아니라는 뜻.
사실 그녀는 사천 땅에서 제법 유명한 여인이었다.
냉심독녀 당세령. 당가의 고명딸.
당금 사천의 당가주 슬하에는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고, 딸은 그녀 혼자였다.
안 그래도 늘그막에 얻은 데다 유일한 딸이기까지 하니 당가 전체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적어도 사천에서 그녀의 눈 밖에 나면 이유를 불문하고 작살난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 기르던 고양이가 손등을 할퀴었다고 당가 전체가 나서서 고양이란 고양이는 죄 씨를 말려 버리는 통에 사천에서 고양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사천에 사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또한, 가문의 과도한 보호를 받는 와중에 그 재능은 또 얼마나 뛰어난지,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나이에 벌써 탄기의 경지에 이르러 당가의 주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그 때문에 성격이 좀.
“이것들이 처돌았나? 칼 안 치워?”
지랄 맞긴 했지만.
당세령의 위협에 구룡파의 무인들이 찔끔하며 눈치를 본다.
“나 참, 이것들이 아주 단체로 미쳐 가지고. 당가의 경계를 넘어온 것도 모자라서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야? 쓸모도 없는 모가지 싹 다 잘라 줘?”
어?
그건 내가 자주 하는 말인데?
쨍그랑.
그녀의 위협에 구룡파의 무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칼을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당세령 앞에서 개겼다가는 그 날로 지옥문을 서너 번은 넘어야 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니들!”
상황을 순식간에 정리한 그녀가 구룡파 무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문태석과 양소예를 지목하며 눈을 찌푸렸다.
“예?”
“너 이 새끼들. 내가 아무 곳에서나 애정 행각 벌이지 말랬지!”
“아, 그건…….”
“영안표국이고 오채상단이고 함 싸그리 털려야 정신 차릴래?”
“…….”
“니들이 자꾸 영역을 벗어나 돌아다니면서 연분을 뿌리니까 막청 이 새끼가 눈 돌아가서 애들 졸졸 끌고 다니면서 사고 치는 거 아냐!”
“아니 그건.”
“시끄럽고! 막청, 이 새끼 때문에 민가의 피해가 얼만 줄은 알아? 제발 좀, 소꿉놀이는 집에서 해! 민폐라고! 안 그래도 골 깨지는 판에 니들까지 보태면 되겠냐?”
“……예.”
문태석과 양소예가 입을 삐죽거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 나, 진짜.”
냉심독녀가 한숨을 쉬며 제 머리를 마구 헝클고는 품에서 전낭 하나를 꺼냈다.
그러곤.
“그리고 당신! 술값은…… 어?”
고개를 돌린 냉심독녀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없다.
조금 전까지 있었어야 하는 사람이 사라졌다.
분명 도망쳤어야 마땅했던 아까는 재미있다는 듯이 턱까지 괴고 구경을 하더니만……?
“야!”
“예. 대주님!”
“못 봤어?”
“뭘요?”
“여기 있던 놈.”
당세령의 말에 녹의 무인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도 없었는데요?”
“없었다고?”
당세령의 얼굴이 더욱 찡그려진다.
그럴 리가?
그녀가 이끄는 녹의 무인들은 녹둔대(綠屯隊)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개개인의 실력이 현기 이상급으로 구성된 당세령의 호위 무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보지 못했다고?
당세령이 악산까지 오게 된 이유는 근래 사천성에 들어온 의문의 인물들을 찾기 위함이다.
신분을 확인하는 당가의 무인과 부딪힌 그들은 두 명의 사망자와 다섯 명의 부상자를 만들고 도망쳤다.
그런 와중에 악산에서 만난 의문의 사내.
당세령은 그가 사라지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혹시 그놈들?”
당세령이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날카롭게 외쳤다.
“모두 찾아! 황삼이다. 키는 육 척 정도. 검은 머리를 뒤로 대충 묶었어. 등 뒤로 검을 찬 놈이다.”
“…….”
빠르게 신상명세를 읊어 대는 당세령의 모습에 녹둔대의 무인들의 얼굴이 그녀만큼이나 일그러진다.
그 짧은 순간에 잘도 많은 것을 파악한 눈썰미는 둘째 치더라도.
하아, 벌써 몇 번째인가.
그들이 받은 임무에 대해서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정작 열의에 차 있는 것은 당세령뿐이었다.
녹둔대 전원은 장로들이 그녀를 다른 곳도 아닌 성도에서 가장 가까운 악산으로 보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악산은 완전한 당가의 영역이었다. 오가는 사람 중 열에 하나는 당가와 관련 있는, 당가의 앞마당과도 같은 곳.
그런 곳에 보냈다는 것은 임무이되 성과를 기대하지 않는 임무.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부디 사고나 치지 않도록 바라는 마음이 가득히 담긴 임무.
그녀가 하도 떼를 쓰는 바람에 심심하지 않도록, 어쩔 수 없이 내려진 임무였다.
그냥 대충 시간이나 때우다 돌아가면 될 일인데.
그것을 본인만 모르는 당세령은 너무나 강한 열의를 보였다.
“뭐 해! 빨리 찾아!”
“…….”
아무리 명령이라고 해도.
황삼. 육 척. 대충 묶은 검은 머리. 검을 찼다.
길가에 널리고 깔린 게 그런 놈들이었다.
이 무슨 장안에서 왕 서방 찾기란 말인가?
하지만.
“예! 대주님!”
녹둔대의 무인들은 으레 그랬듯이 힘차게 대답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괜히 개겼다가는 그녀의 집요한 성격에 두고두고 피를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망할, 오늘도 야근이구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며 당세령을 호위할 몇몇을 제외한 녹둔대가 빠르게 객점을 빠져나갔다.
“처음 보는 놈이야. 그만한 놈이라면 필시 그들과 관계가 있을 게 분명해. 관계가 없어도 뒤가 구린 게 있을 거야. 그러니 도망쳤지.”
당세령이 막청과 구룡파를 바라보았다.
“니들은 그만 꺼져.”
“예!”
이제 그들에게는 관심이 없어졌다.
당세령은 처음으로 임무다운 임무를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껏 들뜨고 있었다.
물론, 당가의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 * *
“희한한 년이었어.”
아무도 모르게 객점을 빠져나온 진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딱 봐도 성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미 일전에 제갈산산이라는 이상한 요물을 경험해 본 뒤가 아닌가?
걸걸한 목소리에 사슴처럼 맑은 눈망울로 사내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며 끝내는 속옷까지 벗겨 낼 것처럼 심계가 깊은.
무림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아이와 여자라고 했다.
당가에 잠시 들러 볼 생각이기는 했으나 통상 저런 것들과 엮이면 괜히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근데 어째 뒤가 쎄한데.”
당가가 있는 성도(成都)를 향하던 진무가 문득 목 뒤를 주물렀다.
그러고 보면 진무 이 녀석의 팔자가 아주 더러운 모양이었다.
자신이 빙의되면서 팔자가 바뀌긴 했지만, 어째 만나는 놈마다 정상적인 것들이 없다.
“그래. 이럴 땐 피하는 게 상책이지.”
뭐 하러 엮인단 말인가?
그가 만나려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당가의 주인이자 정무칠성의 한 명인 암황(暗皇) 당위였다.
정무칠성 중 내력이 가장 강한 무인.
왕년의 혁련무강조차도 그의 내력에 비견될 수가 없었다.
자신보다 열 살은 어렸으니 지금은 한 칠십쯤 되었으려나?
정파치고는 꽤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정사에 관계없이 지극히 이해타산적인 성격으로 가문의 영달을 위해서 고개를 숙이는 것쯤은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는 탄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과 너무 잘 맞았다.
적이 아니었다면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친구를 맺어도 좋을 성격이었다.
“잘 있나 모르겠네. 나이가 들어서 성격은 좀 유해졌으려나?”
근데 만날 수 있을까? 가주씩이나 되는 놈인데?
“내가 무당지검인데 설마 안 만나 주겠어? 무당 대푠데?”
당위와 얽혔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던 진무는 당가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천 성도 외곽의 당가타.
분명 사천성의 수도이자 성주가 있는 곳은 성도인데.
실제로 사람들이 더 많이 사는 곳은 성안이 아니라 외곽의 당가타였다.
당가의 직계들이 중앙에서 작은 마을을 이루고, 방계들이 그 주위로 거대한 도시를 만든다.
외곽은 삼 장은 족히 될 만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황제가 산다는 황성에 비교될 정도로 거대했다.
진무는 해가 다 져서야 당가타에 도착했다.
“기다리시오.”
“…….”
이 반응은 뭐지?
정문을 지키는 매서운 눈초리의 위사 당서광이 진무를 위아래로 쳐다본다.
태극패를 보여 주었다. 무당의 도사이자 무당지검 진무라고 아주 친절하게 신분을 밝힌 것이다.
“무당의 도사가 어찌 도포도 입지 않고…….”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
아니 그따위 도포 좀 안 입을 수도 있지. 패를 보고도 모른단 말인가?
“일단 안에 기별을 해 보겠소. 일단 저곳에 가서 잠시 대기하시오.”
당서광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린 진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성벽 한편에 마련된 작은 대기소다. 바람을 막아 줄 벽도 없고 네 곳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만 있는 곳.
굳이 말하자면 비나 피하게 해 주는 그런 곳이었다.
먼저 온 사람들을 보니 상인도 있었고 무복을 입은 자들도 있었다.
“여기.”
당서관이 진무에게 작은 나뭇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팔(八).
아, 대기표구나. 앞에 일곱 명이나 더 있구나.
근데? 대기를?
이 자식들이 소문을 못 들었나? 나 진무야! 무당지검이라니까?
패를 받아 든 진무가 당서광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뭐요?”
“…….”
그……래. 싸우러 온 것도 아니고. 부탁을 하러 온 입장인데 괜히 소란 피우지 말자.
안에 기별을 넣고 나면 맨발로 뛰어나오겠지. 암, 무당지검인데.
진무는 작은 한숨을 쉬며 여덟 번째로 앉았다.
지붕만 있는 대기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