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1
11화
해검지를 보수하는 작업은 차근차근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한 달에 걸쳐 마목 수십여 개를 박는 작업이니 그다지 급할 것도 없었다.
늘 그랬듯이 진무는 놀고, 청우와 청상은 열심히 박고, 한 두어 개쯤 박고 나면 청상이 사냥을 나가고, 청우가 불을 피운다.
그리고는 툭툭 내뱉는 듯한 진무의 가르침에 따라 둘의 수련이 이어졌다.
“쩝쩝, 근데 오늘 손님이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점심으로 토끼를 구워 먹고 있던 청우가 흘러가듯이 말했다.
“맞아. 으적으적, 명충 사조께서 몇 번이나 찾아가 읍소를 하셨다고 했었지.”
“꽤나 중요한 손님인가 봐요. 아침부터 다들 청소하고 난리도 아니던데.”
“그래. 청양상단인가? 뭐 그런 이름이라고 하던데.”
“그러고 보니 분명히 점심 때쯤 진혜 사숙께서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직접 여기로 내려오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청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리 언덕 아래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청상의 얼굴에 짙은 긴장감이 떠올랐다.
“청우야!”
“…….”
“치워!”
파팍! 파바박!
순식간에 꿩의 잔해가 치워지고, 타다 남은 나무들이 땅속으로 파묻혔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은 척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해검지 앞으로 나섰다.
“야, 니들…….”
진무가 다급하게 불렀지만 이미 그들은 세속을 등지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무당파의 자랑스러운 청자 배 이대제자로서 고고한 표정으로 해검지를 향해 다가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청양상단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예.”
청상의 기품 있는 인사에 염소수염에 야비한 인상을 가진 중년의 사내가 헙! 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무당의 이대제자 청상입니다.”
“아, 아…… 예.”
정중하게 포권을 하는 모습에 사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마주 인사했다.
“아침에 진혜 사숙께 오신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한데 무당에 무슨 우환이라도……?”
“예?”
사내의 물음에 청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산문 쪽에서 일대제자 진혜가 십수 명의 이대제자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상단주님.”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던 진혜가 청상과 청우 등을 보고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 이놈들이…….”
염소수염의 상단주 때문인지 차마 화는 내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홱 하니 진무를 째려보았다.
야리기는. 확 눈깔을 뽑아 버릴라.
나무에 기댄 진무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파락호 같은 놈. 또 고기를 처먹어? 내 청양상단과의 일만 끝나면 일대제자들의 뜻을 모아 반드시 장문인께 주청을 드리고 말겠다.’
속으로 이를 득득 갈던 진혜가 표정을 고치고 청양상단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올라가시지요. 장문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예?”
“어째 이대제자분들의 얼굴이?”
“아, 아닙니다. 아마도 해검지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아아…….”
얼핏 수긍하는 것 같으면서도 염소수염의 사내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이미 진혜의 대답을 들은 다음이라 더 묻지는 않았지만.
“제자들은 짐을 받아 들거라.”
“예, 사숙!”
진혜의 외침에 청자 배의 무인들이 상단의 사람들이 메고 있던 짐을 받아 어깨에 메었다.
“이러지 않으셔도.”
“하하, 상단주님. 우리가 남입니까? 산길이 험하니 사양치 마시지요.”
“허헛,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암요. 암요. 자, 가십시다.”
진혜가 산문 쪽으로 길을 비켜나자 상단주가 기분 좋은 듯 자신의 수염을 만지며 걸음을 옮겼다.
“네놈들은…… 나중에 두고 보자.”
청양상단주가 앞서자 진혜는 청상 등을 보며 눈을 있는 힘껏 부라리고 급히 따라 올라갔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청상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휴우, 진혜 사숙께 토끼 잡아먹은 것을 들키는 줄 알았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서둘러 치웠으니 망정이지.”
사실 들켜도 상관은 없을 일이다.
“그런데 어째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던데요?”
가기 전에 자신들을 쏘아보던 진혜의 모습에 청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아…….”
그들을 지켜보던 진무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둘 다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음, 왜 그러실까요?”
청우가 시커먼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봐도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은데.
“분명히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는데…….”
청상의 기름 범벅인 입술.
예의가 문제가 아니지 않니?
하아, 적어도 청상은 제법 똑똑할 줄 알았는데…….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정말이지 눈치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놈들이다. 하필이면 부하로 삼은 일 호, 이 호가 이런 놈들이라니.
그나저나.
“청우야.”
“예, 사숙.”
“쟤들 누구냐?”
“아, 모르셨습니까?”
모르니 묻지 이 자식아.
“청양상단입니다.”
“청양상단?”
“예, 단강구 어디에 있는 상단이라던데요?”
“흠.”
단강구 청양상단.
진무는 자신이 아는 수많은 상단의 이름을 떠올려 보았지만,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산중에서 무식하게 도(道)나 닦는 정파와는 달리 상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패천이었다.
평소 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깰 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는 중원에서 활동하는 이름 있는 상단, 표국, 해운에 대해서는 대부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신생인가?”
하긴 죽은 지가 벌써 일 년이다.
되살아난 다음에도 꼬박 무당산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
“어? 아닌데요?”
“응?”
“저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단강구에서 삼대째 상단을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삼대?”
삼대(三代)라면 최소 육십 년은 넘는다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쩌리다.
별 볼 일 없는 상단이라는 소리였다.
그런 상단의 주인이 무당의 일대제자인 진혜에게 저런 대접을 받는다고?
산을 오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분명한 상하 관계가 존재했다.
상단주는 객(客)임에도 앞서 걷는 것에 그다지 거리낌이 없고, 뒤따르는 진혜는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모습.
‘아무리 망했다고 해도 명가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데…… 이름도 없는 상단 나부랭이에게 저자세를 보여? 이거 봐라?’
진무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그는 과거 자신이 무당에 왔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팔궁 중 셋이 불태워지고 수뇌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했음에도 자신을 향해 굽히지 않고 원독을 머금고 자신을 노려보던 ‘명진’과 제자들의 눈빛을.
비록 자신이 싫어하는 도문이었으나 무당은 그 정도로 꿋꿋한 곳이었다.
분명 뭔가 있다.
특히나 상단주의 얼굴에서는 본능적으로 비열함을 느꼈다.
무당과 같은 명문에 절대로 이득이 될 만한 놈이 아니었다.
“얘들아.”
진무의 부름에 청자 배의 제자들이 시선을 모았다.
“올라가자.”
“예? 아직 작업이…….”
“됐으니까 그딴 건 대충 정리해.”
“…….”
“그리고, 니들…….”
제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다 진무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얼굴 씻고 와.”
“…….”
“주둥이 기름도 좀 닦고.”
* * *
무당파 본궁인 자소궁의 내전에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청양상단의 금적산이 무당 장문인을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명현이 내어 주는 자리에 금적산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앉았다.
자소궁 대전에 모인 이들.
중앙에 나란히 자리를 놓은 장문인 명현자와 금적산.
그 옆으로 영은궁주 명공을 필두로 팔궁의 주인인 장로들이 앉고, 그 뒤로 일대제자들이 서 있었다.
반대편에는 상단에서 온 이들이 자리를 잡았다.
“가져오너라.”
금적산의 말에 매서운 호목(虎目)에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궤짝 하나를 들고 왔다.
“초청해 주신 마음에 보답하고자 약소하게 선물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명현이 눈앞에 열린 궤짝에 가지런하게 담긴 은원보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리도 많은…….”
오랫동안 도를 닦아 온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금적산은 놓치지 않았다.
“많다니요. 그저 무당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헛헛, 그리 생각해 주시다니 다행입니다.”
명현이 만족스럽게 웃자 장로들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으나 근래 무당의 사정을 듣고 몇 가지 준비를 더 해 보았습니다.”
금적산의 눈빛에 또 다른 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짐을 풀자 제법 날이 예리하게 서 있는 검들과 숫돌 등 무인들에게 필요한 물목들이 가득히 쏟아져 나왔다.
“허!”
장로들이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특히나 무당의 살림을 맡은 원화관주 명선으로서는 손뼉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간 제자들에게 얼마나 미안했던가?
아껴 쓰라고 얼마나 다그쳐야 했던가?
지난 십여 년 동안 이어진 재정 악화로 인해 제자들의 무복 하나 마음대로 지어 입히지 못했던 것이 언제나 못이 되어 가슴에 박혀 있었다.
“상단주. 이렇게나 신경을 써 주시니 제가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별말씀을요. 되레 저희 같은 상단과 연을 맺어 주신 무당에 제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이 모두가 진혜 도장과의 인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금적산의 말에 명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눈빛으로 진혜를 바라보았다.
일대제자 진혜.
단강구에서 제법 이름난 가문의 아들로, 명공의 제자였다.
올해 서른이라는 나이로 무당칠자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그는 장래가 기대되는 무당의 검수였다.
“허허, 우리 진혜가 큰일을 하였군요. 덕에 무당이 한시름 놓겠습니다그려.”
“옳은 말씀입니다. 진혜 도장이 아니었다면 제가 어찌 언감생심 정도 무림에서 이름 높으신 분들을 이리 가까이서 뵐 수나 있었겠습니까? 모두가 진혜 도장 덕분입니다.”
추켜세우는 금적산의 말에 명공의 뒤에 서서 대기하던 진혜가 공손하게 말했다.
“상단주께서 제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군요. 장문인과 장로님들 앞에서 얼굴이 부끄럽습니다.”
“저런, 제가 실수를 했군요.”
금적산이 미안해하자 명현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아니요. 실수라니요, 허허. 진혜는 과히 겸양치 말거라. 이리 좋은 인연을 맺게 한 너의 공을 모두가 높이 사고 있음이다. 안 그런가? 사제.”
명현의 말에 명공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장문인 말씀이 옳습니다. 진혜는 도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았음이니 괘념치 말거라.”
“예.”
명공의 말에 진혜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공손히 뒤로 물러났다.
“상단주, 내 응당 대접을 해야 하겠으나 도문에 흥취를 돋울 것이 마땅히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오.”
“아닙니다. 딱히 무언가를 바라지 않았으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저 돌아가는 길에 도관에 들러 가족들의 구축병마(驅逐病魔)나 빌게 해 주시면 그걸로 족합니다.”
구축병마라 함은 병과 마를 쫓는 것을 말했다.
한창 성세를 구가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기는 해도 찾아오는 이들마다 어떻게든 무당의 힘에 기대려 하건만 어찌 저리 소박하단 말인가?
그의 마음 씀씀이에 명현과 장로들은 더욱 흐뭇한 마음이 들어 너도나도 청양상단과 연을 맺게 한 진혜를 칭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면 바쁘실 터인데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허허, 산중의 도인이 바쁠 것이 무에 있겠소.”
“마음은 감사합니다. 실은 제가 속인(俗人)이다 보니 도관의 분위기가 영 적응이 되지 않아서.”
“허허, 돌려서 말씀하신 것을 내가 우둔하여 몰랐구려.”
명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동안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다시금 깊이 반성했다.
청양상단주 금적산.
무당의 재정 문제로 오랫동안 골머리를 썩여 온 명현에게 진혜가 조심스럽게 소개한 사람이었다.
세가 예만 못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음에도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어떠했던가.
염소수염에 비열해 보이는 눈빛.
속세에 밝지 못해 그에 대한 소문을 자세히 듣지 못했으나 외양만으로는 그다지 연을 맺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나 대화를 하고 만나 보니 그 됨됨이가 갈수록 마음에 들었다.
‘허헛, 도를 허투루 닦았음이야. 어찌 외관만 보고 사람의 진면목은 들여다보지 못했단 말인가.’
마음이 그러했기 때문일까?
처음 가졌던 마음과는 달리 금적산의 모습조차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금 단주. 아무리 불편하다 해도 내 그냥은 보내 드리기 안타깝소. 하니 무당의 도관과 아이들이 수련하는 모습이라도 보고 가시오.”
“그리 말씀하시니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하하, 고맙소이다.”
“하면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금적산이 공손하게 예를 다하고 상단의 사람들과 함께 자소궁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