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11
111화
상청궁을 나온 진무는 상천의 안내를 따라 백운각으로 향했다.
무당의 조사들을 작은 암묘에 모신 것과 달리 청성에서는 백운각을 지어 사당으로 쓰고 있었다.
사당으로 쓰기에는 아까운 삼 층짜리 전각이었으나 평소 어찌나 관리를 잘하는지 기둥이 반질반질할 정도로 윤기가 흘렀다.
“진무 도장께서는 안으로 드시지요.”
“예.”
장문인의 명에 의해 먼저 도착해 제를 올릴 준비를 해 둔 상우가 백운각 문 앞에서 진무를 맞이했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상천이 물러나고 진무는 상우를 따라 백운각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대하다.
삼 층으로 나누어진 줄 알았으나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바닥에서 천장까지 통으로 뚫려 있었다.
창 없는 벽에는 수많은 위패가 걸려 있었고 삼천존의 목상 앞으로 커다란 위패를 놓은 탁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벽에 있는 것은 그동안 청성을 밝혀 온 도인들의 것입니다.”
아, 정말 대단하다.
수천 개가 넘는 위패에 먼지 한 톨 없는 걸 보면 매일 죽어라 청소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죽은 귀신 따위를 기리려고 제자들을 혹사하다니, 못된 도사 놈들.
“이쪽이 청성의 역대 조사님들과 같은 대의 장로님들을 모신 위패입니다.”
진무가 그 자리에 멈춰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것을 상우가 재촉해 앞으로 다가오게 했다.
이것도 대단하다.
다른 위패에 비해서도 특히나 크고 거대하다.
초대 장문인, 장릉(張陵)
다른 도문이 그렇듯이 모두가 초대를 중원 도교의 창시자라 부르지만 그들의 주장일 뿐 확실한 것은 없었다.
누가 창시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당대에 힘센 놈이 제일이지.
진무는 장릉의 위패를 시작으로 공손하게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뭔 놈의 공적이 이리도 많고 역사는 왜 이리도 긴지.
누가 보면 청성의 조사들이 무림을 건립한 줄 알겠다.
위패가 백운각의 내부에 원을 그리며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아, 괜히 한다고 했나?
쓸데없이 예의를 갖춘답시고 한 줌 진기도 끌어 올리지 않고 이 미친 짓을 시작했단 말인가.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이건 뭐, 불교에서 말하는 삼천 배도 아니고…….
어?
절을 올리다 잠시 앉아 쉬던 진무가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았다.
위패를 모시고 있던 탁자 아래 뚫린 손가락 굵기만 한 구멍.
뭐지?
진무는 불현듯 느껴지는 기이함에 멍한 정신을 깨우고 다른 위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없었다.
다른 곳에는 그러한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진무는 차근차근 구멍을 살폈다.
바닥으로 쓴 나무의 옹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인위적이다.
실수라기에는 너무나 교묘하다. 위치조차 의도한 듯 정확히 위패의 아래가 아닌가.
진무는 다시금 위패를 바라보았다.
이십육 대 장문인 풍천(風天) 현양자.
위패에 쓰인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그를 기리는 공적이 쓰여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쓰인 글귀가 눈길을 끈다.
우거진 숲에 불이 붙어 나무들이 사라졌노라. 이는 마치 모자 아래 발이 달린 듯 중원 무학이 작아졌음을 의미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언뜻 보면 시구 같기도 한 그 글귀는 공적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뭘까. 현양자라면 지금의 장문인에서 사 대 전인데. 그러니까 백 년 전…….
어? 잠깐, 백 년 전이라면 양의심공의 후반부가 넷으로 쪼개졌던 그때잖아?
“어찌 그러십니까?”
위패에 돌아가며 절을 올리다 말고 한 위패 앞에 우뚝 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진무의 모습에 상우가 다가와 의아하게 물었다.
“그게, 저 글귀…….”
진무의 중얼거림에 상우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이채가 스쳤다 사라졌다.
고개를 돌려 상우를 쳐다본 진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상우가 이내 표정을 지우고.
“조사님께서 남긴 말에 무슨 문제라도?”
“…….”
문제는 없다.
무슨 글귀를 남기든 그것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 하지만 백 년 전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시기적절하지 않은가?
“자, 서두르시지요. 이러다 저녁 식사에 늦겠습니다.”
“아…… 예.”
상우의 재촉에 진무가 이어 나머지 위패에 절을 올렸다.
모든 위패에 절을 마친 진무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런 육체적인 수련(?)을 해 본 것이 얼마 만인지 다리가 다 후들거릴 정도였다.
“그럼, 저녁때도 다 되었고 이곳도 닫아야 하니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예?”
“제를 올릴 시간이 지났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있었던 거냐?
진무는 잠시 고민했다.
글귀도 글귀였지만, 위패 아래 있던 구멍이 영 신경이 쓰여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 이만.”
진무를 백운각 밖으로 쫓듯이 내친 상우가 문을 걸어 잠갔다.
“무량수불, 부디 청성에서 좋은 시간 보내시길.”
“……예.”
상우가 사라지고 진무는 굳게 닫힌 백운각을 아쉬운 듯이 바라보았다.
백 년 전의 장문인인 현양자의 위패 아래 남겨진 구멍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더욱이 그 글귀.
진무는 그 말을 계속해서 되뇌며 백운각을 떠났다.
그리고 백운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늘의 어둠 아래, 돌아갔던 상우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무당지검……. 설마? 글귀의 뜻을 알았단 말인가? 하지만 무당이 후반부 일부가 조사전에 있다는 것을 어찌 알고?’
상우의 눈동자에는 이전에 전혀 없었던 차가운 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 적영이 무혈을 가지고 돌아오지 않은 시점이었다.
구멍의 정체가 밝혀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의심을 남겨 둘 수는 없는 일.’
진무가 사라진 방향을 싸늘하게 응시하던 상우가 법술가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픽 하고 꺼지듯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 * *
“야!”
“……!”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 자식은 진무의 숙소를 어떻게 알고 또 찾아왔단 말인가?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해 죽겠는데.
“너 여기 막 와도 되냐?”
“당연하지. 장문인께 허락받았는데?”
“뭐?”
분명 상천의 말로는 근래 청성 인근의 쥐새끼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다고 했는데?
“어떻게?”
“어떻게는. 내가 좀 예쁘냐? 미모가 다 했지.”
너 다시 말하지만 진짜 그 정도 아니거든?
“사실대로 말해 봐.”
“아까 니가 조사전에 인사 올리고 있을 때 상천이라는 사람이 와서 말해 주더라. 당가 때문에 니가 곤욕을 치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아빠한테 연락했지.”
“…….”
“내가 청성에 있으니까 그만 무인들 내보내라고.”
아, 그렇구나. 문파 간에 자존심 싸움이 될 수도 있는 문젠데 말 한마디에 쉽게도 해결되는구나.
“그래서? 다 나갔어?”
“어.”
너무 쉽게 대답하는 거 아니냐?
“안 나가면 청성에 불 질러 버린다고 했어.”
“……아!”
이런 망나니를 봤나.
그렇게 위협했다면 당연히 병력을 뺄 수밖에.
진짜로 불을 질렀다가는 자존심 싸움으로 끝날 리가 없다. 최소한 곧바로 유혈 사태.
어이구, 딸년 하나 잘못 두는 바람에 정무칠성이자 사천의 제왕이 땅을 치면서 통곡을 하겠구나.
더욱이 진짜 그랬다면 이년 때문에 양의심공까지 날아갔을 일이다.
너무…… 너무 위험하다.
남의 속이나 알아채는 사슴 눈깔의 요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빨리 떼 내야 한다.
“하아,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아, 꽤 많이 짓긴 했구나.”
“뭔 개소리야? 그나저나 밥 먹었어?”
“그래.”
“벽곡단?”
“어.”
“누가 도사 아니랄까 봐. 나가자.”
“응?”
“고기 먹으러 가자. 어차피 밤에는 아무것도 안 하잖아.”
“닥쳐. 머리 복잡하니까 너 혼자 가라.”
“머리가 복잡해? 왜? 청성이랑 우리 집 문제는 내가 다 해결했다니까?”
“아, 그런 거랑은 상관없으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가라.”
“…….”
진무가 짜증을 내며 손사래를 치자 당세령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안 갈 거야?”
“안 가!”
“흐음.”
당세령이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청성에 불 질러 버려야겠네.”
“…….”
한마디 툭 내뱉자마자 품에서 화섭자…… 뭐! 화섭자?!
이런 미친! 아예 가지고 다니냐?
치익, 화르륵!
“야! 간다 가!”
이 또라이라면 정말로 불 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럭 든 진무가 한숨을 내쉬며 벌떡 일어났다.
치이이…….
그와 동시에 불을 꺼 버린 당세령이 곱게 눈을 휘며 웃었다.
“가자.”
* * *
당세령과 함께 청성파를 내려오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장문인에게 받은 옥패를 보여 주니 아무도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청성을 나온 진무는 올라오기 전에 들렀던 객점으로 향했다.
“왜 안 먹어?”
“너나 먹어라. 머리 복잡하니까.”
“왜? 누가 괴롭혀?”
“…….”
“혼내 줄까?”
실력으로? 아님 맷집으로?
이럴 땐 아예 무시하는 게 상책이었다.
“아씨, 진짜 똥 마려운 얼굴 그만 좀 하고 시원하게 말해 봐.”
젠장, 뭔 여자 말투가.
진무는 장탄식을 하며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슬쩍 내뱉었다.
“우거진 숲에 불이 붙어 나무가 사라졌노라. 이는 마치 모자 아래 발이 달린 듯 중원 무학이 작아졌음을 의미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
진무의 중얼거림에 당세령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뭔 개소리야?”
내가 너한테 뭘 바라냐.
약간이라도 기대한 게 바보 같은 짓이었다.
“됐다, 됐어.”
진무가 다시 한숨을 쉬며 입을 닫자 조금 미안해졌을까?
당세령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어디에 적혀 있었다고?”
“조사전에.”
“흠, 그래? 아무 생각 없이 남겨 놓지는 않았을 텐데.”
당세령이 탁자에 술을 살짝 부어 놓고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왜?”
“이거 파자(破字) 아냐?”
“파자?”
“어.”
파자는 글자를 깨트려 씀으로서 원래의 뜻을 감출 때 사용하는 암호 같은 것이었다.
가령, 문(問) 자를 두고 말하길, 어떤 이는 문(門) 앞에 입(口)이 있으니 거지꼴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처럼 쓰이는 것이다.
물론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를 내놓기도 하지만.
파자라, 파자……. 어디 보자.
“우거진 숲에 불이 붙어 나무가 사라졌다. 이는 마치 모자 아래 발이 달린 듯하다. 우거진 숲(橆: 무)에 나무들(林)이 사라지고 불(灬)이 붙으면 없을 무(無)……. 모자(宀) 아래 발이 달렸으니 구멍 혈(穴)? 근데 작아졌다는 건 뭔 뜻이지? 파자가 아닌가?”
어?
진무의 눈이 동그래지고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혈이라고?
궁, 무혈, 그리고 청성?
분명 청성이라 했다. 백가장을 습격한 놈은 분명 무혈을 들고 청성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위패에 남긴 글귀가 무혈의 파자, 그리고 그 구멍.
그렇구나.
어쩌면 무혈은 청성의 숨겨진 비고를 여는 열쇠 따위가 아닐지도 모른다.
백 년 전 양의심공이 나누어진 시기의 장문인, 현양자.
그가 남긴 글귀가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무혈에, 그 아래 무언가를 끼워 넣을 수 있게 뚫린 구멍이 있다면?
설마 양의심공?
진무가 벌떡 일어났다.
“어? 왜?”
당세령이 엉겁결에 따라 일어나자 진무가 기쁨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힘껏 안았다.
“……!”
“너 진짜!”
“……?”
“진짜 소 맞구나! 뒷걸음질에 쥐를 두 번이나 잡았어!”
지난번 열쇠 이야기도 그렇고 대체 뭔 개소린가 싶었지만 꼬옥 안아 오는 진무의 힘에 당세령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떠올랐다.
“도움이 된 거냐?”
“그래! 엄청!”
“다행이네. 인제 놔. 숨 막혀.”
“……아! 미안.”
진무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당세령을 놓아 주었지만, 얼굴에서는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이야.
하늘이 돕는다. 모든 게 착착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당세령을 만난 것은 가히 신의 축복이 아닐 수가 없었다.
“술 마실래?”
“아니! 지금 당장 확인해야 할 게 있어.”
“확인?”
“그래. 지금 당장!”
“……뭐, 쳇!”
당세령이 뭔가 좋다 말았다는 표정으로 짜증을 팍 냈다.
“더 먹을 거면 먼저 간다.”
“같이 가!”
진무가 순식간에 객점 문으로 다가가자 당세령이 황급히 그 뒤를.
“어?”
나가려다 말고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진무.
“들어가!”
콰드드득!
진무가 외침과 동시에 몸을 날렸고, 새하얀 섬광이 문을 부수며 쏘아져 들어왔다.